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심플.
사람들의 생각은 대부분 비슷하다.
주가가 마구 오르면, 혹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서둘러 팔아 버린다.
역으로 주가가 연일 폭락하면, 기회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더 떨어질 걸 두려워한다.
그런 의미에서 남창진도 론스타의 데이비드 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형! 오성전자 자사주 매입규모만 1조가 넘어. 역대 최고야!”
“그래서?”
“이번 달 들어 코스피는 5% 넘게 내렸다고. 그런데 풋 옵션을 다시 사겠다고? 자칫 쪽박 찰까 두렵다. 형!”
“창진아. 불신지옥! 윤재 천국! 얘기했지?”
“하지만....”
“몇 번 더 얘기해야 하니? 믿고! 버티자! 경거망동 하지 말고, 태산처럼 버티면 얼마 안가 대박 터진다.”
“나는 요즘 등락폭 보고 있으면 살 떨리던데. 형은 진짜 강심장이야! 사자의 심장. 전사의 심장을 가졌어!”
전생에서 윤재는 선물옵션은 꿈도 꿔보지 못했다.
하지만, 회귀 후 파생상품거래의 경험과 감각을 쌓았다.
거기에 전생에서 뒷북치며 후회한 강력한 기억을 결합시킨다면?
확실한 돈벌이가 탄생하는 것이다.
5월초에 윤재는 이미 풋100 단타에 500억을 박았다.
창진의 우려 속에 이뤄진 단 두 번의 사자와 팔자.
그 2번의 거래로 영업일 기준 5일 만에, 500억을 3,000억으로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미국 금리인상, 원유가 폭등, 중국 긴축이라는 트리플 악재가, 오성전자의 자사주 매입이라는 초대형 호재를 이긴 것이다.
2004년 5월 11일 하루만에, 풋100 프리미엄은 장중 변동 폭만 7배가 넘었다.
연속되는 폭락에 반등을 확신하고, 상승에 베팅한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반대로 윤재의 편에 선 사람들은 불과 5~6일 만에, 상상하기 어려운 수익률을 기록하게 됐다.
이론적으로는 빅숏을 맞췄다면 50배까지도 가능한 수익.
하지만 이미 수백억을 굴리는 슈퍼개미 윤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50배까지는 아니었지만, 같은 기간 윤재는 수익금만 2,500억을 벌어들였다.
여의도 증권가가 요동칠 정도의 수익금이었다.
“이번 폭락장에 풋 옵션으로 2,500억을 튀긴 투자자가 있다고 합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완전 대박 맞았군! 대진증권 창구를 이용했다던데? 대체 누구야?”
“씨바. 누군지는 몰라도 그 친구가 우리보다 낫네!”
“이러다가 증권사 하나 차리겠다고 나오는 거 아냐? 전직 증권사 팀장 출신이라던데? 누구 아는 사람 없어?”
여의도 증권가에는 떠도는 윤재에 대한 소문들이었다.
2004년 5월 트리플 악재 속에 펼쳐진 폭락장.
외국인과 기관투자자.
그리고 개인까지 통틀어, 파생상품투자로 가장 많은 돈을 번 사람이 슈퍼개미 김윤재였다.
◈ ◈ ◈
론스타의 한국 책임자 데이비드 리가, 분당에 있는 윤재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누가 어디로 찾아오느냐는 갑을관계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적어도 데이비드 리는 윤재 앞에 서면 확실한 을이었다.
윤재가 5월달 들어 단 6영업일 만에, 600%의 수익률과 2,500억의 차익을 실현했다는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찾아온 것이다.
전날 윤재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초대박을 터뜨린 사실을 데이비드에게 알려줬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5월 달 풋 옵션에서 제법 수익을 낼 거라고.”
윤재의 표정. 몸짓. 목소리톤은 너무 침착했다.
2,500억이 아니라 2,500만원 번 사람들보다 더 여유있어 보였다.
“하기야 론스타에게 이정도 코 묻은 돈은 아웃 오브 안중일 테니까!”
“미친! 6영업일 만에 600%를 기록했고, 수익금이 2,500억이 넘는데 코 묻은 돈이라고?”
