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파트너
2월 13일 금요일.
윤재는 로마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오빠!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응? 그냥 신문 기사 좀 봤어. 외계인 침공 소식 같은 건 없네.”
“아이고! 안타깝다. 오빠 큰 일 할 기회가 없어져서 어떡해?”
“하하하. 세상은 넓고 큰 일 할 기회는 많아.”
윤재는 신문을 접어 포켓에 집어넣었다.
4분의 1로 접혀 있는 신문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 O2 그룹! 중국시장 진출로 글로벌 O2 에 나서다. ]
혜진은 윤재가 어떤 기사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애착이 남아 있구나!’
그녀는 자신과 선희의 선택이 몰고 온 나비효과에 대해 생각했다.
만약 오진탁이 인수한 매니지먼트와 계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계약하러 간다는 얘기를 미리 윤재에게 얘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이라면 윤재가 씩씩하고 유쾌하게, 퇴직 이후의 삶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윤재는 어둠 밖에 없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수많은 회사와 사업가들이 중국에 진출했지만, 그 결과가 모두 좋은 것은 아녔다. O2그룹도 마찬가지였지!’
10억 인구에게 한개만 팔아도 10억 개의 물건을 팔 수 있다는 중국시장.
그런 환상을 가지고 중국에 갔다가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중국 간쑤성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촌로조차도, 자신들을 대국의 국민이라 생각하고 산다.
하루 밥 세끼 겨우 먹고 살며, 소 쟁기로 농사를 짓는 촌로에게 큰돈이 얼마냐고 물었다 치자.
아마 그 노인네는 100조 정도는 돼야 큰돈이라고 얘기할 것이다.
중국은 그런 나라였다.
한낱 필부조차도 대국 병에 걸려 있는 그런 나라.
명품과 비싼 것에 중국 사람들이 환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
전생에서 오진탁의 미래 전략실이 주도한 중국시장 진출은 실패하고 만다.
중국 토종자본과 관의 트집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만, 오진탁이 중국을 너무 우습게 생각한 측면도 컸다.
5조를 쏟아 부어도 부족한 중국에, O2는 10년 넘는 동안 5천억을 투자해 극장사업을 추진했다.
점유율은 5%를 넘지 못했고, 적자에 허덕이다 결국 코로나 상황을 만나 그로기 상태에 빠졌던 기억이 났다.
오진탁과 반대로 윤재에게 중국은 재테크의 원천이었다.
지난 2년간 조선 기계 철강, 이른바 조기철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고 그 원인은 바로 중국의 고도성장이었다.
2004년도 역시 마찬가지.
오진탁은 2004년부터 본격 늪에 빠지기 시작하지만, 윤재는 2004년에도 큰돈을 벌 찬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연 7~8%의 고도성장에 따른 인플레 등을 우려한 중국은, 2004년 중간 중간 긴축을 시사한다.
‘2001년도 9-11 테러이후 주가 상승! 2002년도의 월드컵. 2003년도의 로또 1등 독식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재테크에 실패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버스 떠난 뒤에 후회한다는 것이다. 전생의 윤재가 대표적인 망테크의 표본이기도 했다.
‘2004년도에 5월 옵션대박이 거의 50배였지? 아마?’
2004년 트리플 악재와 옵션대박의 윤재의 기억에 선명했다.
모두 언론의 호들갑과, 창진이가 지겹도록 얘기했기 때문이다.
“형님! 크하! 중국 긴축! 유가 상승! 미국 금리인상 트리플 악재로, 어제 풋옵션 수익률이 하루만에 49배야! 49배! 1,000만원만 넣었어도 4억9천이라고!”
“씨바. 존나 부럽다. 근데 49배면 뭐하냐? 우리는 투자를 안했는데.”
“그니까. 형!”
“창진아 너랑 나는 대체 뭐하고 있냐? 말 좀 해봐. 너! 그놈의 마이너스의 손 언제까지 이어갈 건데?”
“미안해. 형.... 언젠가는 터질 거야!”
전생에서 재테크를 전적으로 창진에게 의존하다, 제법 큰돈을 잃었던 윤재.
2004년도 트리플 악재 당시 옵션대박을 부러워했던 일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그런 식으로 전생의 윤재는 뒷북과 후회의 무한 도돌이표였던 것.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미래를 알고 선제적이고 확실한 대응이 가능했다.
‘5월 며칠이었더라?’
확실한 날짜는 알 수 없어도, 미리 준비하면 49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큰돈을 벌 수 있었다.
‘오진탁! 너는 계속 삽질해라. 나는 차곡차곡 준비해서 너를 역전할 거니까!’
비행기에서 신문을 보다 생각난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이러니야. 아이러니!”
혼잣말을 한다는 게 무심코 입 밖으로 말을 흘리고 말았다.
“뭐가?”
