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 요정
2005년 6월4일부터 현충일인 6일까지 연휴 3일을 맞아, 윤재는 워크샵을 마련했다.
오랜 파트너들과 윤재가 투자한 회사 관계자들, 그리고 52 소프트의 직원들 상당수가 참석했다.
대략 30명 정도가 2박 3일을 함께 하는 일정이었다.
52 소프트 직원들이 예약 등 워크샵을 준비했다.
"에이 요. 형님!"
"응. 창진아! 고생 많다."
초여름이라 후덥지근한 오후.
창진이 빠른 걸음으로 윤재에게 다가왔다.
"형님! 일정 준비해 주시고, 사람들 소개해 줘서 고마워요."
"하하하. 너 팀장진급한 선물이라 생각해!"
"선물? 연초에 이미 선물 사 줬잖아?"
창진은 2005년 1월 부로 대진증권 강동지점의 영업팀장이 됐다.
동기들보다 빠른 초고속 승진이었다.
윤재 덕에 압도적 실적을 냈기 때문이었다.
창진의 승진 선물로 윤재는 연초에 구찌 장지갑을 사준 바 있다.
"고마워 할 필요 없어. 네 덕에 오늘 오신분들이, 재테크로 돈도 벌 수 있고. 서로 상부상조 아니냐?"
윤재의 지인들은 창진을 통해, 자신의 투자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주변사람들의 재테크를 챙겨왔던 것이다.
창진이 고속 승진을 한 배경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형! 이번 일정의 동기가 있을 거 아냐?"
"그냥 옛날 친구들도 만나고, 투자사 관계자들끼리 서로 친분도 쌓고, 뭐 그런 목적이지."
"그럴 거면 그냥 제주도 펜션 잡아서 2박3일 보내면 되는 거 아냐? 왜 전국 8도를 돌면서 이 고생이냐고?"
그 때 윤재 옆으로 장식이 다가오며 말했다.
"창진이 너 새신랑 되니까, 하체 힘 길러주려고 이러는 거야. 그러니 잔말 말고 열심히 걸어. 말 안 들으면 형이 오리걸음 시킨다?"
"장식이형! 울 마누라 청상과부 만들지 말라고!"
창진이도 곧 있으면 기혼자가 될 예정이었다.
윤재는 그런 식으로 일행과 얘기를 나누며 산길을 올랐다.
30명의 일행들은 지금 강원도 영월군 덕구리 고원고택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 ◈ ◈
"와! 경치 미쳤다!"
해발 400m 지점에 위치한 고원고택.
한국 전통식 정원에서 남한강을 바라보며, 52 소프트 디자인팀 막내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상동산과 남한강이 모두 고원고택의 마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에요."
"저 기와 좀 봐! 500년은 됐을 것 같지 않아? 마루가 너무 예쁘다."
52카페 고도윤 사장의 와이프인 송진영 누나 등, 여자들의 호들갑 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만큼 고원고택의 뷰는 전통 한옥과 멋지게 어우러졌다.
일행들은 고택을 샅샅이 둘러보고, 상동산으로 이어진 산책길을 30분 정도 함께 걸었다.
그리고 나서 1층에 있는 갤러리에 다시 모였다.
"지금부터 52 소프트 워크샵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함께 하실 분들은 참석하셔도 좋고, 주변 둘러보고 싶으신 분들은 자유시간 가지세요. 2시간 뒤 저녁식사 합니다."
목청이 좋아 마이크도 필요 없는 윤재.
어디까지나 52 소프트의 워크샵이다.
하지만 30명 모두 갤러리에 남는 것을 택했다.
전날부터 이어진 피로가 누적 돼 있었던 것이다.
"허수정 팀장! 이곳 고원고택 하루 숙박비가 얼마인지, 일행들께 알려주시겠어요?"
윤재의 말에 허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4개동 7개의 객실을 빌리는데, 총 350만원을 썼습니다."
순간 갤러리에 있는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350만원? 세상에!"
"뭐야? 그럼 방 하나에 평균 70만원이라는 얘기야? 오마이갓!"
놀라는 게 당연했다.
고택은 강원도 영월에서도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해 교통이 아주 불편했다.
아직 주차장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아, 방문객의 불편을 초래했다.
"방 값에 놀라셨죠?"
"예. 예쁘긴 한데 생각보다 너무 비싸네요."
"미숙박 고객은 고택 관람하려면 1만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와야 합니다."
"와! 진짜요? 너무 야박하다."
