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돈벌이 천지.
어김없이 발 없는 소문은 천리만리를 날아갔다.
회사를 그만두자 오히려 윤재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김윤재 영입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윤재! 잘 됐다. 이태리로 건너와. 나랑 같이 일하자! 대우는 업계 최고 수준으로 해줄게!”
윤재에게 스카웃 제의를 첫 번째로 한 외국인은 바로 올리버였다.
헤드헌터 업체에 등록하지도 않았건만 러브콜은 계속됐다.
“당신처럼 유능한 사람과 함께 일 한다면, 세계 최고의 사모펀드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연봉 3억과 성공 인센티브 5%를 드리겠소.”
KS그룹과 치열한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소더버그 측에서도 윤재를 찾아와 달콤한 제안을 했다.
1조원짜리 딜을 성공시키면, 인센티브만 500억이라는 얘기였다.
금전적으로 가장 탁월한 조건이긴 했다.
“글쎄요. 굳이 당신들과 함께 일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미스터 윤재. 우리와 함께 한국기업 투명성 제고에 앞장섰습니다. 주주들과 고객들이 좋아하는 기업문화 만들어 나갈 수 있잖습니까?”
“하하하. 나치와 히틀러도 강한 독일 건설이라는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죠!”
윤재는 소더버그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스스로 투기자본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해외 악덕 투기자본과 손을 잡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해외에서 구애한 곳 중에 가장 적극적인 회사는 단연코 매크로소프트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번에도 사티마 아델라가 윤재에게 연락했다.
그동안 아델라의 회사 내 직급은 2단계나 상승해 있었다.
“보스께서 당신을 원하신다. 연봉 50만 달러에, 스톡옵션까지 주겠다고 하던데. 어떤가? 이 정도 파격적인 제안은 좀처럼 나오지 않아.”
그는 한사코 윤재를 만나러 한국에 오겠다고 했고, 오지 말라고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어쨌든 윤재는 해외에서 날아온 모든 오퍼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해외의 오퍼뿐만 아니라, 창진의 직장인 대진증권을 포함한, 국내의 수많은 회사와 업체도 러브콜을 보냈다.
심지어 상주 골프클럽 주인이 된 이재민 사장도 윤재와 같이 일하고 싶어 했다.
윤재는 국내의 오퍼 역시 모두 거절했다.
“오빠! 그동안 잘 살아왔나 봐! 함께 하자고 연락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말이야.”
학사출신 백조가 된, 혜진이 윤재의 팔에 안겨 했던 얘기였다.
최근 윤재와 혜진은 서울 집에서 사실상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스카웃 제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2가지는 따로 있었다.
하나는 KS그룹이었다.
여전히 똥줄이 타 있는 상태인지라, 정민수 사장이 직접 윤재를 찾아왔다.
“회사에서 잘렸다고?”
“하하하. 잘리긴 누가 잘립니까? 제 발로 나왔습니다. 강간범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강간범? 누구 오진탁이?”
“....”
“허허. 당돌한 친구인줄 알았지만, 역시 거침이 없군.”
“강간범 얘기는 됐습니다. 찾아오신 용건이 있을 텐데요?”
“어떤가? 우리 회사로 들어오게. 최고 대우를 보장하지.”
“제가 아니라, 제가 갖고 있는 ㈜KS 지분이 필요하신 거겠죠.”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네. Yes 인가 No 인가?”
“No입니다. 사장님께서는 제게 제안을 하실 처지가 아닐 겁니다. 거꾸로 제 제안에 대한 답변이나 해 주십시오. 데드라인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참고로 이틀 전에 소더버그 피터 대표 만났다는 사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윤재 입장에서는 꽃놀이 패!
소더버그도 KS도 모두 윤재의 지분을 탐하고 있다.
버티면 버틸수록 몸값은 올라가기 마련이었다.
소더버그와 피터 얘기에 정민수가 기겁을 했다.
그는 윤재의 제안을 서둘러 검토하겠다며 허겁지겁 돌아갔다.
윤재는 그렇게 KS그룹의 영입제의도 거절했다.
최소 3년 이내에, 정민수 사장은 물론이고 오진탁 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을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재벌 집 아들이라는 이유로, 윤재를 한 등급 아래로 보는 정민수가 어처구니없을 따름.
마지막으로 윤재에게 오퍼를 위해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장동석 부문장이었다.
