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27화 (127/196)

루비콘 강을 건너(2)

‘이런 짓거리 안하고 기업경쟁력 강화에 힘 쓴다면, 회사는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될 거다.’

장안구 광교산 기슭에 자리한 저수지를 따라 5분정도 산길을 올랐다.

사유지임을 표시하는 경고판과 무인경비 시스템이 눈에 들어왔다.

O2 홈쇼핑 명의로 구입한 광교산 언저리 산 10만평.

그곳에 지은 대지면적 300평짜리 갤러리.

수천억을 쏟아 부어 세계의 명화들과 예술품을 사들였지만, 정작 갤러리에는 일반인들은 출입도 못했다.

그런 짓거리 자체도 한심했지만, 그곳을 21세기 아방궁으로 만든 오진탁이 더더욱 한심할 따름이었다.

윤재가 임프레션 갤러리에 앞에 도착하자, 보안용역업체 직원들이 출동해 입구를 막고 있었다.

사유지로 윤재가 접어들자 보안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다.

소나타에서 내려 온몸의 집중력을 끌어올리자, 4층 펜트하우스에서 떠드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문 열어라! 다른 년들은 나를 보면 서로 몸 바치겠다고 난리인데, 너는 부끄러움이 많은 모양이구나. 이런 귀염둥이 같으니라고.”

오진탁이 술에 취한 건지, 약에 취한 건지 모를 목소리로 떠드는 게 들렸다.

그의 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허! 험한 꼴로 끌려 나오지 말고 곱게 하자니까. 한강에 배 지나가기다. 내가 너하고 결혼이라도 하자는 줄 아느냐?”

상황으로 봤을 때 목욕탕 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혜진은 약기운에서 깨어난 뒤, 샤워하고 오겠다며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근 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윤재가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윤재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다.

“노팀장! 안 되겠어. 집안 열쇠 좀 찾아와.”

“네. 실장님!”

목욕탕 열쇠를 찾고, 오진탁이 문을 강제로 열 때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서둘러야겠어.’

윤재가 갤러리 입구로 다가서자, 보안용역업체 직원들 4명이 윤재를 가로막았다. 건장한 사나이들이 윤재를 보고 각기 한마디씩 했다.

“어이! 술주정은 집에 가서 해. 여기가 어딘지 알고.”

“뭐하냐 애들아! 적당히 마사지해서 쫒아 버려.”

“예. 팀장님!”

프로레슬링 선수나 씨름선수 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보안용역 직원들이 윤재에게 다가왔다.

“니들이 무슨 죄겠냐만, 나한테 시간이 별로 없다. 깨어나거든 좀 나은 주인을 찾아 봐!”

충혈 된 눈으로 보안용역 직원들을 훑어 본 윤재.

이윽고 그의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빡! 퍽! 쿵! 떡!”

원샷원킬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보다.

윤재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그 큰 덩치들이 손 한번 제대로 못 써보고 고꾸라졌다.

팀장으로 보이는 놈의 허리춤에서 보안키를 찾아, 입구 문을 열고 갤러리로 들어섰다.

‘씨발! 좆같은 취미 하고는....’

갤러리 엘리베이터는 온통 금빛이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며 윤재는 생각했다.

‘일반인들 출입도 못하는 갤러리에, 이따위 호화로운 치장을 해놓고 향락이나 즐기고. 이 돈과 노력을 연구개발에 사용하거나, 직원들 복리후생에 이용할 생각은 안하고 말이야. 개새끼! 너는 뒈졌어.’

◈          ◈          ◈

윤재가 펜트하우스로 들어섰을 때, 거실 북쪽에서 오진탁과 노가은은 생쇼를 하고 있었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힘이 쌔?”

결국 목욕탕 열쇠를 노가은이 찾아왔다.

안에서 문고리를 잡고 버티던 혜진!

혜진은 손아귀의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조금씩 오진탁이 당기는 문틈이 커져나가는 찰나!

