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84화 (184/196)

리만 파산

2008년 9월 15일 미국 4대 투자은행인 리만 브라더스가 결국 파산 보호 신청을 했다.

2007년부터 세계 경기가 영향을 받았고, 2008년 내내 금융시장이 출렁거렸다.

전년도 사상최초로 주가지수 2,000들 돌파했던 KOSPI는, 2008년 줄곧 내리막이었지만 리만 브라더스 파산 소식에 다시 요동쳤다.

월가 사람들의 자살을 우려해, 맨하탄 허드슨 강가에 경찰의 순찰이 강화됐다는 뉴스가 종종 들려왔다.

리만 사태가 발표되던 날, 창진이 호들갑을 떨며 전화했다.

“형님! 설마 했는데. 진짜 리만을 날려 버리네.”

“대마불사는 맹신일 뿐이야. 뭐가 예쁘다고 600조가 넘는 손실을 떠안겠니?”

“하긴. 60조도 아니고 자그만치 600조야. 우리 정부 예산의 2배가 넘는 금액이니까.”

수많은 사람이 패닉에 빠졌고, 시장 공포지수가 최대치로 솟구쳤다.

하지만 진정한 선수는 폭락에서도 희망을 보는 법이다.

윤재는 리만 브라더스 파산이,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변곡점임을 알고 있었다.

“남들 다 반토막이니, 3분의 1토막이니 이러고 있는데, 형 덕분에 나는 올해 종합수익률이 100%를 넘었어. 진짜 고마워!”

언제나 그렇듯 남창진은 윤재의 코치 덕에, 회사 동료들을 압도하는 수익률을 자랑하고 있었다.

먼 미래에는 남창진이 사장이 될 거라는 풍문이 돌 정도로, 회사에서 총애를 받았다.

창진은 고객 수익률도 부동의 원탑이었지만, 개인적으로도 2008년에만 10억 넘은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남창진도 윤재의 수익에 비하면, 재벌 앞의 구멍가게에 불과했다.

월가 그리핀 펀드의 존 폴 존슨을 통한 간접 투자.

국내 주가지수 연계 옵션과 선물.

그리고 개별 주식 거래까지.

2007년부터 2008년 9월까지 2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윤재는 금융상품 투자로만 2조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한국 증권투자사에 길이 남을 수익이었다.

“창진아! 이제부터 슬슬 주식 비중을 늘려갈 차례야.”

땅 바닥에 떨어져 있는 우량주를 그냥 줍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미국 주택담보 파생상품을 청산했던 시점이 인버스 투자의 어깨였다면, 지금은 주식을 쓸어 담을 무릎정도 되는 시점인 것이다.

“형님! 무릎 꿇고 대기 중입니다. 예언을 내려 주십시오.”

“오냐. 그렇지 않아도 무릎에서 살 구간이다.”

국내에서는 바이오 대장주인 셀트리올과 기어자동차.

해외 주식은 빅애플과 로슈ADR을 찍어줬다.

“빅애플은 10년 이상 장기투자로, 나머지 3개는 2년 정도 들고 가자.”

셀트리올과 기어자동차는 ‘08년 말에 매집하며, 2년 내 10배 가까이 튀길 수 있는 종목이었다.

게다가 대형주인 만큼 윤재가 부담 없이 투자할 수 있었다.

윤재는 셀트리올과 기어자동차에 각 2천억씩 투자할 계획.

금액이 워낙 크니 평균 매입단가 상승은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줍줍한 뒤 2년 정도 버티면, 5배의 수익은 기대할 수 있었다.

“형님! 나머지 3개는 알겠는데, 로슈ADR은 뭐야?”

“로슈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제약회사야. 내년은 제약 바이오 주식이 각광받을 거다. 왜냐면 스페인 독감 등 바이러스 대유행의 주기가 2008년~2009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거든.”

“에이.. 설마. 유행할지 안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Risk한 거 아냐?”

“그러니까, High Risk를 감수할 수 있는 성향의 사람들에게 권하면 되지.”

2009년 세계적으로 신종플루가 대유행하게 될 거라는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윤재는 로슈의 미국 주식 예탁증서(ADR), 한국의 제약 회사 중 신종플루 관련주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들려줬다.

“나도 그렇지만, 네 고객들도 이제 더 이상 1~2천만 원으로 투자하는 사람들이 아니야. 나름 괜찮은 종목들만 알려준 거다.”

“알았어. 형! 그런데 형은 사업하기도 바쁜 사람이, 그런 걸 어떻게 다 아는 거야?”

