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st Eye
2006년 7월 23일.
오재준 회장은 오랜만에 측근들과 제주도를 찾았다.
그룹 소유인 제주 세븐 브릿지 골프장에서 라운드도 즐기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며 휴양을 즐기다 올 생각이었다.
자식들 중에서는 오진탁이 유일하게 오재준과 동행했다.
여전히 자식들 중에서는 오진탁이 1인자라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다.
“지난 O2 상사 건은 잊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 다시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룹의 50년 지계가 네 손에 달려 있어.”
“명심하겠습니다.”
8명 2개조로 야간 골프에 들어간 오재준 일행.
앞뒤로 팀이 보이지 않게 여유 있게 조를 편성했다.
일반 예악자들의 운동은 모두 끝났고, 골프장에는 O2 임원들만 함께 했다.
말 그대로 황제골프였다.
오재준 오진탁 부자의 조가 1조.
뒤에 따라오는 2조는 사실상 회장 조를 호위하는 역할이 주요 임무.
황제 골프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역시 여름은 야간 골프가 제 격이야.”
“그렇습니다. 회장님! 저녁 바람이 제법 시원하군요.”
“그래서인가? 공도 아주 잘 맞는 군. 껄껄... 아주 좋아.”
“회장님께서 요즘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런가? 나 기분 좋아라고 하는 얘기 아니고?”
“아닙니다. 회장님! 진짜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오재준은 요즘 들어 기분이 괜찮았다.
큰 딸 오하루가 그룹에 복귀해 실력을 뽐내고 있었다.
주변의 평판도 칭찬 일색.
오진탁이 잃은 점수를 하나씩 만회하는 것이 믿음직했다.
작년 태풍 나비 때 150억 넘게 꼴아 먹은 오진탁.
다행히 O2 상사의 역량을 총 동원해, 침몰한 선박을 끌어 올렸고 사태를 해결했다.
그나마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해결한 게 다행이다 싶었다.
“진탁아! 우리가 잘 하는 일을, 먼저 세계적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아버지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식품 비중이 너무 커요. 밀가루. 설탕 팔다가 재계 10위는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비의 아픈 곳을 찌르는 구나!”
“그런 뜻으로 말씀 드린 건 아닙니다. 저희는 너무 가벼운 사업 일변도에요. 산업재 시장에 진출해야, 회사 밸류체인이 더 탄탄해 질 겁니다.”
“생각한 바 있느냐?”
“태우건설이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습니다.”
“태우건설? 그건 너무 덩치가 커서....”
“중동. 중국. 베트남 등 태우건설은 이미 20년 전부터 세계경영을 해 왔습니다. 극장이나 짓는 우리 O2 건설을 비약적으로 키울 수 있어요.”
“알았다. 이번 제주행은 휴식이 목적 아니냐? 그 얘기는 다음에 하자꾸나.”
“예. 회장님!”
오재준은 그 말을 끝으로 업무를 잊었다.
그리고 골프에 집중했다.
18홀 어디에서나 한라산의 절경이 보이는 세븐 브릿지 골프장.
오재준은 간만에 유쾌하게 골프를 즐겼고, 클럽 하우스에 마련된 저녁식사까지 맛있게 먹었다.
총무실과 비서실에서 어른 손바닥보다 큰 전복부터, 줄돔에 이르기까지 산해진미를 마련한 모양이었다.
모두 오 회장이 좋아하는 재료였고, 요리사들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었다.
“오늘 다들 수고 많았네.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예. 회장님! 편히 쉬십시오.”
기분 좋게 취한 오재준.
그는 자신의 200평 스위트룸으로 돌아왔다.
방 4개와 화장실이 6개 달린 단독 빌라로, 1박 요금이 무려 250만원에 달했다.
‘진탁이 놈도 아직 젊어서 그런 거야. 낼 모레면 제 놈도 40이 아닌가? 정신 차릴 때가 됐지.’
오재준 자신도 30대, 40대 시절이 있었다.
젊은 날 바로 이 스위트룸을 드나들었던 미녀들이 분명 있었다.
옛일을 회상하며 오재준은 자신이 늙긴 늙었다는 생각을 했다.
1,000만원이 넘는 이태리 산 리클라이너에 기대 TV를 켜려던 오재준.
그는 협탁 위에 놓은 USB를 발견했다.
“이게 뭐야? 최비서는 아무 얘기가 없었는데?”
오재준은 비서실장을 부를까 생각하다 멈칫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다는 촉이 발동한 것이다.
그는 55인치 TV 옆면에 USB를 꽂았다.
USB를 꽂자마자 영상은 자동으로 플레이되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영상에 등장한 낯이 익은 젊은 여자.
화면 속의 주인공은 오진탁의 애첩이었던 노가은 관장이었다.
“저 여자가 왜?”
