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14화 (114/196)

굴러 들어온 돈벌이

“아니 대주주 형님! 어쩐 일로 제게 전화를 다 주시고?”

제법 서울 사람 티가 나는 창진의 말투.

300억이 훌쩍 넘는 자산과 예탁금은 대진증권 개인 고객 중 단연 최고액.

이젠 밥 값 하게 된 창진을 통해, 치고 빠지기만 해도 수천만원은 쉽게 벌 수 있는 수준이 됐다.

말 그대로 스노우볼(Snow Ball) 효과였다.

2002년 11월말에는 배당을 노리고, 오성전자 주식만 100억 가까이 매집했다.

“최근에는 계속 주당 5,000원 정도 배당했으니, 형 배당금만 1억 5천만원이 넘겠다.”

“소소하네.”

“1억 5천만원이 소소하다고? 이 형! 진짜 미쳤나 봐.”

엄청난 자산가가 돼 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가는 길에 동반자로 함께 가야 할 남창진.

틈나는 대로 남창진 키우기 프로젝트를 점검하고 있다.

“창진아! ETF(Exchange Trade Fund) 도입에 대한 보고 잘 끝났니?”

“응. 형 잘 됐지. 보고서 만드는데 한 달 넘게 걸렸는데, 당연히 잘 돼야지.”

윤재의 서울 발령에 맞춰, 대진증권 을지로 지점으로 발령받은 남창진.

이젠 더 이상 말만 많은 떠벌이 남창진이 아니었다.

동급 증권맨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존재로 성장해 있었다.

“그래. 주식 딜러로 만족하지 말고, 신상품 개발과 IPO 등 계속해서 공부하고 노력해라. 목표를 높게 가져가라고!”

창진은 회사 동료들이 잘못되는 경우도 숱하게 목격했다.

친구나 친척 명의로 주식 투자 했다가 억대의 손실을 본 사람.

주변에 투자 권유했다가 빚쟁이가 돼 허덕이는 사람.

그에 비하면, 창진은 윤재를 잘 만난 덕분에 꽃길만 걷고 있었다.

윤재는 최근 펀드, ETF, IPO 등으로 창진의 업무 영역을 넓혀갈 것을 주문했는데, 모두 창진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조치였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52 Cafe와 52 Farm 에 대한 IPO 주간사도 대진증권을 염두에 둘 정도로, 윤재는 창진을 키울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오늘의 용건은 뭘까요?”

“응. 다른 건 아니고 돈을 최대한 끌어 모아야 할 일이 생겼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식담보대출도 할까 하는데....”

“주담대를? 웬 일이래?”

“응. 나는 사자의 심장을 가진 사람 아니냐? 기회가 왔을 때는 철저하게 물어뜯어야지.”

“알았어. 형! 주식 담보대출 받는 방법 등 알아볼게. 대신 이번에도 같이 가는 거야?”

“알았다. 파트너들 연락해서 총알들 준비해 놓으라고 해. 보안 유지하고.”

윤재가 말한 파트너란 혜진과 선희, 그리고 장식이었다.

동원 가능한 현금을 기준으로 압도적인 1위는 윤재.

2위가 혜진이었고, 창진과 선희 그리고 장식이 뒤를 이었다.

윤재는 창진과 통화를 끊었다.

‘이제 곧 오진탁의 선물옵션 투자 실패와 일맥상통하는, 대형 뉴스가 터진다.’

재벌 2세 또는 3세에게는 경영권승계를 위한 자금마련이 필수적이다.

막대한 상속세가 문제인 것이다.

오진탁의 경우만 해도 절친인 KS 민시원 사장과 함께, 상속세 재원 마련을 위해 선물옵션에 손을 댔고, 결과적으로 2명 모두 수천억의 손실을 입고 말았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재원 조달.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불법과 편법.

유죄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치권력과의 결탁.

모두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들이다.

‘내게는 결코 손해 볼 장사가 아니다. 투명 경영을 강조해 오진탁과 차별화 할 수 있고, 재테크로도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 게다가 미래먹거리까지 굴러 들어올 테니까.’

계획은 모두 윤재의 머릿속에 있었다.

재벌그룹들의 오랜 폐단에서 비롯된 이번 사태.

윤재는 최소 1타 3피를 자신했다.

◈          ◈          ◈

문제의 뉴스는 금새 전국에 울려 퍼졌다.

페레레와 제휴 보고가 끝난 지 2일째 되던 밤.

신사업 부문은 회사 근처 곱창 집에 모여 회식을 했다.

지난 2개월간 쉼 없이 달려온 직원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였다.

“다들 고생 많았어. 라면시장 진출에 이어, 해외 사업 제휴까지! 회장님께서 평소답지 않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더군.”