혜진도 오진탁과의 악연을 생각하다가, 윤재의 얘기에 정신을 차렸다.
“응?... 오진탁 그 자식 생각하다가.... 그 미친개가 개판을 칠수록, 내게는 기회가 커지는 것이니까! 아이러니라는 거지.”
“O2 그룹의 중국진출에 무슨 문제 있어?”
“응! 시기가 좀 늦었고, 진출 규모도 너무 작아. 시장을 잘못 읽은 것 같다. 그런데 중국진출은 시작일 뿐이야. 더 큰 문제들이 앞으로 쏟아질 거다.”
“에혀! 오진탁 같은 무능한 사람을 아들이라는 이유로 밀어주는, 한국 기업문화가 확실히 문제 있어.”
“그렇지. 재벌 총수 체제가 장단점을 갖고 있는데, 오진탁 같은 놈은 단점을 극대화 시켜 버린다는 거야.”
“그 인간의 뱀 같은 눈빛!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혜진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안하다. 괜한 얘기해서. 우리 좋은 얘기만 하자!”
“그러자! 그래서 말인데 에밀리는 더 예뻐졌겠지?”
눈치 빠른 혜진이 재빨리 주제를 돌렸다.
“무슨 소리야? 에밀리가 예쁘다고?”
“오빠야 말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에밀리는 노래를 잘 하는 거고, 예쁜 건 조혜진이지!”
“깔깔. 제법 웃겨!”
윤재와 혜진은 나폴리를 찍고 밀라노, 모데나, 베니스로 북향하며 여행할 계획이었다.
일정에 주세페와 올리버 커플과 만나는 일정도 예정돼 있었다.
돈 많은 백수의 자유란 이렇게 좋은 것이다.
◈ ◈ ◈
로마 공항에는 올리버와 에밀리, 주세페가 윤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윤재와 혜진을 발견한 올리버와 에밀리가 달려와 서로를 끌어안았다.
“험! 험! 올리버 너 유난히 혜진이랑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다?”
윤재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딴지를 걸었다.
“하하. 윤재 왜이리 민감해?”
“올리버! 참고만 해라. 얼마 전에 혜진이한테 눈독들이던 놈 골로 보냈으니까!”
“어이쿠! 무서워라!”
주세페. 올리버 모두 이탈리아 북부가 거점이다.
윤재를 마중하러 로마까지 내려온, 올리버 일행과 로마 외곽에 위치한 호텔로 이동하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회사 주주의 아들놈을 깨박살 낸 다음, 회사 그만뒀다는 거잖아?”
“네. 주세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푸하하. 이 친구 역시 쾌남아야. 나랑 코드가 딱 맞는다니까!”
“주세페가 좋다면 저도 좋아요.”
“푸하하. 이 친구. 역시 내 스타일이야!”
윤재와 혜진, 그리고 오진탁 사이에 있었던 얘기를 모두 들은 주세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에밀리 다시 한 번 축하해요. 영국차트 1위하고, 미국 빌보드에서도 순항중이라 들었어요.”
“고마워! 혜진! 윤재와 한국이 베푼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주세페의 회사 소속인 미니밴 안에, 영어와 이태리어. 그리고 한국말이 오갔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다들 반가운 표정이다.
원래부터 대성할 목소리를 타고났던 에밀리.
계속되는 실패로 소심해져 있던 에밀리는 한국 생활 동안 각성했다.
그리고 2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해, 에밀리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올리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피앙세를 성심성의껏 도와준 사람이 바로 윤재였다.
한국에 초대해 스싱님을 만나게 해준 사람도 윤재.
진도에서 숙식하던 에밀리를 찾아가 말동무가 돼 줬던 사람도 윤재였다.
그녀가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윤재인 것이다.
한마디로 윤재는 올리버의 은인이었다.
“그나저나 오진탁 그 친구는 뭐지? 한국의 마피아인가?”
“그런 건 아니구요.”
“그 작자 때문에 혜진 같은 미녀가 연기를 관뒀다고 하니, 내가 다 천불이 나서 그래.”
주세페는 약 2년 만에 만났고, 올리버와 에밀리 역시 거의 1년 만에 만난 셈이었다.
그 동안 있었던 일들과, 한국의 친구들에 대한 안부를 전해줬다.
하지만 얘기를 거듭할수록 오진탁의 만행으로 얘기가 되돌아갔다.
한국 굴지의 재벌 후계자가, 강간범에 가깝다는 얘기는 그만큼 충격적이고 부끄러운 뉴스였다.
“장시간 비행하느라 피곤할 텐데, 쉬었다가 내일 만날까?”
“아냐. 괜찮아. 혜진이랑 샤워만 마치고, 내려와서 와인이라도 한잔 하자!”
“우린 좋지! 너랑 혜진이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오케이! 금방 씻고 내려올게.”