“그러게 제가 관심 좀 가지라고 말했잖아요. 회사 차원에서 안 할 거면,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시라니까.”
“....”
데이비드 리는 왠지 부글거렸다.
부러움. 질투. 시기. 후회. 짜증 등의 복잡다단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졌다.
“한두 번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네가 무슨 투자의 신이야?”
“투자의 신이라뇨? 그랬으면 좋겠네요.”
윤재가 애써 표정관리를 할수록, 데이비드의 얼굴을 갈수록 무쌍하게 변했다.
‘퍽! 10억만 태웠어도, 60억 아냐? 저 친구 얘길 더 신중하게 들었어야 해.’
연간 수익률과 프로젝트 별 수익률이 중요한 사모펀드.
6영업일 만에 600%면, 연 수익률로 따지면 천문학적 수익률이 나온다.
생각할수록 더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제 주거래 투자사는 대진증권입니다. 거기에 있는 제 딜러에게 항상 해주는 말이 있어요.”
“그게 뭐지?”
“불신 지옥! 윤재 천국! 그 친구는 이번에 저를 믿은 덕에, 수억 벌었습니다. 걔한테 투자한 사람들도 수십 퍼센트에서 몇 배까지 먹었구요.”
“끄응.”
“대진증권 고객 중에 이번에 2,000만원으로 4억을 번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20배를 튀긴 거죠.”
“끄응.”
“그 고객은 상반기 투자 접고, 유럽으로 한 달간 여행 떠났답니다.”
“....”
데이비드 리는 여전히 똥 마려운 표정이었다.
벌써 2연타였다.
외국환은행을 놓쳤고, 파생상품 대박을 넋 놓고 지켜만 봤다.
돈이란 게 그런 것이다.
론스타와 데이비드는 극동건설. 스타타워 매각으로 조 단위 성과를 냈지만, 더 많은 돈을 갈망했다.
“하기야! 4억도 유럽 한 달 여행도, 데이비드 앞에서면 세발의 피일뿐이지만.”
끓는 기운을 낮추기 위해, 짧은 한숨을 내뱉은 데이비드.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물었다.
“코스피가 폭락할 거란 걸, 어떻게 예측한 거야?”
“무엇보다 운빨이 좋았죠!”
“운빨에 500억을 태워?”
“얼굴빨. 몸빨. 실력빨 보다 훨씬 무서운 게 운빨입니다.”
론스타의 애를 태워가면서 살살 유인하는 전략.
야금야금 키워서 한꺼번에 잡아먹겠다는 계획.
윤재는 시간을 두고 론스타와 데이비드를 요리할 생각이었다.
“작년 카드사태로 폭락한 주가가 전고점까지 왔습니다. 트리플 악재는 단기급등에 따른 차익실현 욕구에 불을 지른 거구요.”
지난 뒤에 돌아보면 모든 분석은 맞는 법.
거기에 기막힌 타이밍에, 과감한 투자로 윤재는 떼돈을 벌었다.
데이비드 리가 믿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폭락은 일시적입니다.”
“일시적?”
“저는 중기 시그널이 느껴져요. 앞으로 최소 3년 동안, 한국과 중국 등 신흥국 시장은 꾸준히 오를 겁니다. 지수 상품. 개별 종목. ETF. 신흥국 펀드. 뭐에 투자하더라도 돈이 될 거에요.”
“?”
“뭐 무식한 풋내기의 예측이니까, 믿거나 말거나!”
데이비드 리에게 할당된 시간을 다 사용했다.
미리 주문한 대로, 이세영이 사장실 내선전화를 호출했다.
류중정 전무의 계약직 비서였던 이세영.
백수로 지내던 이세영은, 52 소프트에서 팀원 없는 비서팀장을 맡고 있었다.
“데이비드. 미안해요. 회의 시간 때문에..... 다음에 다시 만나요.”
“하하. 내가 미안하지. 바쁜데 시간 내 줘서 고맙네.”
사장실을 나가는 데이비드 리의 뒤통수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쯤 똥줄이 탈거다. 너는 그렇게 조금씩 수렁에 발을 담그게 될 거야!’
