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의 시작
“아무래도 내가 영국에 따라 갔어야 해! 지은이가 왠지 긴장한 것 같지 않나?”
“하하하. 사장님! 농담도 잘 하시네. 이프로가 어딜 봐서 긴장한 것 같이 보여요? 침착하게 플레이하고 있는데. 박남수 프로가 옆에 있으니, 믿고 진득하게 기다려 보세요.”
2006년 8월 27일 일요일.
윤재는 상주에서 이재민 사장과 함께, LPGA 브리티시 오픈 중계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4라운드 18홀에서 극적인 동타를 이뤄낸 이지은 프로.
그녀는 일본 선수인 시부노 하나코와, 벌써 연장 3번째 홀까지 이어지는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에어컨이 빵빵한 사무실인데도, 이재민 사장은 땀을 비처럼 흘렸다.
막말을 달고 사는 상남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완전 딸 바보였다.
“사장님! 사장님이 경기 하십니까? 뭔 땀을 그렇게 흘려요?”
“자네는 애비의 심정을 몰라!”
“이거 왜 이러세요? 저도 희망이가 오늘 내일 하고 있습니다.”
윤재는 2세의 태명을 희망이라고 지었다.
이제 2주 정도 지나면 아빠와 엄마를 보러 세상에 나올 예정이었다.
“경기 보시다가 사장님이 먼저 쓰러지는 것 아닐까요? 건강을 위해서 TV를 끄는 게 어떨까요?”
“아냐. 나 그렇게 맘 약한 사람 아니네.”
연장 3번째 홀!
일본 선수 역시 LPGA 우승 경험은 없는 선수.
메이저 대회와 연장 접전이라는 중압감 때문이었을까?
시부노 하나코가 아마추어나 한다는 3퍼팅을 하고 말았다.
반면 이지은 프로는 침착하게 버디로 승부를 마무리했다.
그녀가 약 2년 가까이 이어진 불운을,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2005년 LPGA 무대에 데뷔한 후 꾸준히 Top10을 오가던 이지은.
지난 2년간 경기력에 비해 운이 따르지 않았다.
전년 US오픈에서는 볼이 하필 벙커 턱에 박힌 적도 있었고, 싱가폴 대회에서는 1위를 맹추격했으나 스코어카드에 사인을 하지 않아 실격되기도 했다.
실력보다 모두 불운에 가까웠고, 불운의 시기는 O2그룹과 불화를 겪던 시기와 묘하게 겹쳤던 것이다.
“그동안 진짜 더럽게 안 풀렸는데..... 마침내 우리 딸이 해냈어. 해냈다구!”
눈물뿐만 아니라 콧물까지 흘리는 이재민사장을 얼싸 안았다.
“사장님! 축하합니다. 지은이가 드디어 해냈네요. 메이저 퀸이라니! 감격스럽니다.”
“응.... 이 모든 게 자네 덕분이네. 고맙네!”
◈ ◈ ◈
한편 영국 현지에 있는 이지은 프로는, 동료들이 뿜어대는 샴페인 샤워를 즐겼다.
주관사와 우승 기념식 등을 모두 끝낸 이지은.
디스커버리 골프에서 진행하는 기자 회견을 가졌다.
우승의 비결, 소감 등을 묻는 질문이 한참동안 이어졌다.
공식적인 시상식과 인터뷰가 모두 끝나고, 주최측과 기자들이 함께하는 간담회 시간.
미국 기자가 질문했다.
“이지은 프로. 메인 스폰서인 O2는 어떤 곳입니까? 산소처럼 소중하다는 의미인가요?”
“음..... 산소처럼 소중하다기 보다는 산소처럼 흔한 그런 의미.... 어쨌든 그렇습니다."
비공식 석상이지만 O2를 디스한 것이나 다름없는 멘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O2는 이지은을 못살게 굴었다.
“올챙이 시절 생각해 이프로! 슬럼프 시절에 이프로를 일으켜 세워준 곳이 우리 회사란 걸 벌써 잊었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스폰서 계약 5년 연장합시다. 돈은 섭섭하지 않게 대우해 줄게!”
삼오어묵 문제로 이재민과 다툰 이후, O2 담당 팀장이 하는 꼬라지는 거의 갑질에 가까웠다.
그들은 여전히 이지은을 햇병아리 취급했다.
"LPGA 가니까 다시 귀신같이 해매네. 자네가 우리 없이 되겠어?"
