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73화 (173/196)

저인망식 포위작전

2007년 9월 13일 목요일.

O2 그룹 미래전략실에 낯선 손님이 한 명 찾아왔다.

그는 한국 론스타 총괄을 담당하고 있는 데이비드 리 였다.

데이비드 리를 만나고 있는 오진탁과 전략실 팀장들은 모두 표정이 썩 밝지 않다.

“데이브드? 방금 얼마라고 그랬소?”

“주당 2만 5천원이라고 했소만.”

다시 한 번 오진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쪽 다리를 꼰 채, 소파에 몸을 푹 기댄 데이비드.

그의 표정에 거만함과 여유가 가득했다.

“내가 52그룹의 김윤재 사장과 동반자적 관계라는 건 잘 아실 겁니다. 김사장과 저는 O2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태우건설의 주식 4,000만주를 원합니다.”

2만 5천원에 4천만 주라면, 정확히 1조원의 금액이다.

하지만 오진탁의 귀에는 4,000만주라는 주식수가 아니라 ‘52그룹’이라는 얘기가 더 크고, 더 정확하게 들렸다.

“데이비드 선생! 방금 뭐라고 했소? 뭐요? 52 그룹?”

“하핫! 부사장님께서 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52 Corp는 1조원 넘는 가치를 지닌 회사만 3개를 보유한 중견그룹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성장성이 어마어마....”

“됐습니다. 더 얘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즈니스의 세계는 적도 없고 아군도 없는 법.

세계 굴지의 사모펀드의 지역책임자 데이비드 리.

그이 말을 중간에 자르는 것은 결례에 속한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예상했다는 반응이라는 제스처를 한 번 보여줄 뿐이었다.

“김윤재 그 친구에게 분명히 전하시오. 우리 O2그룹은 태우건설을 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말이요.”

“25,000이면 현 주가보다 주당 1천원을 더 쳐준 금액입니다만. 시세보다 400억이 큰 금액이요.”

“글쎄 듣기 싫단 말이오. 우리 미팅은 이걸로 끝내는 걸로 합시다. 에잉..쯧.”

데이비드 리는 끝까지 윤재의 지시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곱게 물러나지 말고 최대한 빈정거리라는 것이 윤재의 오더였다.

“커피 잘 마시고 갑니다. 역시 재벌 그룹답게, 접객용 커피 맛이 일품이군요. 확실히 52Corp같은 중소기업과는 차원이 다르군요.”

오진탁이 더는 데이비드와 상종하기 싫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아! 내가 잘못 말했구나! 커피는 52Cafe의 카푸치노가 최고인데.... 하하핫! 또 봅시다.”

데이비드가 문을 열고 사라지자, 미전실 팀장들에게 두려움이 퍼져갔다.

오진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던 것이다.

◈          ◈          ◈

데이비드 리가 O2그룹 미전실을 휘젓고 사라진 뒤, 오진탁 실장 방에 팀장들이 다시 집결했다.

싸늘하게 식은 분위기가 참석자들의 목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부사장님! 냉정하게 생각하면, 론스타와 김윤재 그 친구의 제안도 검토해 볼만 합니다.”

1조원의 지분을 팔아도 O2그룹은 태우건설에 대한 경영권을 유지하고도 남는다.

3만원을 넘던 주가가 2만 5천원을 하회하는 상황.

윤재와 론스타에게서 1조원을 받으면, 태우건설 인수에 따른 부담을 현저히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오진탁은 역시 윤재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인물.

예상했던 반응을 보였다.

“당신 미쳤어? 지금 내 앞에서 김윤재 그 새끼 얘기가 나와?”

“1조면 바이아웃 옵션 부담을 낮추는데 이용해도 되고, 한국통운 인수자금으로 활용해도 됩니다.”

오진탁의 입에서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너! 지금 짤리고 싶어서 용쓰는 거야? 내 앞에서 한번만 김윤재 그 자식 얘기하면, 다 아가리를 찢어버릴 줄 알아? 알았어?”

오진탁의 성질을 모를 리 없는 팀장들.

속으로 한숨만 내쉴 뿐 더는 직언을 하지 못했다.

“바이아웃 아직도 1년 4개월이나 남았어. 올해도 태우건설을 못해도 4천억은 벌 수 있다고. 코스피가 심심하면 사상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는데, 뭐 2만 5천원? 2만 5천워어어언?”

“죄송합니다.”

“한국통운 인수나 차질 없이 준비해. 이번에도 금오부터 시작해 줄줄이 달려들 기세잖아?”