오진탁의 등 뒤에서 벼락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논다. 씹 새끼!”

윤재의 일갈에 그때서야 인기척을 느낀 오진탁과 노가은.

흠칫 놀라 윤재를 돌아봤다.

“누...구? 그리고 보안업체 직원들은 어디가고?”

“누구는 누구야 이 씹 새꺄! 저 안에 있는 여자, 남자 친구지.”

갑작스런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노가은.

답을 내린 노가은이 윤재에게 다가왔다.

호가호위라고 했던가?

재벌 옆에서 브로커 짓을 좀 하더니, 자신도 재벌 집 처자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노가은이 생각하기에 오진탁은 강했다.

부자집 도련님 같지 않게 파이터 기질이 있는 사내가 오진탁이었다.

건강관리에 엄청난 투자를 했고, 복싱과 주짓수 등을 어려서부터 익혀온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선수들과 스파링을 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실력이었다.

위기에 처한 여친을 구하러 온 평범한 젊은이가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진탁 승리와 조혜진 정복이라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젊은 양반.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여기가 어딘지 알아? 당신 주거침입에, 기물파손으로 콩밥 먹고 싶어?”

노가은이 도도한 표정으로 윤재에게 다가왔다.

“닥쳐! 이 씨발년아.”

윤재는 노가은에게 불꽃 싸다구를 시전한 뒤, 발로 배를 걷어차 버렸다.

넓디넓은 응접실 구석에 노가은이 널 부러졌다.

오진탁은 약 기운이 확 깨는 기분을 느꼈다.

“뭐야? 이 미친 새끼? 어디서 좆밥이 튀어 나왔어?”

그가 거품물고 쓰러져 있는 노가은과 윤재를 번갈아 바라봤다.

“닥쳐 이 개새끼야. 얼른 와서 좀 맞고 끝내자. 너 같은 썅놈의 새끼랑은 1분 1초도 더 엮이기 싫으니까.”

“가만. 너! 어디서 본 놈인데... 누구더라?”

“누구긴 누구야. 니 저승야차다 이 씨발 놈아.”

뇌만 빼면 제법 쓸 만한 오진탁.

준수한 용모에 탄탄한 몸과 운동으로 다져진 실력까지.

그는 스스로의 실력을 자신할 만 했다.

하지만 회귀와 함께 신체능력이 탈 인간 급이 돼있는, 윤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빡! 퍽! 쿵! 떡!”

4마디의 경쾌한 타격소리가 넓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보안경비 요원들과의 차이라면, 오진탁이 윤재의 주먹과 발길질을 4번이나 버텨냈다는 정도였다.

오진탁은 거실바닥이 일어나 자신에게 달려든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너... 뭐.... 뭐야....켁..켁!”

“니 저승야차라니까 씹새꺄!”

윤재는 피를 흘리며 뻗어있는 오진탁을 내려다봤다.

“개새끼! 니가 짓밟은 꽃다운 아가씨들에게 참회하며 살 수 밖에 없을 거다.”

윤재는 오진탁의 거기를 눌러 밟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빡! 퍽! 쿵! 떡! 과는 조금 다른 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          ◈          ◈

윤재는 혜진을 구출해 임프레션 갤러리를 유유히 빠져나왔다.

이곳에 올 때는 몰라도, 돌아갈 때도 음주운전을 할 수는 없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로 경황이 없었던 혜진도, 맑은 공기를 마신 덕에 제법 정신을 차리게 됐다.

“근데 나 이렇게 된지 어떻게 알았어?”

그녀는 아직도 윤재가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 기적 같다고 생각했다.

“선희가 전화해 줘서 알았다. 그리고 선희 전화 아녔어도 널 찾아냈을 거야. 운명이란 그런 거니까.”

20분 정도 내려오자 마을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사이 윤재와 혜진은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공유했다.

“그나저나 그 색마. 오빠 회사네 오너 아냐? 자기가 O2그룹 후계자라고 하던데.”

