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인큐베이터
“또 너냐?”
미소천사 남광주점 앞에 한 사나이가 무릎을 꿇은 채 윤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형님! 제발 저를 아우로 받아 주십시오.”
그의 이름은 민삼식.
재작년 미소천사은행을 습격한 삼식이파의 두목이었다.
“한 겨울 아스팔트 바닥 냉기에 치질 걸린다. 일 없으니 가 봐라.”
“형님! 제발 저를 거둬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이탈리아 출국을 2주일 앞둔 상태에서, 윤재는 매일 미소천사은행에 출근했다.
윤재의 광주 복귀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삼식이파 삼식이가 오늘로 4일째 매일같이 삼궤구고두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동상 걸리고 치질 걸렸다고 약값 줄 생각 없다. 괜한 고생 마라!”
윤재는 할 말만 마치고 엔젤투자 사무실로 올라갔다.
2층에서 동재가 창밖으로 이 광경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동안 쟤가 은행 귀찮게 하지는 않았니?”
“네. 형님한테 호되게 당한 뒤로는 얼씬거린 일 없습니다.”
“그런데 쟤는 대체 왜 저러는 거니?”
“시장 상인들 사이에 미소천사은행 때문에 망했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조직도 사실상 와해됐다고 하고.”
“뭐 먹고 사는지는 모르고?”
“시장 통에서 몇 번 마주치긴 했는데, 생닭 배달하는 것도 봤고 생선 배달하는 것도 봤어요. 조금 안 돼 보이긴 하대요.”
“알았다.”
윤재는 노트북을 켠 뒤, 전날 미국과 유럽시장의 동향부터 체크했다.
뉴욕과 런던의 상품거래소의 동향과, 창진이가 보내준 대진증권의 보고서까지 꼼꼼하게 점검했다.
‘자식! 되게 신경쓰이게 만드네.’
윤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님! 저 점심 좀 따로 먹고 오겠습니다.”
“알았어요. 본부장님! 그리고 우리 말 편하게 합시다. 형! 불편하잖아.”
“하하하. 알았다!”
윤재는 사무실을 조금 일찍 나왔다.
아직 1시간이 안돼서인지, 삼식이가 무릎 꿇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얼른 일어나서 코에 침부터 좀 발라라!”
“정말요? 형님?”
삼식이가 반색하며 일어서다가, 발이 저렸는지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 ◈ ◈
“이름?”
“민삼식입니다!”
“나이?”
“올해 서른 살입니다.”
“뭐이리 얼굴이 삭았어?”
“어려서 한약을 잘못 먹어서요.”
윤재는 삼식이파 두목 민삼식과 근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너는 안 되겠다. 누가 봐도 네가 노안인데, 니가 나를 형님이라 부르면, 사람들이 나보고 건방지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냥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
“제발 부탁입니다. 평생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처음 만난 날부터 형님을 다시 뵙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이렇게 다시 뵌 것도 인연인데, 형님으로 모시게 해 주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나도 서른 살인데, 형님은 아니지 않냐?”
“형님! 생일이 언제십니까?”
“나 76년 4월생인데....”
4월이라는 얘기에 삼식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형님으로 모실 수 있게 됐습니다. 저는 76년 12월입니다. 형님이 빠른 76이니, 제가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왜 나를 형님으로 모시고 싶은 거냐? 나랑 손잡고 전국구 조폭이라도 만들어 보겠다는 거냐?”
“아닙니다. 저는 이미 손 씻었습니다. 그냥 지난 번 형님께 죽도록 얻어맞고 깨달았습니다. 이 분이 내 인생의 귀인이다. 이 분과 함께라면 인생을 걸어도 되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형님이 미소천사 은행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운명임을 직감했습니다.”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인사가 만사!’ 라는 말을 수없이 듣게 된다.
사람 하나 잘못 들이면 조직을 망칠수도 있는 것이다.
“내 별명이 뭔지 아니? 사람들은 나를 빨간 펜 선생님이나 구몬 선생님이라 부른다.”
“?”
“내 과제를 달성한 사람들에게만 기회를 준다는 의미야!”
