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낳은 개
2003년 4월 16일.
소더버그가 ㈜KS 지분을 12.9% 취득했다고 공시했다.
전생에서는 14.99%의 지분을 취득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윤재의 집중적인 매집 때문에 그들이 공시 룰을 지키면서, 확보할 수 있는 지분은 12.9%였다.
소더버그의 지분매입 소식은, KS글로벌의 분식회계 뉴스만큼이나 파장을 일으켰다.
“형! 진짜 이런 일 생길 줄 미리 알고 있었어? 어떻게 주식 매입 끝나가는 시기에 이런 뉴스가 터져주냐?”
“하하하. 창진아! 내가 뭐 미래에서 돌아온 터미네이터라도 되는 줄 아니? KS는 국내 1위의 정유사야. 그리고 기름장사는 안정적인 수익 창출이 가능한 사업이지.”
“....”
수화기 너머 창진의 말문 막힌 얼굴이 떠올랐다.
“분식회계. 총수 구속으로 기업가치가 크게 훼손되지는 않을 거라 봤어. 그래서 사람들이 공포에 눌려 있을 때, 용기 있게 올라탔을 뿐이라고.”
“그랬구나. 형. 대단하다. 역시 운림동의 현인이야! 그런데 ㈜KS 얼마까지 올라갈 것 같아?”
“그런 말 있잖아. 경영권 분쟁 있는 곳에 주가상승 있다. 이제 대충 매집은 끝났으니, 싸움 구경만 하면 된다고 봐.”
전생의 기억에 의하면 KS 주가는 1년도 되지 않아 3만원 언저리까지 오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윤재까지 개입해 있는 상황.
얼마나 더 올라갈지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줄 건 뻔했다.
분식회계와 총수 구속으로 KS그룹의 몰락을 걱정했던 수많은 사람들.
소더버그의 대량 지분 확보 소식에, 국민들은 이제 180도 다른 반응들을 보였다.
“듣도 보도 못한 사모펀드가 국내 재계 서열 3위를 공격한다고?”
“그나저나 KS주식을 사들인 이유가 뭘까요?”
“뻔하지. 경영권 분쟁을 일으켜 주가를 부양한 뒤, 먹고 튀려고 저러는 거지.”
“지금 KS주식 사야 하는 거 아닐까요?”
“분식회계만 1조가 넘어. 총수 구속됐고. 그런 주식을 산다고?”
주식은 심리 싸움.
저마다 갑론을박을 주고받았지만, 불과 1개월 만에 공포는 기대감으로 바뀌는 분위기였다.
창진과 통화를 끝내고 사무실로 들어오자, 직원들도 삼삼오오 모여서 소더버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윤재는 모른 척 하며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신사업부문의 리베로에게는 항상 수많은 일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 ◈ ◈
2003년의 3분의 1이 지나가고 있는 즈음에, 윤재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신사업 부문 비전 수립과 KPI 운용 정의.
하얀국물 라면 출시.
페레레와의 제휴.
그리고 ㈜KS에 대한 지분매집에 이르기까지.
회사에서는 살인적 노동강도와 묵묵히 맞섰다.
개인적으로는 재산의 퀀텀 점프의 계기를 만들어 놨다.
350억 정도 투자한 ㈜KS는 연말이 가기 전에, 1천억 수준으로 윤재의 재산을 늘려줄 것이었다.
최근 세전 200억이 넘는 로또 1등에 공동으로 당첨돼, 벼락 떼돈을 맞았다.
52 Cafe와 미소천사 은행은 완전히 자리 잡았고, 52 Farm도 제법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꿈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반면, 윤재와는 정 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O2 직원도 있었으니, 다름 아닌 오재준의 장남 오진탁이었다.
KS그룹의 총수가 파생상품 투자로 4천억이 넘는 손실을 입었다는 얘기와, 그 손실액의 출처가 비자금이었다는 사실은 세간에 알려졌다.
당시 오진탁도 평소 친분이 있던, KS 사장과 함께 선물옵션에 투자했고 1,500억대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이는 인터넷에 카더라 통신으로 끝났을 뿐, 메이저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KS 비자금 사건의 책임 검사가, 범 오성그룹의 사돈이라고 했다.
어쨌든 오진탁은 조상 잘 둔 덕에, 포토라인에 서지도 않았고 구속도 면할 수 있었다.
청각이 고도로 발달해 있는 윤재.
굳게 닫힌 신사업부문장실에서 류전무와 신재영, 조영우 팀장이 나누는 밀담이 모두 들렸다.