오재준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회장님! 저는 지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바로 회장님의 아드님, 오진탁 부사장이 제 목을 노리고 있는 분이죠.”
가짜 미술품을 400억 원 어치 끼워서, 몰래 팔아먹은 뒤 야반도주한 노가은.
그녀에 대한 추적명령이 떨어졌지만, 아직도 그녀의 목은 오진탁 앞에 도착하지 않았다.
“회장님! 물론 제가 잘 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아드님 정액받이로 무려 6년을 살았습니다. 제가 회장님의 손자라도 낳았어 봐요? 얼마나 회사가 혼란에 빠졌겠습니까? 그러니 오진탁 부사장에게 지시해 주십시오. 저를 쫒는 걸 단념하라고. 그러면 저 노가은! 이 지구상에 없는 존재가 돼 조용히 살아가겠습니다.”
오재준의 감정 선을 꿰고 있다는 듯, 영상은 쉬는 구간과 재상구간을 기막히게 맞춰가며 촬영돼 있었다.
오재준의 목과 이마에 힘줄이 선명하게 굵어지기 시작했다.
“오진탁 그 인간이 앞으로도 제 목을 노린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회장님만 다음 영상을 보겠지만, 앞으로는 인터넷에서 다음 영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구촌의 몇 억 명의 사람들이 영상을 보게 되겠죠? 회장님?”
뇌쇄적 매력이 있는 노가은이 앙칼지게 마지막 대사를 내뱉었다.
10초 정도 간격을 두고 다음 영상이 재생됐다.
그것은 오재준의 큰 아들 오진탁과 갤러리 관장 노가은이 등장한 섹스 동영상이었다.
“이.... 이..... 이.... 미.친....새끼....”
아들놈과 노가은의 거친 신음소리와 짐승들 같은 화면을 지켜보던 오재준.
먼저 그의 손에서 리모콘이 거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곧 이어 그의 몸이 썩은 고목 넘어가듯 리모콘 옆으로 쓰러졌다.
◈ ◈ ◈
오재준 회장이 섹스 동영상 때문에 충격으로 쓰러진지 일주일.
오재준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사실을 그룹 수뇌부는 쉬쉬하고 있었다.
당일 골프장을 찾은 7명과 오재준 회장의 가족들 외에는 누구도 오재준이 쓰러진 사실을 몰랐다.
7월 29일 토요일 윤재와 친구들은 부산 해운대에 집결했다.
서쪽 하늘로 해가 넘어갈 준비를 하는 시각이었다.
꼬박 18개월 동안 공사를 진행해 온 대관람차 Vast Eye 의 오픈 세리머니를 위해 해운대를 찾은 것이다.
해운대를 넘어 한국의 바다와 해변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될 Vast Eye!
부산시장과 국토해양부 장관이 오프닝 행사에 참석했다.
외국에서는 설계사와 건설사 대표를 포함한 취재진들도 참석했다.
국내의 언론사 기자들도 수십명 참석했고 셔터를 누르기 바뻤다.
NBC의 안수애 아나운서의 얼굴도 보였다.
부산시장. 장관의 인사말이 끝나고 52Cafe의 CEO인 고도윤 사장이 단상에 등장했다.
“지난 18개월 동안 52 Cafe는 1,000억을 투자해 Vast Eye를 완공했습니다. 감회가 새롭군요. 오늘 역사적인 개장식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고도윤 사장은 스스로 감동 받았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52 Cafe 홈페이지를 통해, 개장식의 대관람차를 무료로 탑승하실 고객 1,500명을 추첨했습니다.”
고도윤의 얘기가 끝나자, Vast Eye 주변을 가득 매운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52 Cafe 홈페이지를 통해 관람권의 행운에 당첨된 고객들이었다.
오픈 행사에서 VIP들과 참석자들은 무료로 Vast Eye를 타게 될 것이었다.
야간 시간대인지라 딱 3회만 운행할 계획이었다.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 때문에 몇 초간 말을 멈춘 고도윤.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다음 멘트를 이어 나갔다.
“오늘 Vast Eye에 탑승하는 모든 분들께 저희 52 Cafe의 시그니처 음료인 아이스큐브돌체라떼가 제공됩니다. 오늘의 행사를 위해 부산 최고의 바리스타들을 전원 소집했습니다.”
최소 2,000잔 정도의 음료를 만들어야 했다.
Vast Eye는 부대시설로 52 카페를 운영했지만, 규모가 작았다.
인근 매장에서 에스프레소 머신과, 콜드브루 원액은 물론 바리스타들까지 원정을 나왔다.
“앞으로 해운대의 랜드마크가 될 Vast Eye! 이 남자가 없었다면 Vast Eye 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이 남자를 소개할 수 있어 영광이군요. 52 카페의 주주이자, 52 소프트의 대표인 김윤재 씨를 소개합니다.”
