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릴리프
1억원의 검은 돈.
그리고 승진 후 O2푸드의 원하는 부서로 이직시켜 주겠다는 제안.
파격적인 제안을 제시했지만, O2 미래전략실은 실패했다.
이젠 중소기업 직원이 돼 버린, 내일식품 직원이 미래전략실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론에 제보까지 해 버린 이유는 뭘까?
윤재는 귀국 후 서영호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됐다.
"그 직원은 기존 O2푸드 저성과자 사원이었더군요."
"그래서 만두공장이 팔릴 때, O2로 복귀하지 못했던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복직을 희망할 때는 내치더니, 느닷없이 나타나 돈과 복직을 제시하니 더 자존심이 상했다고 하더군요."
필요 없으면 냉정하게 버리고, 필요할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도 기업의 생리인지 모른다.
"복직에 실패했고, 저희가 재정비 기간 휴직도 했잖습니까? 그때도 정상적으로 급여를 준 모습에 제일 놀랐다고 하더군요."
결국 세상은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윤재가 엄청난 손실을 감내해 가며, 재정비 기간에도 급여를 지급한 것이 이렇게 보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주주인 김사장님에 대한 인식도 좋게 작용했다고 하더군요."
"저를요? 서사장님이 아니구요?"
"네. 그 직원은 예전에 청주공장에 있다가, 익산으로 발령받았다고 합니다. 청주에 있을 때 라면 설명회를 하던 사장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얀국물 라면 꼬끼오 면의 출시를 앞두고, 청주공장을 제 집 드나들듯 찾아갔던 시절이 있었다.
노동조합원 대상 설명회에 참석했던 그 직원은, 당시 윤재의 열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게다가 귀신같은 솜씨로 수천억을 벌어들이고, 종국에는 O2로부터 만두공장까지 인수해 버렸으니.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서영호 사장이 경영을 잘 했다.
기존 익산 공장 직원의 입장에서 서영호는 듣보잡 중소기업 출신.
하지만 서영호는 사장이라는 티 내지 않고, 직원들을 존중했으며 격의없이 소통했다.
"저희가 7개월 동안 준비해 출시한, 새참 만두의 성공도 주요하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돈이 아깝지 않은 새참만두의 사이즈와 맛!
광고 하나 없이 오로지 입소문 만으로, 할인마트와 유통점의 냉장고를 채우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호재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NBC뉴스 보도이후 사건은 잠잠해 졌지만, 삐리리 푸두의 이상한 공작은 엉뚱한 곳에서 화제가 됐다.
바로 새참 만두를 사랑하는 네티즌을 통해서였다.
미래전략실이 가장 관가한 것이 바로 네티즌 수사대의 존재였다.
C.I.A와 모사드 다음으로 정보력이 좋다는 한국의 네티즌 수사대.
그들은 블러처리된 익산공장이, 원래 O2푸드 소속이란 걸 밝혀냈다.
'새사모'(새참 만두를 사랑하는 모임)과 '식도락', '밥사랑' 등의 인터넷 카페가 다시 뜨겁게 달궈졌다.
=> 삐리리 회사가 O2푸드라고 강하게 추정합니다.
└ 님! 그러다 고소미 먹어요.
└ 후훗. 그런가요? 그럼 최근 흰국물 라면을 출시한 회사로 정정합니다.
└ 님! 그거나 그거나 아네요?
=> 세상에! 얼마나 새참 만두가 맛있었으면, 그런 공작을 다 한 거죠?
└ 자기들이 팔아 놓고, 대박 나니까 배가 아팠던 게 아닐까요?
└ O2 푸드에서 벤댕이 젓갈 만들면 대박 날 듯. 하는 짓거리가 벤댕이
소갈머리니까.
└ 크크크. 웃고 갑니다.
=> 이렇게 된 것, 새참 만두를 국민만두로 키워 줍시다. 회원님들! 한 팩 살
때 주저하지 말고, 한 팩 더 담으세요.
└ 구매 후 인증사진 첨부 필수!
└ ㅍㅍㅍ. 인증사진 놀이를 시작합시다. 싸가지 바가지인 대기업에
본떼를 보여 줍시다.
=> 세상에 죽을 각오로 일하고 있는 기업에 더러운 공작질을 하다니! 저는
오늘부터 O2푸드의 어떤 식품도 구매하지 앟겠어요. O2 푸드!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를 심판한다.
└ 이거 구매 인증 놀이에 이어, O2 불매운동 놀이도 시작하는 건가요?
└ 하하하. 이분 세일러 문이시네.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자살까지 할 뻔 했던 서영호 사장의 서사.
거기에 재벌기업에 억압받는 중소기업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져, 파급력이 엄청나게 커져 버린 것이다.
