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비콘 강을 건너(1)
KS 정민수 사장이 오재준 회장을 찾아왔었고, 윤재와 워터루 호텔에서 만난 사실은, 아주 극소수의 인원만 아는 비밀.
그럼에도 소문이란 놈은, 발이 없어도 천리를 가는 법.
윤재가 수백억대 슈퍼개미가 됐고, KS그룹과 마찰을 빚었다는 소문이 회사 내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그 소문 들었어? 김윤재 대리 재산이 1천억이 넘는대.”
“아냐. 1천억이 아니라 3백억 정도 된다던데.”
“3백억도 엄청난 돈 아니냐? 진짜 신은 불공평해! 김대리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일 잘하지. 인물 좋지. 돈도 왕창 벌었지. 부럽다. 부러워!”
“김윤재 대리가 주식의 신이래. 사는 족족 몇 배씩 올라 버린다던데...”
“야. 우리도 김대리한테 주식 좀 찍어주라고 할까?”
대부분의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윤재에게 우호적이거나,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의 반응이 주로 이런 부류에 속했다.
반면 근거 없는 루머를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픈 부류였다.
“일은 안하고 재테크만 열을 올린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무일푼 고졸 계약직이 어떻게 수백억을 벌수 있지?”
“맞아. 외근 나간다고 밖에 나가면, 객장에 가서 주식만 팠다고 그러더라.”
“그 놈이 돈 좀 벌었다고, 회장님께 개겼다는 얘기도 있던데. 사실이야?”
“그 자식 얼마 전 로또 독식한 거 아냐? 재수 오지게 좋은 놈이네.”
이런 험담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근거 없는 이따위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들보다, 윤재가 회사에 공헌한 바가 수십 배는 훌륭했다.
그런 공헌은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법이다.
어쨌든 이런 소문들은 윤재로 하여금, 운신의 폭을 좁혀버리는 측면이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O2 F&B를 세계 수준의 식료품 회사로 만들겠다는 일념!
오진탁의 망테크로부터 동료들을 구하겠다는 생각!
윤재는 오로지 목표에 집중하며 위기를 해쳐나갈 생각이었다.
◈ ◈ ◈
약 1주일가량 회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수퍼개미 김윤재에 대한 소문도 차츰 가라앉을 무렵.
신사업부문은 차기 프로젝트로 장류 시장 국내2위인 풍찬들과의 M&A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지분 50% 인수를 목표로 신사업부문의 관련 팀들이 브레인스토밍에 들어갔다.
부문 소속 팀장 조와 팀원 조로 나누어 회의가 진행됐다.
“조팀장님!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이요?”
조영우 역시 ‘부자 김윤재’ 소문으로 홍역을 치른 사람 중 한명.
소문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오진탁 전무님께서 또 사고 쳤다고 하네요.”
“휴... 난 또...”
조영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윤재가 돈방석에 앉은 얘기가 또 나오나 싶었는데, 다행히 다른 주제였다.
“왜 몇 달 전에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 인수했잖아요. O2 라이징 스타 엔터인가 뭔가...”
“라스엔터라고 한다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오전무가 이번에 또 여자연예인 하나 건드렸다가 시끄러운 모양이에요.”
일을 저렇게 열심히 하면 좋으련만...
조영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왜? 그 있잖아요. 정예비라는 신인 탤런트...걔가 자살 기도한 게 오실장 때문이라고....”
조영우가 화를 버럭 냈다.
그도 귀가 있고 눈이 있는 사람.
오진탁과 관련된 추문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신 팀장님! 그런 황색 사이비 찌라시 얘기 그만 하고, 풍찬들 M&A 방안이나 협의 하시죠.”
평소 모진 소리를 잘 하지 않는 편인 조영우.
윤재 루머로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기에, 오진탁 관련 뒷담화도 달갑지 않은 것이다.
조팀장의 마음과 별개로, 오진탁과 관련된 루머는 대부분 사실에 가까웠다.
애초 미술품 브로커인 노가은의 권유로 시작한 엔터테인먼트 사업 강화.
오진탁은 다목적 활용을 염두에 두고, 기존 연예기획사를 인수했었다.
제법 괜찮은 회사를 인수한 것인지라 안정도 빨랐다.
문제는 오진탁이 마각을 드러내는 게 그보다 더 빠르다는 것이었다.
오진탁의 먹잇감은 신인이나 지명도가 떨어지는 여자연예인들이었다.
재벌3세 황태자로 유명했던 그는, 노가은의 예측대로 벌써 여러 명의 연예인 지망생을 건드린 상태였다.
국내 대부분의 재벌들이 그렇듯, O2 그룹도 정도경영과 윤리경영을 외쳤는데, 정작 그룹의 제1 승계권자인 오진탁은 정도와 윤리를 쌈 싸 먹은지 오래였다.
2003년 10월은 말 그대로 루머 정국이었다.