“오진탁 전무 투자 손실을 회복하기 위해, 미래전략실 재무팀 전원이 매달리고 있다고 하는군.”
“....”
“안타까운 일이야. 회장님은 매출 100조를 위해 고민하고 계시는데, 승계 1순위가 저러고 계시니.”
“전무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습니다.”
조영우가 류전무에게 직언했다.
오진탁이 그룹을 승계하고, 류전무가 뒷담화 한 사실이 알려지는 날엔 자리를 보전키 어려운 것이다.
“허허. 조팀장. 걱정돼? 알았다. 하여튼 이런 얘기 직원들이 알면 동요하니까. 단도리 잘들 하라고.”
“알겠습니다. 전무님.”
“내가 신팀장, 조팀장 그만큼 믿어서 하는 얘기야.”
조영우와 신팀장이 임원실에서 나왔다.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팀장 자리로 돌아오던 조영우의 눈에 윤재가 들어왔다.
언제나 저런 모습으로 업무에 집중하는 윤재를 보고 있으니, 씁쓸함이 밀려왔다.
‘저런 직원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오진탁 전무 같은 사람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말이야.’
오진탁이 싸질러 놓은 똥을 치우느라 오재준의 입에서 속도조절론이 나왔다.
작금의 현실에 조영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수에 대한 관용!
크고 작은 도전을 장려하고,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그 실수에서 교훈을 얻으면 된다는 것이 O2 회사의 기업문화라고 했다.
이름하여 ‘실수에 대한 관용.’
하지만 O2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그 관용이라는 것이 위로 올라갈수록 너그럽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잔인하다는 것을.
오진탁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평사원이 회사 돈으로 파생상품에 투자했다, 1천억이 넘는 손실을 봤어도 오진탁처럼 용서받았을까?’
조영우는 다시 한 번 옅은 한숨을 내쉬고, 잠자기 모드에 있던 모니터를 켰다.
◈ ◈ ◈
본사 30층 O2그룹 전략기획실.
실장 오진탁을 중심으로, 팀장들 5명이 모여 앉아 회의를 진행 중이다.
전략기획실은 실장이자 전무급인 오진탁이 리더였고, 기획, 재무, 법무, 조직팀장, 그리고 대외협력팀장 5명은 계열사 상무 또는 상무보급이었다.
오성그룹의 2세 승계 과정에서 분리돼 나온 O2그룹.
그러다 보니 전략기획실의 규모 자체가 작은 편이었는데, 문제는 전략기획실의 규모가 아니었다.
실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오진탁이, 재계 15위권인 O2 그룹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기에는 현격하게 부족한 위인이라는 것이었다.
㈜O2를 출범해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문제.
복잡한 계열사 간 순환출자 문제 해결.
3세간 경영권 승계를 위한 총알 마련.
정부규제와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면서, 지주회사로 전환하는 문제부터 시작해 산적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이 판국에 매출 100조 로드맵도 챙겨야 하고..... 아주 죽어라 죽어라하는 구만.”
“실장님! 일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 조상무! 일깨워줘서 고맙군.”
오진탁의 얘기에는 뭔가 가시가 돋혀 있었다.
그의 가시가 계열사 임원급인, 미전실 팀장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5명의 팀장들은 오진탁의 눈치를 보며, 각자 타이밍을 재고 있다.
“이번 주 주요현안 및 업무보고 드리겠습니다.”
재무팀장이 말했다.
“이번 달에 상해와 푸동에 각기 1개씩 극장이 준공검사에 들어갑니다. 각기 15억씩 30억의 비자금을 O2 엔지니어링 통해 조달키로 했습니다.”
“짱개놈들이 그게 문제야. 사회주의? 인민들의 천국? 미친 소리지.... 인민들의 천국이란 나라의 관료들이 뇌물은 왜 그릴 밝히는 거야? 그 놈들 챙겨주다 보니, 회수되는 돈이 자꾸 줄어들어.”
“전무님! 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 중국입니다.”
“오케이. 알았어. 임원들 리펀드 하는 건은 완료 됐나?”
“네. 모두 완료됐습니다.”
임원들에게 초과 상여금을 주고, 그 중 일부를 비자금으로 돌려받는 전통적인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오진탁은 비자금 얘기만 나오면 짜증이 났다.
재계1위 오성그룹의 경우 회사 규모가 워낙 컸기에, 전략기획실에만 200여명이 직원이 있고, 관리하는 자금도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계열 분리돼 나온 O2 그룹은 전략기획실에 달랑 4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오진탁을 짜증나게 하는 지점이 그 부분이었다.