“.....”

오진탁의 발광 때문에 아무도 얘기는 못했지만, 미전실 팀장들은 속으로 떨고 있었다.

현 주가라면 태우건설 재무적 투자자에게 물어줘야 할 금액만 대략 7,0000억!

지금도 허덕이는데 한국통운을 인수하려면, 최소 2조원이 더 필요했다.

자칫 미끄러지면 그룹이 골로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지가 눈앞이야. 한국통운 먹고, 그 기세로 태우조선해양까지 간다. 정신 바짝 차리고, 정보력을 총 동원하라고. 돈 걱정 말고!”

“예. 부사장님!”

또 다시 대답을 안했다가는 불호령이 뻔했다.

이등병처럼 대답하는 팀장들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          ◈          ◈

데이비드 리가 그룹 미전실을 휘젓고 떠난 날 밤.

미전실 팀장들은 오진탁 몰래 심야 회동을 가졌다.

태우건설 주가가 25,000원이 깨진 뒤로 날마다 오진탁에게 시달렸다.

회포를 풀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죽을 것만 같은 시기였다.

“그런데 김윤재 그 친구가 정말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말이야.”

“우리 재무팀 정보력을 못 믿는 거에요?”

“아니, 못 믿는다는 게 아니고, 재벌도 아니고 33살 먹은 젊은이가 2조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

“적게 잡았을 때 2조원입니다.”

“허허. 믿기지 않는 노릇이야. 2조원이라니!”

“더 놀라운 게 뭔지 아세요?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해가 갈수록 윤재의 재산 가치는 상종가를 달리고 있었다.

외국환 은행 지분 4%만 해도, 이제는 3~4천억을 오가는 수준이었다.

상장사인 52카페의 지분가치만 해도 5천억이 넘었고, 태화정밀기계는 2008년 상장을 목표로 조율 중이었다.

“국내외 스타트 업 지분도 화려하다는 소문이에요. 게다가 52 Farm이라는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이 어마어마합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2조원이 훨씬 넘을 거에요.”

“오진탁 부사장 형제들 지분을 다 합쳐도 2조원은 안 될 것 같은데?”

오재준과 그의 부인의 지분을 빼면, 실제 오진탁 4형제의 지분은 다 합쳐도 2조 될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오진탁이 미친 듯이 비자금에 열을 올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8월에 여의도 증권가를 놀라게 한 소문이 있는데, 그 주인공도 김윤재 그 친구가 확실해 보여요.”

“더 놀랄 소문이 남았어?”

“O2 투자증권에 있는 동기 말에 의하면, 지난 8월에 일주일 만에 2천억을 딴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김윤재 같다고 합니다.”

미전실 팀장 5명은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룹이 잘 나갈 때나, 미래전략실 팀장 자리는 꿀 보직의 가치를 갖는 법.

최근 태우건설의 주가하락 부담으로, 그룹 계열사들 주가는 곤두박질치는 중이었다.

거기에 오진탁의 히스테리까지!

달콤했던 기억이 있기나 했는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었다.

“우리 입장에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뭔지 아세요?”

“뭐? 뭐가 또 남았는가?”

“김윤재가 론스타와 손을 잡고, O2 그룹 사냥에 나서는 겁니다.”

“땡그랑~”

법무팀장 이동인이 마시던 양주잔을 떨어뜨렸다.

나머지 팀장들 역시 충격을 받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전혀 불가능한 시나리오도 아네요. 5조는 땡길 수 있는 론스타. 거기에 외국환은행장과 김윤재가 거의 부자지간처럼 지낸다고 합니다. 거기에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렌 버핀과도 막역하다고 하더군요! 만약 이들이 힘을 합친다면?”

“그룹이 통째로 김윤재의 손에 넘어가는 건 일도 아니겠군?”

“게다가 오진탁이 때문에 회사에 대한 감정도 나쁘잖아요. 적대적 M&A라도 시도하면, 오진탁이처럼 무능한 자가 막을 수 있을까요? 회장님도 저러고 계시는데?”

최경식 팀장을 뺀 나머지 팀장들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을 느꼈다.

“이러든 저러든 사는 길은 한국통운까지 먹는 것 밖에 없습니다. 김윤재 따위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덩치를 키워 버리는 거죠.”

“일리 있는 얘길세. 그런데 김윤재 걔가 설마 그 정도 생각까지 하지는 않겠지?”

오진탁은 물론 미전실 팀장들도 여전히 오판에 오판을 거듭하고 있었다.