◈ ◈ ◈
에밀리가 노래를 숭고한 그 무엇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삶의 일부라는 걸 깨닫고 거듭났다면 올리버 역시 다른 의미로 깨달은 상태.
페레레 본사로 복귀한 올리버는 더 이상, 방황하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토요일 일요일 이틀만 윤재와 함께 보내고, 월요일에는 출근해야 한다고 했다.
방탕한 젊은이에서 비즈니스맨으로 완벽하게 재탄생한 것이다.
“정말 올해 안에 계약하고, 내년 중에는 착공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해?”
윤재가 O2 재직당시 추진하려 했던 페레레와의 조인트 벤처.
오진탁이 선물옵션으로 막대한 손실을 봤던 탓에, 무기한 연기된 바 있다.
윤재는 페레레와의 조인트 벤처를, 52 Corp를 통해 추진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50:50으로 투자한다고 해도 수천억이 소요될 텐데?”
“돈은 문제가 아니야. 페레레가 52 Corp 같은 마이너 중의 마이너와 제휴할 의향이 있느냐가 더 중요하지.”
올리버는 여전히 믿기 힘든 눈치였다.
그의 머릿속의 윤재는 유능한 젊은이였지만, 한국의 평범한 중산층으로 각인돼 있었다.
올리버는 혜진의 얼굴을 쳐다봤다.
혜진은 조용히 고객만 끄덕여 보였다.
‘그럴 여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를, 혜진은 눈빛으로 전달했다.
“다시 얘기하지만 관건은 돈이 아니야. 우리는 한국 부동의 1위 푸드 회사가 아니야. 이제 병아리 수준이지. 그럼에도 52랑 손을 잡고, 베트남 또는 러시아에 조인트 벤처를 설립할 수 있겠어?”
“....”
몇 초 동안 올리버는 답을 하지 못했다.
5초? 아니면 10초가 흘렀을까?
마침내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우리 할아버지 역시 동네 빵가게에서 시작하셨다. 우리는 능력과 실질을 중시하는 집안이야. 평판과 지위 따위는 개나 주라고 해! 나는 윤재 네가 보여준 판단력과 초인적인 능력을 믿는다.”
올리버의 머릿속에 얼음장처럼 차갑던 물속에 뛰어들어, 혜진과 마멋을 구해내던 윤재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수천억 투자를 너무 즉흥적으로 했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었다.
일단 2년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단기간에 수천억을 벌었다는 얘긴데, 2년의 시간이라면 윤재가 지금보다 훨씬 성장해 있을 거다!’
올리버가 긍정적인 결정을 내린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비상한 두뇌와 사업 감각을 가졌다.
거기에 동물적인 판단력을 겸비한, 올리버의 두뇌는 윤재의 손을 잡아도 된다고 지시했던 것이다.
52 Cafe가 갖고 있는 몽블랑과 몬스터 초콜릿에 대한 권리.
페레레의 글로벌 브랜드와 자금력!
그리고 윤재의 인사이트와 자금력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일단 구두계약이 된 걸로 하자고! 올해 안에 계약서에 사인하고, 2005년 안에 착공 들어가는 거야!”
“오케이.”
5명의 일행들이 허공에서 와인 잔을 부딪쳤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주세페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듣자하니 윤재 네가 엄청난 부자가 된 것 같은데, 나폴리 피자가게는 왜 하려는 거니? 그거 해봐야 얼마나 남는다고.”
“하하하. 그런가요? 주세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이미 수천억을 번 제게, 피자가게는 작은 비즈니스일 수 있죠.”
“내 말이 그 말이야. 거물이 된 것 같은데, 피자 가게라니?”
“52Corp에서 피자사업 진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피자와 미국식 피자.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업. 매장방문 식사와 배달까지! 우리는 한국과 미국 피자 시장의 25%를 차지할 생각입니다.”
“농담치고는...... 너무 진지한 거 아냐?”
“하하하. 농담 아네요. 52 Cafe는 현재 4층 이상인 건물을 5개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날 거구요. 건물 3층이나 4층에 나폴리 피자 점을 입점 시킬 생각이에요. 나폴리 피자는 52 Corp의 피쩨리아 사업으로 포지셔닝하게 될 겁니다.”
“헐....”
주세페. 올리버. 에밀 리가 순차적으로 입을 벌린 채 윤재와 혜진을 바라봤다.
공항에서 만난 지 2시간 만에 들은 얘기치고는 제법 충격적인 내용들이었다.
“주세페. 올리버. 에밀리! 윤재 오빠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이 뭔지 알아요?”
“?”
“세상이 돈벌이 천지다!”
“또 헐....”
본격적인 52Corp의 글로벌 파트너가 될 페레레와의 조인트 벤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윤재가 피자사업 진출에 대한 목표를 밝히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