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44화 (144/196)

금단 현상

O2 푸드의 친 윤재 List에 올라있던 사람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 하나 있었다.

2004년 10월 말 임원인사에서 오진탁이 미래전략실장에 유임된 것이다.

부사장으로 승진하긴 했으나, 그가 노리던 영업본부장이 될 수 없었다.

그가 친 윤재 List 인사들에게 피의 보복을 가할 것을 염려한, 오재준 회장이 끝까지 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0월 23일.

윤재는 강원도 용평리조트에서, 옛 동료들과 골프회동을 가졌다.

“분기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는데, 분기 한번은커녕 1년에 한번 보기도 힘 드네!”

“명수 형이 오라고 난리쳐서 오긴 했습니다만. 괜히 걱정 되네요.”

“뭐가?”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 알면, 오진탁이 또 블랙리스트니 뭐니 난리칠 거 아네요?”

“야! 오진탁 그 새끼 얘기는 꺼내지도 마라. 마른하늘에 벼락이라도 맞아 콱 뒈졌으면 좋겠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애사심이 있기 마련이다.

차명수도 회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얘기다.

과거 영업3팀의 역전의 용사들뿐만 아니라, O2 직원들 대부분은 오진탁의 함량미달을 걱정했다.

“관건은 이겁니다. 오진탁 체제로 가서 화끈하게 빨리 망할 것이냐. 아니면 오건탁 체제로 가면서 서서히 망할 것이냐!”

“오팀장님 말씀의 결론은 어떻게 되든 망한다는 거네요.”

웃프다는 이럴 때 쓰는 말 이리라!

3명의 O2 직원들은 골프를 치면서도, 어딘가 그늘이 져 있었다.

오재준은 서서히 건강과 총기를 잃어갔고, 오진탁은 깜이 안됐다.

임원 인사에서 오진탁의 뜻이 관철되지 않은 덕에, 한시적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서글픈 일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회장님 측근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더군.”

역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던 장동석이 입을 열었다.

“상무님! 뭐 들은 얘기 있으세요?”

“그런 얘기가 있어! 오하루 양을 귀국시키려고, 회장님 라인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 말이야.”

“오하루요?”

윤재가 플랜B를 본격 가동하고 있듯이, 오재준에게도 플랜B 라는 한방이 있었다.

그것은 오진탁과 오하루의 경쟁구도를 만들어, 오진탁을 업그레이드 시키겠다는 복안이었다.

다목적인 용도로 오하루 카드만큼 파워풀한 대안은 없을 것 같았다.

‘오하루는 만나본 적 없지만, 뛰어난 인재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 어차피 넘어야 할 허들인지도 모른다.’

전생에서도 회귀 이후에도 오하루의 존재는 미스테리였다.

그녀의 O2 복귀는 분명 윤재에게는 악재였다.

오진탁이 망쳐놓을수록 윤재의 복귀는 쉬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꼼수나 더티 플레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회귀 이후에도, ‘정공법’을 강조하던 장동석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상무님! 윤재야! 우리 머리 아픈 얘기 하지 말고, 기분도 꿀꿀한데 강원 랜드 한 번 갈래요?”

“에이. 그런데 뭐 하러 가요? 괜히 갔다가 잘못 빠지면, 신세 조집니다.”

“나도 윤재 의견에 동감이다. 명수 너 같은 스타일은, 한번 빠지면 미친 듯이 빠지는 스타일이잖아. 괜히 뉴스 나올 일 만들지 말고, 건전하게 보내자.”

“아니. 저희가 거기 가서 100만원을 쓸 겁니까? 1,000만원을 쓸 겁니까? 인당 20만원 리미트로 한 번 가시게요. 기분도 꿀꿀한데 경험삼아.... 어때요?”

차명수의 땡깡 때문에 4명은 결국 강원 랜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잭팟이 아니라, 뜻밖의 인물이었다.

◈          ◈          ◈

“딱 3시간만 해 보는 거다. 더 하자고 하는 사람은, 노름장이로 간주해 다시 얼굴 보는 일 없기로 하자.”

장동석 상무의 엄포로 시작된 강원 랜드 경험.

카지노에서 뭘 하는지만 봐도 그 사람의 스타일이 나온다.

장동석은 블랙잭을. 오석진과 차명수는 룰렛을 했다.

윤재가 선택한 종목은 포춘 휠이었다.

‘2배당의 확률은 44.4%! 10번 중에 4번은 2배당이 나온다는 거다.’