◈          ◈          ◈

데이비드 리를 오진탁에게 보내놓고, 윤재는 베트남에서 올리버를 만났다.

작은 엄마의 레시피와 페레레의 루텔라 초콜릿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FMM의 제품들.

매달 판매기록을 갱신하며 순항 중이었다.

현장 점검이 명분이었지만, 실제 올리버를 만나려 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고맙다! 윤재!”

“친구끼리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냐.”

“흐흐흐. 아버지가 아주 좋아하셔. 이제 홀가분하게 정상에서 내려 올 수 있겠다고 하시더군.”

“축하한다. 올리버! 그동안의 네 노고가 드디어 인정을 받는구나.”

CEO로서의 테스트나 다름없었던 베트남 합작법인.

FMM의 제품들과 기존 페레레의 히트작을 앞세워, 올리버는 아시아 시장에서 페레레 그룹의 파이를 자꾸 키워 나갔다.

중국은 물론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까지 영토를 넓힌 것이다.

“혜진이가 그러던데, 에밀리와 결혼하기로 했다며?”

“응. 날 잡았다. 12월 23일이야!”

10년 가까이 친구이자 연인으로 살아온 올리버와 에밀리.

드디어 부부의 연까지 맺게 됐으니, 일도 연애 비즈니스도 모두 순풍에 돛 단 듯 흘러가고 있었다.

“할아버지 피에트로부터, 부친이신 미켈레까지. 페레레는 눈부신 성장을 해왔지!”

“애가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러는 거야?”

윤재가 갑자기 분위기 전환을 시도하자, 뭔가 꿍꿍이가 있음을 눈치챘다.

“하인즈, 크래프트는 물론이고 페레레도 아직 넘지 못한 넘버원이 있지.”

“네슬레?”

“맞아. 올리버! 나는 네 꿈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

“내 꿈?”

“그래. 네슬레를 넘어서는 세계 넘버 원 푸드 회사가 되는 것 말이야.”

쿵!

올리버 페레레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역시 그는 연예인이나 배우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전생에서 아버지 미켈레에 이어 CEO의 자리에 올랐던 올리버 페레레.

그가 남몰래 꿔온 꿈은, 미래의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물론 2007년 시점에 올리버의 꿈을 아는 사람은, 윤재와 올리버 자신뿐이었지만.

“내 꿈도 너와 같거든!”

윤재의 얘기에 올리버의 원래 큰 눈이 더 커졌다.

“내게 좋은 복안이 있어. 한번 들어 볼래?”

“?”

“나랑 손잡고 글로벌 식료품 회사를 M&A하는 거다.”

초콜릿과 과자에 치우쳐 있는 페레레.

회사의 특성상 사실상 A부터 Z까지 만드는 네슬레를 넘기가 어려웠다.

올리버가 자신의 꿈을 이루는 수단으로, M&A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 역시 윤재는 알고 있었다.

올리버는 속으로 기가 찼다.

자신의 도플갱어와 얘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올리버. 나와 함께 세계인을 위한 푸드 제국을 건설하자. 건강한 식자재로 맛있게 만들어서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거야!”

“꿀걱!”

“그 첫 번째 타겟으로 나는 한국의 O2 푸드를 점 찍었어.”

“O2 푸드를?”

“그래. 왜 O2푸드가 필요한지 이유를 얘기해 줄게. 잘 들어봐!”

설명은 왜 자신이 회사를 그만둬야 했는지부터 설명했다.

그 뒤 O2푸드의 전략적인 가치.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과 어떻게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지.

마찬가지로 페레레 그룹과 함께 세계시장을 공략할 방안을 설명했다.

대략 30분에 걸친 장대한 설명이었다.

올리버의 반응은 전혀 뜻밖의 지점에서 폭발했다.

“그러니까 오진탁 그 개자식이, 천하의 썅놈의 새끼라는 거잖아?”

“뭐 대충 비슷해.”

“게다가 내 여신이기도 했던, 혜진이를 건드렸다고? 이 개자식! 너는 뒈졌다!”

당장 한국으로 날아가 오진탁의 모가지를 부러뜨리겠다는 올리버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윤재는 올리버를 진정시키는 한편 뿌듯함을 느꼈다.

‘국제시장에서 올리버를 경쟁자로 만나는 것보다, 아군으로 만나는 것이 백번 좋은 일이다!’

이렇게 해서 윤재는 O2 공략의 강력한 아군을 확보했다

‘기다려라! 오진탁! 때론 야금야금, 때로는 전격전으로 포위망을 좁혀 가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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