다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어제 아침부터 부산의 욕쟁이 할매 국밥집, 순천의 하월당 과자점, 옥천의 어탕국수, 남양주의 돌다리 숨두부 집을 찍고, 오늘 고원고택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의 눈빛에 지난 2일의 빡쌘 일정이 스쳐 지나갔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긴 했지만, 동서남북을 오가는 고된 일정이었다.
"저희가 방문한 곳의 공통점이 뭘까요?"
"저요! 다 먹는 겁니다."
창진이의 씩씩한 답변에 사람들이 '와' 하고 웃었다.
"남창진 팀장님! 고원고택은 먹는 것 없잖아요?"
"그. 그런가?"
사람들은 오답이란 얘기에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어제 욕쟁이 할머니 집에 가서 욕 한바가지 먹고, 하월당과 어탕국수 가서는 줄 서서 기다리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 뿐인가요? 오늘 고원고택 오느라 산행까지 했죠."
"...."
사람들 머릿속에 이틀 동안 돈 쓰고, 고생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저희가 이틀 동안 방문한 곳의 공통점이 바로 그겁니다. 내 비싼 돈 내고 고생하면서도 어떻게든 찾아오는 곳이라는 거 에요."
듣고 보니 그랬다.
하월당의 카스테라는 한 개에 1,000원 정도 했고, 부산 국밥도 보통 국밥보다 더 비쌌다.
고원고택만 해도 1박에 70만원이니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사람들은 돈 값을 한다고 생각하면, 지갑을 기꺼이 연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2박 3일 동안 여행을 겸해 전국을 돌아다닌 이유가 바로 그 점이었다.
"52 소프트 직원들도, 저희가 방문한 곳들처럼 돈이 아깝지 않은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했으면 좋겠습니다."
29명의 참가자들은 윤재의 얘기를 곱씹었다.
파트너들과 투자회사들에게 주문하는 사항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조금은 놀라운 소식 하나 말씀드릴까요?"
이미 윤재가 이뤄낸 업적에 놀랄 만큼 놀란 사람들.
어지간한 일로 놀라기 힘들었다.
"이곳 고원고택에도 52카페가 입점합니다."
사람들이 놀라기는 놀랐다.
이 시골 촌구석에 교통도 불편한데, 누가 와서 커피를 먹을까 라는 의문 때문에 놀란 것이다.
하지만 윤재는 알고 있었다.
주차장이 완공되면 이 예쁜 고택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밀려올 것이라는 것을.
"매년 1회는 이번처럼 워크샵을 개최하겠습니다. 많이들 참석해 주십시오."
◈ ◈ ◈
산등성이에 위치해 여름에도 시원한 고택의 정원.
밥값을 따로 받는 고택의 한식 정찬으로 저녁식사가 진행됐다.
윤재는 자리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고 비즈니스를 협의했다.
"민기 형님! 형수님 건강하시죠?"
"응. 윤재 니 덕에 예전 건강을 되찾았다."
"하하하. 다행입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태화정밀의 김민기 사장.
최근 몇 가지 중요한 비즈니스가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콤팩트 특허는 끝났죠?"
"응. 잘 끝났다. 다음 주에 NC생활건강 구매 팀과 미팅하기로 했어. 크리스챤 디올과 입생로랑도 이달 안에 만나기로 했다."
"잘 됐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내가 한 일이 뭐 있니? 다 네 머릿속에서 나온 일이지."
김민기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손기술 좋은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태화정밀기계.
윤재와 인연이 맺은지 3년.
공장부지만 3배로 넓어졌고, 매출은 처음보다 10배, 순이익은 5배나 증가하는 폭풍성장을 거듭해 왔다.
그 뿐인가?
자신의 와이프와 딸의 기념일 등을 잊지 않고 챙기는 섬세함까지 갖춘 동생이었다.
게다가 어려울 때 다른 주주들이 가지고 있던 지분까지 인수해준 은인이었다.
"형님! 콤팩트는 매직홀 용기나 텀블러 보다 훨씬 매출이 클 겁니다. 게다가 프랑스 명품업체들도 저희 고객이 되니까, 회사 가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기회가 될 겁니다."
"진짜 생각만 해도 설레인다. 내가 크리스챤 디올과 입생로랑의 오케이 사인을 받을 줄이야. 이게 다 윤재 네 덕이다. 고맙다. 윤재!"
"하하하. 혹시 알아요? 샤넬이나 에르메스도 형님 앞에 줄서게 될지?"
