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탁의 기지개
올리버가 이태리로 돌아가고 2주일이 지나서야, 신사업부문은 오재준 회장에 대한 보고를 할 수 있었다.
포르노 재생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류전무에 대한 재보고만 2차례 더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2003년 3월 7일.
신사업 부문의 CEO 보고날.
본사 32층 경영 위원실에서, 각 BU장들과 오재준 회장을 모시고 진행하는 보고가 시작됐다.
보고자는 임나영 팀장이었다.
팀원 중에서 페레레와 제휴사업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갖고 있는, 윤재가 유일하게 배석할 수 있었다.
약 30분 정도 진행된 페레레 그룹과의 제휴사업에 대한, 보고는 전반적으로 좋은 분위기에서 마무리됐다.
보고자가 가장 싫어하는 Q&A 시간만 남아 있었다.
“3년 내 매출 500억과 10% 넘는 순이익! 자신하는 거지?”
“네. 회장님! 자신 있습니다. 일본 등 페레레의 해외 사례를 연구했는데, 모두 그 이상의 성과를 보였습니다. 믿어 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올해 신사업 부문 시작이 좋아.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 가자고! 요즘 영업본부가 잘 한단 말이야. 이게 다 나상길 본부장이 부임한 뒤의 일이 아닌가 싶네만!”
턱을 쓸며 영업본부를 칭찬하던 오재준이 나상길 부사장을 바라봤다.
칭찬을 하고 있음에도 오재준의 얼굴엔 왠지모를 그림자가 보였다.
“아닙니다. 회장님! 요즘 영업은 회장님께서 말씀 하신 매출 100조를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직원들이 열정적입니다.”
살다보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나 본부장의 얘기가 딱 그런 말이었다.
“영업에 기대가 커! 좋은 작품 많이 만들라고!”
“알겠습니다.”
“류전무도 안주하지 말고, 오늘 신사업 부문 전략 보고한 대로 착실히 진행하게나.”
“주마가편하겠습니다. 회장님!”
이정도면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보고서가 굉장히 산뜻한데. 역시 여성 팀장이라서 그런지 잘 만들었군. 다른 본부에서도 참고할 만 하겠어.”
“보고서 톤을 회사 C.I 컬러인 Althea Blossom 에 맞춰 봤습니다.”
“아! 그랬던가? 좋은 생각이야. 페레레와 계약 체결 빈틈없이 진행하도록 하고.”
Q&A까지 보고를 마쳤다.
계약서 검토, 품의서 결재 등 할 일이 남아 있긴 했지만, 9부 능선은 넘은 것이나 마찬가지.
시간이 금인 사람들이 대기업 CEO다.
대기업 CEO의 급에 맞지 않았지만, 오재준이 윤재를 언급했다.
말석에 앉아 꾹꾹이를 진행하던 윤재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이번 제휴 건도, 김윤재 자네의 공이 컸다고 들었네. 맞나?”
사장 또는 부사장이 기본인 경영위원들이 일제히 윤재를 바라봤다.
사장단들이 즐비한 경영위원회에 위축될 법 한데, 윤재의 모습은 아주 당당해 보였다.
“우연한 기회에 페레레 그룹의 3세의 인연을 맺게 됐는데, 회사와 비즈니스 파트너까지 발전하게 됐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껄껄걸. 운도 자꾸 반복되면 실력이야!”
“감사합니다. 회장님!”
“조직은 구성원의 공로와 헌신을 잊지 않는 다는 것을 명심하게.”
“네. 회장님!”
이사회 다음가는 회사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경영위원회.
제휴사업에 대한 보고가 성공리에 끝났다.
경영위원이 아닌 류전무와 휘하의 직원들은 회의실을 나와야 했다.
◈ ◈ ◈
“나는 따로 경영위원회 끝나고 미팅 있어서 기다려야 하니까, 니들은 먼저 올라가라.”
“네! 전무님!”
“고생한 멤버들 맛있는 점심 사주고! 조만간 저녁은 내가 거하게 사마. 다들 고생했다.”
“전무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윤재는 2명의 팀장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류중정 전무는 임원대기실로 갔다.
류전무가 윤재 일행과 함께 돌아가지 않은 결정적 이유.
점심식사 이후 오재준에게 추가 보고의 자리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었다.
나상길 영업본부장과 함께, 올리버 페레레가 제시한 조인트 벤처에 대한 구두 보고가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윤재는 알고 있었다.
