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 공룡과 싸우는 법
“오늘부터 매 30분마다 2억 전후로 KS주식을 사들여라.”
윤재는 전화로 창진에게 주식매집을 지시하는 중이다.
“30분마다 2억이면 대체 얼마야?”
“하루 평균 20억 정도 사들인다고 생각하면 돼.”
“2.... 20억!”
창진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수화기로 전달됐다.
KS글로벌과 KS해운의 비자금 사태.
저녁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후, 총수는 구속됐고 KS 그룹 주식들은 연일 떡락을 되풀이했다.
사건 발생 후 10일 정도 지났고, 주가는 반토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윤재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타이밍이 도래한 것이다.
“최대한 매집하자! 신용대출, 주식담보 대출 등 가능한 금액은 모두 동원할 생각이니까.”
어차피 현재 윤재가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은 맥시멈 350억 전후.
KS 지분 4%를 넘기기 어려운 금액.
차라리 잘 된 일인지 몰랐다.
5% 지분변동 공시에 저촉되지 않는 수준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무조건 Go하면 된다. 5백만주 정도 쓸어 담을 생각이니까.”
“형!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 얘기해 준 사람이 형이야!”
“하하하. 그보다 중요한 게 Case by Case 지.”
“아. 알았어... 형의 도른자 투자가 노른자 투자되길 빌게.”
“하하하. 짜식! 라임 좋네.”
전생에서 KS글로벌 분식회계는, 엉뚱하게도 외국 투기자본이 장난질로 떼돈을 버는 기회를 제공했다.
소더버그라는 사모펀드가 KS그룹 지배구조의 취약점을 공격한 것이다.
당시 소더버그는 약 15% 가까운 KS지분으로, 최대한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다.
2년 조금 넘는 경영권 분쟁으로, 소더버그는 한국 시장에서 약 1조원 가까운 차익을 실현했다.
조세회피지역을 우회한 투자로, 세금은 거의 내지 않았다.
‘나 때문에 소더버그가 매집할 지분율은 낮아질 거다. 그리고 4% 가까운 지분이면 캐스팅 보트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어.’
윤재의 노림수가 거기에 있었다.
어차피 KS주가는 기관. 외국인. 개인들의 투매로, 15,000원 수준에서 6,000원까지 떨어진다.
소더버그와의 경영권 분쟁은 4월말이면 가시화 된다.
최소 1년에서 2년 정도 소요될 소더버그 사태.
KS 오너들과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한 백기사 측과, 소더버그로 대표되는 적대세력간의 피 튀기는 경영권 분쟁이 예정돼 있었다.
윤재는 그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생각이었다.
금융기법이 아직 서유럽이나 미국에 비하면 걸음마 단계였던 한국.
IMF 이후 취약한 한국의 금융시장을 교란해 떼돈을 벌어가는 코쟁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윤재는 단기 고수익을 향유하면서, 세금은 철저히 회피하는 코쟁이들 편을 들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얼마 되지 않는 지분으로 황제대우를 받으며, 비자금이나 만드는 재벌 오너 편을 들 생각도 없었다.
‘전생에서는 소더버그만 문제였지만, 이번에는 나까지 개입했다는 소식이 알려질 거다. 그렇게 되면 경영권 분쟁 기대감으로 주가는 더 폭등할 수 밖에 없어.’
윤재의 기억에 폭락한 ㈜KS는 1년 만에 4배 가까이 오른다.
하지만 4% 수준의 지분을 갖고 있는 개인투자자가 주목받기 시작한다면?
보나마나 더 오를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시세차익을 올리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그리고 두 번째 목표는 윤재의 Plan B와 관련이 있었다.
‘적당히 줄타기 한 다음, KS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들이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면 된다.’
KS그룹은 오너들의 지분구조만 취약한 것이 아니었다.
윤재는 KS그룹의 취약한 Value Chain의 허점을 역으로 공략해, 52 Corp의 미래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정유와 통신이라는 막강한 캐시카우를 갖고 있는 KS그룹.
50%를 넘나드는 점유율로 사실상 국내 이통시장을 독점하듯 장악하고 있는 회사가 바로 KS텔레콤이다.
그곳에 윤재의 Plan B와 결합할 기회가 웅크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KS와 소더버그의 경영권 분쟁 로드맵을 그리는 사이.