◈ ◈ ◈
날이 갈수록 가치가 높아지고 있는 외국환은행 지분 4%.
은행 지분을 빼더라도, 윤재의 재산은 이미 억만장자 급이었다.
수익 실현하지 않고 보유중인 원유상품 ETF.
5월초 풋 옵션으로 벌어들인 수익.
거기에 현금으로 갖고 있던 금액까지 더하면, 4천억 가까운 현금성 자산을 갖게 됐다.
나주와 충남 연기군과 평택에 갖고 있는 부동산.
그리고 52 Cafe와 52 Farm 의 지분가치에 외국환은행의 지분가치를 더하면, 1조원 자산가도 더 이상 꿈은 아니었다.
52 소프트 사내에 윤재가 잭팟을 터뜨렸다는 소문이 좍 퍼져 있었다.
매주 한번 윤재는 팀별 개발자 회의에 직접 참가했다.
“사장님! 이번에도 잭팟 터뜨렸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사장님! 혼자만 하지 마시고, 직원들에게도 소스 좀 주세요!”
나이의 많고 적음.
성별의 차이 등을 떠나 고용자와 피고용자가 아니라, 동네 선후배나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처럼 격의 없는 회의였다.
“대진증권 남창진 대리라고 아주 유능한 증권맨이 있습니다. 저도 그 친구 덕 보고 있는 겁니다. 명함 드릴 테니, 시간 내서 찾아가 보시면 어떨까 싶네요.”
“정말요?”
30살 젊은 나이에 엄청난 재산을 모은 윤재였다.
그가 추천하는 증권맨이라면 묻지도 따질 필요도 없었다.
직원들 돈 벌어서 좋고, 창진이 돈 벌어서 좋은 일.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고 인 것이다.
“대신 너무 돈 많이 벌지 마요. 돈 벌었다고 회사 그만두면, 제가 머리 아파지니까!”
“사장님! 남창진씨 소개시켜준 것 후회하게 될 겁니다. 10억 벌어서 건물주 되면 회사 그만둘 테니까!”
“하하하. 제가 괜한 말을 했나요? .... 농담입니다. 저는 우리 직원들이 창업도 하시고, 돈도 많이 벌었으면 좋겠습니다.”
젊고 유능한 억만장자 사장.
명확한 비전과 성공 가능성이 보이는 프로젝트.
가족 같은 사내 분위기.
그래서인지 최근 52 소프트 사무실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날마다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 할 때는 누구보다 몰입하는 사람이 윤재였다.
웃으면서 뼈 때리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능력이 있었다.
얼빠진 놈처럼 웃다가, 쉽게 정색하는 윤재의 표정관리에 다들 긴장하기 일쑤였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2가지가 중요합니다. 미치도록 심플! 미친듯한 속도!”
“이보다 더 심플하게 가자 구요?”
“네. 원두의 종류. 커피 이야기. 마일리지 카드. 이런 것 다 불필요한 겁니다.”
“사장님! 커피 회사 홈페이지에 원두나 로스팅 얘기 빠지면 뭐가 남습니까?”
“클라이언트의 주문 사항입니다. 심플하고, 빠른 홈페이지. 고객 요구사항을 최우선으로 생각합시다. 사실 52 카페 홈페이지 찾는 사람 중에, 이디오피아나 컬럼비아, 인도, 브라질 등에 관심 있는 사람은 10%도 안 될 겁니다.”
“....”
“그보다 빠른 로딩. 직관적인 정보전달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군더더기가 없어야 해요.”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사장 인사말. 회사 연혁. 이런 것 고객들은 궁금하지 않아요. 지금보다 50%는 들어내야 합니다.”
“오십 프로요?”
“하하하. 걱정 말고 날리세요. 여기 계신 5명께서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십시오. 뭘 날려야 할지. 1~2층 매장에 자주 가셔서 커피도 마셔 보고, 소비자의 입장에서 고민해 보세요. 그러면 날려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일 겁니다.”
“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
“그리고 모든 스트럭처나 레이어를 영어로 하라고 했는데, 아직 한글 베이스에요. 다들 영어실력 되니까 뽑았는데, 한글 기반 사고 버려야 합니다. 눈앞의 52 Cafe만 봐서는 안 됩니다. 세계시장 경쟁력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화기애해한 분위기에서 폭풍 잔소리로 간담회가 끝났다.
