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는 만사
2004년 3월초 한남동 오재준 회장 자택.
오재준 회장의 부인, 성미예 여사의 생일을 맞아 모처럼 식구들이 모였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는 생일 파티를 하는 집 같지 않게 어두웠다.
저녁 식사를 마친 오재준은,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서재로 불렀다.
“진탁아! 나도 내 가신들을 미래 전략 실에 심어 뒀다는 사실 잊지 마라.”
“....”
“지난 몇 년 하지 말라는 파생상품 투자로 그룹의 금고를 축낸 것, 엔터사업 한답시고 젊은 여자들 건드려서 문제 일으킨 것, 모두 눈감아 줬다.”
“면목 없습니다.”
“그로 인한 출혈이 네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크다는 것 명심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아는 놈이....”
순간 오재준이 언성을 높였다. 그의 얼굴이 씨뻘겋게 상기됐다.
“그걸 아는 놈이, 또 사고를 쳐?”
“....”
이 대목에서 오재준은 윤재를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건만, 자꾸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능력도 있고, 인물도 괜찮고. 문제 일으킬 사돈댁도 없는 놈.’
생각할수록 아까운 인재였다.
그래서 오재준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막내딸을 윤재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장동석이라는 최고의 메신저를 통해서.
‘감히 하나를 거절해?’
눈앞의 무능력한 큰 아들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김윤재가 생각났고,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조울증이라도 걸린 기분이었다.
오재준은 비서진을 통해 윤재에 대한 정보를 계속 전해 듣고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소식은 윤재가 외국환은행의 개인 1대주주가 됐다는 소식이었다.
‘(주)KS 지분을 판 자금으로 외국환은행 지분 4%를 취득했다니. 믿을 수 없는 얘기야.’
외국한은행과 정부당국의 애물단지였던, 반도체 회사 아이닉스.
반도체는 사이클이 있는 산업.
망조가 들어 곧 망할 것 같던 아이닉스가 최근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메모리 반도체 세계1위 오성전자가 몇 년 전부터 시작한 치킨게임.
독일. 미국. 대만과 일본의 기업들이 먼저 나가 떨어졌다.
그 덕에 살아남은 아이닉스는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외국환은행은 아이닉스의 지분을 10% 넘게 보유하고 있었다. 덩달아 은행도 미운오리에서 백조로 거듭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백조를 꿀걱한 사람은 워렌버핀. 김윤재. 그리고 퇴물이라 생각했던 왕년의 금융계 스타 차태영이었다.
이 모든 과정에에 윤재가 관여했다는 것이, 오재준이 취득한 정보였다.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놈이야. 그 뿐인가? 보유한 재산만 어림잡아도 2~3천억은 될 거야. 정말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실력이다.’
자신에게 회사를 세계 최고로 만들 비전과 전략이 있다고 어필하던 윤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오진탁과 윤재 중에 택일하라던 당돌한 모습도....
반면 눈앞의 오진탁과 오건탁은 말 그대로 천덕꾸러기였다.
오진탁과 오건탁의 엄마인, 성미예 여사의 생일 날 오재준이 아들들을 따로 부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조혜진을 건드리려다 그 사단을 낸지, 3개월 밖에 안 됐다.
그런데 큰 아들 오진탁이 인수한, 엔터테인먼트에서 또 추문이 들려왔던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오재준은 엄마의 생일을 핑계 삼아, 두 아들을 호출했던 것이다.
“태조 이방원이 세종대왕을 세우고, 인조가 효종을 세운 것을 교훈으로 삼아라.”
“아버지!”
후계구도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엄청난 얘기였다.
오진탁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는 선포나 다름없었다.
“이놈! 천하의 못난 놈. 양녕대군과 소현세자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연예기획사 팔아 치워. 그렇지 않으면 나도 플랜B를 가동할 수밖에.”
“아버지! 연예기획사와 엔터 산업은 그룹의 미래 성장 동력입니다.”
“뭐? 성장 동력? 그런 성장 동력 나는 필요 없다. 창업보다 어려운 것이, 수성이란 말이 있다. 마약. 밀수. 여자. 도박! 그리고 무능한 후계자! 이 다섯 가지로 재벌은 망하는 거야!”