“응. 어쩌다 그런 잡놈이 나왔나 모르겠다.”

“오빠한테 피해 주는 거 아닐까?”

“걱정 마. 재벌 집 후손이라는 거 빼면 내세울게 없는 놈이니까!”

윤재는 혜진을 목욕탕에서 꺼낸 뒤, 핸드폰으로 동영상 녹취를 모두 했다.

혜진과 노가은의 증언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다음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노가은과 오진탁.

윤재는 그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 말했다.

“노가은씨! 몇 대 더 처 맞고 얘기할 건가? 아님 좋은 말로 할 때 얘기할래?”

“좋게 얘기하겠습니다.”

화려한 외모와 끝내주는 몸매 덕에, 나름 곱게 살아왔던 노가은.

오늘처럼 화끈하게 처 맞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임프레션 갤러리 펜트하우스에서 벌어진 일들과, 오늘 혜진의 일에 대해 모두 털어놨다.

반면 오진탁은 끝까지 함구했다.

노가은에 대한 배신감 때문인지 부들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은 못할 것이었다.

윤재에게 처참하게 발렸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 자체가 불명예일 테니까.

마침내 큰 길이 나타났고, 차량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회사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그게 더 걱정돼. 오빠!”

“걱정할 필요 없어. 오진탁이 무릎 꿇고 혜진이 너와 선희에게 사과한다면, 까짓 거 회사 생각해서 조금 더 다녀주지 뭐.”

“괜찮겠어? 회사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한 사람이 오빠였잖아?”

“하하하. 회사는 회사고 오진탁은 오진탁이니까. 나는 회사보다 두고 온 내 소나타가 더 걱정된다. 홧김에 오진탁이 못으로 긁을까 봐!”

“깔깔깔. 내가 미쳐!”

혜진이는 완전히 불안과 긴장을 털어낸 표정이 돼 있었다.

“나는 혜진이 네가 더 걱정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작년엔 운이 좋았어. 강민우 감독을 만났으니까. 하지만 연예계가 원래 이렇게 험한 곳이다.”

“....”

혜진은 말이 없었다. 아빠가 왜 그렇게 자신의 연예계 진출을 반대했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혜진아! 연예계 활동하지 않으면서도, 방송이나 연기 등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돈은 영화나 광고 찍는 것보다 더 벌 수 있을 거야.”

“그런 일이 있다고? 진짜?”

“응. 차차 얘기해 주마. 일단 선희나 만나러 가자.”

혜진과 선희 정도의 실력과 외모에 컨텐츠와 컨셉만 겸비하면, 유투브로 떼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험한 연예계에서 몸과 마음 상해가며 버틸 필요 없는 것이다.

◈          ◈          ◈

회사는 윤재가 ㈜KS 지분을 350억 넘게 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보다 더 시끄러워졌다.

이번에도 윤재에게 우호적인 여론이 더 앞섰긴 했다.

“재벌 3세가 중책을 맡았으면, 미래를 책임져야지 밑에를 책임지겠다고 나서니까 그렇게 된 거 아냐?”

“지난번에도 연예인 지망생 건드렸다가, 수 억 배상했다더니... 얼마나 지났다고. 쯧쯧! 회사 앞날이 캄캄하다. 캄캄해.”

“그런데 윤재 여자 친구가 연예인이라는 게 사실이에요?”

“응. 작년에 백제의 달밤에 출연했다더군.”

“설마? 조혜진인가 그 배우?”

“응. 그렇다고 하네.”

“세상에! 신은 진짜 불공평하구나.”

반면 마이너였지만 윤재를 비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뼛속까지 노예근성이 뿌리박힌 부류라 하겠다.

“어찌 모시는 주군의 아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이도 오전무님이 6살이나 많은데 말이야.”

“근본 없는 고졸 계약직 출신의 한계지. 한계!”