인력이 5분의 1 수준이니까 비자금도 5분의 1은 돼야 하는데, 실상은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재무팀장의 보고가 끝나자, 나머지 팀장들이 브리핑했다.
보통 조직과 달리 전략기획실은 재무가 서열1위, 대외협력팀이 서열 2위, 법무, 조직, 기획의 순서로 이어졌다.
“실장님! 공정위에서 가이드한 데드라인이 앞으로 2년입니다.”
“말이 2년이지 연장해 줄 거야.”
“정권이 바뀌어서 어찌될지 모릅니다.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오진탁의 짜증에 대외협력팀장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1천억을 넘게 까먹은 상태라, 오진탁의 조바심이 장난 아니었다.
게다가 매출 100조의 압박까지 그를 짓누르는 상황.
잘 되면 자기 덕,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했던가?
한 번 터진 오진탁의 짜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이게 다 잘난 아버지가 오성을 물려받지 못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애시당초 자신의 몫도 아니건만, 오성그룹을 오재준이 물려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오진탁 앞에서 대외협력 팀장이 보고를 이어나갔다.
대관 업무 동향에 대한 보고였다.
한 번 짜증이 난 오진탁은 보고내용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 때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아니라, 양복 주머니 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오진탁은 핸드폰을 꺼내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의 이름은 노가은.
오진탁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간다.
실장님! 르느와르와 카라바조 그림 매입 마쳤습니다.
오성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O2 전략기획실 역시 미술품을 통한 비자금 조성에 열을 올렸다.
노가은은 그림이나 조각 등을 구입하는 브로커로, 2년 전 오재준이 연결해 준 사람.
미학을 전공했으니 당연히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노가은을 오늘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그녀의 두뇌가 아니라, 매끈한 몸과 반반한 얼굴이었다.
‘그림 경매도 끝냈겠다, 오늘은 노가은이 고것이나 예뻐해 줘야겠어.’
2년째 노가은과 관계를 맺어왔지만, 오진탁은 상상만 해도 피가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대외협력팀의 뒤를 이어 조직팀장이 브리핑을 했는데, 갑자기 귀찮아졌는지 오진탁은 회의종료를 선포했다.
“다음주 브리핑 때 오늘 미보고한 내용까지 다시 들읍시다.”
“?”
5명의 팀장들은 오진탁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낼 때부터, 이렇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비상장 회사 상장해서 튀기는 게 가장 커요. 다들 아시잖습니까? 내가 2년째 바이오 바이오 해왔는데.... 아직 기별도 없어요? 그리고 식품, 홈쇼핑 등 소비재 산업에 치중돼 있는 그룹 체질 바꿔야 한다니까요. 성산그룹이 원래 중공업 전공이었어요? 아니잖아요! 제발 시킨 일들도 좀 챙겨가며 합시다.”
“....”
바이오나 산업재 시장 진출이 4개월 만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진탁의 바이오와 산업재 타령은 전략기획실 팀장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오늘은 이만 마치고.... 다음 주에 봅시다. 어차피 수시 보고가 더 중요한 것이니까.”
오진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실장실을 나가려던 오진탁이 기획팀장을 돌아봤다.
“앤더슨 컨설팅 쪽 미팅 아직 안 잡혔어요?”
“아닙니다. 전무님! 잡혔습니다. 이따 보고 시간에 말씀드리려 했는데....”
“허팀장님! 그렇게 중요한 보고가 있으면 중간에라도 언질을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람이 일의 경중을 아직 모르면 어떻게 해요? 보고서 인트라넷으로 올려놓으세요.”
“알겠습니다. 실장님!”
5명의 팀장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가운데, 오진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쪼개면서 자신의 방을 나가버렸다.
실장실에 남은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휴~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거야?”
기획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외협력팀 성수용팀장이 자신의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갔다댔다.
“이거 참! 실생활이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라지만....”
“어허. 쉿!”
“알았어요. 알았어... 답답해서 해 본 소리요.”
엄마를 닮아서 귀공자 같은 용모.
귀인의 기가 흐른다는 청아한 목소리.
죽을 때 까지 펑펑 써도 부족하지 않은 재력.
겉으로 보이는 오진탁은 전형적인 재벌 3세의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의 뇌는 부모를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옆에 있으면 상대방의 가치를 높여 주는 인물. 오진탁은 전형적인 그런 인물이었다.
10을 알려주면 4~5 정도만 체득하는 둔재 수준의 인물.
문제는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 재계 10위 진입을 꿈꾸는 재벌의 후계자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