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75화 (175/196)

몰락의 전주곡

2008년 1월 29일.

52 소프트 분당 본사.

최초 52 Cafe 소유의 건물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근처 8층 오피스 건물의 7~8층을 임대해 이용할 정도로 회사가 커졌다.

“사무실이 멋지군......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뗀 사람은 오진탁 사장.

오진탁은 2007년 말 임원인사에서 셀프승진을 단행했다.

자신을 포함한 측근들은 줄줄이 승진을 시켰고, O2푸드 사람들은 가혹하리만큼 박한 인사 조치를 단행했었다.

그런 그가 윤재의 사무실로 찾아온 것이다.

누가 어디로 찾아왔는지는 권력관계의 갑과 을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

2008년 1월자로 꿈에 그리던 한국통운 인수까지 성공했건만!

오진탁이 윤재의 집무실까지 찾아와, 괴상한 존댓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

“오사장님 집무실이나, 갤러리 꼭대기 층에 만들었던 펜트하우스에 비하면 구멍가게 수준이죠.”

윤재는 일부러 2003년 당시의 일을 상시시켰다.

오진탁은 윤재의 의도를 알아챘다.

수치심과 분노 때문에 무릎위에 올려놓은 오진탁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그날 조혜진 여사님 건은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미 지난 과거의 일.

이미 오재준과 오하루를 통해 받은 사과로 충분했다.

윤재가 오진탁을 용서할 수 없는 포인트는 혜진을 겁탈하려 했던 문제가 아니었다.

오진탁이 누구인가?

무능력한 오너. 아버지의 병환을 이용하고 있는 패륜아. 직원들에 사적 보복을 가하는 속 좁은 인간이었다.

한마디로 O2그룹이라는 재벌을 이끌어 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나를 찾아온 용건이 뭡니까?”

윤재는 사실 오진탁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멘트 하나하나 모두 계획에 의한 것들로, 오진탁을 질근질근 밟아버릴 생각이었다.

“일전에 론스타 데이비드 리를 통해 제안한 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요즘 하는 일이 많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태우건설 4,000만주를 25,000원에 사주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약 4개월 전 데이비드 리를 보내, 태우건설 지분 인수를 제안했던 적이 있었다.

오진탁은 지금 당시의 일을 상기시키며, 윤재에게 태우건설 지분을 인수해줄 것을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어느 순간부터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 증시는 수시로 출렁거렸고, 실물경제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그 여파로 태우건설 주가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폭락했고, 불과 5개월 만에 정점대비 반 토막인 15,000원 수준까지 떨어져 버렸다.

“하하하하하. 오사장님! 지금 제정신 입니까?”

“예?”

“그때는 태우건설 팔 생각 없다면서요.”

“.....”

“그리고 내가 닭대가리 입니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 거에요. 15,000원도 버거운 주식을, 나보고 25,000원에 사라 구요? 내가 호구요? 당신 돈이면 그 가격에 사겠소?”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오진탁은 엄청난 내적 갈등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김윤재와의 협상 테이블을 걷어차고 싶었다.

그는 이틀 전 울먹이며 자신을 설득하던 최경식 팀장의 얘기를 떠올렸다.

“사장님! 그룹을 구할 기회가 김윤재에게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1조원의 여유자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제발 고려해 주십시오.”

한 번 더 매달려야 하나, 박차고 일어나야 하나.

짧은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들이 오갔다.

그만큼 오진탁과 그룹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털썩!”

오진탁이 결국 무릎을 꿇었다.

윤재를 항상 ‘근본 없는 놈’이라 천시했던 오진탁이 딴에는 엄청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김윤재 사장님! 그날 일은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부디 옛정을 생각해, 태우건설 지분 인수 부탁드립니다. 25,000원이 너무 비싸다면 22,5000원에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재무팀장과 협의한 마지노선은 22,500원!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없이 싸늘했다.

“무릎 꿇고 있어 봤자 당신이 얻을 것은 발 저림 밖에 없을 거요.”

윤재의 얘기가 끝나자 오진탁이 분노조절장애를 발동할 기세였다.

하지만 이 역시 윤재의 계산에 있던 모습.

폭주하기 직전 윤재가 오진탁을 제압했다.