1년 단위로 목숨 줄을 연명하고 사는 임원들에게, CEO의 눈도장을 받는 일은 그만큼 중요한 법.

류중정 전무는 오회장의 칭찬에 고무돼 있었다.

“우리 신사업 부문이 회사의 백년지대계를 책임진다는 각오를 담아 원샷 한 번 합시다.”

이 순간만큼은 약 10여명의 참석자가 모두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재는 라이벌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데, 자기들끼리 허공에 새도우 복싱을 하던 신재영과 하진호.

술잔을 치켜든 그들의 표정도 밝아 보였다.

“특히, 김윤재 대리가 고생 많았어. 모두 박수 한 번 쳐 줍시다.”

술을 권하고 덕담을 건네고, 박수에 화답하는 사이.

TV에서 문제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검찰은 오늘 1조원이 넘는 비자금 조성과 분식회계 혐의로, KS글로벌 본사에 대한 압수수색과 안동호 KS글로벌 사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재계 3위의 재벌기업이 조 단위 분식회계를 했다는 뉴스에, 식당 안이 술렁거렸다.

“국민 여러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저희 KS그룹은 검찰 수사에 적극 협력하겠습니다. 투명한 경영과 고객 중심주의로 글로벌 KS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룹의 수장에 앉아 있는 전문경영인이 출연해 사과부터 했다.

신속한 사과가 이어질 정도로 다급한 모양이었다.

거꾸로 검찰이 핵심물증을 확보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한참 분위기가 업 돼 있던 신사업부문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야? 1조가 넘는 분식회계? 저러다 KS그룹 부도나는 것 아냐?”

“IMF 졸업한지 얼마나 됐다고? 쯧쯧. 비자금에 분식회계라니. KS도 엉망이구만.”

“애시당초 비디오테이프나 만들던 것들이, 권력에 야합해 정유사와 이통사를 삼켰으니, 탈이 안 날수가 있나?”

대체적으로 부도덕한 재벌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다.

반면 아주 실질적인 얘기들도 오갔다.

“내일 KS글로벌은 물론이고, KS그룹 주식들 폭락하는 거 아냐?”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한국시장 전체의 투명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며, 주식시장 전체가 얼어붙을 수도 있습니다.”

주식투자 좀 하는 직원들의 입에서 나온 평가였다.

하지만 윤재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먼저 부도덕한 재벌 KS그룹에 대한 비판은,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였다.

엄밀히 얘기해서 O2 그룹도, 오진탁이 수장으로 있는 미래전략실을 중심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

최근 카더라 통신으로 문제가 됐던, 수천억대 선물옵션 손실도 모두 비자금으로 이뤄진 투자였다.

퉁쳐서 얘기하면 재계순위와 역사는, 비자금과 정경유착의 순위와 역사와 일치한다고 봐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경쟁사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 진짜 글로벌 O2가 되기 위해서는 회사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

예나 지금이나 윤재가 견지해온 철학이었다.

주식투자의 관점도 사람들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KS글로벌과 KS해운에서 시작된 비자금 사태는, 윤재에게는 10년에 한번 올까 말까한 기회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재에 공포를 느껴 투매에 동참한다. 하지만 진정한 선수는 공포에서 돈 냄새를 맡는다.’

회귀 이후 윤재는 매년 초 당해 연도의 중점과제를 정리해 왔다.

2003년 재테크의 화두는 KS글로벌 사태와, 신용카드대란을 꼽았다.

또 하나의 빅 이벤트!

윤재는 2003년 4월 12일 로또 19회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생에서 19회 로또의 당첨자는 단 한명.

수차례 이월까지 됐던 터라, 당첨금이 400억이 넘었다.

윤재는 19회 당첨번호 6자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등 당첨자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좀 나눠서 씁시다. 어차피 평생 다 못 쓸 돈이니까!’

Plan B의 실행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했다.

우선 목표한 금액에 도달할 필요가 있었고,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녔다.

‘2003년은 큰 돈벌이가 넝쿨째 굴러오고 있어!’

◈          ◈          ◈

전체적으로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신 사람들.

윤재의 경우 소맥 4잔에, 소주를 4병정도 마셨을까?

이 정도에 만취할 주량은 아니었다.

“2차 갈 사람? 요 앞에 오뎅탕 기똥차게 하는 실내 포장마차 있는데!”

딱 봐도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게 생긴 조영우의 제안이었다.

술에 취하고, KS글로벌 사태로 흥이 깨진 사람들은 귀가한 상황.

윤재와 조영우를 포함해 3명만이 포장마차로 향했다.

지난 노래방 사건과 포르노 비디오 사건의 피해자 하진호가 3번째 멤버였다.

자신의 의지보다는 신재영 팀장의 꾀임에 넘어갔던 하진호.

