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견지명
10박 12일의 이탈리아 일정은 순항했다.
보고 싶었던 친구 올리버와 에밀리를 만났고, 페레레와 조인트 벤처에 대한 잠정적 합의를 마쳤다.
주세페를 통해 나폴리 3대 피쩨리아 중 하나인, 브란디의 상표와 메뉴를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로마. 피사의 탑. 밀라노 대성당과 비토리오 이마누엘 갤러리. 피렌체와 베니스 등을 마음껏 둘러본 것은 덤이었다.
혜진과 마치 신혼여행을 즐기는 것 같은 나날이었다.
이태리 현지 시각 2월21일 토요일 오전.
베니스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카페 플로리안에서 윤재는 혜진, 올리버 에밀리 커플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세계 최초의 카페라는 곳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사이, 이태리보다 7시간이 빠른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사람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녁 뉴스가 전국 각지에서 흘러나왔다.
“어제 경기도 파주에서 조류독감이 발병해, 파주 문산 일대에서만 닭 20만 마리를 살 처분 했습니다. 당국은 조류독감 확산 방지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습니다.”
저녁부터 뉴스를 타기 시작한 조류독감 관련 소식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는 양계산업이 영세하다보니, 너무 밀집한 상태에서, 닭을 키우고 있습니다. 몸통조차 움직이기 힘든 닭장에서, 종일 모이만 먹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이죠. 감염 병에 취약한 구조입니다.”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이 출연한 방송은 저마다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얘기했다.
하지만 한국 양계산업은 수년째, 조류독감 감염과 살 처분이라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뉴스가 하나 있었다.
조류독감 뉴스들 사이에서, 관련 종사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뉴스였다.
“전남 나주 다시 면에 있는, 52 Farm 이라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Green Farm을 찾아왔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2만평의 농장에, 닭들이 평화롭게 농장을 거닐고 있습니다.”
TV화면에는 산과 강을 배경으로, 울타리가 쳐있는 Green Farm의 모습이 비춰졌다.
기자의 얘기처럼 닭들이 퍼덕거리며 날기도 했고, 평화롭게 농장을 뛰어 다니기도 했다.
“현장에서 52 Farm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남재 대표를 만나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네. 안녕하십니까? 52 Farm 대표 김남재입니다.”
“그린 팜이라는 친환경 양계농장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셨습니까?”
“우리나라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농어촌이 희생을 하게 된 점은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러다 보니 저비용으로 수많은 닭을 키워야 했고, 결국은 닭들이 움직이기도 힘든 양계장이 탄생해 버린 것이죠.”
“네. 그렇군요.”
“그래서 저희 그린 팜은 생각했습니다. 닭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농장을 만들면 면역력도 강해지지 않을까?”
“그렇군요. 그래서 저렇게 닭들을 방목하는 농장을 지으신 거군요.”
“네. 뿐만 아니라 농장 출입 직원들과, 주민들에게도 철저한 방역시스템을 통해 전염병 예방도 하고 있습니다. 2002년 조류독감이 극성일 때, 저희 그린 팜은 모두 AI에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남재의 인터뷰는 약 3분간 이어졌다.
집단 사육.
항생제 이용.
면역력 저하.
조류독감과 살 처분.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수 있었는지, 남재는 담담하게 얘기했다.
“저희 그린 팜의 친환경 닭과 계란은, 일반 양계장 닭들보다 5배나 비싸게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남재의 마지막 멘트로 뉴스는 끝이 났다.
“이제 한국도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건강한 계란과 삼계탕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2 Farm이 항생제 없는, 건강한 먹거리 문화에 앞장설 생각입니다.”
이미 52 Farm은 친환경 양계장과, 양돈농장을 호남에 4개소, 경남에 1개소 확보해 둔 상태였다.
본격적인 사업에 나선지 2년!
아직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형편이긴 했다.
최근 들어 남재와 52 Farm에, 친환경 농장에 대한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었다.
남재는 작은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자신이 출연한 뉴스를 지켜봤다.
“이야! 우리 막둥이 말 잘하네?”
“헤헤. 엄마! 왜 그래. 쑥스럽게.”
“화면 빨도 생각보다 잘 받고. 고생했다.”
“하하. 남재 너 완전 스타 됐다.”
“형까지 왜 그래? 놀리지 마.”
뉴스가 끝나자 작은 집 식구들은 자연스럽게 윤재를 떠올렸다.
“놀랍지 않아? 윤재 형이 준비한 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잖아.”
“그러게 말이다. 놀랄 때가 너무 많아.”
최근 외국환은행 출신들 동료들 전원이, 원래 다녔던 직장으로 복직했다.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재와 관련된 미소천사 은행과, 외국환은행 일들이 마치 톱니바퀴 돌아가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52 Farm과 Green Farm 소식이 뉴스를 탄 것이다.
