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30화 (130/196)

show me the money

2004년 1월 17일 토요일.

아직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기 전인 관계로, 대다수 중소기업은 토요일에 출근해야 했고, 미소천사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윤재는 퇴근 직전, 미소천사 은행 남광주점을 찾았다.

“다들 퇴근한 모양이구나?”

“예. 토요일 점심 먹고 나면 다들 자연스럽게 퇴근하고 있습니다.”

미소천사 은행 본점은 과거와 2가지 포인트가 달라졌다.

하나는 건물 일부를 임차에서 한 층을 통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재만의 공간이 새로 생겼다는 정도였다.

시중 은행보다는 비싸지만, 사채업자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싼 금리.

금과 금 상품에 투자하면서 부대수입을 챙겨온 덕분에, 남광주점과 양동점 모두 연간 2억원 수준의 순이익을 올리고 있었다.

누가 볼 사람도 없건만 사장실 문을 굳게 닫은 뒤 동재와 마주 앉았다.

“동재 네 표정을 보니 사업이 궤도에 올랐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헤헤. 이게 다 형님 덕분이지 뭐야.”

“설날이 내일 모레라 내려오긴 했지만, 동재 너랑 꼭 상의해야 할 일이 있어.”

동재가 살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백수가 된 사촌형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좋은 소식이니까!”

“긴장이라니. 아니야. 형! 내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2004년 1월5일 차태영은 외국환은행장으로 공식 취임했다.

그와 사전 협의한 내용은 미소천사 은행 식구들과도 관련된 내용이었다.

“현재 미소천사 은행 직원들 중에, 외국환 은행으로 복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차태영 회장님께서 모두 받아주기로 하셨다.”

“정말이야?”

“응!”

메이저 은행에서 쫒겨나, 시장바닥에 2년을 뒹군 사람들이다.

악착같은 생존본능을 검증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원래 외국환은행의 직원들이었으니, 복직시킨 다음 뭘 하게해도 잘 할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박봉에 고생 많이 했는데, 다들 좋아하겠네.”

동재의 표정이 아주 밝아졌다.

짧지 않은 시간 동고동락한 사람들!

그들에게 희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장으로서 큰 기쁨이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니?”

“나?”

“너도 외국환은행 출신이잖아.”

“나야... 뭐. 내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조 일을 했던 것도, 모두 정치권 입문이라는 목표 때문이었다.

동재의 말투와 몸짓에서 강한 의지가 읽혔다.

만류한다고 말려질 것 같지 않았다.

“외국환 은행 출신이 아닌 사람들까지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냐. 형! 박봉이지만 다들 나름 회사 생활에 보람과 긍지가 있어! 빈자리 채워서 함께 열심히 해 볼 생각이야.”

“하하하. 파이팅이 좋네. 그래서 말인데.... 베테랑들이 복직해 버리면, 미소천사 은행에 구멍이 날 수 있어!”

“확실히 빈자리가 제법 클 것 같긴 해! 그렇다고 더 좋은 곳으로 가겠다는 사람들 말릴 수는 없고.”

“내가 니 밑으로 들어가서 틈을 좀 매울까 하는데.”

“엥? 말도 안 돼! 형이 최대주주인데 사장을 해야지.”

“아냐. 미소천사 은행은 엄연히 너를 위한 컨텐츠야. 나는 밑에서 본부장 정도 명함 갖고 일 할 생각이다.”

어차피 동재가 바라는 건 정치활동.

업적과 광파는 일은 동재가 하도록 놔두고, 실리는 대주주인 윤재가 챙긴다.

나름 괜찮은 분업이었다.

동재의 컨텐츠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주고, 자신이 돈도 벌 복안을 들려줬다.

“미소천사은행을 말 그대로 천사은행으로 만들까 생각중이다. 서민금융이라는 축에, 엔젤 투자라는 축을 하나 더 장착시킬까 한다.”

벤처나 스타트 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High Risk High Return을 추구하는 엔젤 투자.

보통사람들에게 고 위험 고 수익이겠지만, 윤재에게 엔젤 투자는 저 위험 고 수익모델이었다.

“미소천사 은행 산하에 엔젤 투자 사업부를 신설하고, 내가 사업부장이나 본부장을 하면 어떨까 싶은데....”

“대부업 매출 20억에 이익규모가 1억 정도인 회사에, 엔젤 투자는 너무 큰 거 아냐?”

“그러니까 High Risk지! 미소천사 은행이 소액신용대출의 사업모델을 넘어, 한국 최고의 벤처 캐피탈로 탈바꿈할 모습을 상상해 봐라.”

“....”