“오진탁. 곱게 꺼지는 게 좋을 거야. 내 실력 알지?”

오진탁의 눈에 튀던 불꽃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자신보다 수십 배는 더 큰 불덩이가 윤재의 눈에서 이글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오진탁은 굴욕만 당한 채, 얻은 것 없이 52 소프트를 떠나야 했다.

◈          ◈          ◈

무 개념의 사나이 오진탁.

그는 미래전략실로 돌아오자마자 소속 팀장들에게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맘 같아서는 다들 대가리 박아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야!”

회사로 돌아올 때부터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팀장들.

입 다물고 고객 숙이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최팀장!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김윤재 그 새끼한테 매달려 보라며?”

“죄송합니다.”

“내가 근본도 없고 나이도 어린놈한테 당한 굴욕을 생각하면. 어휴 열 뻗쳐!”

“.....”

미래전략실 팀장들은 한동안 오진탁의 진상 짓을 견뎌야 했다.

폭언폭설과 광기가 10분 동안 쉼 없이 이어졌다.

“태우건설 주가 떨어졌다고 회사 당장 망하는 것 아니야.”

“맞습니다. 사장님! 호랑이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날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팀장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진상 짓을 보지 않을 구멍이 생긴 것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언젠가는 끝나게 돼 있어. 우리는 그 뒤를 준비합시다.”

“예. 사장님!”

재무적 투자자에게 약속한 바이아웃 옵션까지 남은 기간은 정확히 1년.

그 안에 뾰족 수를 내지 않으면, 현재 가치로 1조원이 날아갈 판이었다.

“최팀장. 극비리에 태우건설 인수할 후보 찾아보시오.”

“예?”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통운을 지키고, 태우건설을 정리하는 게 낫겠어.”

“건설경기가 최악입니다. 게다가 해외수주 손실이 알려지면서, 태우건설 메리트가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덩치가 워낙 커서 후보자를 찾기도 힘들지만, 지금 팔기에는 손실이 너무 큽니다. 장기전을 준비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럴까? 그럼 한국통운 다시 내놓을까?”

소비재 중심의 기업체질을 산업재 중심으로 바꾼다는 애초의 계획은 온데간데없었다.

워낙 큰 위기가 닥치다 보니, 팔랑귀처럼 갈팡질팡 할 뿐이었다.

위기일수록 리더의 자질이 중요한데, 오진탁이 중심을 잡지 못하니 그룹 전체가 휘청거리는 것이다.

“최근 O2푸드에서 보고서가 하나 올라온 게 있습니다.”

“어휴~ 짜증나는 놈들. 푸드 얘기하지 말라니까! 또 김윤재 그 어린 놈 생각나잖아.”

다시 진상 짓을 봐야 하나?

눈치를 살피던 재무팀장이 보고를 이어갔다.

“O2 푸드 해외 제휴사 중에, 페레레 그룹이 있습니다. 페레레에서 상호 신뢰관계 강화를 위해, 지분 스왑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지분 스왑? 얼마나?”

“많지 않습니다. 3% 정도....”

“에이. 놔둡시다. 그거 해봤자 현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의미 없잖아요.”

회의는 공전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태우건설 주가하락의 데미지가 크다보니 뾰족 수가 없는 것이다.

“노가은이 그년 소식 여전히 없지?”

“예. 사장님! 죄송합니다. 이제 노가은 관장은 잊어버리는 게....”

“어휴. 그 년이 빼돌린 돈만 있었어도. 벤처기업 하나 만들어서 목돈 좀 쥘 수 있는데 말이야. 김윤재 그 자식도 그런 식으로 회사 키운 거잖아.”

미래전략실 팀장들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푼돈은 잊어버리고 큰 머리를 써서 위기를 벗어나야 하는 상황.

이 판국에 자꾸 과거에 연연하는 오진탁 때문에, 없는 암세포가 생길 판인 것이다.

“아! 맞다! O2푸드 지분을 페레레 그룹에 조금 넘길까?”

“예?”

“경영권 위협받지 않는 수준에서 검토해 봐. 페레레 측 속셈도 좀 파악해 보고, 지분 매입으로 동원 가능한 금액도 확인해 보고.”