“윤재 오랜만이다.”
“반갑습니다. 상무님!”
각자 신사업지원팀과 강원부문으로 발령 났지만, 장동석과는 골프장에서 라운드를 즐기기도 했다.
팀장이 된 오석진과 차명수 대리와 함께, 골프를 치는 것은 장동석의 낙중의 하나였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인 것이다.
“회장님께서 보내신 모양이군요.”
“....”
“저 때문에 상무님만 괜히 불편해 지셨군요. 죄송합니다.”
“아니다. 니가 잘못한 게 없으니까.”
가장 약한 고리를 공략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오재준의 의지가 읽혔다.
아들의 자존심을 세우면서도, 윤재를 회사에 잡아두고 싶은 것이다.
회사 내부에 장동석과 윤재의 관계가 가장 돈독하다는 건 주지의 사실.
장동석을 이용해 윤재에게 마지막 오퍼를 한 것이다.
“회사로 복귀하라고 하시더구나. 오진탁 전무는 너를 폭행죄로 고소하겠다고 날뛰는 모양이야.”
“기대도 안했지만 사과할 마음이 없나 보군요. 뭐 그럴 인간.. 아니 그럴 새끼라 예상했습니다.”
“....”
“회사로 돌아갈 생각 없다는 건, 상무님께서 더 잘 아실 텐데요.”
“응. 내가 왜 그걸 모르겠냐.”
장동석이 그 답지 않게 말을 아꼈다.
뭔가 곤란한 얘기를 할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회장님께서 오진탁 전무의 사과 대신, 너를 막내사위로 삼고 싶으신 것 같더라.”
최근 자신과 트러블이 있었지만, 오재준에게 윤재는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인재였다.
그는 진심으로 윤재를 놓치기 싫어했다.
마지막 패는 아끼는 막내딸을 이용해, 윤재를 사위로 맞이하겠다는 복안이었다.
“하하하. 상무님! 그 오퍼 역시 제가 받을 수 없다는 것 아시잖습니까?”
“미안하다. 내가 혜진이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상무님! 저는 예나 지금이나 상무님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장동석이 얼굴을 붉혔다.
누구보다 윤재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장동석과 윤재는 마포의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며, 꽤 긴 얘기를 주고받았다.
“상무님! 저는 반드시 회사로 돌아갈 겁니다. 그 때까지 회사 망하지 않게 잘 이끌어 주세요.”
“허허.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겠다는 것이냐?”
“오진탁이 때문에 회사는 망조가 들 겁니다. 그 망나니가 미쳐 날뛰면 날뛸수록, 제게 기회가 올 겁니다. 두고 보세요.”
“....”
“그리고 상무님은 제가 아는 한, 가장 유능하고 도덕적인 O2 임원이세요. 진심입니다.”
“미안하다.”
장동석은 윤재의 성격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오재준의 메신저로 윤재를 찾아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윤재는 그렇게 장동석과 헤어졌다.
늦가을 강변의 밤바람이 제법 쌀쌀했다.
‘이제 회사의 은원관계는 대충 정리됐다. 본격적인 도약에 나설 차례다.’
잃는 게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법.
회사 일. 겸업금지 조항. 빡빡한 업무 강도 등 자신을 옭아매는 많은 것들을 떨쳐냈더니 자유와 기회가 찾아왔다.
52 Corp와 파트너들의 입장에서 보면, 윤재의 퇴사와 자유 신분 획득은 천만대군이 따로 없는 것이었다.
◈ ◈ ◈
2004년 1월.
윤재는 20대와 작별하고 서른 살이 됐다.
청년이라고 불리는 게 어색한 나이가 된 것이다.
해가 바뀐 2004년 1월에 큼지막한 사건이 2가지 일어났다.
하나는 오랜 밀당 끝에 윤재가 ㈜KS지분 전량을 매각한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차명수의 부친, 차태영이 외국환은행의 새로운 CEO로 임명된 것이었다.
먼저 윤재는 KS의 백기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오성전자에 블록딜을 단행했다.
KS텔레콤에 자사가 만든 핸드폰을 대량으로 판매해 왔던, 오성전자는 KS그룹과 돈독한 관계가 필수였다.
주당 4만2천원! 시세보다 20%가량 비싼 가격.
모르는 사람들은 비싸게 주고 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성그룹 미래 전략실이 어떤 곳인가?