뭐 이런 비아냥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Top10을 유지했지만, 우승을 하지 못한 이지은을 무시한 것이나 다름 없는 행동이었다.
이지은의 어두운 표정을 뚫고 미국 기자가 다시 물었다.
"옷과 모자를 포함해 무려 일곱 개나 노출시킨 52 라는 스폰서는 어떤 곳입니까?”
52 라는 얘기가 나오자 이지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할수만 있다면 제 모자와 옷에 52개의 공간을 내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한 후원사입니다."
이지은 프로는 O2와는 노골적으로 비교될 정도로, 52 Corp에 대한 극찬을 이어갔다.
"그런데 왜 52라는 이름을 쓰는 건가요?"
“언젠가 제가 LPGA에서 18홀을 52타로 코스 레코드를 세우라는 의미라고 하네요.”
이지은이 살짝 웃으며 얘기했고, 기자회견장의 모든 사람들도 폭소를 터뜨렸다.
"박남수 캐디를 발굴했고, 제 아빠에게 삶의 활력과 여유를 찾아 준 회사가 바로 52 Corp입니다. 거기 대표님께서 저에 대한 후원을 중단하지 않는 이상, 제가 먼저 계약을 해지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야무지면서도 당찬 선언이었다.
오늘날 이지은의 성공은 O2라는 회사가 아니라, 윤재라는 남자 덕분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오래전에 깨달았다.
박남수와 자신을 이어주고, 아빠에게 골프장을 제공하고, 최근에는 이재민 사장과 동업을 하고 있는 윤재야 말로 그녀의 은인이었다.
◈ ◈ ◈
O2 그룹은 엄연히 이지은 프로의 메인 스폰서.
윤재가 회사 다니던 시절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회사 직원들 대부분이 이지은의 선전을 기원했고, 이프로는 메이저 대회 우승으로 다시 한번 O2 에 보답했다.
오진탁 역시 미래전략실에서 팀장들과 함께 이지은 프로의 경기를 관람했다.
그녀가 우승할 때 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문제는 그녀의 간담회였다.
인터뷰를 지켜보던 오진탁이 대노했다.
“저런 건방진 년을 봤나! 프로에 와서 해매고 있던 걸 20억이나 후원해 줬고, 그 덕에 우승도 하고 LPGA도 진출했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런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건방은 뭐야? O2 얘기는 어디 가고, 같잖은 52 Corp 타령만 하고 있어? 52 Corp 라는 듣보잡이, 김윤재 그 자식이 만든 회사 아니냐고?”
“....”
미래 전략실 팀장들은 다시 도진 오진탁의 히스테리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저 년 계약기간이 얼마 남았다고 했지?”
“아직 2년 남았습니다.”
“법무팀 불러서 스폰서 계약 파기해 버려. 우리를 뭐로 보기에 저딴 건방을 떤단 말인가? 그것도 전 세계에 송출되는 방송에서!”
오진탁이 발광할 때는 조용히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지은의 홍보효과는 돈 20억을 몇 배 뛰어넘는다는 입바른 얘기를 해봤자, 오진탁에게 찍혀서 명줄만 짧아질 뿐이다.
“은혜도 모르는 년!”
“우리 아버지께서 이지은 저년에게 얼마나 잘 해줬는데...”
오진탁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이런 비난을 계속했다.
이지은에 대한 폭풍 비난이 끝나자, 미래전략실은 업무 모드로 변경됐다.
브리티시 오픈 기자회견 잔상 때문인지, 회의 분위기는 제법 살벌했다.
“52 카페인가 뭔가 하는 곳이 IPO를 성공리에 마쳤다는 게 사실이야?”
“네. 실장님! 아뢰옵기 황공하지만, 8월7일 상장이후 어제까지 오른 주가만 40%가 넘습니다.”
3연상 이후 등락을 하긴 했지만, 상장이후 현재까지 우상향 트렌드는 확실했다.
주가도 어느새 7만원을 뚫은 상태였다.
“7만원이면 시가 총액이 얼마야?”
“1조 4천억이 조금 넘습니다.”
“끄응... 미치고 환장하겠군.”
오진탁은 신음을 토했다.
52 Cafe의 상장과 주가 상승으로, 윤재의 평가액은 5,600억에 육박해 버렸다.
현재 기준으로 오진탁의 재산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발바닥의 떼 정도로 생각했던 윤재가, 어느새 거물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실장님! 재무팀에서도 보고 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뭔데?”
“태우 건설 매각 입찰에 론스타가 참여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합니다.”