미치도록 심플. 미친듯한 속도!
윤재는 3개 팀으로 나뉘어 일하고 있는 개발팀과 만날 때마다 2가지 원칙을 강조했다.
심지어 회사 미션이 [ 우리는 미쳤다! 미친 제품을 만드니까! ] 였다.
외국환 은행용 모바일 뱅킹 팀.
MSN과 메이트온이 양분하고 있는 메신저 시장 진출까지.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한 이들에게 강조하는 원칙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치도록 심플. 미친듯한 속도.
그리고 “쟤들 미친 거 아냐?” 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퀄리티를 갖춰라 였다.
◈ ◈ ◈
윤재의 소프트웨어 회사 직원들이, 52 Cafe와 Farm, 그리고 미소천사은행의 홈페이지 구축을 끝내갈 즈음 윤재는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5월 마지막 주에는 귀국할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IT 서비스팀은 홈페이지 구축 마무리해 주세요. 모바일 뱅킹 팀과 메신저 팀은 프로토타입 나와 있어야 합니다.”
세 명의 개발팀 팀장들에게 전한 당부였다.
미국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기 까지 남은 기한은 3주.
52 소프트가 바빠졌다.
“야! 사장님이 미국 놀러가는 것 같니? 우리랑은 다른 사람이야. 날마다 웃는 것 같아도, 일 처리는 어영부영하는 꼴 안 봐주는 사람이라고.”
“출퇴근 걱정 말고 알아서 일하라. 이것처럼 무서운 말이 어디 있겠어?”
“그러네!”
“집에는 다 갔구나!”
“지금 그게 문제냐? 미치도록 심플하고, 미친듯한 속도를 내지 못하면, 우리가 미친듯이 갈굼 당한다는 게 문제지?”
“사장님! 조근조근 뼈 때리는 것 봤지?”
“후덜덜.”
“그런데 사장님은 O2 푸드 다녔다던데, 어떻게 IT 비즈니스에 조예가 깊지? 전산 팀에서 근무했나?”
“아냐. 영업하고 신규개발 업무 하셨대. 그런데 회사 다닐 때 오피스 스페셜리스였고, 책도 내셨대. 직원들 교육도 시킬 정도였다더라.”
“정말?”
“응. 코딩도 초보적인 수준은 가능하다던데.”
“어쩐지.”
기대 반 걱정 반.
윤재가 자리를 비우고 출장길에 오르자, 52 소프트에는 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한편 윤재는 LA행 비행기에서 생각했다.
최고의 대우에는 최상의 퍼포먼스가 따라야 하는 법.
어느새 30 정도까지 늘어나 있는 직원들.
급여만 연간 15억이 필요했다.
그리고 갈수록 고정비 부담은 늘어날 것이었다.
O2와 달리 52 소프트는 윤재의 회사.
‘프리 라이더들이 가져갈 것은 진정한 자유 밖에 없어.’
어영부영 월급만 축내는 사람들은, 해고를 통한 자유가 기다리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태된 사람들이 평생 누리지 못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윤재가 52 소프트에 던져놓고 온 미션을 생각하고 있는데, 비행기 옆 자리에 앉아 있던 혜진이 물었다.
“그런데 오빠! 이태리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미국에 또 가는 거야? 나야 오빠랑 함께 다니니까 좋긴 한데....”
“혜진아! 걱정 마라. 세상은 넓고 돈벌이 천지다고 했잖아.”
“걱정하는 건 아닌데.”
“미국 가서 현질 좀 하고 올 생각이야. 미친 듯이 현질!”
“현질?”
“응.”
이번 출장은 미소천사 은행과 미소 엔젤 투자를 위한 출국이었다.
개발과 인큐베이팅은 52 소프트에서.
엔젤투자는 미소 엔젤 투자의 몫으로 진행했다.
미국 IT의 양대 산맥인 시애틀과 실리콘 밸리.
윤재는 자신의 현질을 기다리고 있는 스타트업에, 현질이 무엇인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미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