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28화 (128/196)

이런 백수 없습니다.

회사에 들어올 때 윤재를 알아 준 사람은 장동석 팀장 한명에 불과했다.

회사를 다닌 지 약 3년 4개월!

그 동안 윤재는 자신이 계획했던 것 보다 훨씬 거물로 성장했다.

1천억이 넘는 그의 자산을 말하는 게 아니다.

회사 내에서 그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오재준 회장이 사위로 삼겠다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잡으려 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큰 아들 오진탁은 미덥지 않은 수준도 안됐고, 큰 딸 오하루는 탁월했지만 품을 떠났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것을 지키는데 급급하고, 막내딸은 너무 어렸다.

“고졸 계약직 새끼에게 무릎을 꿇을 바에는, 목숨을 끊겠습니다. 아버지는 하루만 예뻐해서 제게 상처를 주시더니, 이젠 근본 없는 월급쟁이 때문에 제게 상처를 주겠다는 겁니까?”

갈등을 거듭하다 오재준은 큰 아들에게 사과할 것을 지시했다.

그 때 돌아온 오진탁의 답변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재벌 회장 체면에 막내딸과의 결혼도 거부한 윤재에게, 더 이상 저자세를 유지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결국 윤재는 11월30일자로 퇴직하게 됐다.

“김윤재 그 새끼에게 송별식 같은 것 해주는 인간들은 모두 모가지야! 모가지! 알았어?”

오진탁은 영업본부의 조직장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영원히 정신 차릴 가능성이 없는 놈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미래전략실에서, 친 김윤재 인사의 List를 관리한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진짜 상 또라이가 따로 없었다.

오진탁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윤재의 퇴진을 아쉬워했다.

전화와 문자가 빗발치는 바람에, 전화를 꺼둬야 할 지경이었다.

차명수. 오석진 등 광주에서 영업을 함께했던 동료들부터, 거래처 사장님이나 관계자들은 윤재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계속 전화를 걸었다.

“오진탁 그 미친놈이 회사를 떠나야지! 윤재 자네가 회사를 떠나면 어떻게 하나?”

“우리는 윤재 자네 회사에서 커 나가는 모습 보고 싶어서, O2 대리점 차린 사람들인데. 서운해서 어쩌나?”

윤재의 퇴진을 아쉬워하고, 윤재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내용들이었다.

한송이. 백현민을 중심으로 한 입사동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간혹 홧김에 자신들도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사람까지 있어, 윤재는 그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오진탁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신사업부문은, 조촐한 퇴직기념 행사를 열어줬다.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내가 참석하면 조직적 항명으로 보일 수 있으니, 나는 송별식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대신 팀장들에게 잘 얘기해 놨으니 그리 알고.”

“감사합니다. 전무님!”

“김대리 네가 신사업부문에서 1년간 보여준 업적은, 내 평생 잊지 못할 거다.너는 어딜 가나 잘 될 거다.”

“아닙니다. 모두 전무님 리더십 덕분이었죠. 밑에서 일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신사업부문의 수장 류중정은 윤재의 업적을 치하하고, 앞날을 축복해줬다.

40명에 달하는 모든 사람이 송별식에 올수는 없는 노릇.

윤재가 신사업부문의 코디네이터로 전 방위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에, 부문 내 모든 팀이 윤재의 덕을 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4명의 팀장들은 모두 참석하라는 것이 류전무의 오더였다.

그럼에도 신재영 팀장은 끝까지 참석하지 않는 지조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딜 가나 밴댕이 소갈머리인 사람이 있는 법.

반면 19금 사건의 주인공 하진호는 송별식에 참석했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문제는 그 과오에서 교훈을 얻고 변화해 나가느냐, 다시 실수를 되풀이 하느냐의 차이.

그런 측면에서 하진호는 발전이 가능한 사람이고, 신재영은 평생 그렇게 살 사람이었다.

11월 29일 금요일 저녁.

조영우 팀장. 임나영 팀장을 포함해 8명이 모여 조촐한 송별식을 거행했다.

“윤재 대리! 그동안 고생 많았다.”

“맞아! 윤재대리가 우리 부문에서 한 역할이 있는데. 너무 큰 구멍이 나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조영우와 임나영의 말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죄송합니다. 먼저 배에서 내리게 됐네요.”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냐? 선배로서 바람막이가 돼 주지 못해 우리가 미안하지.”

윤재가 앞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들은 진심으로 오진탁의 막장 질에 분개했고, 능력자의 퇴사를 아쉬워했다.

소주잔이 몇 번 돌자 우는 사람도 나왔다.

신미나, 이세영 같은 여직원들의 눈이 충혈 돼 있었다.

“주제넘지만 두 가지 부탁만 드리겠습니다.”

“얼마든지....”

“배가 좌초하게 되면 사람들이 마구 뛰어내린다고 하잖습니까? 혹시 회사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여기 계시는 분들은 뛰어 내리더라도 마지막까지 버티다 뛰어 내리셨으면 좋겠습니다.”

“허허. 녀석! 회사 그만두는 네가 할 소리냐?”

“그래서 주제 넘는 소리라고.... 하하하.”

