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82화 (182/196)

글로벌 호구들

거의 한 달 일정의 미국 출장.

데이비드 리의 뇌리에 ‘노키아 인수’라는 환상을 제대로 심어놓은 뒤, 워싱턴 주에 들러 빌 게이트를 만났고, 네브라스카에서 워렌 버핀을 만났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윤재의 종착지는 캘리포니아였다.

7월 18일 윤재는 쿠퍼티노에서 스티브 홉스를 다시 만났다.

“앱 스토어 오픈 축하해요.”

“우리가 아니라 52 소프트가 더 축하받을 일 아냐? 앱 스토어 다운로드 순위 Top10 중, 무려 6개의 제품이 자네 회사 거야!”

오픈 10일 만에 이룬 쾌거였다.

게임을 빼면 사실상 Top10을 석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윤재가 3년 가까이 공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52 메신저. 채터. 스타그램. 레이버후드. 산타 수학. 산타 영어 까지. 앱 스토어가 52 소프트 천지야.”

“당신이 장터를 잘 깔아준 덕분이죠.”

“우리 직원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나?”

“?”

“52 소프트는 외계인을 고문해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아니냐고 하더군.”

소프트웨어의 특성 상, 하나의 상품이 히트하면 미투 전략을 쓰는 제품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기 마련이었다.

아직은 앱스토어 초창기라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긴 했다.

세계 각국의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정신을 차릴 즈음에는, 52 소프트는 저 멀리 달아나 있을 것이었다.

“우리 직원들 얘기로는 52 소프트의 기술과 아이디어가 최소 업계보다 3년은 빠르다고 하더군.”

“과찬의 말씀입니다.”

“덕분에 앱스토어 방문자수가 급증하고 있어. 지난 번 자네 아이디어도 우리 제품 개발에 도움이 됐고, 여러모로 고맙네.”

“하하하. 도움이 됐다니 저도 기쁘네요.”

윤재에게 호구 잡힌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호구 잡혔음에도 윤재에게 고마워하고, 윤재의 말과 행동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스티브 홉스 역시 호구 잡힌 대표주자 중 한 명이었다.

“이번에 내가 자네를 보자고 한 이유 말인데.”

“?”

스티브가 윤재를 초청한 본론을 꺼냈다.

앱 스토어 심사 때 52 소프트의 제품들을 눈여겨봤고, 충분한 검토를 끝낸 모양이었다.

“스타그램 말인데.”

“예. 스타그램에 뭐가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는 문제지. 너무 고저스(gorgeous)하고 어썸(awesome) 한 서비스거든. 그래서 말인데, 우리에게 스타그램을 매각하면 어떻겠는가? 3억 달러 어때?”

“하하하. 스티브! 미안해요.”

“왜? 3억 달러가 너무 작아?”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이미 찜한 사람이 있거든요.”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기댄 채 얘기 하던 스티브 홉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 된 밥에 어느 놈이 재를 뿌리는 게 아닌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래니 페이지 아시죠?”

“구글 래니?”

“예. 내일 그 친구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우리 소프트에 관심이 많다고 하더군요.”

“으하핫! 구글보다 우리가 돈이 더 많지. 거기는 3억 달러까지 여력 없을 거야.”

“현금은 부족한지 몰라도, 지분은 있을 겁니다.”

스티브 홉스의 동공이 떨려왔다.

다 잡은 고기를 놓쳤다는 표정이었다.

“그 뿐 아니에요. 모레는 페이쓰북의 마이클 주커버그 만나기로 했어요.”

“에이~ 걔네는 완전 중소기업인데... 구글보다 더 가난하다구.”

“마이클도 지분이 있을 거 아네요.”

시종일관 유쾌한 표정이었던 스티브 홉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정 그렇다면.... 우리도 내부적으로 다시 검토할 테니, 시간을 좀 주게나. 래니도 마이클도 결국은 비즈니스 맨이야. 덜컥 계약서에 사인하지 말라구.”

“하하하. 저도 비즈니스 맨입니다. 협상의 협자를 아는 사람이에요.”

스티브 홉스와의 1차 미팅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윤재의 재킷 주머니 속에는 앱 스토어에서 내려 받은 녹음기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마운틴 뷰에서 래니 페이지를 만났다.

전형적인 공학도인 그는 CEO인 에릭 슈바이츠와 함께 윤재를 맞았다.