하나는 맨 손으로 자수성가해 가는 사람에 대한 루머였고, 다른 하나는 멀쩡한 재벌을 몰락시킬 망나니에 대한 것이었다.
◈ ◈ ◈
2003년 10월 23일 목요일 경기도 수원.
마스터스 골프 아카데미라는 수원의 프로 샵 앞에서 윤재는 이재민 사장을 기다렸다.
며칠 전 이재민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우하하. 내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들인데, 제가 거하게 한번 모셔야지요.”
거듭되는 이재민사장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미안해, 약속장소를 수원으로 잡았다.
서울도 아니고 경북 상주도 아닌 수원을 접선지로 택한 이유는, 이지은 프로 때문이었다.
“정말 수원에 자네가 말한 귀인이 있단 말인가?”
“하하하. 사장님! 제 얘기 들어서 잘못된 것 있습니까? 속는 셈 치고 일단 한번 와 보세요.”
조팀장이 류전무를 모시고 저녁식사 장소로 오기로 했고, 윤재는 그보다 먼저 수원에 도착해 이재민을 만난 것이다.
조금은 낡아 보이는 골프 아카데미.
마스터스 골프 샵을 보는 이재민의 표정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사장님! 겉만 보고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사장님도 겉은 산적같이 생기셨는데, 마음은 소녀 같으시지 않습니까?”
“허허. 이 친구 왜 이러나. 나는 외모도 마음도 소녀 같은 사람이야.”
상주CC인수와 딸의 KLPGA 우승으로 한결 여유가 있는 이재민.
그의 어처구니없는 유머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6개월만 맡겨보세요. 맘에 안 드시면 그 때 교체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정말 박남수 프로가 그렇게 잘 본단 말이지?”
“그럼요. 어깨 부상만 아녔어도 KPGA를 씹어 먹었을 사람이에요. 모른 척 들어가서 구경이나 한번 하고 나오시게요. 유소년 선수들 육성도 많이 하고,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프로생활을 하다 고질병인 어깨부상으로, 수원에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는 박남수 프로!
선수로서 박남수가 A급이었다면, 캐디로서 그는 S++급이었다.
전생에서 그는 뒤늦게 포텐을 터뜨린 이지은과 결혼했었다.
이재민이 늙고 병들어 캐디를 보지 못하게 되자, 스윙교정 등을 위해 찾은 사람이 박남수였고 둘은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
지금으로부터 7년 뒤의 일이지만, 맺어질 운명이라면 6년 정도 빨리 만난다고 해서 문제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재민 사장과 골프 입문자인 척 샵을 둘러보고 나왔다.
“어떻습니까? 제자들 표정이 밝지 않던가요?”
“....”
“아니 왜 말씀이 없으세요?”
“박프로 그 사람. 너무 노안이야. 정말 29살 맞나? 아무리 봐도 자네보다 10살은 더 먹어 보이는데.”
“하하하. 사장님! 캐디 얼굴보고 뽑습니까? 실력보고 하는 거지.”
“얼굴이 자네 반만 됐어도....”
“사장님! 캐디 뽑는 거지. 사위 뽑는 게 아니잖아요?”
“사위라고? 그런 끔직한 얘기 하지도 말게나.”
이재민은 곧 알게 될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을!
몇 년 안에 이재민은 박남수에게 씨암탉을 삶아줘야 한다.
공연한 트집을 잡는 이재민 사장을 달래고 나서, 수원이 자랑하는 왕갈비 집으로 이동했다.
저녁 장소에 조팀장과 류전무가 이미 도착해 있다고 했다.
‘1차에... 2차! 3차까지... 오늘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구나!’
이재민 사장은 자신의 말에 의하면 주량이 소주 20병이라고 했다.
왠지 곱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때만 해도 그냥 늙다리 수컷 한명을 포함해 수컷 네 마리가, 꽐라대는 정도의 술자리가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고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터지는 법이다.
◈ ◈ ◈
“하하. 사장님! 정말 주량이 대애애다안 하삽니다. 딸국! 아주 말술이시군요.”
류전무가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갈비 집에서 저녁을 먹기 시작한지 2시간 만에, 류전무와 조팀장은 혀가 꼬이고 눈이 풀렸다.
갈비 집 특실 방구석에는 소주 빈병만 30병이 도열해 있었다.
“자! 자! 전무님! 2차 가셔야지요. 제가 수원 사는 친구한테 조오으은데 알아왔습니다. 가시죠~ 전무님. 조팀장님. 김대리님!”
가장 팔팔한 사람이 이재민 사장이었고, 윤재도 주량이 거의 Full로 차서 그런지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조영우와 류전무의 상태는 그로기 직전.
갈비 집 식비를 법카로 계산하느라, 본인이 풀코스로 쏘겠다는 이재민 사장과 한참을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윤재가 실랑이에서 승리했고, 신용카드 체크기가 뽑아내는 전표소리를 듣고 있을 때였다.