전생에서 소더버그의 공격을 물리친 ㈜KS는 4개 회사로 분할되기 전에, 10만원 넘게 오른다.
오성그룹 미래 전략실 입장에서도 나쁜 투자가 아닌 것이다.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는 윤재라고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4만 2천원에 블록딜을 단행한 이유가 있었다.
“혜진아! 축하한다. 이제 윤재 형은 2천억이 넘는 자산을 가진 준재벌이 됐어!”
블록딜 성사 후 현금을 확보한 윤재는 창진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학사출신 백조인 혜진과 선희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혜진 역시 백수가 된 이후 윤재와 함께하다 보니, 이제 윤재의 재산 상황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이러다 진짜 오빠가 준 약속어음 현실화 되는 것 아냐?”
“하하하. 그거 아직도 부도 안냈어?”
윤재와 혜진의 약속어음 얘기를 전해들은, 창진과 선희도 배꼽을 잡고 웃었다.
창진, 혜진, 선희는 한 참 웃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웃음을 멈췄다.
“그런데, 진짜 약속어음 현실화 되는 것 아냐? 벌써 2천억이라며?”
“에이... 설마!”
현금성 자산만 2,100억 정도를 갖게 된 윤재.
나주와 세종시의 땅값도 1년 만에 5배 넘게 올라 있었다.
52 Cafe와 미소천사 은행은 흑자 기조를 이어갔고, 52 Farm도 순수 영업활동에서는 흑자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형! 아직 KS랑 소더버그랑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인데 왜 판 거야? 나랑 내 고객들에게는 들고 있어 라고 했잖아.”
“어쩔 수 없었어.”
“뭐야? 나 모르는 이유가 또 있는 거야?”
창진의 얘기에 혜진과 선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재를 바라봤다.
3명이 윤재의 답변을 촉구했다.
“응. 이 마당에 내가 뭘 더 숨기고 말고 하겠니.”
윤재는 갖고 있으면 앉아서 돈을 벌어줄 ㈜KS 지분을 팔아치운 얘기를 들려줬다.
“워렌 버핀이 외국환 은행 지분 인수한 것 알지? 버크셔 해서웨이가 취득한 51% 지분 분, 군인연금을 포함한 기금이 21.5%, 내가 4%를 투자하기로 했거든.”
“4%? 4%면 돈으로 얼마야?”
“대략 1,100억 정도 된다.”
“세상에나!!”
개인이 은행에 투자할 수 있는 최대한도에 맞춰 4%를 취득키로 했고, 대금납부를 위해 ㈜KS 지분을 판 것이다.
어쨌든 KS 정민수 사장과 밀당을 하며 버틴 덕에, 당시보다 2배 넘은 돈을 벌 수 있었다.
1천억을 중심으로 밀당하다 2천억을 벌게 된 만큼, 윤재는 인터넷 포털 메이트에 대한 매수 권리는 요구하지 않았다.
KS그룹의 애물단지가 될 것이 뻔한데, KS는 메이트에 들어간 Sunk Cost를 아깝게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필요한 게 메이트였어. 자유인이 된 내게 더 이상 메이트는 필요치 않다. 회사를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백수가 된지 벌써 2개월이 흘렀다.
그 동안 틈틈이 주식과 선물옵션을 해왔고, 주주로서 52 카페와 Farm, 미소천사 은행에 대한 일들도 챙겨왔다.
윤재는 고도윤. 김동재. 김남재 등 경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도 결코 잊지 않았다.
“형 말 대로면 대충 1천억 정도가 여유자금으로 있는 거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이야?”
“김우중이 말했잖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방구석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에 온통 돈벌이가 널려있더라.”
“형! 돈 벌 때는 알지? 나와 내 고객들도 잊지 않는 것 말이야.”
“오빠! 나도 나도~ 잉!”
창진과 선희가 전에 없던 애교를 부렸다.
“하하하. 걱정마라! 나는 너희들을 인생 파트너라고 생각하니까!”
“피... 그럼 혜진이는 뭐야?”
선희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물었다.
“혜진이는 내 와이프지!”
“아잉. 몰라.. 오빠는!”
일단 외국환은행 투자 문제를 정리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본격적으로 52 Corp를 키워나갈 생각이었다.
갑자기 오진탁이 은인으로 느껴질 정도로 기분이 상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