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36화 (136/196)

설계자

“씨바. 노인네가 벌써 노망났나?”

“실장님! 아버지께 말버릇이 그게 뭐에요?”

오진탁이 노가은 앞에서 거친 언사를 내뱉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 어머님 생일에 오진탁과 오건탁을 불렀을 때였다.

“건탁이는 나가 보고, 진탁이는 잠시 남아 보거라.”

둘째 아들 건탁이를 물리고 나서, 오재준 회장이 한 얘기가 복종하려던 오진탁을 격동시켜 버렸다.

후계 구도가 정립될 때 까지 말 잘 듣는 아들이 돼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혹시라도 김윤재 그 녀석에게 복수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아.”

“예?”

“지고는 못 사는 네 성정을 생각해 하는 얘기다. 공연한 짓 하다가, 회사 이미지에 먹칠하지 말고, 김윤재 그 녀석은 아예 잊어버려. 나도 이미 잊었다.”

“....”

“들려오는 정보에 의하면 보통 놈이 아니라고 한다.”

너무 화가나 오진탁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영감이 내 앞에서, 그 찢어죽일 놈을 두둔하는 거야?’

오진탁은 어금니를 씹어가며 분노를 참았다.

“왜 대답이 없어?”

“아하하. 복수라니요? 아버지! 제가 복수할 일이 뭐 있습니까? 저는 김윤재가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

“앞으로는 아버지 후계자가 돼, 저희 O2 그룹을 재계 10위 안에 진입시키는데 매진할 생각입니다.”

말은 그럴싸했지만 오재준과 오진탁 모두 불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

‘자랄 때는 하루 고것만 예뻐하더니, 회사를 물려주는 것도 아니고! 안 물려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김윤재 같은 듣보잡 새끼를..... 아오! 씨발.’

잘 해야 하는 일에 몰입하지 않고, 안 해도 될 일에 몰입하는 사람을 보통 삽질 잘 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진탁은 공구리 대마왕 정도 되는 인물이었다.

◈          ◈          ◈

2004년 4월이 가기 전에 52 소프트는 15명의 개발인력을 채용했다.

윤재는 15명의 신규 개발자들과 함께하는 간담회 자리를 마련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어머님께서 정말 감동받으셨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귀한 아들을 회사에 보내 주셨으니, 저희가 감사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죠.”

15명의 개발자들의 집에는 꽃바구니와 와인세트가 배달됐다.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52 소프트 대표 김윤재입니다. OOO씨를 저희 회사에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OOO씨와 함께 52 소프트를 최고의 회사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댁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꽃바구니에는 윤재가 손 글씨로 작성한 감사장이 동봉돼 있었다.

“여러분들께서 개발업무와 별개로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사장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좋다고 했던가?

자기 자신도 좋지만,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에게 잘 해주면 더 좋아하는 법.

꽃다발 선물에 간담회 분위기가 아주 부드러웠다.

방긋 웃고 있는 사람들에게 윤재가 추가적인 당근을 제시했다.

“소프트웨어 전문가를 소개해 주십시오. 회사에 정식으로 채용되면, 소개해 주신 분께도 혜택이 있습니다.”

혜택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단어다.

“소개로 채용된 직원의 1년 치 연봉 15%를, 포상금으로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요? 사장님?”

15명 모두 파격적인 제안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여기 계신 분들 중 누가 마당발인지 한번 지켜보는 재미도 있겠죠? 10명 소개하시면 포상금만 4,500만원입니다.”

“우하하. 정말 그렇네요. 사장님! 리미트는 없는 거죠?”

“호상씨? 왜요? 친구들이 많나 보죠? 100명이든 1,000명이든 입사만 시키세요. 무제한으로 포상금 지급하겠습니다.”

“와아!”

52 소프트라는 신생 기업에 반신반의했던 개발자들.

그들 전원이 태세 전환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2 카페와 52 Farm의 대주주. 그리고 외국환 은행 개인 최대 주주!

이 정도의 소문이면 직원들을 뻑 가게 만드는데 충분했던 것이다.

15명의 개발자들은 자가발전을 통해, 52 소프트 사장 윤재와 회사에 대한 애사심을 만들어 갔다.

“우리 고객사인 52 Cafe와, 사장님께서 론칭 할 피자회사 홈페이지 개선작업이랑, 주문 시스템 만들면 된다고 하던데?”

“기존 사업 지원과 신사업으로 구분된다더라. 신사업으로는 우선 메신저 서비스를 시작하실 생각이라고 하던 걸?”

“맞아. IT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들이 아니라면, 메신저나 화상회의 시스템이 없을 테니까.”

“그 얘기 들었어? 사장님이 외국환은행 4% 주주에, 차태영 CEO와 막역한 사이래. 외국환은행용 핸드폰 뱅킹도, 우리 회사가 따낼 거라던데?”

“그래 바로 그거야. 그래서 사장님께서 개발자 확보에 열을 올리고 계신다고 들었어.”