“한국 마이크로 크레딧의 아버지 김동재! 한국 벤처캐피탈의 대부 김동재! 엄청난 컨텐츠 아니냐?”

동재 역시 윤재가 실현시킨 마법 같은 일들을 이미 여러 차례 목격했다.

미소천사 은행을 설립했고, 금 투자로 안정적인 성장을 가능케 도왔다.

그 뿐인가?

고문으로 활동해 온 차태영을 외국환은행 CEO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설마 이런 일들이 가능하겠어?’

윤재의 행보마다 동재는 반신반의 했지만, 보란 듯이 모두 현실로 만들어 낸 형이었다.

동재는 지금 이 순간도 물음표를 지우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기존 주주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동재의 질문 뉘앙스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지분 정리하고 싶은 사람들은 팔아 라고 해! 내가 인수할 테니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냥 보유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나중에 지분 가치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커질 테니까!”

“알았어. 형!”

이 형님의 상상력과 포부의 끝은 어디일까?

몇 년 전 닷컴 버블 때 돈방석에 앉았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동재는 불연 듯 외국환은행으로 복직할 사람들이, 오히려 기회를 잡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벌려놓은 일들이 많아. 앞으로 할 일도 그만큼 많고. 미소천사에서 풀타임으로 일할 수는 없을 거다.”

“형님이 합류해 준 것만 해도 고맙지!”

미소천사 은행의 대주주에다 능력까지 뛰어난 사람.

자신의 자리를 빼앗겠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욕심 없이 밑으로 들어오겠다는 윤재였다.

동재는 자신의 속 좁음을 다시 한 번 반성했다.

“내일은 작은 아빠랑 남재 데리고 목욕탕이나 가자! 설날도 다가오는데 떼 좀 빼고 광 좀 내야지?”

그렇게 해서 윤재는 채 2개월이 되기 전에 백수를 탈출했다.

비록 미소천사 은행의 엔젤투자 사업부장 타이틀이었지만, 대기업의 안정된 직장도 박차고 나온 그에게 명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          ◈          ◈

설날을 맞아 작은 집에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52 Corp의 관계자들을 흔쾌히 초대해 준 작은아빠 내외가 고마울 따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올 줄 알았으면, 더 큰 집을 살걸 그랬다!”

“그러게요. 작은 엄마. 60평대로 이사 가야겠어요!”

2층 양옥 허름한 집에서 30평대 아파트로 이사한 작은 집.

52 Cafe 바리스타 겸 수석 파티세인 작은 엄마.

일출건설 공동대표 작은 아빠.

미소천사 은행의 대표인 동재와 52Farm의 수장인 남재 까지.

전생과 180도 달라진 작은 집 식구들을 보고 있자니,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떡국은 내일 각자 집에서 드셔야 할 것 같아, 만둣국을 준비했어요. 맛있게들 드세요!”

52 Cafe의 고도윤 사장과 그의 부인 송진영.

백화점 동료들인 창진.장식. 혜진과 선희!

10여명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예전 집은 5명만 모여도 비좁았는데, 10명이 둘러 앉아도 여유가 느껴졌다.

“그나저나 윤재 너는 혜진이랑 결혼 안 할거 야?”

떡국을 먹으며 장식이 형이 물었다.

“응! 올해가 가기 전에는 해야지. 일단 백수부터 탈출하고!”

2004년이 가기 전에 결혼하자고 혜진이와 이미 약속했다.

장인어른은 백수 됐다고 구박했지만, 말로만 그럴 뿐 윤재를 사위 이상으로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청난 재산과 사업체를 일궜음에도, 항상 검소했고 부자라는 것을 티내지 않았다.

그리고 한 결 같이 혜진이를 아끼고 사랑했다.

처갓집에 고가의 선물과 립 서비스를 하지 않더라도, 윤재의 말과 행동은 자연스럽게 신뢰감을 줬던 것이다.

“설 끝나면 혜진이랑 이탈리아에 좀 다녀올 계획입니다.”

“이탈리아? 신혼여행 미리 가게?”

“하하하. 아네요. 비즈니스 차원에서 가는 거에요. 물론 머리도 좀 식힐 생각이구요.”

장식과 얘기를 하면서 윤재는 고도윤 사장에게 눈빛을 보냈다.

고사장의 영역과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는 것이다.

윤재는 대주주인 자신이 고사장이나 동재, 남재의 영역을 넘지 않도록 항상 조심했다.

“작년 한해 52Cafe가 매입하거나 임차한 건물들이 꽤 있습니다. 모두 4층 이상 되는 건물들이죠. 그 건물 3층에 이탈리아식 피자가게를 입점 시킬 생각입니다.”