노련한 에릭 슈바이츠의 협상력을 기대한 모양이다.

‘구글링 좀 하고 오지. 그럼 내가 어떤 협상가인지 알았을 텐데.’

윤재는 래니와 에릭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 하겠소. 우리는 빅애플의 앱스토어를 예의 주시하고 있소. 당신네 회사의 52 메신저. 채터. 레이버후드. 스타그램을 패키지로 인수하고 싶소.”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인수 희망가는 얼마입니까?”

대답 대신 에릭 슈바이츠가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One Billion Dollas!”

한국 돈으로 1조의 금액이었다.

윤재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어 보였다.

지극히 매력적인 미소였음에도, 래니 페이지와 에릭 슈바이츠는 뭔가 서늘함을 느꼈다.

“왜 웃나?”

“이거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누구 목소리인지 에릭 슈바이츠는 잘 아실 겁니다.”

윤재는 전날 녹음한 스티브 홉스의 대화를 아주 조금만 들려줬다.

빅애플의 이사회 멤버이기도 한 에릭 슈바이츠는 단번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스티브 홉스라는 걸 알아차렸다.

“스티브는 스타그램 하나에 3억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녹음 들어서 아시겠지만, 인수금액을 올릴 분위기죠?”

“!!”

“그런데 4개 제품의 패키지 딜에, 1조라니..... 실망입니다.”

래니 페이지와 에릭 슈바이츠가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에릭 슈바이츠는 무리해서라도 윤재와 52 소프트를 잡자는 표정.

하지만 래니 페이지의 눈빛은 걱정이 앞서는지 미세하게 떨렸다.

“하하하. 차분히 생각해 보세요. 내일 페이쓰북의 마이클 주커버그, 모레는 야후의 제리 양을 만날 예정입니다. 저도 뭐 급한 상황이 아니니까요.”

스티브 홉스도 후덜거리는데, 실리콘 밸리의 신성 마이클 주커버그에 제리 양이라니!

이번에는 침착함을 유지하던 에릭 슈바이츠의 눈동자마저 흔들거렸다.

“만나기 힘든 분을 2명이나 만났으니, 제 얘기도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

윤재는 자신의 백 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영상을 보여줬다.

하이폰 앱스토어에 등록돼 있는 각종 게임. 어플을 시현하는 영상이었다.

“중간 중간 광고 나오는 거 보이시죠? 그리고 어플 구동 중에 잠시 나오는, 배너 광고도 보셨을 겁니다.”

“꿀걱!”

래니 페이지와 에릭 슈바이츠가 동시에 침을 삼켰다.

래니는 세계 최고의 검색엔진을 만들었고, 에릭 슈바이츠의 경영능력이 더해져 광고시장을 휩쓸고 있었다.

그들은 윤재가 시현하는 영상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당신들도 스마트폰 운영체제 준비하고 있는 것 압니다.”

래니 페이지와 에릭 슈바이츠가 동시에 음료를 뿜었다.

빅애플에 맞서기 위해, 안드로이드를 준비하고 있는 구글을 윤재가 먼저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저희 52 소프트가 개발한 애드가(AdGa)라는 모바일 광고 엔진입니다.”

“꿀걱!”

윤재는 조용히 손가락 하나를 펼쳐 보였다.

52 소프트의 4개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One Billion Dollars 에 사겠다며 손가락을 펼쳤던 에릭 슈바이츠.

그가 음료수 컵을 들고 있던 손을 덜덜덜 떨었다.

“애...애드가를....10억 달러에 사주라는 얘기인가?”

“생각해 보세요. 구글링 조금만 해 보시면 알 겁니다. 제 미국인 절친이 빌 게이트에요. MS 역시 모바일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거 잘 아실 겁니다.”

“꿀걱! 꿀걱!”

“내일은 마이클 주커버그, 모레는 야후의 제리 양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충분히 검토하시고 연락 주십시오. 그럼 이만.”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었다.

래니 페이지와 에릭 슈바이츠는 마운틴 뷰를 떠나는 윤재의 뒷모습과, 서로의 얼굴을 계속해서 번갈아 볼 뿐이었다.

윤재의 재킷 속의 하이폰 녹음기는 이번에도 정상 작동 중이었다.

◈          ◈          ◈

“스타그램 탐난다고 하지 않았어?”

“물론 탐납니다.”

“애드가 탐나지 않아?”

“탐납니다.”