52 소프트는 아직까지는 매출이 10원도 없는 신생회사.

비전과 해야 할 일의 윤곽이 드러나자, 다들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최동진 인사실장님 소문 들었지? 오성물산에서 HR 팀장 하셨대. 복리후생 설계와 채용이 주특기라고 하시던데?”

“응. 오성물산 근무하는 선배한테 들었는데, 합리적이고 일 잘 하신대.”

“맞아. 우리 회사 급여와 복리후생을, 국내 최고수준으로 설계하는 작업을 하신다더라.”

연봉 3,000만원.

고과에 따라 최대 연봉의 20%에 달하는 금액을, 주식으로 받을 수 있었다.

이것만 해도 대기업 개발자에 준하는 조건!

그런데 복리후생을 최고 수준으로 설계하고 있다니!

말 그대로 다들 일 할 맛이 나는 직장이라 생각했다.

◈          ◈          ◈

2시간 정도 진행된 사장과의 대화를 화기애해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했다.

간담회를 끝내고 윤재는 다른 직원들을 회의실로 초청했다.

“최동진 인사실장님은 다들 아시죠? 우리 회사 인사업무를 총괄하실 겁니다.”

15명의 개발자들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최동진 실장과 인사했다.

“디자인 팀! 허수정 대리입니다. 온&오프 디자인 전문가에요. 경력도 실력도 괜찮은 분입니다. 여러분들과 잘 지내시게 될 거라 확신합니다.”

태화정밀에서 경리업무와 디자인 업무를 했던 허수정.

그녀를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윤재였다.

김민기 사장을 설득해, 학부를 마친 허수정을 52 소프트로 이직시켰다.

윤재와의 인연으로 52 소프트에 입사한 사람이 현재까지 대략 50명 정도.

아직 턱없이 부족한 인력이었다.

하지만 완성형이 아니라 만들어 가야하는 조직!

‘일단 시장 선점이 중요하다. 조직을 갖추는 건, 일과 함께 병행으로 간다.’

그런 점에서 최동진 실장의 합류는 윤재에게 큰 힘이 돼줄 것이었다.

스텝 직원과 개발자들의 상견례를 마친 윤재.

마지막 선물 보따리를 방출할 시간이었다.

“회사 앞 갈비집 예약해 놨습니다. 저녁 식사하러 가기 전, 입사 기념 선물이 있습니다.”

윤재의 얘기에 15명의 개발인력이 술렁거렸다.

이미 받을 만큼 받았는데, 뭐가 또 있냐는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정명철 팀장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정팀장?”

“네. 안녕하십니까? 팀원 없는 총무팀장 정명철입니다.”

팀원이 한명도 없는 팀장이라는 얘기에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아직 체계는 잡히지 않았지만, 그랬기에 더 가족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지도 몰랐다.

“사실 선물을 제가 아니라, 사장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빅애플의 ibook G4입니다. 이놈 구하느라 고생깨나 했습니다.”

2003년 형 Ibook은 윈도우 랩탑과는, 다른 의미에서 최고사양의 노트북이었다.

“우와! 데스크 탑 있는데, 노트북 또 주는 거 에요?”

개발자들의 질문에 윤재가 직접 답변에 나섰다.

“네. 윈도. 리눅스. 맥 등 여러분들은 모든 OS와 친해지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빅애플과 친해져야, 우리가 그들을 호구로 만들 수 있습니다.”

“사장님! 아무리 OS전쟁에서 패한 빅애플이라지만, 저희가 그들을 어떻게 호구로 만듭니까?”

공대출신답게 상상력과 유머가 부족한 친구였다.

“하하하. 그럼 이렇게 바꾸죠. 여러분들이 OS와 친해질수록, 저희가 호구될 가능성이 낮아진다. 이렇게요!”

“우하하. 말 되네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사장님! 잘 쓰겠습니다.”

그들은 포장도 뜯지 않은, 아이북 G4를 보며 애들처럼 좋아했다.

나머지 직원들 모두는 모르고 있지만, 윤재는 미래의 일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며 다 죽어가던 빅애플이, 가까운 미래에 세계에서 제일 돈 잘 버는 회사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빅애플이 52소프트에 떼돈을 벌어주고, 윤재에게는 호구 잡히고 말 것이라는 것을!

◈          ◈          ◈

윤재 때문에 다잡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눈앞의 대어를 놓친 론스타.

자유인이 된 윤재에게 스카웃 제의와 동시에, 동업을 제안한 많은 무리들 중에 론스타도 섞여 있었다.

한국의 유수의 회사들과, 소더버그 등의 오퍼를 거절했던 윤재.

그가 유일하게 동업제안을 오케이한 세력이 바로 론스타였다.

2004년 4월 말.

52 소프트를 성공적으로 발족시킨 윤재는, 론스타에서 한국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데이비드 리를 만났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한국에서 단물 빨아먹는 일을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프레지던트 김! 정말 대단해!”