“그 친구 그렇게 안 봤는데, 예의범절이라고는 애초에 없는 놈이었어.”

이런 회사의 분위기 속에서 윤재는 다시 한 번 오재준 회장과 독대하는 자리를 가졌다.

윤재는 본사에 위치한 오재준의 방으로 호출됐다.

㈜KS 지분을 둘러싼 갈등부터, 오진탁에 대한 인식까지!

더 이상 회사를 다니기 어렵겠다는 예감이 윤재를 지배했다.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예.”

“내 큰 아들놈을 묵사발 낸 책임은 묻지 않겠네. 그러니 사표는 거둬들여. 나는 젊은 사람들끼리 그 정도 해프닝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하하. 회장님! 뭔가 착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착각이라고?”

줄곧 평정심을 유지하던 오재준의 눈자위가 꿈틀거렸다.

“회장님! 지금 책임을 묻고,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오진탁 전무입니다. 제 아내 될 사람과, 제 후배를 강간하려 한 사람이 오진탁 전무란 말입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겁니까?”

서민들은 재벌 집 오너에게 강간을 당하면, 성은이라도 입었다고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까?

오진탁 보다야 조금 나을지 몰라도, 오재준도 결국은 스스로를 다른 계급이라 생각하는 재벌이었다.

건널 수 없는 인식의 간격이 느껴졌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몰락해 가던 영업팀을 살리고, 작금의 회사 이름을 만들었으며, 월드컵 때 수백억에 달하는 홍보효과를 누리게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꼬끼오 라면의 대박과 삼오어묵 인수, 날개 돋친 듯 팔리는 페레레 로쉐까지! 모두 누구의 작품이었는지 말입니다.”

“....”

“제게 회사를 세계 최고의 식품회사로 만들 비전과 전략이 있습니다.”

“....”

오진탁의 말이 없었다.

팩트로 뼈를 때리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오 전무에게 진정한 사과하도록 하십시오. 오입쟁이 아들놈을 택하실 건지, 일 잘하는 미래 기수를 택할 건지! 이보다 더 쉬운 문제는 없을 겁니다.”

“뭐? 오입쟁이?”

오진탁을 오입쟁이로 부르자, 오재준은 다시 꿈틀거렸다.

태어날 때부터 재벌이었던 사람인지라, 자신도 그의 아들도 다른 인종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모양.

“오진탁 전무가 제 여친과, 제 후배에게 무릎 꿇고 사죄한다면 사과를 받아들이고, 회사를 계속 다니지요. 조건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자네가 감히....”

“회장님! 표정으로 봐서 진심어린 사과는 물 건너간 것 같군요.”

“자네 여자 친구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고 들었네만.”

“회장님! 제가 회장님 며느리에게 똑같은 짓을 했어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룹을 물려받을 욕심에 눈이 멀어 있는 오진탁은,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재준에게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보고를 올렸었다.

정황상 진실을 알고 있는 오재준도, 애써 아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회장님 큰 아들이 소문난 강간범이란 사실은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동안 감사드린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벌어드린 돈이, 제가 받은 월급보다 수 백 배 많을 테니까.”

“너.... 너.... 이 방을 나가는 순간, 꼬끼오 라면 인센티브도! 미국 유학도 날아간다는 사실 알고 있는 거야?”

“하하하. 회장님! 저 돈 많아요. 아시잖습니까?”

그토록 유능함을 증명했건만 건널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들거리고 있는 오재준 방을 나왔다.

‘회사에서의 3년!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3년이 허송세월도 아니야. 3년간 쌓은 회사 선후배들과의 인연은 내게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다.’

윤재는 오재준 회장 방을 돌아보지 않았다.

신입사원 연수시절 오재준이 갖고 있는 인식의 단면을 알아채긴 했었다.

‘그토록 Plan B를 피하려 했건만..... 블랙스완은 피할 수 없다고 했던가? 어쩔수 없다. 플랜 B에 박차를 가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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