‘응? 선희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밤 8시 30분에 전화를 건 사람은 혜진이 아니라 선희였다.
선희를 알고 지낸지 3년이 넘었지만, 밤 늦게 전화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윤재는 이재민 사장과 직장상사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전화를 받았다.
“오빠! 큰 일 났어.”
평소 씩씩하기로 치면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선희의 목소리에, 긴박함과 공포가 전해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혜진이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오빠! 어떻게 해! 엉엉.”
“뭐야? 어떻게 된 일인데 그러는 거야? 울지 말고 좀 얘기해!”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한 선희의 얘기는, 최근 오진탁의 루머와 연관돼 있었다.
그리고 당사자가 혜진과 선희였다.
“왜 그래? 부모님 돌아가셨어? 김대리 대체 무슨 일이야?”
윤재는 어리둥절해 있는 이재민 사장과, 회사 상사들을 팽개치고 수원왕갈비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 없었다.
“죄송한데요 사장님! 얼음 있으시면 많이 좀 주십시오.”
“예? 얼음이요?”
“네. 양주 마실 때 쓰는 얼음 통 같은 것 없으신가요?”
“알았어요. 잠시 만요.”
윤재는 왕갈비집 사장님이 양푼에 가져다준 얼음을 들과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얼음이 가득한 양푼에 물을 좀 부은 뒤, 얼음을 통째로 자신의 머리에 끼얹었다.
오늘 마신 소주만 대략 7병!
이렇게라도 해야 술이 조금이나마 깰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요. 정말 죄송한데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유는 나중에 말씀 드릴게요.”
윤재는 부랴부랴 자신의 소나타로 달려갔다.
뒤에서 당황한 이재민 사장, 조팀장, 류전무의 얘기들과 음주운전을 걱정하는 아우성들이 들려왔다.
◈ ◈ ◈
만취한 상태에서 음주운전에 전화까지.
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었지만, 그만큼 상황은 급박했다.
운전을 하면서 용인 쪽으로 방향을 잡고, 선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약 체결하고 저녁 먹고 커피 마실 때 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거든. 사장도 젠틀해 보였고.”
“그런데?”
“사장이 와인 한잔만 하고 가라는 거야. 그런데 그곳에서 와인을 마시다 의식을 잃어 버렸어. 깨어났더니 그 사장 새끼가....”
선희는 고급 빌라로 끌려갔다가 정신을 차렸다.
약기운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덮치려던 사장의 대갈통을 양주병으로 갈겨버렸다고 했다.
“그 사장새끼 죽었으면 어떡해 오빠! 피를 철철 흘리던데....”
“선희야! 내 말 잘 들어. 그 새끼는 뒈져도 싼 놈이야. 그리고 그런 놈들이 명이 길어. 걱정하지 마라.”
“혜진이는 어떡하지?”
선희가 여전히 울음기가 가지 않은 목소리로 걱정했다.
“일단 너는 근처 파출소 같은 곳으로 도망가.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신고해라. 알았지?”
막막한 일이었다.
정신을 잃은 혜진이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단서를 얘기해 봐. 매니지먼트 회사 이름이라든가, 사장이름이라든가...”
“오빠! 사실 우리 O2 라이징 스타 엔터랑 계약했어. 혜진이랑 오빠와 같은 그룹사 소속 된다고 좋아했는데....”
“뭐야? 그 얘길 왜 여태까지 안하고 있었어?”
“나도 그렇고 혜진이도 그렇고, 계약금 받은 다음에, 오빠 놀래 주려고 그랬지. 미안해. 오빠! 이렇게 될 줄 몰랐어.”
하필이면 오진탁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O2 라스엔터라니!
“오빠! 아까 걔들이 갤러리가 어쩌고 그랬거든....”
“갤러리?”
“응. VIP얘기도 하고. 갤러리 어쩌고 ....”
“잘했어. 선희야! 일단 거긴 위험하니까 빨리 가까운 경찰서 찾아가. 이만 끊는다. 혜진이는 걱정 마. 내가 해결할 테니까!”
그동안 선희는 일이 있을 때 마다 혜진의 보디가드가 돼 주었다.
어딜 가든 그녀가 혜진의 곁에 껌 딱지처럼 붙어 있었기에, 방심한 게 화근이었다.
‘O2 라이징 스타 엔터테인먼트와 갤러리라! 씨박새끼 너는 뒈졌다!’
오진탁의 펜트하우스로 이용되는 임프레션 갤러리!
윤재가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전생에서 비자금 관리할 수 있는 일반임원 테스트를 위해, 임프레션 갤러리를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막연한 추측이었지만 왠지 그곳에 오진탁과 혜진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집중할수록 술도 깨는 기분이 들었다.
컴컴한 국도를 소나타 한대가 시속 120km로 주파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진탁의 펜트하우스 임프레션 갤러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