“하하하. 내가 얘기 했잖니. 미래에서 타임머신 타고 왔다고.”

윤재는 창진과 함께 떼돈을 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창진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재산을 증식시켜 왔다.

창진의 고객들 중 상당수는 윤재의 지인들인 것이다.

◈          ◈          ◈

윤재가 폭락장에서도 천문학적인 수익을 기록하는 동안, 온 몸으로 폭락을 맞으며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O2그룹의 사실상 총수가 된 오진탁과 미전실 직원들이었다.

이미 그룹의 콘트롤 타워로서 기능을 상실한 미래전략실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세상에! 베어스턴스에 이어 리만 브라더스까지 파산할 줄이야.”

“리만 브라더스도 망하는데, 우리라고 망하지 말란 법 없어.”

미전실 팀장들이 회사에서 이런 얘기를 떠들 정도로, 그룹의 기강이 해이해져 있는 것이다.

“그 지랄 맞은 바이아웃 옵션 때문에, 회사가 거덜 나게 생겼네. 회사 다 팔아서 옵션금액 물어줘야 할 판이야.”

“바이아웃도 문제지만, 태우건설과 한국통운 재무적 투자자들에게 매년 보장해 주기로 한 수익만 1,600억이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 이 불경기에 그룹 영업이익의 절반을, 재무적 투자자에게 갖다 바치고 있으니.”

2008년 9월.

태우 건설의 주가는 6천 원대로 폭락했다.

바이아웃 옵션 금액과 주당 2만 6천원이 차이가 나는 금액이었다.

문제는 앞으로도 주가가 올라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었다.

바이아웃 행사일 까지 5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

이대로 가면 그룹이 물어줘야 할 금액이 4조원을 훌쩍 넘게 될 판국이었다.

“우리가 왜 그랬을까?”

“뭘?”

“그때 김윤재 사장이 데이비드 리 파견했었잖아. 2만 5천원에 지분 1조 원어치 인수하겠다고 했잖아. 생각 안나?”

“왜 안 나겠나? 그 때 팔았어야 해! 아니 1조 원어치가 아니라, 전량을 처분했어야 한다고.”

“우리야 매각해야 한다고 합창 했지만, 오사장님께서 움직이지 않은 걸 어떡하나?”

“죽은 자식 불알만지기도 아니고... 미치고 폴짝 뛰겠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면 월척으로 보이고, 수익을 내던 주식이 마이너스로 돌아서면 더욱 짜증이 나는 법.

미전실은 물론 오진탁도 당시 윤재의 지분인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었다.

“오진탁 사장도 그 생각만 하면 이불 킥을 한다고 하더군.”

“그나저나 사장님은 왜 안 오시는 거야?”

“요새 바빠! 여기저기 돈 빌리러 다니느라. 요즘처럼 열심히 일한 적 없을 걸?”

“만시지탄이지....”

오진탁은 최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녔다.

증권. 투신 등 태우건설 인수 당시 재무적 투자자들을 찾아다니며, 옵션 행사를 늦춰줄 것을 부탁하고 다녔다.

“오사장님! 우리도 연장해 드리고 싶죠. 하지만 올해 우리 회사가 창사 이래 최악의 실적이라. 여유가 없네요. 미안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주로 이런 것들이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재무적 투자자들은 더 이상 오진탁을 VVIP로 대우하지 않았다.

기존 투자자들이 아니라, 다른 은행이나 증권사들도 불티나게 쫒아 다녔다.

0.5%라도 이율이 낮은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오진탁 사장이야 누굴 탓할 것도 없지. 인수전 자체를 본인이 진두지휘 했으니까.”

“맞아. 저번에 김윤재 사장 찾아가서도 더 적극적으로 애원 했어야 해. 오진탁 사장이 진정성 있게 사과했으면, 김윤재 사장 그 분이 그토록 매정하게 굴었겠어?”

6개월 전만 해도 미전실 팀장들은 ‘김윤재!’, ‘김윤재 그 새끼!’ 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모두가 ‘김윤재 사장’이라고 불렀다.

오진탁의 위상이 추락한 만큼, 윤재의 위상이 올라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전실 팀장들의 오진탁에 대한 충성심 역시 약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최팀장. 그런데 말이야. O2 엔터야 오하루 상무가 잘 버텨주니 그렇다 쳐도, O2 푸드 주가는 제법 잘 버티고 있단 말이지?”

“나도 요즘 예의 주식하고 있네. 분명 뭔가 있단 말이야.”

회사 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미전실 팀장들은 뭔가 불길함을 느꼈다.