“그런데 뭘 망설이는 거요?”

“저희가 아직 그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10억 달러라니요....”

윤재는 이번에 마이클 주커버그를 구워삶고 있는 중이다.

“누가 현찰로 달래. 서로의 지분을 교환하자는 거야.”

“....”

“스티브 홉스. 래니 페이지와 에릭 슈바이츠. 육성 녹음 잘 생각해 봐.”

“....”

“내일은 제리 양과 약속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보겠네.”

“미스터 김!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검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이클 주커버그의 눈동자 역시 동공대지진이었다.

52 소프트의 제품은 분명 욕심났지만, 돈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피 같은 지분을 내주자니, 한없이 아깝게 느껴졌다.

“나야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어. 하지만 빌 게이트. 스티브 홉스. 래니 페이지와 에릭 슈바이츠. 제리 양이 나처럼 느긋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네.”

“....”

“그럼 이만. 생각은 짧을수록, 행동은 민첩할수록 좋은 거라 생각하네.”

“....”

래니 페이지와 에릭 슈바이츠가 침만 삼켰다면, 마이클 주커버그는 말문을 잃은 것 같았다.

◈          ◈          ◈

윤재는 3주 동안 진행된 미국 출장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우선 론스타와 데이비드 리에게 헤어나기 어려운 덫을 설치하는데 성공했다.

뭔가에 꽂히면 보고 싶은 점만 보는 게 사람의 특징.

노키아라는 매력적인 매물을 10조라는 헐값에 사게 될 거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이었다.

절친이자 파트너인 빌 게이트와 워렌 버핀을 만나 앞날에 대해 협의했다.

스티브 홉스. 래니 페이지와 에릭 슈바이츠. 마이클 주커버그에 이어 제리 양과도 미팅을 가졌다.

주식 발행 성공으로 현금은 많이 들고 있지만, 야후의 비즈니스 모델이 너무 취약했던 관계로 제리 양은 윤재에게 휘둘렸다.

출국을 앞두고 윤재는 제리양과의 대화를 회상했다.

“검색에서는 구글에 완전 밀려 버렸잖습니까?”

“그렇지. 인정하네.”

“SNS는 페이쓰북 천하이구요.”

“그렇지. 인정하네.”

“포털을 지향하는 야후에게 미국의 인터넷 망은 너무 느려 터졌어요.”

“그렇지. 인정하네.”

“그러다보니 광고시장도 구글에 뺐기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인정하네.”

“모바일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데, 준비가 전혀 안 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인정하네.”

복사해 붙여넣기도 아니고, 제리 양은 같은 말만 무한 반복했다.

제리 양의 마지막 보루는 회사를 MS에 파는 것.

윤재 때문에 매각이 무산됐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제리 양.

매각 실패 후 전투력이 뚝 떨어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스티브 홉스. 래니 페이지. 초신성 마이클 주커버그의 육성 녹음까지 들어서일까?

제리 양이 아니라 순한 양이 돼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야후가 제자리걸음 하는 동안, 30대 초반의 사내가 엄청난 서비스를 5개나 성공시켰다는데 압도된 것 같았다.

“애드가를 사면 모바일 광고시장에서는 구글과 한판 승부가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인정하네.”

“채터와 스타그램을 인수하면, SNS에서 페이쓰북과 일합을 겨룰 수 있어요.”

“그렇지. 인정하네.”

“어떻습니까? 애드가를 1조원에, 채터와 인스타그램을 각기 5천억에. 총 2조원이면 당신에게 3개의 회사를 넘기겠습니다.”

“그렇지. 인정하네. 아..아니야. 내가 실언을 했네. 내게도 시간을 좀 주면 안 되겠나?”

복사하여 붙여넣기 하다 에러가 발생한 모양.

제리 양이 황급히 자신의 말을 주워 담았다.

“알았어요. 다른 경쟁자들은 나처럼 느긋한 성격이 아니란 걸 알아주세요.”

“응. 알지. 그런데 현금 말고, 야후 지분과 스왑하면 안되나?”

“하하하. 저는 야후 지분은 필요 없어요. Show me the money.”

“그렇지. 인정하네.”

제리 양이 힘겹게 뱉은 복사하여 붙여넣기 마지막 대사였다.

이들 중 누가 가장 큰 호구가 될 지는 알 수 없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가장 조급하고, 현금 동원력이 있는 사람이 호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