새참 만두를 대량 구매해 인증사진을 올리는 놀이가 유행했고, 마트나 슈퍼에서 때 아닌 새참만두 구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O2 푸드와 그룹에 대한 불매운동도 놀이가 돼 버린 것이다.
◈ ◈ ◈
익산 공장 사장실에서 서영호와 윤재는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10원 한푼 들이지 않고, 엄청난 홍보효과를 보고 있군요. 오진탁 그 멍청한 놈에게 고맙다고 문자라도 보내야 겠습니다."
"정말! 오진탁 부사장이 이 일의 배후에 있을까요?"
"저는 그랬을 거라 확신합니다."
"다 좋은데 유통점에 저희 만두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할 지경이 됐습니다. 살다가 이런 경험을 다 하는군요."
충주의 만두소 공장. 익산의 새참 만두 1공장. 안동의 새참 만두 2공장까지. 모두 24시간 가동을 해야 할 정도로 주문이 밀려 들었다.
"채용을 더 하고 계시겠지만, 직원들이 힘들겠군요."
"네. 그래서 수당이나 특별 상여금 등 챙기고 있습니다만. 24시간 가동 체제가 계속되면, 결국 추가 충원을 해야 할 겁니다."
"서사장님 판단대로 하십시오. 저는 사장님 판단을 믿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서영호는 감개무량했다.
한강에 빠져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주고, 공장을 사준 것도 모자라, 기존 자신의 사업체보다 10배는 큰 사업체의 경영권까지 준 사람.
서사장에게 있어 윤재는 목숨바쳐 일 할 가치가 있는 주주였다.
"어디 오진탁이 혈압이나 좀 올려 줄까요?"
"예?"
"하하하.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입니다."
윤재는 핸드폰을 꺼내 오진탁에게 문자를 보냈다.
예의범절과 공손함이 뚝뚝 떨어지는 문자였다.
- 실장님! 감사합니다. 회사 다닐 때 월급주고 휴가도 보내주시더니, 회사를 그만뒀는데도 은혜를 베푸시는 군요. 덕분에 24시간 가동을 해도 부족할 정도로 만두가 잘 팔립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 ◈ ◈
내일식품의 새참만두의 약진은, O2 푸드와 그룹 미래전략실에는 대참사였다.
윤재와 내일식품은 가만히 있는데, 스스로 자살골을 넣었으니 누굴 탓할수도 없는 일.
윤재의 문자를 받은 오진탁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크악! 성수용 팀장! 그 인간 불러 와! 당장!"
대외협력팀장 성수용이 산발한 채로 실장 방으로 달려왔다.
"당신! 이 사태 어떻게 책임질 건가?"
"죄. 죄송합니다."
"죄송. 죄송. 이 씨발 인간아. 죄송하면 다야? 새참만두는 날개돋힌 듯이 팔려 나가고, 우리 식품류 들은 불매운동까지 벌어지고 있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성수용도 한 가정의 가장이자, 사람이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거리는 법.
나이 어린 오너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 회사에 붙어있을 수 없었다.
"사표쓰겠습니다."
"병신. 꼴에... 사표낼 때 내더라도, 이 사건 수습해. 당장! 미전실과 O2푸드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라도 해결하라고!"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고 나왔지만, 성수용은 그날부로 회사를 떠났다.
한 마디로 리더십의 부재였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위기가 닥치면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던가?
불매운동이라는 위기에 허둥대는 오진탁이 있다면,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강원영업부문을 책임지고 있는 장동석 상무였다.
"관내 모든 대리점과 유통업체에 사과공문을 발송하십시오. 이럴 때 일수록 거래처 사장님들께 잘 해야 합니다. 고압적인 자세나, 회사가 갑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소비자들과 거래처에 진심으로 대하면, 결국 고객들은 다시 저희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대리점들의 클레임. 반품요청 등으로 전국이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장동석이 이끄는 강원부문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90%가 넘는 달성율을 보였다.
2등 부문과 15%가 넘는 차이였고, 꼴지와는 25%가 넘는 압도적 차이였다.
모두 장동석과 직원들이 2년간 강원도를 누빈 덕이었다.
호남부문에서는 오석진팀장과 차명수가 버티고 있는 영업3팀이 빛났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던가?
윤재와 장동석이 바닥을 다져 놓은 효과에, 오석진의 리더십이 가미됐기 때문이었다.
"팀장님! 이러다 진짜 우리 회사 망하는 거 아네요?"
"명수과장. 우리 회사 역사가 60년이 넘었다. 쉽게 망하지 않아! 이럴 때 일수록 직원들이 더 힘을 내야지."