“이탈리아 피자?”

“네. 화덕에서 굽는 나폴리 스타일 피자가게를 Cafe 3층이나 4층에 입점 시키는 거죠. 52 Cafe는 임대료 수입이 발생하고, 피자가게는 피자 팔아서 돈 벌수 있죠. 서로 시너지도 발생할 겁니다.”

옆에서 조용히 떡국을 먹고 있던 동재의 눈이 제일 커졌다.

“형! 은행일은 어떡하고, 갑자기 피자야?”

동재의 문제제기에 창진도 끼어 들었다.

“아니. 천재적인 투자가께서 대진증권 팀장자리를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하겠다는 일이 피자가게야?”

회사를 그만둔 뒤 윤재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던 수많은 회사 중 대진증권도 있었다. 물론 윤재는 그 제안 역시 거절했었다.

“내가 말했잖아. 할 일이 엄청 많다니까! 피자사업도 그 수많은 일들 중 하나야!”

윤재는 엔젤 투자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매장을 찾아와 정통 이태리 식 피자를 먹는 피자리아 사업.

거기에 미국식 피자를 배달 판매하는 사업까지 동시에 추진할 생각이었다.

백수가 된 이후 구상해 놓은 일만, 어림잡아 10가지가 넘었다.

“일단 이태리 가는 길에 올리버와 에밀리도 좀 만나보고, 주세페도 좀 만날 생각입니다.”

“그 떠벌이에 터프가이 아저씨?”

“네.”

“그 사람 아직도 연락하고 살았어?”

“그럼요. 회사 다닐 때 거래처였고, 태화정밀의 고객이기도 했으니까!”

윤재와 이탈리안들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페레레와 주세페와 윤재가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얘기를 듣고 또다시 놀랐다.

에밀리 캠벨이 영국차트를 이미 점령했고, 미국시장에 본격 상륙했다는 소식은 일행에 더 큰 충격을 안겨줬다.

“듣고 보니 정말 단순히 놀러 가는 게 아니네?”

“네. 죽으면 평생 놀 거니까, 젊어서는 일을 해야죠. 피제리아와 피자배달 판매를 동시에 석권할 생각입니다.”

“헐.... 피자헛이 피자헐 할 소리네!”

“선희야! 두고 봐. 52 피제리아는 작지만 강한 피자전문점으로 키우고, 52 피자는 도미노와 피자헛을 능가하는 업체로 키울 테니까!”

“금연이나 다이어트 같은 새해 목표만 듣다가, 윤재오빠 목표 들으니 조금 스펙터클하긴 하네!”

처음에는 농담 반 진담으로 생각했던 사람들!

계속해서 진지모드인 윤재의 얘기에 조금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차차 지켜보시면 알겠지만, 피자에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결합할 생각입니다. 피자 시장 석권의 열쇠죠!”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네. 세상은 조만간 우리가 지켜봤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변하기 시작할 거에요. 그 변화를 먼저 주도하는 사람들이, 승자독식 하는 세상이 곧 열립니다.”

인류가 문명이라는 것을 만든 이래 수 천 년을 이어온 양식이 지난 100년간 엄청나게 변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10년이면 지난 100년보다 더한 변화가 찾아온다.

“형! 그 많은 일들 더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한 거 아냐?”

“하하하. 돈 도 당연히 더 벌어 야지. 근데 나는 돈 걱정은 안한다. 쇼 미더 머니 알지. 스타크래프트 돈 버는 치트키. 그게 나한테 있거든.”

주식. 부동산. 상품 투자. 엔젤 투자. 회사 설립. 새로운 사업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넘쳐났다.

앞으로 급등할 외국환은행의 지분가치와 나머지 투자 회사들.

보유한 현금성 자산과 부동산까지...

이미 수천억을 넘어선 현재!

이제 윤재는 슈퍼개미 정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주식이나 파생상품, 상품거래소 투자 등을 지속할 계획이었지만, 이제 한 단계 다시 도약할 시점이었다.

떡국을 다 먹어갈 즈음, 작은 엄마가 말했다.

“다들 설날 앞두고 일 얘기만 할 거야? 자 이제 그만들 하시고, 상 치운 다음에 윷놀이나 한판 합시다. 52 패밀리 단합을 위해서!”

작은 엄마의 성화에 비즈니스 얘기는 일단 중단해야 했다.

“작은 엄마! 저희가 과일 깍아 올 게요.”

눈치 빠른 혜진과 선희가 부엌으로 달려갔다.

회사를 그만둔 허전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화목한 가족.

믿을만한 동료들!

그리고 사랑스런 여친 까지.

진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