오진탁은 더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지은 죄를 모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작정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전해졌다.
반면 오진탁 때문에 벌 서는 기분인 오건탁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으이구. 저 멍청한 새끼! 그러게 아버지는 나를 후계자로 지목했어야지. 저런 찐따새끼를 지명해서.... 가만! 찐따? 라임 좋네. 오진탁. 오찐따. 크크크.’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오건탁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건탁이 너도 정신 바짝 차려.”
“예? 아버지 제가 뭘 잘못했다고?”
오건탁은 형에 비해 건전한 삶을 살았다.
여자도 멀리했고, 잡기를 최대한 접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형 때문에 자신도 도매금으로 혼나고 있는 중이라고 오건탁은 생각했다.
“네가 맡고 있는 사업들은 모두 정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내가 정체하는 동안, 남들이 치고 나가면 결국은 뒤처지는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오재준은 오진탁과 오건탁을 노려봤다.
그리고 다시 불호령을 내렸다.
“작년에 영국에 있는 하루를 접촉했다.”
“예? 하루를요?”
갑자기 오진탁과 오건탁은 바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하나는 너무 어렸지만, 오하루는 달랐다.
비록 여자이지만, 머리가 비상했고 비즈니스 감각이 특출했다.
다만 오빠들과의 분쟁이 싫어, 경영권 승계에서 스스로 물러난 뒤, 외국생활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오하루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국을 가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런데 지금 아버지가 큰 딸을 들먹인 것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늙어간다. 진탁이 네가 다시 한 번 불미스러운 일로 찌라시에 오르내리면, 하루를 한국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이미 봐줄 만큼 봐줬다. 하루와도 대충 얘기가 끝난 일이야. 명심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건탁이 너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3년이다. 1등자리를 빼앗긴 홈쇼핑과, 몇 년째 업계 1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인터넷몰 성장시켜! 그렇지 못하면 네 자리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니들도 잘 알 것이다. 명심해라! 3년이야. 3년!”
“예. 아버지.”
작년 가신들을 보내 영국에 있는 오하루를 만나게 했다.
“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아빠가 나를 필요로 하면, 언제든 돌아가겠습니다. 조건 없이!”
관재팀장이 영국에서 가져온 오하루의 소식이었다.
최고의 능력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였다.
‘하루가 딸만 아니었어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무능한 아들놈들을 지켜보며, 오재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태리 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윤재.
서울 마포의 아파트를 매물로 내놓은 뒤, 분당의 40평대 아파트를 매입했다.
혜진과 신혼살림을 차릴 집이었다.
그리고 분당에 있는 52 Cafe 소유의 건물 4층을 임차했다.
당분간 윤재의 베이스캠프가 될 곳이었다.
회사명 52 소프트.
52 소프트의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는, 먼저 52 Cafe와 52 피자의 홈페이지 구축과 온라인 주문 시스템 구축.
관련 회사와 용역계약을 맺어, 유료로 서비스를 제공할 생각이었다.
더 중요한 일은 인터넷 기반의 스타트 업을, 순차적으로 오픈시켜 나갈 생각이었다.
이태리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윤재는 많은 생각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었다.
당분간 함께 일할 사람을 늘려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3월 15일.
윤재는 프리랜서 헤드 헌터 최동진을 만났다.
“개발자들 구하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하하하. 쉬운 일은 아니었죠.”
“일단 후보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검토한 다음, 3월 말에 면접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이사님 추천인 모두 합격시키고 싶은 마음입니다.”
“부디 후보자들 전원과 소중한 인연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네요.”
오랜 회사생활과 헤드 헌터 경력에서 나오는, 매너가 일품인 사람이었다.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사님! 제가 이탈리아에 10일 정도 출장을 다녀왔는데,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렸습니다.”
“그래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축하드립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사님! 헤드 헌터 접고, 저랑 함께 일 해보실 생각 없으세요?”
“네?”
“제가 지금 헤드헌터를 헌팅 하는 겁니다. 저희 회사 인사실장으로 말이죠.”
최동진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기 힘든 표정이었다.