"바닥에서 우리 같은 소총수가 백날 힘내면 뭐합니까? 높은 놈들... 아니 오진탁 그 미친놈이 자꾸 대포를 아군에 쏴대니!"
"명수야! 너 제발 입조심 좀 해라."
3팀의 경우 거래처들의 클레임도 다른 지역에 비해 현저하게 낮았다.
모두 윤재와 장동석 그리고 장동석과 함께 한 용사들의 노고 덕분이었다.
반면 위기를 맞이해 바닥을 드러낸 사람들도 있었다.
"세상에 김윤재 대리가 우리 등에 칼을 꽂을 줄이야."
뭐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무능하고 타락한 사람들의 전형이었다.
신사업부문의 신재영 팀장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었다.
"신팀장님! 우리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시죠. 윤재대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새참 만두 공장에 공작질을 시킨 사람이 윤재대리에요?"
"그. 그건 아니지만, 불매운동은 윤재가 사주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점심을 먹으며 때 아닌 김윤재 책임론이 대두됐다.
신재영의 말도 안되는 트집에, 대거리를 하고 맞선 사람은 임나영 팀장이었다.
조용히 만두국만 먹고 있던 조영우가 얘기했다.
"우리 조용히 만두국이나 먹읍시다. 새참만두도 아닌 것 같은데, 만두국이 참 맛있네요."
오진탁이라는 무능한 리더.
거기에 알아서 기는 타락한 참모들의 콜라보가 빚어낸 대참사.
위기에 흔들리다 결국 무너져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O2 그룹을 휘감고 있었다.
◈ ◈ ◈
2005년 5월.
O2 푸드와 그룹사에 대한 불매운동이 놀이가 돼 버린지 벌써 3주일이 넘었다.
예전 오재준이라면 재빠르게 대응했을 법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진 탓에, 판단력이 상당히 흐려져 있었다.
한남동 오재준 회장의 집.
수심이 가득한 오재준 앞에, 건강미 넘치는 30대 중반의 아가씨가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오하루.
오재준의 큰 딸이자, 오진탁의 여동생.
무능한 오진탁과 오건탁의 최후의 대항마로 생각해둔 존재.
마침내 그녀가 전격 귀국한 것이다.
"임직원 이름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게재하자고 하더구나!"
오진탁의 미래전략실이 들고나온 해결방안이었다.
오하루가 고개를 냉정하게 흔들었다.
"소비자들의 비아냥을 사게 될 겁니다."
"비아냥?"
"예. 아버지. 잘못은 높은 사람들이 해놓고, 왜 임직원 명의로 사과를 하느냐는 비아냥이 뒤따를 겁니다."
실로 오진탁같은 찐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세판단이었다.
오재준의 표정이 제법 밝아졌다.
오진탁을 볼 때 마다, 죽음이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던 오재준.
큰 딸의 명석함에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아버지께서 직접 사과문을 올리시고, 회사 홈페이지에도 사과 영상을 올리십시오. 물론 아버지가 직접 사과하셔야 합니다."
불과 2년만에 오재준의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하나, 이 정도의 사리구별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방법이 최선이로구나."
"예. 아버지!"
오재준은 결국 대국민사과 방송과 대표이사 회장 명의의 사과문 게재를 결정했다.
만시지탄이긴 했으나, 안하는 것보다는 나은 결정이었다.
"앞으로 너는 어떻게 할 거냐?"
"O2 엔터테인먼트로 보내 주십시오."
"다행이구나. 네가 미래전략실로 갈까 걱정됐다. 푸드로 가는 건 어떠냐?"
"푸드는 구성원들 맨파워가 아주 높은 곳입니다. 역사와 전통은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니구요. 엔터로 가서 사업을 키우겠습니다. 제 전공이기도 하니까!"
"알았다."
"영국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곧 끝납니다. 3개월 정도만 시간 주시면, 마치고 완전히 귀국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거라."
오재준의 건강악화.
오진탁의 리더십 부재로 휘청대던, 그룹 수뇌부가 순식간에 안정을 찾았다.
무엇보다 오재준이 생기를 되찾은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하루야!"
"예. 아버지."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너무 늦게 돌아와 죄송합니다."
"쉬어라."
윤재의 입장에서 오하루의 등장은 반길수만은 없는 일.
오진탁이 무능하면 무능할수록, 윤재가 손쉽게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었으니까.
윤재는 아직 오하루의 등장을 모르고 있었다.
'영특하고 괜찮은 재목이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경영권에서 멀어진 사람.'
전생에서 윤재가 알고 있던 오하루에 대한 정보는 그정도였다.
하지만 전생보다 무려 15년 앞서, 오하루가 그룹의 경영의 일선에 등장했다.
일종의 구원투수인 셈.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윤재가 마주칠 사람이었고, 넘어서야 할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