“어떤 과제든 해 내겠습니다.”
“내 사촌동생이 운영하는 52 Farm이라는 회사가 있다. 거기에서 그린 팜 사업을 하고 있어. 양돈도 하고 양계장도 일부 운영하고 있다. 전남 나주에 52 Farm이 운영하는 양계장이 있다. 그곳에서 1년 동안 일을 해.”
“양계장 일이요?”
“왜? 하기 싫어?”
“아닙니다. 해 보겠습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일일 것이다. 거기에서 1년 동안 문제없이 일을 해낸다면, 너를 동생으로 받아주마!”
“감사합니다. 형님!”
민삼식은 추운 겨울날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버티는 깡다구가 있었다.
손을 씻었고, 합법의 영역으로 넘어올 의지가 확인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삼식이가 동네 건달 생활을 접고, 배달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를 써먹을 분야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 ◈
회사를 그만 둔지 벌써 2개월이 지났다.
지난 2개월 동안 윤재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헤드헌터 최동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오성물산 인재 개발팀장을 하다가, 임원이 되지 못해 옷을 벗고 헤드헌터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출국을 앞두고 윤재는 혜진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을지로에 있는 52 Cafe 서울 2호점에서 최동진을 만났다.
취직이 성사돼야 헤드헌터는 고객사에서 보수를 받을 수 있다.
최동진의 오퍼를 3번이나 거절했던 윤재.
이번에는 윤재가 먼저 만나자고 했기 때문에, 최동진은 조금 들떠 있었다.
“오성증권? 아니면 밸류에셋? 아니면 NC상사인가요?”
“하하하. 이사님! 제가 뵙자고 한 건 취직 때문이 아닙니다.”
수수료 생각에 들떠 있던, 최동진의 얼굴에 잠시 실망한 기운이 스쳐갔다.
“더 좋은 제안을 하러 온 건데, 너무 일찍 실망하시는 거 아닙니까?”
“더 좋은 제안이요?”
“네. 이사님을 통해 취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고 싶습니다. 이사님께서 좀 구해 주십시오.”
백수가 사람을 구해 달라니?
최동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최소 5개 국어 이상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더 많은 언어를 구사할수록 좋습니다.”
“5개 국어요? 그런 사람이 많지 않은데....”
“하하하. 여기서 제가 얘기한 언어는 영어, 불어, 이태리어 같은 언어가 아닙니다. 파스칼. 포트란. 코볼. 오브젝티브 C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말씀드린 겁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프로그래머가 필요하신 거군요. 그런데 개발자들이 왜 필요하신 건가요?”
“회사를 키워 나갈 생각입니다.”
“회사를 창업하시는 게 아니라 키워요?”
최동진은 굴지의 대기업에서 팀장까지 역임한 사람답게 머리회전이 빨랐다.
하지만 아직 윤재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네.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가 몇 곳 있습니다.”
“아! 김 선생님 회사에 IT인프라를 구축하실 생각이신 모양이군요?”
“아닙니다. 스타트 업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처우나 원하는 인재상 등에 대해서는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회사 이름이 뭐죠?”
“52 Corp입니다.”
최동진은 자신의 다이어리에 윤재와의 대화 내용을 꼼꼼하게 필기했다.
52 Corp라는 이름을 적던 최동진이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혹시 이곳 52 Cafe 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52 Cafe도 제가 대주주인 회사입니다. 전국에 직영점을 40개 넘게 보유하고 있죠.”
“!”
최동진은 윤재가 오성증권과 밸류 에셋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했을 때 보다, 더 놀라는 눈치였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유능한 직장인에 주식 투자의 귀재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윤재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올해 5월까지 일단 20명 정도 채용할 계획입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20명이나요? 부지런히 뛰어 다녀야겠군요.”
헤드헌터가 소개해 준다고 모두 채용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두 성공시키고, 연봉을 3,000만원만 잡아도 최동진이 받을 수수료는 억대에 육박하게 된다.
최동진은 1년 장사를 이번 건으로 마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다시 들떴다.