윤재가 포춘 휠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룰이 단순하고, 매번 칩을 걸지 않아도 됐다.

블랙잭이나 룰렛처럼 주변사람이나 딜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2002년도 월드컵 당시 황성호가 꺼내든 필승카드와 비슷했다.

본질은 확률 싸움.

2배당이 4번 연속 안 나올 때 마다, 베팅금액을 2배씩 올린다.

5천원. 1만원. 2만원. 4만원. 8만원!

그렇게 하면 잭팟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크게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인당 게임시간 3시간.

3시간 동안 윤재는 포춘 휠에 딱 10번 베팅했다.

20만원 시드머니가 강원 랜드를 나올 때는 24만원이 돼 있었다.

“석진이형과 저는 오링됐어요. 돈 더 찾고 싶었는데, 상무님 불호령 때문에 참았습니다.”

“명수 대리! 너는 그 유혹을 참은 것 자체가 승리한 거야. 20만원 내고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하자.”

“네. 상무님!”

“그리고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말자. 잘못 빠지면 인생 종칠 수 있어.”

“그나저나 상무님과 윤재는 역시 달라요. 2명만 돈 땄잖아요.”

장동석과 윤재의 수익률은 비슷했다.

윤재가 24만원. 장동석이 23만 5천원을 만들어 나온 것이다.

“오팀장님이야 알아서 잘 하실 테고, 명수대리 너는 윤재를 보면서 좀 배워야 해.”

“뭘요?”

“윤재 봐라. 준 재벌이 된 걸로 알려져 있잖아. 그런데도 딱 자기 룰 지켜서 게임을 하잖니. 윤재한테 돈 20만원이 대수겠니? 4만원 따서 윤재가 뭐 하겠어? 하지만 자신의 룰을 지키며 플레이 했잖아. 그게 어려운 거야!”

“괜히 부끄럽네요.”

차명수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남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지 안다는 것 자체가, 차명수가 많이 성장했음을 보여줬다.

윤재가 뒤통수를 긁으며 끼어 들었다.

“상무님! 명수 형! 4만원 딴 걸로 일단 저녁부터 좀 드시죠. 4만원 범위에서 제가 쏘겠습니다. 하하하.”

“야! 너 돈 많이 벌었다며? 강원도 한우라도 좀 먹어보자! 응?”

“그럼 안 되는데... 제게는 다 룰이 있는데....”

“뭐야?”

“하하하. 농담입니다. 고기 드시러 가요. 제가 살게요.”

4명의 단짝은 그렇게 강원 랜드 근처에 있는 고기 집을 찾았다.

특수부위를 포함해 넉넉하게 6인분을 먼저 시켰다.

그리고 소주잔을 돌리며 고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윤재 등 뒤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들의 얘기가 들려왔다.

“야! 우리가 어제 오늘 날린 돈이 300만원이다. 300만원! 그런데 밥 값 아끼자고 비빔밥 하나 시켜서, 둘이서 나눠 먹어야 하니?”

“야! 이 멍청아. 아껴야 잘 사는 것 몰라. 비빔밥 한 그릇에 만원이야. 만원이면 베팅 2번 할 돈이란 말이야.”

“그래? 그럼 오늘 밤은 잠도 아예 노숙하자. 아직 얼어 죽을 날씨도 아닌데. 방값 아끼면, 포춘 휠 같은 게임은 하루 내내 즐길 수 있어!”

“그런 얘기는 하지도 마라. 포춘 휠은 그냥 확률게임 아냐? 실력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실력이 중요한 룰렛이나 블랙잭이 내 스타일이지.”

지금 이 개소리를 하는 사나이들.

강원 랜드 주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카지노 폐인들이었다.

카지노에서 수 백 만원은 물 쓰듯 쓰고, 밥값은 몇 푼 절약하기 위해 애쓰는 그런 사람들.

“그런데 저 뒤통수 왠지 낯익지 않아요?”

차명수 대리의 얘기를 듣고, 뒤돌아보니 진짜 낯익은 뒤통수가 보였다.

“저거 황성호 아냐? 맞지? 황성호!”

윤재 일행에게 뒤통수만 보이는 남자는 황성호가 분명했다.

비빔밥 한 그릇을 2명이서 나눠먹고, 방값을 아껴 카지노를 즐긴다는 바로 그 카지노 폐인이었다.

2004년 4월의 17대 총선에서 황태준은 공천 단계에서 탈락했다.

원내대표에 도전해 지도부의 미움을 샀던 일이 가장 큰 요인.