페레레의 인기제품에 대한 국내 판매 제휴와 달리, 조인트 벤처는 쉽게 통과되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투자액수도 문제였고 신제품이라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도 문제였지만, 진짜 걸림돌은 따로 있었다.
2002년 말부터 인터넷 카페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대.투.사!
대한민국 투자 사랑방 이라는 인터넷 카페로, 주식과 부동산 등 카테고리 별로 활발한 활동이 이뤄지는 빅 커뮤니티였다.
특이한 것은 지난 4개월가량, 선물옵션 방에 희한한 소문이 돌아 다녔다.
PM5257과 AM2258이라는 아이디가 게시판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퍼져 나간 소문이었다.
PM5257이 게시판에 올린 글들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형이 제주도에 땅 2,000억 어치를 샀어. 골프장도 짓고....
형이 어제 선물 5,000계약 매도했다. 얼마 못 먹었어.
형 재산 얼마 안 돼. 대략 4조 정도 되려나....
그와 비슷한 시기에 게시판을 달군 AM2258의 글들은, PM만 못했지만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 네 마녀 춤추는 날, 양매도 전략 실행해 30개 먹었다.
- 아버지가 요즘 매출 100조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아서, 머리가 아프다.
맥라렌 한 대 들여올 생각인데, 인증사진 올릴게.
처음에는 카페 회원들이 PM과 AM이 인터넷상에서 장난치는 허세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카페 유저가 PM5257이 KS그룹의 오너가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놀라운 추리라는 얘기가 퍼져나가자, PM과 AM은 계정을 폭파시키고 카페를 탈퇴했다.
사이버 수사대보다 정보력이 좋다는 네티즌 수사대의 추리처럼, PM은 KS그룹 오너가 맞았고, AM은 O2 그룹의 오너 3세 오진탁 전무였다.
2002년부터 2명의 재벌가 후손들은, 집안 몰래 선물옵션 투자를 해 왔다.
그들이 카페를 떠난 것은, 네티즌 수사대 때문이 아니라 검찰 수사 때문이었다.
서초동 검찰청 주변에는 2명의 재벌 3세가 천문학적인 손실을 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KS 조민원 사장이 5,000억!
O2 오진탁 전무가 1,500억을 날렸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오래지 않아 사실로 드러난다.
‘소문이 뉴스가 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오재준 회장도 이미 아들놈이 사고친 것을 알고 있을 테지?’
신사업 부문이 나이스한 보고를 했음에도, 오재준의 표정이 밝지 않은 이유.
그룹 승계권자인 큰 아들의 사고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사고 친 비자금 1,500억을 메워야 하는 판에, 수천억이 투자 될 페레레와의 조인트 벤처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기대도 안했지만 대기업 회장의 부정(父情)은 필부의 것과 달라야 하거늘!’
오진탁의 삽질이 커지기 전에, 회사에서 존재가치를 키워야 하는 윤재.
나비효과 때문에 전생보다 오진탁의 삽질 시점이 빨라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 오진탁이었다.
‘Plan A의 장애물이 전생보다 빨리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 ◈ ◈
경영위원들과 식사를 마친 뒤, 오재준은 영업본부장과 류전무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오재준은 페레레 제휴건에 대해 다시 한 번 류전무를 칭찬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조인트 벤처 추진 구두 보고에 대해서는, 신중론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조인트 벤처 건을 일단락 지은 오재준.
“이태리에는 누구를 보낼 건가?”
“아무래도 제가 직접 다녀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페레레측 실무협상자인 올리버와 안면이 있는 류전무가 이태리 행에 직접 나서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래. 나도 류전무가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법무팀장하고 국제변호사 한 명 데려가고.”
오재준은 뜸을 들였다. 뭔가 추가 지시사항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황영춘 전무와 함께 다녀오게!”
“황전무를요?”
나상길 본부장이 깜짝 놀라 물었다.
황영춘 전무는 O2 그룹 미래전략실 대외협력팀장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관공서 대관업무를 진행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오너 일가에 대한 관리책임을 맡고 있었다.
“3일 정도 더 줄 테니, 이태리 용무 끝내고 영국에 가서 하루를 만나고 오란 말일세.”
오하루!
오재준의 3번째 자식이자, 가장 아픈 손가락이 바로 오하루였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그녀는, 지금 10년 가까이 영국에 머물고 있었다.
“가서 하루에게 내 의중을 전달하고 오면 되네.”
“알겠습니다.”
“하루 그 녀석이, 외지에서 겉 돈지 너무 오래됐어. 이젠 귀국해서 애비를 도와야지!”