“외국에서 근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주시면, 그 분에 대한 수수료는 30%를 드리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S급이나 임원급 취직 때 받는 보수가 보통 25%.
30%는 헤드헌터들에게는 대박 조건이었다.
대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최동진은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을지로에서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있나요?”
“저번에 만났을 때 최이사님 댁이 을지로 쪽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리고 마침 여기에 52Cafe도 있구요.”
최동진의 명함에는 사무실 주소만 적혀 있을 뿐 집 주소는 없다.
지나가는 얘기까지 기억했다가 약속장소를 정하는 센스.
헤드헌터인 자신에 비해, 윤재의 비즈니스 매너가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 ◈
“오빠! 왔어? 기분 좋아 보이네?”
최동진을 만나고 돌아온 윤재의 표정이 밝자, 혜진이 환하게 웃었다.
윤재 옆에 바짝 붙어 외투를 받아주는 혜진을 보고 있으니, 신혼살림이라도 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식탁에는 혜진이 끓여 놓은 김치찌개에서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O2 로 돌아가 세계최고의 식품회사로 만들겠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왜 개발자들을 대거로 채용하겠다는 거야?”
최동진과 있었던 얘기를 모두 듣고 난 다음 혜진이 물었다.
“하하하. 예리한 질문이네. 혜진이 아주 날카로워!”
“내가 살짝 샤프하지. 근데 왜 개발자들을 20명이나 뽑겠다는 거야?”
“혜진이 너한테 준 어음 부도내지 않기 위해서 그런 거야.”
“피.... 약속어음은 잊어도 돼. 그날 하루 재미있었던 걸로 끝내야지. 그렇게 많은 돈 필요한 것도 아니고.”
윤재는 저녁식사를 하면서, 자신이 개발자들을 뽑아서 무얼 하려는지 들려줬다.
“최고의 재테크는 창업이란 생각이 들었어. 괜찮은 스타트업을 만들어, 주식시장에 상장시키면 말 그대로 대박이 가능하거든. 나뿐만 아니라 취직한 사람들도 우리사주나 스톡옵션 받아서 대박이 터질 수 있고!”
“창업? 스타트 업?”
O2 F&B를 적대적으로 M&A하려면 최소 1조 5천억의 현금이 필요하다.
지분 전쟁까지 벌어진다면 필요한 금액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혜진아! 미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전통산업과 디지털 산업의 컨버전스가 필수적이 될 거야. O2로 돌아가면서 동시에 미래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야.”
그녀는 윤재의 얘기를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이, 뭔가 큰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왠지 실패하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보니까 알겠더라. 세상이 온통 돈벌이 천지야.”
“이 오빠! 완전 돈 버는 것에 재미 붙였네?”
“우리 내일 비행기 타고 출국할 거잖아? 그것도 모두 돈벌이야!”
“응? 항공사라도 차리겠다는 거야?”
“하하하. 그건 아니고. 비행기 티켓구매. 호텔이나 리조트 등 숙박예약. 현지 렌터카 예약. 관광지에서 즐길 관광 상품을 하나의 사이트에서 원스탑으로 해결해 준다고 생각해 봐!”
“헐.... 생각지도 못했는데, 진짜 그런 사이트 있으면 대박이겠다. 그런데 전 세계에 항공사가 몇 개고, 호텔이 몇 개인데.... 그 모든 걸 하나의 사이트에서 할 수 있다고? 그게 가능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 떼돈을 벌 수 있지. 우리에게는 든든한 파트너들이 있잖아.”
“파트너?”
“그래. 여행하면 누구야? 신장식 형님이 있잖아.”
“헐?!”
윤재는 500원짜리 액면가의 스타트 업을 열 개든 스무 개든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모두 대박을 낼 아이템들!
15년 뒤의 미래를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최소 5년은 앞서 시작할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일부 스타트 업은 지분 매각해 자금을 동원하고, 일부는 미래의 성장 동력으로 삼을 생각.
윤재는 자신의 앞에서 밥을 먹고 있는 혜진이가, 빌게이트의 부인이나 제프 베조스의 부인처럼 머지않아 억만장자의 아내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