윤재의 문자 메시지로 ㈜KS의 주식 체결 문자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자! 이제 굿이나 보면서 떡이나 먹으면 된다.’
◈ ◈ ◈
다음날 아침 일찍 사무실에 출근한 윤재.
당연히 자신의 1등 출근이라 생각했다.
28층 신사업 부문 출입문은 2개가 있었다.
무인경비에 카드를 대려다, 사람의 통화소리에 윤재는 뒷문으로 이동했다.
“그럼 어떡하니? 나도 보고에 미팅에.. 게다가 업체에서 속까지 썩히고~ 오늘만 당신이 이해해!”
임나영 팀장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신사업 부문에 온지 3개월 만에 강제 다이어트를 체험하는 중이었다.
굵직한 일거리가 연달아 터지면서, 고생을 하는 바람에 살이 저절로 빠진 것이다.
그런 임나영이 아침부터 남편과 전화로 싸우고 있었다.
“시댁에 맡기는 것도 싫다! 우리 엄마한테 맡기는 것도 싫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데?”
IMF라는 전례가 드문 충격은 세상을 많이도 바꿔 놨다.
그 중 하나가 워킹맘들의 변화였다.
90년대만 하더라도 직장여성들의 상당수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게 되면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종신고용의 틀이 흔들리고,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직장 여성들이 악착같이 회사를 다니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리고 그런 변화에 맞춰 육아를 둘러싼 부부간의 갈등도 증가했다.
일종의 변화의 과도기였고, 200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오전 7시 20분. 아직 다른 사람들은 출근하기 전!
윤재는 모르는 척 임나영 팀장에게 다가갔다.
전생에서 임나영은 영엉본부 최초로 여성임원이 된 사람이다.
윤재의 기억에 의하면 임나영은, 대표적인 살려야 할 사람으로 각인돼 있는 인물이었다.
“팀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응? 김대리 언제 왔어?”
임나영 팀장이 화들짝 놀랐다.
남편과의 통화를 윤재가 들었을까봐 걱정된 것이다.
“방금요. 팀장님 회사 너무 일찍 오신 거 아네요? 우리 회사는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루 8시간 근무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호호호. 그래. 김대리 말이 맞네. 그러는 김대리는 이 시간에 뭐해? 그리고 우리 부문에서 제일 먼저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김대리 아냐?”
임나영 팀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윤재와 얘기하다보니 언제 남편과 싸웠냐는 듯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OT 많이 받으려구요!”
“회사가 퍽이나 OT주겠다.”
같은 회사원들이지만, 노동조합만 해도 OT 등 각종 수당을 칼같이 받아갔지만 사무직은 신청조차 시도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모를리 없는 윤재.
특유의 유머에 임나영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기분이 좀 좋아진 임나영이 윤재에게 고충을 털어놨다.
“김대리! 요즘 꺄르푸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뭐 좋은 수 없겠니?”
세계적인 유통공령 월마트보다 한국에 먼저 진출한 꺄르푸!
꺄르푸는 월마트와 같은 창고형 할인점을 내세워 한국시장을 공격적으로 공략했다.
진출 7년 만에 20개가 넘는 매장을 개업했으니, 연평균 3개씩 매장을 오픈한 셈이었다.
임나영을 괴롭히고 있는 존재가 바로 꺄르푸였던 것이다.
“전 또 무슨 일로 그렇게 고민하시나 했네요. 그냥 까르르 까르르 웃어넘기세요. 걔네들 별것 아네요.”
“까르르. 까르르?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야?”
월마트에 이어 세계 2위의 유통공룡을 웃어넘기라니!
O2에서 대형 할인점을 담당하거나, 임나영 팀장처럼 제휴사업을 하는 사람 중에 꺄르푸나 월마트, D마트와 로티마트를 웃어넘길 사람은 윤재 빼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떤 유통업이든 구매력이 커지면, 납품하는 제조업체는 을이 되고 만다.
“팀장님! 꺄르푸 그것들 한국시장 철수설 나오고 있는 것 몰라요?”
2006년에 꺄르푸는 한국시장에서 철수한다.
현재 2003년 3월 이니까 윤재의 얘기는 듣도보도 못한 헛소리로 들릴 수 있었다.
“뭐야? 그런 얘기가 있어?”
“아니요. 없어요!”
“야! 김대리 나 지금 꺄르푸 때문에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너까지 왜 이러니?”