“그 정도는 별거 아니죠. 한국에서 1조 넘게 챙긴 론스타도 있는데!”

“크하하. 여전히 가시가 돋혀 있군. 뭐 상관없어. 우린 자네의 능력을 보고 손을 잡은 것이니까!”

서로에 대한 필요성이 사라지기 전까지, 론스타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저녁을 함께 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국제유가가 고공행진을 할 거란 예측! 아주 좋았어. 덕분에 재미 좀 봤지.”

“당분간 3대 벤치마크 모두 강세일 겁니다. 섣불리 매도하지 마세요.”

“우리 팀도 전문가야. 걱정하지 말게.”

“걱정은 무슨? 이익실현하면 내 보수나 잊지 마요.”

론스타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윤재는 론스타와 당분간 공동투자를 하면서 그들의 돈을 불려줄 생각이었다.

국제유가의 3대 벤치마크는 1위 WTI, 2위 브렌트, 3위 두바이로 이어진다.

이 외에도 타피스나 오만크루드 등도 있지만, 모두 3대 벤치마크에 비할 수 없는 수준.

윤재는 런던과 뉴욕에서 가장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는, 브렌트와 WTI를 기초상품으로 하는 ETF에 론스타와 함께 투자했다.

남창진을 통한 투자와는 별개로, 외국계 자산운용사를 이용했다.

“이유는 이미 수도 없이 말씀드렸고, 적어도 2006년까지는 고공행진 이어가니까 중기 투자로 접근합시다.”

“크하하. 뭐 매번 귀신같이 알아맞히니 타박할 거리가 없군.”

윤재와 월례회의와 수시연락을 통해 정보를 취득하면, 데이비드 리는 론스타 팀을 통해 크로스체크를 했다.

매번 윤재의 예측과 분석이, 론스타 정보팀과 귀신같이 맞아떨어지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론스타 펀드가 운용하는 자금의 규모는 어림잡아 10~15조 규모.

자체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들이 제공하는 양질의 보고서가 매일 책상위에 배달된다.

그런 론스타 아태 총괄이 윤재에게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가 뭘까?

언론을 통한 이슈 제기.

워렌 버핀이라는 공신력 있는 해외 파트너 섭외.

유능한 CEO 차태영의 발굴에 이르기까지.

외국환은행 인수전에서 철저하게 짓밟혔기 때문이었다.

최고의 인재들과 정상급 정보력.

그리고 이 바닥에서 최고로 통하는, 49세의 데이비드 리!

그런데 혈혈단신의 29세 청년에게 발렸으니, 론스타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동지는 아니더라도,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돼! 그리고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접근하면, Risk 없이 김윤재의 인사이트를 활용할 수 있다!’

데이비드 리가 윤재를 대하는 기본 자세였다.

그렇다면 윤재는 왜 론스타에게 아까운 머리를 제공하는 걸까?

‘살을 내주고 뼈를 깍아 버리겠다!’

론스타를 망하게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혼란한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단물만 쪽쪽 빨아 먹은 론스타에게 적잖은 피해를 안겨줄 자신은 있었다.

‘한국 사람들 눈에 눈물 나게 했으면, 니들은 피눈물 날 각오는 해야지?’

론스타와 동상이몽에 빠진 윤재의 생각이었다.

“덩치가 있어서 개별 주식 같은 건 안 할 테고....”

“왜? 좋은 재료가 있나?”

“최근 한국 주식시장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

“변동 폭이 매우 커졌어요. 하루 1~2% 하락하는 날이 늘어나고 있어요.”

“그래서 최근 대장주인 오성전자가 자사주매입을 발표했잖아. 그것도 1조 넘는 규모로!”

반도체. TFT LCD. 핸드폰의 3두 마차로, 사상최대 실적을 매년 갱신하고 있는 오성전자.

코스피 대장인 오성전자의 자사주매입 발표는, 허약한 체력의 KOSP 시장에 엄청난 호재였다.

“우리 팀은 오성전자의 자사주매입으로, 상승반전의 모멘텀이 생겼다고 보고 있는데? 한국은 본질적으로 저평가된 시장이라구! 이번에는 자네가 틀린 것 같군!”

“뭐. 어차피 당신들은 투자할 것도 아니잖아요. 대신 누구 말이 맞는지 지켜나 봅시다.”

“꿀걱!”

“론스타야 투자하지 않으면, 최소한 잃을 염려는 없는 거니까!”

2004년 5월이 목전에 다가와 있었다.

트리플 악재 시기에, 파생상품 투자로 큰돈을 벌 계획이었다.

이 기회를 통해 론스타에게 신뢰를 심어주고, 나아가 그들의 배를 아프게 만들 복안이었다.

윤재는 그런 식으로 론스타를 몇 년에 걸쳐 키운 다음, 한꺼번에 잡아먹을 계획이었다.

이름 하여 ‘호박씨 까서 한 입에 털어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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