윤재의 얘기는 진심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29살의 대리가 아니라, 회귀하기 직전 상무의 심정이었다.

당시 회사는 몰락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었고, 1년 사이에 숱한 인재들이 난파선을 탈출했다.

주로 능력 있는 사람들이 먼저 빠져나갔던 기억이 났다.

“두 번째 부탁은 뭐니?”

“임팀장님께 특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에요. 미나씨랑 세영씨도 마찬가지지만 아직 둘은 어리니까.”

윤재의 두 번째 부탁은 서울에 살 예정인 사람들은 집부터 장만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그 필요성과 이유를 설명해줬다.

“에고! 이렇게 마음씨 착하고, 일 잘하는 직원을 품지 못하고 관두게 하다니!”

임나영이 습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2가지 부탁이라는 것이, 윤재와 이해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참석자 모두 윤재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떠나는 윤재를 더 보내기 싫은 마음이 들었고, 그만큼 무력감이 커졌다.

어쨌든 윤재는 회사를 떠났다.

회사 생활에 한정해 생각해 보면, 3년 4개월 동안 근무하며 직원들과 관계자들을 남긴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어떤 소설에서 얘기했듯이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니까!

◈          ◈          ◈

송별식을 마친 윤재는 12월 2일 화요일 광주로 내려갔다.

3일 동안 서울 집 정리를 했고, 일단 부동산에 내놨다.

혜진과 결혼해 신혼집을 꾸리려면, 더 넓고 좋은 집이 필요했기 때문.

광주에 내려가면 작은 집에도 좀 들리고, 52 카페도 찾아갈 생각이었다.

중간에 군산에 있는 태화정밀기계에도 방문할 생각이었다.

군산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 조영우 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 이 미친놈아!”

“하하하. 팀장님! 아침부터 웬 육두문자에요?”

“이거 뭐야? 이런 건 뭐 하러 남겨놨어? 지금 네가 그럴 때냐?”

“잘 만들었는지 모르겠네요. 그럴싸하면 참고 해 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걸 우리가 어떻게 쓰냐?”

“맘에 안 들면 버리셔도 돼요.”

“미친놈!”

“팀장님! 죄송해요. 운전 중인데 교통경찰이 보여서... 이만 끊습니다.”

윤재는 신사업지원팀 자신의 책상에 봉투를 남겨놓고 왔다.

봉투에는 부문의 중장기 전략에 대해, 윤재가 구상한 스케치 보고서가 담겨 있었다.

조영우는 윤재의 간략한 보고서의 완성도에 한번 놀라고, 회사를 떠나면서도 부문의 중장기 전략을 걱정하는 윤재의 마음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는 윤재의 빈 책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에 엄청나게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았다.

‘언젠가는 돌아갈 회사인데, 속절없이 망해버리면 안 되니까!’

윤재는 조팀장과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류전무에 의해 쓰일지 어쩔지 모르는 일이지만, 부디 신사업부문도, 회사도 망하지 않고 버텨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          ◈          ◈

군산 태화기계에 도착하자, 김민기 사장이 윤재를 반갑게 맞았다.

“갈 곳은 정했니? 갈 데 없으면 나랑 일해도 좋은데....”

김민기 사장이 쭈볏거리며 눈치를 봤다.

대기업을 다녔던 인재에게, 자신의 회사는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제가 들어오면 형님 불편해서 안돼요. 하여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웬일로 왔니?”

“왜 오기는요? 형님 보러 왔죠!”

윤재가 태화기계를 찾아온 이유는 비즈니스 문제도 있었지만, 김사장의 부인 때문에 찾아온 이유가 더 컸다.

3주 전 김민기 사장의 부인이 위암수술을 했던 것이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김민기 사장도 얼굴 살이 쏙 빠져 있었다.

위암 1.5기 정도였고, 위를 절반가량 들어냈다고 했다.

다행히 조기 발견이었다.

김민기 사장 부인은 퇴원해 집에 와 있었고, 앞으로 6개월 정도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건 뭐냐?”

“그냥 내려오는 길에, 천안에서 호두과자 좀 사왔습니다.”

“빈손으로 와도 된다니까, 매번 이런걸 사오면 내가 불편하지.”

“하하하. 형님 말고, 직원들 먹으라고 사온 거 에요.”

윤재는 김사장이 부담 갖지 않도록, 매번 이런 식으로 눙치고 넘어갔다

“점심은 어떻게 할래?”

“형님 사무실에서 짜장면이나 시켜서 먹죠!”

“그럴래?”

태화기계 사무실에서 짜장면 시켜 먹는 것은 이제 패턴이 돼 있었다.

조금은 불어터진 짜장면도 김민기와 먹으면 확실히 맛이 있었다.

짜장면을 먹으며 비즈니스 얘기를 했다.

“매직 홀 용기 반응 어때요?”

“얘기했던 것처럼 아주 좋다. 현재 하루 5천개 정도 생산가능한데, 수요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주문을 맞추지 못할 지경이야.”

꿀단지에서 꿀이 줄줄 흐르는 걸 보고 생각해 낸 매직 홀 용기.