아침 일찍 출근한 이유도 꺄르푸였고, 그 바람에 남편과 싸웠으니 꺄르푸는 임팀장에게 가정파괴범이나 마찬가지였다.
“페레레와 제휴건도 일단락 됐고, 꼬끼오 면도 8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오늘 조팀장님 오시면 같이 꺄르푸 놀러 가실래요?”
“우리 빅 거래처인데, 거길 놀러 간다는 말이 나와?”
“가서 제 말씀 들어 보시면, 꺄르푸가 왜 한국을 철수할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왜 팀장님께서 그냥 까르르 까르르 웃어 넘기셔도 되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보통사람이 이렇게 말했으면, 허세충이거나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한심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임나영.
하지만 얘기를 하는 사람이 윤재였다.
고졸 계약직에서 초고속으로 정규직이 됐고, 2년 동안 국내 영업을 씹어 먹고 나서 신사업부문에 온 젊은이.
라면 시장 진출과 페레레와의 제휴를 최선봉에서 이끌고 있는 사나이.
윤재를 다시 보니, 묘하게 자신의 남편과 대비가 됐다.
아내인 임나영의 출근에, 걸핏하면 신경질을 부리는 남편이 한쪽에 있었다.
반면, 밥 먹듯 되풀이 되는 야근과, 굵직한 프로젝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힘들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윤재가 반대편에 있었다.
그래서 일까?
오늘따라 임나영은 윤재가 더욱 크게 보였다.
“오늘 꺄르푸-D마트-로티마트 1개소씩만 다녀오시게요. 마트에서 장도 좀 보고, 식사도 거기서 해보고... 그럼 팀장님 두통이 씻은 듯이 나을 겁니다.”
“정말.....?”
임나영의 대답을 보아하니 절반은 넘어온 상태였다.
“어차피 올해는 꺄르푸 요구 들어주실 수밖에 없잖아요. 그동안 해온 전례가 있으니까! 하지만 내년에는 꺄르푸에 끌려 다닐 필요 없어요. 저만 믿으세요.”
“그래? 김대리 얘기 들으니까, 오늘 하루 일정이 왠지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한번 해 보자고.”
그때 조영우 팀장이 남산만한 배를 내밀고 출입문을 들어섰다.
“굿모닝! 두 분이 다정하게 있으니까, 왠지 내 새끼 하나 뺏긴 기분인데?”
조팀장의 표정은 질투의 화신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하하. 팀장님! 농담도 잘 하십니다. 윤재대리 어디가면 항상 조팀장님 소속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니까, 그런 걱정 마셔요.”
“크하하. 윤재가 그랬나요?”
조영우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윤재는 조영우 팀장을 따라가며, 임나영과 했던 오늘 스케줄에 대해 보고했다.
조팀장은 자리에 앉지 않고, 윤재의 얘기를 경청했다.
대형마트와의 장려금, 광고비 분담, 판촉사원 인건비 지원 문제 등은 해마다 O2에게는 큰 숙제였다.
워낙 덩치가 크다 보니, 대형 할인점 5사와 1%만 불리하게 계약을 해도 1~20억이 왔다 갔다 할 정도였다.
“제휴 사업팀이 저희 부문의 꽃 아닙니까? 그리고 팀장님과 제가 부문 팀들 지원하는 역할이구요!”
“누가 아니래?”
“그러니까, 오늘 꽃구경 하는 셈치고 마트들 한 바퀴 둘러보고 오시자 구요!”
“오케이! 안 그래도 임팀장하고 그 건에 대해 상의하려던 참이다!”
그렇게 해서 마치 2:2 미팅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자 2명과 남자 2명으로 마트 탐방 일정을 잡았다.
윤재는 씩씩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3년 안에 조영우, 임나영 모두 임원이 된다. 미래 회사의 주역이 될 이들에게 신뢰 포인트를 차곡차곡 쌓아 둬야 해.’
오늘 이벤트는 자신을 조팀장과 임팀장에게, 조금 더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었다.
‘마트 탐방을 통해 장래 임원 2명에게, 내 인사이트에 대해 어필한다. 미래에 나를 후원해 줄 사람들은 많을수록 좋아! 그것도 생부에 이름을 휘날릴, 임원이면 금상첨화지!’
급한 일을 마친 조영우 팀장.
어느새 임나영 옆으로 가서 객쩍은 농담을 하는 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완연하게 밝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