“외국계 창구 통해서 주문이 계속 들어오고 있거든. 덕분에 O2푸드 주식은 하방경직성을 보이고 있고.”

“이러다 우리도 몇 년 전 KS주식회사처럼, 양키 놈들 공격당하는 거 아냐?”

“설마?”

“참! 돌아 버리겠다. 지주회사 전환은커녕, 회사가 망하게 생겼으니.”

“회장님과 오진탁 사장 형제들 지분이 있고, 국민연금도 11% 정도 들고 있어. 우리사주 조합도 2%정도 가지고 있어. 우호지분을 계산하면 과반이 넘는다고.”

“하긴 누가 우릴 건들겠어?”

대마불사에 대한 맹신.

그리고 근거 없는 자신감.

미국 4위의 투자은행이 속절없이 망하는 걸 보면서도, 오진탁과 미래전략실은 무대책으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          ◈          ◈

회사나 조직에 위기가 찾아올 때 사람들의 유형은 극명하게 갈린다.

그룹 전반에 위기가 찾아오자, 젊고 유능한 직원들 중 상당수가 살길을 찾아 이직에 나섰다.

O2 푸드도 마찬가지.

특히 젊은 직원들의 탈출 러시가 눈에 띄었다.

“기획실 이동화 대리 KS텔레콤으로 이직했대!”

“정말. 씨바 존나 부럽다. 나도 5살만 젊었어도, 다른 회사 알아보는 건데.”

“인사지원팀 김재훈 사원은 앤더슨 컨설팅으로 스카웃 됐다던데?”

“아! 안타깝네. 그 친구 신입답지 않게, 싹싹하고 일도 잘 했는데.”

난파선을 지키지 않고 먼저 뛰어 내리는 선원들처럼, 유능한 인재들이 탈출에 나서고 있었다.

회사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였다.

오진탁의 진상짓 때문에 의도치 않게 강원부문장만 4년째 맡고 있는 장동석.

부문장 실에서 그는 소속 팀, 지사장들과 회의를 주관했다.

회의의 주제와 관계없이, 신입사원들의 이직이 화제가 됐다.

“휴~ 인재는 빠져나가고, 쭉정이들만 남는 건가요?”

“춘천지사장! 그게 무슨 소린가? 그럼 남아 있는 우리가 다 쭉정이란 말인가?”

“죄송합니다. 상무님! 그런 뜻에서 한 얘기는 아닙니다.”

“나라고 왜 자네 마음 모르겠나. 회사가 위기인 것은 맞지만, 우리는 제법 양호하게 버티고 있어. 괜한 얘기로 사기를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되네.”

“명심하겠습니다. 상무님!”

강원부문은 여전히 실적과 조직관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바로 장동석의 존재 때문이었다.

난파선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선장처럼, 장동석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버텨내는 중이었다.

“이건 사견이고 비공식적인 생각이니, 직원들 오해하지 않도록 잘 전달해 줘야 해!”

“말씀 하십시오. 상무님!”

다시 군기가 바짝 오른 팀장, 지사장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우리 회사 주식이 역사적인 저점에 와 있어. 아무리 못해도 20만원은 나가는 게 정상이거든. 그런데 지금 10만원도 붕괴돼 버렸어.”

“그러게 말입니다. 1억 5천만 원어치 들고 있었는데, 지금 7천만 원도 위태롭습니다.”

“절대 팔지 말게. 버티면 언젠가 올라갈 주식이야. 우리 회사 업 특성 상 절대 망하지 않을 회사야.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정리되면 주가 다시 올라갈 거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직원들한테도 조심스럽게 얘길 전해주게. 여유 돈 있으면 회사 주식들 사놓으라고. 2~3년 버티면 2배 먹는 건 일도 아닐 거라 자신하네. 물론 손해 봤다고 나보고 물어내라고 하면 안 돼!”

회의를 마친 장동석은 부문장실에 남아 창밖을 바라봤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됐을까? 윤재 같은 인재의 안타까운 퇴사. 오재준 회장의 병마....’

갑자기 장동석은 윤재와 차명수 등의 옛 동료들이 보고 싶어졌다.

특히 윤재가 보고 싶었다.

이미 테헤란로와 분당 벤처계의 신화적 인물로 성장한 윤재.

심심치 않게 뉴스나 방송에도 출연하는 윤재를 볼 때마다, 장동석은 스스로를 독려했다.

‘나중에라도 윤재나 후배들 보기 민망하지 않게, 회사를 지켜내야 한다. 그동안 나와 가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준 회사에 대한 의리이기도 하고.’

듣는 사람도 없건만, 장동석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내쉬는 한숨 때문에,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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