바깥쪽으로 튀어 나온 게 아니라, 용기 안쪽으로 홈을 판 게 특징인 매직 홀 용기.

용기 밖과 안의 기압차로 인해 짜고 나도, 내용물이 묻거나 흐르지 않았다.

꿀은 물론이고, 케첩, 마요네즈, 액상 초콜릿 같은 걸 집어넣고 짜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품이었다.

이미 특허등록까지 마친 매직 홀 용기는, 태화기계에 제법 큰돈을 벌어줄 예정이었다.

윤재도 이제는 태화기계의 고객이 아니라, 엄연한 주주였다.

6개월 김민기 사장에게서 지분 일부를 취득했다.

“일단 남서벌꿀과 납품계약을 마쳤다. 그리고 케첩과 마요네즈 회사 등에서도 계속 오퍼가 들어오고 있어!”

“잘 됐네요. 공장 증설도 일정대로 추진해 주세요!”

“그래. 알았다.”

“해외 바이어들 주문도 가능할 겁니다. 공장 증설이 그래서 중요해요.”

비즈니스 얘기는 끝났다.

태화기계를 찾은 가장 중요한 목적이 남아 있었다.

“형수님은 어떠세요?”

“응. 다행히 딸이 휴학하고 엄마를 지키고 있어.”

형수를 끔찍이 아꼈던 김민기 사장.

만약 딸이 없었다면 공장 일에 김사장이 집중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

“온 김에 형수님 얼굴이라도 보고 가려고 하는데.”

“마누라가 자기 모습 보이기 싫어할 건데....”

김사장 부인을 직접 만나 위로하고 싶었지만 형수도 여자였다.

위암 수술로 살이 형편없이 빠진데다, 집안에서 환자로 살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알았어요. 잠시 만요...”

“왜? 어디 가게?”

“아네요.”

윤재는 김민기 사장의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소나타로 돌아갔다.

위암환자에게 좋다고 해서, 무릎담요와 모자를 준비했다. 그리고 100만원이 담겨 있는 봉투와 50만원이 담겨있는 봉투를 준비해 왔다.

하나는 형수님, 작은 봉투는 그 딸을 위한 것이었다.

자동차 핸들의 에어백 자리에 대고 편지를 한 통 썼다. 바닥이 평평하지 않았기에 글씨는 형편없었지만, 윤재는 진심을 담아 편지를 썼다.

윤재는 다시 김사장 사무실로 돌아갔다.

“형님! 이거 약소하지만 꼭 받아주십시오. 이거 안 받으면 저 형님 안 봅니다.”

“뭐 하러 이런 걸 가져왔어. 네가 우리 부부 도와준 게 얼마인데...”

김민기가 봉투를 확인하고 깜작 놀랐다.

“내가 형님보고 이런 줄 알아요? 다 형수님 보고 그러는 거지. 이건 예린이 전해주고.”

한사코 뿌리치는 김사장에게, 준비해온 선물과 봉투 2개를 모두 전달했다.

“형님! 위암 1기는 아무것도 아네요. 꼭 형수님이랑 예린이랑 같이 이겨 냅시다.”

윤재는 자기보다 나이가 20살 가까이 많은 김민기 사장을 꼭 안아줬다. 김민기 사장의 어깨가 흔들리는 게 느껴져, 윤재도 살짝 목이 메어왔다.

“형님! 위암 1기는 요즘 같으면 병도 아니에요. 힘내요! 저 갑니다. 또 보게요!”

“그래. 고맙다.”

“다음 달에 한번 찾아뵐게요. 특허랑 신제품 등 형님이랑 상의할 일이 많습니다.”

윤재는 태화기계를 나와 광주로 향했다. 윤재의 소나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 김민기 사장은 사무실에 들어와 윤재의 편지를 읽었다.

[ 형수님!

민기 형님 3번째 만났던 날 형수님이 집에서 끓여준 김치찌개 맛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형수님 꼭 위암 이겨낼 거라 믿어요. 내가 6개월 뒤에 형수님 집에 다시 놀러 갈 테니까, 그 때 꼭 김치찌개 끓여 주셔야 합니다. 알았죠?

저는 종교가 없는 놈인데, 매일 밤 자기 전에 형수님 병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꼭 완치해서 만납시다. ]

윤재가 소나타 핸들에 갈겨쓴 편지의 내용이었다.

김민기는 눈자위를 훔쳤다.

‘회사 관둬서 마음도 심란할 텐데.....’

김민기는 윤재가 사라져 버린 아스팔트를 다시 바라봤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나를 이렇게 챙기다니! 윤재 저 녀석은 진짜 대성할 거야! 애시 당초 O2 푸드 정도의 회사가 품을 그릇이 아니었어.’

나이는 자신보다 훨씬 어렸지만, 김민기는 윤재가 거인 같다고 느꼈다.

아이디어. 추진력. 인재를 알아보는 눈.

이 모든 것보다 중요한, 온기가 흐르는 마음씨.

힘들게 하루를 버티고 있는 아내에게, 윤재의 편지는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그 역시 투지와 용기가 꿈틀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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