그는 윤재와의 관계 회복을 원하고 있었다.

안주가 나오기 전부터 소주잔을 돌렸다.

그 사이 조영우 팀장이 극찬한 오뎅탕이 나왔다.

“와! 팀장님! 이런 맛 집을 어떻게 아셨대요? 비주얼이 보통 오뎅탕과는 비교를 불허하네요.”

하진호 대리의 혀 꼬부라진 소리.

어쨌든 그의 얘기처럼 오뎅탕 비주얼은 끝판 왕 수준이었다.

오뎅꼬치, 생선완자와 곤약 등 색깔과 신선함이 돋보였다.

“와. 쫄깃한 오뎅 꼬치를 양념간장에 찍어 먹으니까 입에서 녹는다. 녹아.”

“나는 이 집 국물 맛이 좋더라. 진짜 국물이 끝내주네.”

신나게 오뎅을 먹고,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20분 정도 흘렀을까?

갑자기 조영우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윤재야 갑자기 우울해 진다.”

“오뎅 잘 드셔놓고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냥. 갑자기 공장 얘기해서 미안한데, 오뎅도 그렇고 간장도 그렇고, 우리 제품이 없다는 게 괜히 서글프네.”

2차로 포장마차 와서 발휘하는 애사심이라니!

조영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생김새와 달리 속도 깊고, 머리도 좋았다.

특히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혹시 다음 제휴 스텝에 대해 논의 하시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시죠?”

최대치로 치켜 떠봤자 윤재의 눈 크기 절반도 안 되는 조영우의 눈.

조팀장의 눈이 제법 동그랗게 커졌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는 눈빛이었다.

윤재는 모른 척 하면서, 조팀장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은 우리 음식의 기본인데, 왜 우리는 장류 시장에서 죽을 쑤고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신 거잖아요.”

“얼씨구?”

조영우가 헤벌쭉 웃었다.

“게다가 오뎅도 모두 삼오어묵 제품들... 맞죠?”

“으하하하하. 계속 해 봐라!”

조영우와 윤재가 선문답을 주고받는 동안, 술에 찌든 하진호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때론 주량도 회사 생활의 경쟁력이 되는 법인데.

하진호는 주량도 윤재에게 한참 부족했다.

윤재에게 사과하고 관계를 복원할 생각으로, 2차를 따라온 하진호.

사과 받을 윤재가 아니라, 허공에 대고 꾸벅꾸벅 절을 하고 있었다.

윤재는 하대리를 애처롭게 바라본 뒤, 조팀장과 대화를 이어갔다.

“제갈량에게 북거조조 동화손권(北拒曹操 東和孫權) 이라는 기본 전략을 하달 받았음에도, 관우는 손권의 정략결혼을 단칼에 거절했죠. 결국 형주성을 빼앗기고 위태로운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웬 관우?”

“함께 연대할 세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외롭지 않다는 얘기죠. 제휴가 됐든 M&A가 됐든 말입니다. 관우는 독고다이 하다 그렇게 된 거니까.”

“지화자?”

조영우는 평소 수호지, 삼국지, 십팔사략, 초한지 등 중국의 문학과 역사를 아주 좋아했다.

그런 조영우의 취향을 고려한 맞춤식 답변인 것이다.

“페레레와 올리버라는 글로벌 동맹군이 수중에 들어왔으니, 이제 국내에 동맹군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첫 번째 친구로 저는 장류의 영원한 2인자가 제격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조영우 팀장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발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영우는 전생에 국내 장류 2위 업체인, 풍찬들과의 제휴와 합병으로 임원에 오른 사람이었다.

조영우가 듬성듬성한 이를 드러낸 채 한참을 웃었다.

“임나영 팀장 쪽이 Main이 돼야 하는 일이니까, 조심스럽게 준비 해 보라. 나는 네가 해장들을 지켜보고 있는 줄 몰랐다!”

국내 장류 시장의 강자이지만, 결코 태상의 아성을 넘지 못한 풍찬들.

O2와 풍찬들이 손을 잡으면 고추장, 된장, 쌈장에서 태상의 아성을 넘는 게 더 이상 꿈은 아니었다.

태상의 고추장, 된장 점유율은 약 45%!

반면 풍찬들의 점유율은 30% 후반. O2와 손을 잡으면 막강한 2위 또는 1위도 넘볼 수 있는 수치가 나왔다.

“조만간 장류 시장에 대한 보고서 준비하겠습니다.”

“오케이! 제휴 사업팀에 먼저 의견 묻는 거 잊지 말고.”

“네. 팀장님!”

신제품 출시와 해외 제휴사업 진행은 변곡점을 넘었다.

이제 국내 M&A를 위한 프로젝트가 윤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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