“우리는 그린 팜을 넘어 Smart Farm까지 도입할 거야. 윤재 형 얘기로는 2009년 안에, 52 Farm의 모든 농장을 Green Farm과 Smart Farm의 복합 농장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하더군.”
“진짜! 놀라울 따름이다.”
“지역 농가와 제휴하는 것과, 직영농장의 채용을 계속해서 늘리고 있어. 윤재 형 얘기가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게 느껴져.”
“윤재형의 비전과 실행력은 정말 우주 최강인 것 같다.”
작은 집 식구들이 앞 다퉈 윤재의 공로를 치하했다.
“귀국할 날 며칠 안 남았네. 윤재 형 보고 싶다. 우리 농장이 뉴스 탄 걸 알면, 윤재 형이 좋아할 텐데.”
“그러게나 말이다.”
“이거 좀 먹어 봐라. 닭이 좋아서 그런지 통닭 맛도 끝내준다.”
그 때 작은 엄마가 통닭을 만들어 왔다.
그린 팜에서 건강하게 키운 닭으로 튀긴 치킨이었다.
◈ ◈ ◈
조류독감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 대진증권 맨 남창진 역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화통이 불이 났고, 모니터에는 여러 건의 메신저가 번쩍 거리고 있었다.
창진은 침착하게 밀려드는 전화를 응대했다.
“네. 고객님! 15% 정도 수익 났으니 수산주는 모두 이익실현 하시죠? 잠시 기다리면서 다음 종목 함께 고르시자 구요.”
“그것 보십시오. 제 말 듣고 닭고기 관련주는 피하시길 잘했죠? 제 덕분에 사장님 하한가 맞을 위기, 피하신 겁니다.”
“괜찮다니까 이런 걸 자꾸 보내십니까? 사장님 돈 벌게 해 드리는 일이, 제가 할 일이라니까요.”
남창진은 매일 윤재와 통화를 했다.
지금은 출국한 덕에 통화하지 못했지만, 윤재와의 통화는 창진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조류독감이 발생했을 때, 상승하는 종목과 하락하는 종목을 미리 정해놓고 대비할 수 있었다.
1분 1초의 차이로 매수와 매도에 실패해,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게 주식시장이다.
창진은 윤재 덕분에, 여의도 증권가에서도 최고 에이스로 거듭나 있었다.
아직 윤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윤재 없이도 제법 잘 해낼 경지에 오른 것이다.
장이 끝나고 나서도 창진은 퇴근하지 못했다.
지점 최고의 큰 손들과 세미나가 예정돼 있기 때문.
PB룸에 6명의 큰 손들이 모였고, 창진이 세미나 룸 앞에 나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저희 지점에 맡긴 고객님들 예탁금 운용계획에 대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살도 많이 빠졌고 말투까지 세련되게 변한 남창진.
누구와 견줘도 손색없는 증권 맨인 것이다.
“텀플턴에서 운용하는 펀드에 20%, 저희 CMA에 20%, WTI원유를 벤치마크로 삼은 ETF에 20%, 개별종목에 20%, 끝으로 선물옵션에 20% 정도 운용하는 방향으로 올해는 움직일 생각입니다.”
창진의 제안으로 대진증권은 주식 브로커리지에, ETF나 DLS 같은 파생상품을 추가했다.
방향성이 가장 중요한 ETF와 DLS.
앞날을 훤히 알고 있는 윤재는, 방향성에 있어서는 갑중의 갑!
덕분에 대진권과 창진이는 ETF와 DLS로 깃발을 날리게 됐다.
창진이 각 상품들의 Risk와 기대수익률을 요약한 장표를 띄워놓고 설명을 이어갔다.
“남대리? WTI ETF 기대수익률이 연 50%나 된다고? 그게 가능해?”
“크하하. 윤사장님! 중국과 인도, 베트남 브라질 등이 고도성장 중입니다. 이 나라들이 세계의 원자재를 빨아들이고 있지요. 그리고 올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거라 다들 예상하고 있어요. 유가는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
“요즘 중동 산유국들에서 볼멘소리 나오는 거 아시죠?”
“응? 무슨 소리?”
“기름 값이 콜라 값 보다 싸다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이라크 전쟁도 끝났고, 좀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신흥국의 경제성장은 당분간 계속될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기름 값은 2002년부터 2003년까지 바닥을 찍었기 때문에, 올라갈 일만 남아 있습니다.”
투자자들은 듣고 보니 그럴 만 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나갔다.
고객 중 한 명이 윤사장을 타박했다.