최근 태화정밀기계는 여성용 파우더의 휴대성을 극대화한 콤팩트에 대한 특허를 등록했다.
그리고 작년에 사들인 부지에, 콤팩트 용기를 뽑아낼 수 있는, 금형공장을 완공한 상태였다.
김민기의 손을 거친 제품답게, 마감과 완성도가 굉장히 고급스러웠다.
"헛헛! 생각만 해도 취한다. 취해!"
김민기가 기분 좋게 소주잔을 털어 놓았다.
그의 인생 최고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트레이드 드레스 특허 진행하는 건 있잖아요. 보안 철저히 지켜 주시고, 반드시 기한 내 등록되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
"응. 알았다. 구종기 변리사가 참 잘해. 국제특허 경험도 풍부하다고 하니, 너무 걱정 말아라."
"네. 형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윤재는 김민기의 테이블을 떠나, 다음 자리로 이동했다.
현재 태화정밀기계가 준비하고 있는 디자인특허!
매직홀 용기나 콤팩트 케이스는 비교할 수 없는 수익을 안겨줄 특허였다.
◈ ◈ ◈
피자. 카페. 내일식품. 미소천사은행과 52 소프트까지.
각각의 테이블을 돌며 마신 소주만 족히 6~7병은 되는 것 같았다.
깊은 산속의 맑은 바람 탓인지, 아직까지는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
윤재는 마지막으로 52 Farm의 남재와 소프트의 개발팀 직원들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테이블 한 쪽에 김삼식이 앉아 있었다.
"운전하느라 고생했다. 한잔 받아라."
"예. 형님!"
이번 워크샵에 김삼식이 참석했고, 일행들의 버스를 운전하는 일을 담당했다.
전직 깡패치고 술이 약한지, 김삼식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네. 조폭출신이 술도 잘 못 마시고 말이야."
"제가 다 잘 하는데, 딱 하나 술을 못합니다."
김삼식은 남재 밑으로 들어가 1년 넘게 닭똥과 돼지 똥을 치우며 살았다.
눈에 살기가 완벽하게 빠져 있었다.
"형님! 제가 택도 없는 놈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깡패 갱생프로젝트로 택한 김삼식.
다행히 계획했던 대로 고쳐 쓸 수준은 돼 있었다.
"사실 저는 형님을 K-1이나 프라이드 같은, 격투기 선수로 데뷔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매니저 일 보구요."
"그래서 그 겨울에 삼고초려를 했던 거였니?"
"네. 부끄럽지만 그랬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때 킥복싱 선수로 활동 했거든요. 그런데 형님처럼 빠르고 강한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단언컨데 형님은 효도르랑 붙어도 이길 겁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Farm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52 소프트 직원들이 대화를 듣고 깜짝 놀랐다.
버스 기사가 깡패 출신이라는 얘기도, 자기네 사장인 윤재가 엄청나게 강자라는 얘기도 모두 놀랄만 한 얘기였다.
"1년 동안 김남재 사장님 밑에 있으면서 많이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형님은 격투기 선수 정도의 레벨을 이미 넘어선 사람이란 걸요. "제가 보기에 형님은 정말 위대한 사업가가 되실 겁니다."
"우리가 고딩도 아니고. 싸움 얘기는 그만하자. 내가 이번에 너를 부른 이유가 있어."
사람 고쳐 쓰기 쉽지 않다.
그런데 김삼식은 그걸 해냈다.
갱생이 가능한 재목인 것이다.
"우리 회사가 추진하고 있는 카페. 피자. 만두 등 모두 물류가 필요한 일들이다."
"물류요?"
"응. 배달도 물류사업에 속하지."
52 Corp의 미래에 배달과 물류사업은 필수적인 사업 아이템.
일단 52 Farm이 강세인 호남지역에서부터 물류업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빨간 펜 선생님이야. 아직 삼식이 네가 넘어야 할 숙제가 많다."
"각오 돼 있습니다."
"그래. 좋은 자세다. 일단 팀을 만들어라. 작은 성공을 이뤄내면, 너를 조금씩 크게 쓰마!"
"감사합니다. 형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자동화든 알고리즘이든 어쨌든 사람은 필요한 법.
52 소프트 초창기 해고자들처럼, 싹수가 없는 사람들은 처내야 한다.
그리고 삼식이처럼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들은, 과거를 묻지 않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회사의 모든 인력을 S급 인재로 채울 수는 없었다.
사원들도 필요하니까.
삼식이를 통해 보내고 싶은 신호가 그것이었다.
가능성을 입증하면, 52 Corp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