“네. 회장님! 황전무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오늘 다들 수고했어.”
2명의 임원이 나간 회장실.
오재준은 끊은 지 20년도 넘은 담배가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탁이에게 회사를 물려줄 마음.... 아직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재준은 큰 딸 오하루가 아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 ◈ ◈
같은 시각 신사업 부문.
점심식사 전까지 약 1시간 30분이 남아 있는 가운데, 왠지 모르게 나사들이 풀려 있었다.
지난 2개월 동안 미친 듯이 달려왔었고, 쉼표를 찍을 타이밍이기도 했던 것이다.
인터넷 스포츠 뉴스를 보는 사람, 주식 계좌를 보는 사람 등등.
간만에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윤재는 그 자투리 시간에 쉬지 않고, 류전무 비서이자 사무보조 담당인 이세영씨를 도왔다.
“어맛! 대리님! 이런 일까지 안하셔도 돼요. 놔두셔요. 제가 할게요.”
“하하하. 나는 문서 파기되는 모습 보면, 왠지 희열을 느껴서 말이야.”
“어맛! 대리님! 그런 취향이셨어요?”
“하하하. 농담이야. 그냥 세영씨 혼자 이 많은 문서 파기하려면 짜증날 테니까!”
윤재는 복도에 비치돼 있는 4개 팀의 문서 세단기를 모두 지원팀 앞으로 끌어왔다.
누구보다 계약직의 설움을 잘 아는 윤재였다.
애시당초 ‘비서’ 역할로 충원한 이세영에게 사무보조까지 시킨다는 것은 업무분장에 문제가 있는 것임에도 다들 관행이라는 이유로 이세영에게 온갖 허드렛일을 시켰다.
그렇게 부려 먹은 뒤에, 2년이나 최장 4년이 지나면 버려지는 존재가 계약직이었다.
윤재가 앞장서 문서세단을 돕자,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신미나 대리도 합세해 3명이 문서를 파기하기 시작했다.
윤재가 2개의 세단기에 그동안 작성해 온 페레레 관련 서류들을 파기했고, 나머지 2대를 신미나와 이세영이 작업하고 있었다.
“세영아! 울 김대리님만큼 맘씨 고운사람 없어.”
“알아요. 언니!”
“너! 김대리님께 잘 해라. 세상 누가 여직원 문서 세단하는 것 도와주니?”
그렇지 않아도 이세영은 윤재의 고마움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공동으로 이용하는 냉온수기에 물통 올리는 것도 돕지 않는 직원이 태반이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아침에 출근한 이세영이 낑낑 대며 물통을 올리고 있는데, 전략팀의 하진호가 출근했다.
“대리님! 죄송한데 물통 올리는 것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아. 세영씨! 미안 내가 습관성 탈골이라....”
비겁한 변명이었다.
어깨 탈골이 아니라, 물통 드는 일은 자기 일이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밑에 어린 직원도 있고, 계약직 여직원도 몇 명 있는데 왜 자신이 그런 일까지 하느냐는 생각이었다.
선량한 사람들이 많지만, 종종 하진호 같은 부류도 있었다.
하지만 윤재는 달랐다.
일부러 찾아다니며 허드렛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계약직 여직원들의 요청을 모른 척 하는 법이 없었다.
보고서, 프레젠테이션 등 굵직굵직한 큰일도 척척해냈지만, 물통을 교체하는 거나 프린터 고장 등 사소한 일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문의 직원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윤재를 신뢰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것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인정을 받아 프로모션 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자산이라는 것을 윤재는 잘 알고 있었다.
“대리님! 덕분에 문서 파쇄가 넘 일찍 끝났어요. 호호호. 감사드려요.”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수고했어. 세영씨!”
자리로 돌아가는 윤재의 뒷모습을, 이세영은 한동안 바라봤다.
이세영은 자리에 앉아서 윤재에게 사내 메신저를 보냈다.
- 대리님! 점심 드시고 커피 드시지 마세염. 제가 밥 먹고 오면서 대리님 커피 사 올게요.
괜한 헛수고란 없는 것이다!
윤재는 이세영의 메신저를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짧은 답장을 보냈다.
- 잘 먹을게! 세영씨~ 그리고, 설탕 많이!
남들은 여전히 스포츠, 연예 기사를 보고 있는 시간.
윤재는 2003년 초, 함께 서울로 올라온 남창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떼돈을 벌어줄 이벤트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