사실 최동진은 지난 번 개발자들 채용 문제로 만난 뒤, 윤재에 대해서 나름 정보를 파악한 상태였다.
다른 건 몰라도 엄청난 능력자라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
최동진이 헤드헌터로 일한지도 어느덧 5년!
다시 조직생활이 그립기도 했던 것이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이지,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회사생활과 비교하기 어려운 측면도 많았다.
자유와 안정을 바꿨다고 할까?
갈등이 명멸하는 사이, 윤재가 최동진의 상념을 뚫고 들어왔다.
“피쩨리아도 운영해야 하고, 피자회사도 M&A 해야 합니다. 개발자들 채용해 소프트웨어 회사도 만들어야 하구요. 할 일이 태산 같군요. 그래서 이사님 같은 전문가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닙니다. 회사에 HR 전문가가 필요한데, 이사님이 딱 적격일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군요.”
1차적으로 52 소프트를 론칭 할 계획이었다.
미소천사 은행의 일부 젊은 직원들.
태화 정밀의 허수정양.
O2 시절 함께 근무했으나, 계약직인 이유로 2년 또는 4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던 사람들.
아무리 동원해도 맥시멈 10명 전후였다.
반면 윤재가 구상하고 있는 사업들은 엄청난 인력을 필요로 했다.
먼 미래의 얘기지만 소프트웨어 전문가와, 개발자들만 최소 1,000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게다가 회사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직군이 있다.
재무. 인사. 관리. 영업!
이 모든 일을 윤재 혼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사님! 저희는 이제 태동단계입니다. 하지만 이런 회사가 단점도 있지만, 의외로 장점이 많습니다.”
“그렇겠죠.”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쉬운 비유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는군요. 태동기에 합류하시면 개국공신 되시는 겁니다.”
“하하. 그렇군요. 그게 가장 큰 장점이겠군요.”
“이사님과 영광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저희 인사실장님이 돼 주십시오. 긍정적인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네. 사장님! 늦지 않게 결정하겠습니다.”
윤재는 최동진 이사와 헤어졌다.
최이사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윤재는 발걸음을 옮겼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 ◈ ◈
최동진 이사와 헤어진 윤재는 노량진을 찾았다.
공무원 고시 학원이 즐비한 그곳에, 윤재가 영입할 인재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고 있었다.
“형님! 너무 반갑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하하하. 명철이 너도 예전 그대로구나. 반갑다!”
윤재는 신입사원 연수원 시절, 황성호의 흉계에 의해 계곡으로 추락했던 사나이. 정명철을 찾아왔다.
O2 F&B와 계약갱신이 되지 않았고, 그는 회사를 관두고 나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찾아 왔는지 궁금하지?”
“예. 솔직히.... 회사는 어떡하시고?”
“하하하. 회사 때려치우고, 회사를 만들까 생각중이야. 무슨 얘긴지 알겠지?”
“아!”
2년 동안 일반 행정직 공무원을 준비 중인 정명철.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합격.
윤재의 실력과 인품을 잘 알고 있지만, 2년의 고생을 포기하기 아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의 기대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뜬금없이 찾아와서 괜히 심란하게 만든 것 아닌가 모르겠다.”
“아닙니다.”
“그래? 그럼 짐 싸라. 당장! 공무원이 네 꿈이라면 모를까. 호구지책으로 안정된 직장이 필요해 공부하고 있는 것이라면 당장 짐 싸!”
“예? 지금이요?”
“그래. 지금! 당장! 내가 너한테 안정된 직장은 물론이고, 금전적 여유와 꿈과 희망마저 제공할 생각이니까.”
정명철의 눈동자가 커졌다.
고시원 생활에 찌들어 있던 정명철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3년 전 김윤재라는 젊은이처럼 되고자 애쓰던 시절의 기억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퍼지고 있었다.
“아직 짐 싸러 안 들어갔어?”
“가. 갑니다. 형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명철. 송진영. 이세영 등...
전생의 경험에 회귀한 3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윤재의 기억에 시대를 잘못 만나, 계약직으로 전전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그들이 윤재가 함께 일할 최고의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봉대장을 방금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시작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