“론스타가? 머리 아프게 생겼군. 걔네들 전문적인 벌처펀드잖아?”
“그렇습니다.”
금오그룹의 인수전 참여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
O2 그룹 보다 덩치가 큰, 금오를 따돌리기도 벅찬데 론스타의 등장이라니?
오진탁은 머리가 지끈 거리는 심정이었다.
“송구스러운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야? 뭐가 또 있어?”
“네. 론스타가 국내 회사와 손을 잡았는데, 그 회사가 김윤재 그 자식이 몸 담고 있는 회사라고 하는 군요.”
“다. 당신 지금 누구라고 했어? 김윤재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론스타의 뒤에 김윤재가 있고, 김윤재의 뒤에 외국환 은행과 버크셔 해서웨이가 있다는 정보입니다.”
오진탁 입장에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재계 서열에서 밀리는 금오그룹도 벅찬데, 론스타에 외국환 은행과 버크셔 해서웨이라니!
“무슨 일이 있어도 태우 건설은 잡아야 합니다. 김윤재 그 따위 듣보잡에게 질 수는 없어요. 그룹의 미래와 재벌 그룹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부사장님! 인수자가 많아질수록 인수가액은 오르기 마련입니다. 그룹의 자금 동원에는 한계가 있어서... 자칫....”
“자칫 뭐요?”
“아. 아닙니다. 부사장님!”
“정신들 차리세요. 태우건설 인수는 회장님께서도 제주도에서 승인한 사안입니다. 회사 주거래은행. 사모펀드 등 재무적 투자자를 총 동원하세요. 그렇게 리스크 분산시키면 될 것 아닙니까?”
“....”
여기서 오진탁은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했다.
오재준이 제주도에서 쓰러진 뒤, 온전한 의식을 회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짓말이었다.
오재준은 태우건설 인수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 인수를 오케이 한 적이 없었다.
제주도에서 쓰러진 이후 오재준은 코마 상태나 다름 없는 상황에 빠져 있었다.
간신히 호흡만 했지, 움직일수도 의사 표현을 하지도 못했다.
비감에 젖어 살고 있는 다른 가족과 달리, 오진탁은 현재 상황을 하늘이 준 호기라 생각했다.
'회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라는 하날의 계시다!'
그래서인지 오진탁은 미래전략실의 팀장들에게 의욕적으로 지시를 내렸다.
“명심하세요. 태우건설은 Risk가 큰 대신 Return 도 큰 회사입니다. 우리 그룹을 단숨에 재계 10위권으로 끌어 올릴 수 있어요.”
“명심하겠습니다.”
“태우건설은 국내 시공능력 1위입니다. 건설분야 사관학교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는 거에요. IMF 이후 어려운 시기를 겪었지만, 조금만 자금지원이 되면 매년 5,000억의 순이익을 그룹에 안겨줄 회사란 말입니다.”
전혀 틀린 분석은 아니었다.
우여곡절을 겪게 되지만, 태우건설은 2010년 이후 꾸준히 3,000억에서 5,000억에 달하는 이익을 창출했다.
'건설회사야 말로 비자금 확보의 보고야! 노가은 그 년 때문에, 주춤한 승계자금 마련에도 태우건설은 제 격이지!'
오진탁은 야심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행과 기관 투자자에게 매년 이익률을 보장해 주세요!”
“정 안되면 풋백옵션이라도 걸어두면, 재무적 투자자들이 움직일 겁니다.”
오진탁의 머리에서 나오는 처방들이었다.
모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생하지 않을 Risk였다.
작년에 있었던 태풍 나비의 교훈은 쌈 싸먹은 지 오래였다.
오진탁의 머릿속에는 장밋빛 환상만이 가득했다.
‘김윤재 네까짓 놈이 돈 좀 벌었다고? 웃기지 마! 우린 10조짜리 회사 먹고 재계 10위 입성한다. 그리고 요즘 나대는 하루 고것을, 태우건설 인수 한 방으로 잠재운다!’
이날의 광분이 회사에 얼마나 큰 쓰나미로 되돌아올지 오진탁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 부동산 거품 붕괴에서 촉발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수기로 유명한 웅지. 보험회사로 유명한 LIC.
극동건설과 건영건설 인수로 몰락한 대표적인 회사들이다.
7~80년대 고도 성장기 건설업 신화와, 건설회사를 통한 비자금 조성의 꿀맛에 취해 Risk 관리를 소홀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회사들.
그 길에 오진탁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