윤재가 고도윤에 이어 무대에 등장했다.
노출을 최대한 꺼려왔던 윤재가, 대중들 앞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Vast Eye 주변을 가득 매운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윤재를 반겼다.
1시간 가까이 오픈 세리머니가 진행됐고, 어느새 Vast Eye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됐다.
“52 Cafe와 함께 Vast Eye를 개장할 수 있게 돼 너무 영광입니다. 오늘 저는 52 Cafe의 주주이자, Vast Eye 공사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윤재의 말이 끝날 때 마다 좌중에서 “잘 생겼다!”, “멋있다!” 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무대 체질이어서 그런지 윤재는 여유가 넘쳐 보였다.
그의 시야에 혜진. 선희. 창진. 장식. 안수애를 포함한 친구들이 보였다.
그리고 52 Corp 관련자들도 한명씩 눈에 들어왔다.
“오늘 저는 3가지 뉴스만 고객님들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소식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이런 식으로 열거식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은 윤재의 전매특허.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8월 7일 월요일 52 Cafe 가 한국 커피업체 사상 최초로 코스닥에 등록하게 됐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진증권을 주간사로 선정한 52 Cafe의 코스닥 등록.
8월 1일부터 3일간 공모절차가 진행될 예정이었고, 희망가격은 주당 4만원이었다.
“축제의 장에서 개별 회사에 대한 홍보가 너무 길어서는 안 될 거라 생각합니다. 곧바로 두 번째 소식을 발표하겠습니다.”
윤재는 첫 번째 소식을 짧게 끊고 곧바로 두 번째 소식을 전했다.
“Vast Eye를 여름 휴가시즌과 광복절을 맞아 7일간 무료로 운영합니다. 52 Cafe 홈페이지를 통해 응모와 추첨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7일을 무료로 운영하면 52 Cafe 가 부담할 비용만 대략 20억 수준이 된다.
52 Cafe의 판촉비로 처리할 계획이었지만, 결코 적은 금액이라 할 수 없었다.
관람객들과 관광객들이 다시 한 번 환호했다.
“마지막 세 번째 소식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새 해는 저 물었고, 해운대 주변은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늘 이 자리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을 위해, 60분간 환상적인 공연을 해줄 세계적인 디바 ‘에밀리에 캠벨’과 친구들을 소개합니다.”
윤재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무대에 에밀리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등장했다.
Vast Eye 주변에 몰려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똑똑히 목격했다.
조명을 받으며 서서히 돌기 시작한 Vast Eye와 세계적인 팝 스타 여가수를.
오늘의 무대를 위해 LED 조명을 설치했기에, Vast Eye가 거대한 화염 바퀴처럼 빛을 내며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Vast Eye를 너머 바다 위에 설치한 무대 위로 등장한 에밀리 캠벨.
어림잡아도 200평이 넘는 무대에 동원된 댄서만 50여명.
에밀리의 노래에 맞춰 코러스를 담당하고 있는 펜타 시스터즈 누님들도 보였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에밀리는 자신의 히트 곡 퍼레이드를 펼쳤다.
무대 위의 에밀리는 완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말 그대로 관객을 휘어잡는 카리스마였고, 눈물을 쏙 빼는 호소력이었다.
안수애와 함께 Vast Eye 오픈 세리머니에 참석한 NBC 피디.
그는 안수애에게 얘길 걸으며 취재수첩에 글을 적어 나갔다.
“김윤재 사장이 자기 친구라고 했나?”
“뭐. 그런 사이라고 할 수 있죠.”
“엄청난 친구로군.”
“대단한 남자인 건 사실이에요.”
“1,000억짜리 대관람차를 설치하고.....”
그는 눈을 들어 다시 한 번 대관람차를 바라봤다.
조명을 받으며 은은하게 돌고 있는 Vast Eye가 그의 눈동자에 비쳤다.
“솔직히 놀랐네. 괜한 환경파괴라 생각했는데, 해운대에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그러게요. 저도 많이 놀랐습니다.”
“행사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 봐. 마치 예술 감독 같아. 상장 발표에, 무료 운영을 통해 Vast Eye를 제대로 홍보해 버렸어.”
“52 Cafe 홈페이지 서버가 버텨낼까 걱정될 지경입니다.”
“마지막에 에밀리에 캠벨이 등장할 줄이야... 대체 왜 바다위에 무대를 만들었나 했더니. 세기의 디바를 숨겨놨을 줄이야.... 내가 커피 회사를 운영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을 정도야.”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모르긴 몰라도 다른 커피 회사들이 오늘 기념식을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걸?”
“감독님?”
“응?”
“그쯤 적었으면 닥치고 무대나 즐기시죠?”
“하하하. 그럴까?”
관람객들은 물론이고, 초대받은 VIP와 행사 관계자들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준 무대와 오픈 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