결정적으로 아들 황성호가 저지른 수많은 악행이, 황태준의 뒷다리를 잡았다.

도박장이 아들 때문에 돈 날리고, 공천도 못 받고.

황태준은 황성호를 원수 대하듯이 했다.

황성호가 2002년 월드컵 도박과 주식으로 수억 원을 날린 지 벌써 2년.

그 사이 황성호는 도박 폐인이 되고 말았다.

여태까지 황태준 몰래 갖다 날린 돈만 15억이 넘었다.

아버지 황태준도 2002년 이후 불행한 삶을 살았다.

부동산 재벌. 3선 국회의원의 권력.

권력을 잃어버린 뒤 그는 창당을 하겠다느니, 복당해 새로 시작하겠다느니 하면서 여기저기 돈만 뿌려대고 있었다.

아들놈은 도박에 중독됐고, 아버지는 권력에 중독돼 있었던 것이다.

재산이 조 단위라는 황태준 일가의 삶이, 왠지 행복할 것만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가서 불러 올까요?”

“놔둬라. 그냥 모른 척 하자. 행색을 보아하니, 누구에게 자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알겠습니다. 지가 먼저 아는 척 하면 모를까, 그냥 놔두겠습니다.”

윤재는 차명수와 장동석의 얘기를 들으며,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윤재의 얘기에 고기집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윤재가 자리로 돌아왔고, 고기집 사장님이 비빔밥 한 그릇을 준비해 황성호의 테이블에 가져다 줬다.

“이게 뭡니까?”

황성호가 반가운 기색으로 물었다.

“저 쪽 테이블에 계신 손님이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황성호가 뒤를 돌아봤다.

그 자리에 있던 윤재가 황성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황성호의 시야에 장동석. 오석진. 차명수. 김윤재가 순서대로 들어왔다.

갑자기 황성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식당을 뛰쳐나갔다.

수염은 덥수룩했고, 머리는 산발이 돼 있었으며 행색은 초라했다.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야! 어디 가! 밥은 먹고 가야지?”

“너나 많이 처먹어!”

황성호가 자신의 도박 친구에게 한 얘기였다.

황성호는 윤재 일행에게 두 번 다시 시선을 주지 않고 식당을 뛰쳐나갔다.

“황성호 저 병신 새끼. 뭐래? 비빔밥 하나에 만원인데... 배가 불렀구만! 지가 아직도 재벌 집 아들인줄 아나?”

도박 친구라는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황성호의 친구는 혼자서 비빔밥 두 그릇을 뚝닥 해치웠다.

“윤재야. 왜 그랬니? 짓궂게. 괜히 황성호 밥만 못 먹었잖아.”

“상무님은 속도 좋네요. 황성호 그런 싸이코 새끼 걱정도 해 주시고!”

차명수는 황성호가 사라진 문을 보며 이죽거렸다.

“명수 대리. 너무 그러지 마. 쟤도 생각해 보면 인생이 불쌍하잖아. 아버지라는 무게를 넘지 못하고 짓눌려 버린 삶.”

“몰라요. 나는 저 건방진 새끼. 결국 망할 줄 알았어요.”

장동석이 신선 같은 사람이라면, 차명수는 역시 현실적인 남자였다.

“와! 그러고 보니 우리 명수가 대단하네. 명수도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잖아요. 그런데 부모님 명성에 욕되지 않게 살고 있으니까!”

“석진이 형님은 잘 가시다가 또 나를 갈구네.”

“야! 이게 갈군 거냐? 칭찬을 해줘도 이렇게 반응하는 거야?”

“참 나. 오팀장님은 저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 겁니까?”

“흐흐흐. 명수는 역시 갈궈야 제 맛이라니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영업3팀의 분위기였다.

윤재는 장동석과 멤버들을 보며 생각했다.

‘내게 금단현상을 주는 것은 뭘까?’

황태준의 금단현상은 권력!

황성호의 금단현상은 도박이었다.

‘전생을 포함한 과거의 동료들. 그리고 현재의 동료들과 괜찮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일념! 그것이 나의 강박이고,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원천이다.’

수천억 부자가 된 지금!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윤재는 매일 아침 6시 부터 새벽 1시까지 미친 듯이 일했다.

52 소프트의 결과물을 점검하고, 세계시장의 투자 동향을 분석하고, 직원들의 성장을 고민하는 이유도 모두 그것 때문이었다.

돌아가야 할 회사가 있는 한, 윤재의 꿈은 계속 될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