“어이! 윤사장. 남대리가 얘기해서 틀린 것 봤어. 나는 믿고 투자할 생각이니까, 윤사장은 알아서 하소. 대신 남대리 브리핑 시간 뺐지 좀 마. 자네는 의심이 많아서 탈이라니까!”
남창진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가늠할 수 있는 한마디였다.
창진이 서울로 올라온 뒤로, 이들 6명은 창진이 덕에 큰돈을 벌었다.
최근에도 수산주에 투자해 제법 재미를 봤다.
대진 증권 본점에서 가장 큰 금액을 굴리는 사람도 남창진이었고, 월등한 수익률을 고객들에게 안겨준 사람도 창진이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고객들과 식사까지 마친 뒤, 창진은 퇴근했다.
술이 기분 좋게 취한 창진은 윤재 형을 생각했다.
이탈리아 출국 전 대진증권과 외국 계 운용사의 원유 ETF에 50억을 나눠서 투자해 놓고 떠난 윤재.
한 달도 안됐는데 수익률이 7%가 넘어 있었다.
마치 윤재가 쓰는 소설이나, 그가 그리는 그림처럼 증시가 움직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태리 출국 전 윤재가 들려준 얘기들이 생각났다.
“작년에 조류독감 때문에 홍역을 치렀잖아.”
“그랬지.”
“전염병은 자꾸 되풀이 되는 경향이 있다. 올해도 다시 유행할 가능성이 높아. AI 다시 터지면 수산 주에 기민하게 올라타야 한다.”
“알았어. 형! 그런데 형은 투자 안 할 거야?”
“나는 이미 덩치가 너무 커졌어. 대형주 아니면 개별종목은 가급적이면 피할 거야.”
출국 전 윤재가 한 얘기였는데, 거짓말처럼 조류독감이 다시 뉴스를 탔다.
그 바람에 창진은 투자자들 사이에서 노스트라다무스 급 대우를 받게 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윤재는 이런 얘기도 해줬다.
“국제유가 상승. 중국발 긴축. 미국 금리인상! 2004년에는 트리플 악재 때문에 장이 출렁거리는 경우가 많을 거다. 그 때를 대비해 총알들 모아 두라고 해! 선물이나 옵션으로 중박은 가능할 거다.”
창진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윤재가 출국 전에 들려준 메시지를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이제 곧 윤재가 한국으로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의미로 선물과 옵션으로 대박을 칠 시간이 도래했다는 것이었다.
◈ ◈ ◈
2월 22일 일요일.
윤재와 혜진, 올리버와 에밀리는 베네치아 국제공항에서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옛날 생각나네. 네가 페레레 후계자일 줄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몽블랑에서 우연히 만나고, 헤어질 때 올리버가 초콜릿을 사다주며 커밍아웃 했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나야 그렇다 쳐도, 윤재 네가 더 놀랍지. 3년 만에 수천억을 벌었다니,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우리 상페 호수에서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워렌버핀과 빌게이트가 있었던 것 모르지?”
워렌버핀과 점심식사를 했고, 그와 함께 한국 5위의 상업은행에 투자했고, 개인주주로는 최대 지분을 가진 사람이 윤재라는 얘기에 올리버와 에밀리는 경악했다.
“에밀리! 미국에 가서 좋은 활약 이어나가길 빌게!”
“고마워 혜진!”
포옹하는 두 여자가 친 자매처럼 보였다.
에밀리는 베니스에서 뉴욕으로 넘어가, 전미 투어를 포함해 본격적인 미국 활동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에밀리는 꼭 괴상한 매니지먼트 말고, 제대로 된 소속사에 들어갔으면 좋겠어.”
“맞아. 에밀리! 이제 슈퍼스타인데 혼자 활동하는 건 무리야.”
오진탁 때문에 연예활동을 쉬고 있는 혜진,
그녀는 진심으로 에밀리가 잘되길 바랬다.
“걱정 마! 미국에서 오카루상이 현지 매니지먼트를 섭외해 놓고 기다리고 있으니까.”
올리버와 에밀 리가 과거에도 극찬한 적이 있는 동양인 프로듀서 오카루.
그녀가 에밀리의 미국진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고 했다.
에밀리의 오랜 무명생활을 순식간에 끝내버릴 정도로 실력이 있는 여자라고 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윤재랑 혜진이도 오카루상 만나봤으면 좋겠다. 분명 함께 잘 어울릴 수 있을 거야.”
“그래. 조만간 다시 만나자!”
“비행기 시간 됐다.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자!”
“올리버. 에밀리 또 만나!”
인천국제공항. 뉴욕. 피에몬테주 알바!
4명이 돌아갈 곳은 각기 달랐지만, 그들의 바라보고 있는 지향 점은 비슷하다는 것이 4명의 공통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