“사장님! O2푸드는 그룹의 역사 자체입니다.”

“어이! 최 팀장! 역사가 밥 먹여주나? 역사가 돈 10원이라도 주냐고?”

“.....”

“아니면 오재영 사장을 찾아가 볼까?”

오재영은 오성그룹의 후계자로, 오진탁의 사촌동생이었다.

뿌리가 같으니 그쪽의 도움이라도 받아볼 심산.

적장손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던 오진탁의 패기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갈팡질팡 끝판 왕. 팔랑 귀 최종보스 다운 오진탁의 우유부단함이었다.

◈          ◈          ◈

오진탁이 미래전략실에서 갈팡질팡하던 시기.

윤재는 창진을 만났다.

매년 전년도의 투자성과를 피드백하고, 1년의 투자전략을 정교화하기 위해서였다.

“형님! 이제 한국 최고의 슈퍼 개미가 됐어. 현금성 자산만 1조원에 육박한다구!”

2007년은 유난히 주가가 요동을 친 한해였다.

사상최초로 주가지수 2,000을 돌파한 해였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영향이 이어지며 급락을 밥 먹듯 하기도 했다.

“우리 직원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글쎄다.”

“최고의 투자처가 남창진의 머릿속이래! 크하하하. 웃기지 않아? 그런데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야. 내 머릿속은 형님 오더로 가득 차 있으니까!”

2008년은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는 해.

전 세계가 공포에 가까운 주가폭락과 경기침체를 경험하는 1년이 될 것이었다.

윤재는 2008년을 대비하는 기본전략을 들려줬다.

얘기를 듣는 동안 창진의 입에서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 나왔다.

“투자전략은 이만하면 됐고. 창진아! 보안을 철저히 지켜줘야 할 일이 있다.”

“뭔데 그래? 형! 갑자기 쫄깃해 지는데?”

“장기투자에 대한 얘기야. 가장 중요한 건 보안이고.”

“나 몰라? 형! 퀵 마우스에서 과묵한 청년으로 변한 사람이라고. 나만 믿어.”

떠벌이였지만 누구보다 윤재에 대한 충성심이 높은 친구였다.

“O2 그룹이 태우건설, 한국통운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거 알지?”

“응. 알지. 증권가에 O2 망하는 거 아니냐고 난리도 아냐!”

태우건설. 한국통운에 끌어들인 외부자금이 대략 6조.

바이아웃 옵션을 빼더라도, 오진탁이 보장한 재무적 투자자의 연간 이익률은 평균 7%.

연간 4,000억이 넘는 엄청난 돈이 이자로 들어갈 형편이었다.

“당분간 O2 그룹 계열사들 주가가 폭락할 거다.”

“워렌버핀이 와도 박살날 상황이니까!”

“내 얘기는 절대하지 말고, 니 고객들에게 O2 F&B 주식을 권유해라. 평 단가를 6만원 수준에 맞춘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에이. 아무리 그래도 6만원은 너무 싼 거 아냐? 지금 주가만 해도 10만원이 넘고, 국내 1위의 식품회사인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고에, 승자의 저주까지 겹쳤어. 2008년 중에 5만원 밑으로 떨어지는 일도 있을 거다.”

“헙! 정말?”

“내 말 믿어. 그리고 명심해! 평단이 6만원이야. 최대한 보안을 지키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한테 사라고 해.”

“기간은 얼마나 보고 가야 하는 거야?”

“제법 길게 봐야 한다. 최소 3년은 들고 간다는 생각으로 사라고 해.”

“혜진이랑 선희한테 권해도 되는 거지?”

“응. 최대한 많이.... 하지만 내 얘기는 절대 보안이야.”

“세상에 마누라한테도 보안에 부친다고?”

다른 계열사는 어차피 관심 밖.

윤재가 노리는 것은 오로지 O2 F&B.

지분대결을 펼치게 되면 1주가 아쉽게 될지도 몰랐다.

올리버와 페레레그룹에 이어, 창진과 개미들을 최대한 끌어 들일 생각이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필요해. 보안이 생명이니까!’

윤재는 머릿속으로 외국환은행의 차태영과, 외국의 우군들인 워렌버핀. 그리고 빌 게이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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