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09화 (109/196)

멀티 태스킹

한국에 들어와 진도에서 생활한지 벌써 1년이 다 돼가는 에밀리.

그녀를 다시 귀환시키기 위한 준비가 끝나 있다는 올리버의 얘기였다.

“사실 작년에 주세페와 함께 귀국한 뒤, 영국 쪽 음반사에 계속해서 에밀리의 데모 테잎을 보냈었다.”

“아. 그랬었구나!”

“그리고 마침내 지난달에 에밀리를 만나보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어. 팬텀이라고, EMI 같은 메이저는 아니지만 괜찮은 회사야.”

브릿팝이나 락 밴드 등을 주로 소속사로 거느린 소형 레코드사라고 했다.

정상급 스타는 없어도, 영국에서는 나름 저변이 탄탄하다고 했다.

“팬텀 제작 총괄이 아시아 여자야. 오카루라는 일본 여자인데, 에밀리 목소리에 반했다고 했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데모 테이프는 한국에 오기 전에 녹음한 것들이었다.

올리버도 에밀리를 직접 만난 본 게 약 1년 전의 일이었다.

사실 에밀리는 특유의 허스키 보이스에 Scar가 더해져, 한 차원 더 성장해 있었다.

최근 에밀리는 박수소리에 맞춰 노래만 불러도 빈틈이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완성형 보이스로 진화해 있었다.

올리버와 팬텀 뮤직의 오카루라는 여자가, 에밀리의 지금 노래를 들으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재는 2002년 말에 진도에서 에밀리를 만났던 당시를 떠올렸다.

소공례 여사님이 돌아가신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조문객들이 대충 돌아간 늦은 밤.

윤재는 5명의 누님들과 함께 에밀리를 설득했다.

진도 소리공부방에는 공례 엄니와 15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보냈던 선배님들이 계셨다.

5명의 언니들은 생전의 공례 엄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에밀리가 영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음악을 하기를 바랐다.

“에밀리! 우리를 봐라. 소리에 미쳐 산 세월이 다들 20년 넘었어. 세월이 그처럼 빠른 것이다. 이제 그만 돌아가. 우리야 이미 나이 들어 힘들지만, 네 재능을 외딴 섬에서 썩히는 건 낭비라고 생각한다.”

“그래. 에밀리. 고국으로 돌아가서, 니 노래를 하는 걸 공례 엄니도 바랄거야. 여기서 이렇게 세월과 씨름하는 건 엄니가 바라는 게 아닐 거다.”

푸른 눈의 국악인 에밀리에 캠벨.

그녀는 1년 만에 한국 사람이 다 돼 있었다.

“공례 엄니 49재 모시는 대로, 영국으로 돌아가겠어요.”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 공례 엄니 생각에, 다섯 선배들과 에밀리는 한동안 부둥켜안고 울었다.

눈물을 한바가지 쏟아낸 다음 에밀리가 한 얘기였다.

공례엄니의 출상 날.

한국 국악계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명창의 죽음을 애도했다.

한 겨울에 섬 바람이 무섭게 불던 날이었다.

수많은 국악인들이 만가를 부르며 상여를 따랐다.

그 인파 속에 에밀리도 함께 했던 기억이 났다.

에밀리의 한국생활 1년에 대한 얘기를 들은 올리버의 눈빛이 빛났다.

“그러니까 네 말은 에밀리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됐다는 얘기잖아.”

“응. 너도 놀랄 거다.”

약 2주일 전에 진도향토문화관에서 공례 엄니의 49재를 기념한 추모 공연이 열렸었다.

5명의 언니들과 제자의 신분으로 함께 공연을 마친 에밀리.

올리버가 지금 시점에 내한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에밀리의 귀국 추진이었다.

몽블랑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에밀리와 윤재는 마음이 잘 맞았다.

한국 생활 동안 윤재의 에밀리에 대한 보살핌까지 추가돼, 그녀가 성공적으로 데뷔를 하게 된다면, 올리버 ? 윤재 ? 에밀리 3명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질 것이었다.

◈          ◈          ◈

“모으다 조그레!”

에밀리가 과거보다 훨씬 성장해 있다는 얘기에 흥분한 올리버.

뭐가 그리 좋은지, 커피를 입에 머금은 채로 뭔가 얘기했다.

그래서인지 발음이 이상했다.

“뭐라고?”

커피를 삼킨 올리버가 또렷한 발음으로 얘기했다.

“몬스터 초콜릿!”

“작은 엄마가 만드신 몬스터 초콜릿?”

“그래. 네 작은 엄마가 만드신 몬스터 초콜릿! 그리고 몽블랑 초콜릿. 이 2가지에 대해 그동안 계속 고민해 왔다.”

“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역시 윤재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비상한 두뇌와 뛰어난 사업 감각.

이미 세계적으로 성공한 CEO의 반열에 오른 올리버의 아버지 미켈레 페레레.

아버지의 유명세 덕을 보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올리버에게, O2와의 제휴사업과 신제품 출시만큼 좋은 아이템도 드물었다.

올리버는 몬스터 초콜릿과 몽블랑 초콜릿으로 자기만의 성공신화를 쓰고 싶은 것이었다.

“제휴사업에 대한 조인식을 할 때, O2 푸드와 몬스터 초콜릿과 몽블랑 초콜릿에 대한 조인트 벤처도 함께 처리했으면 한다.”

조인트 벤처 얘기는 이미 구축돼 있는, 페레레의 제품을 한국에 들여오는 것과는 또 다른 비즈니스였다.

“윤재야. 당장 결정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안다. 내부적으로 충분히 검토한 뒤 해결해 나가자.”

“올리버. 몬스터 & 몽블랑 초콜릿은 완전 다른 얘기야. 좀 더 복잡하다구.”

윤재는 겸업금지를 원칙으로 하는 회사의 특성 때문에, 52 Cafe가 상표권을 갖고 있는 2가지 신제품을, 회사에 오픈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올리버는 역시 시원시원했다.

마치 그런 케케묵은 고민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식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52 Cafe가 갖고 있는 몬스터, 몽블랑 초콜릿의 판권을 페레레가 갖고 있는 것으로 하고, 그 다음 아시아 조인트 벤처에 대한 투자를 O2와 함께 하는 거지.”

역시 머리가 윤재만큼 잘 돌아가는 올리버였다.

그의 해법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었다.

먼저 윤재의 곤란한 상황을 커버할 수 있다.

페레레 입장에서는 조인트 벤처를 통해, 자금부담을 O2와 분산할 수 있었다.

끝으로 O2 입장에서도 2가지 신제품 초콜릿이 성공한다면, 5% 마진이 예상되는 페레레와의 제휴보다 훨씬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만큼 올리버가 몬스터, 몽블랑 초콜릿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루텔라 초콜릿 베이스로 만들어지는 페레레의 각종 제품들!

페레레 로쉐, 루텔라&고, 킨더 등의 히트작들은 모두 루텔라 초콜릿을 베이스로 한 제품들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 보고 싶어. 그 첫 번째 작품이 몬스터와 몽블랑이 될 거고.”

분명 루텔라 베이스의 초콜릿과 몬스터, 몽블랑이 결합하면 히트작이 될 것 같긴 했다.

문제는 O2 푸드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올리버 너야 오너 3세지만 나는 그냥 회사 직원일 뿐이야. 조인트 벤처 건은 좀 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

“단계적 접근?”

“응. 네가 말한 것처럼 우선 2개 제품을 상용화부터 하고!”

“상용화야 52 Cafe가 이미 한 것 아냐?”

올리버에게 52 Cafe의 존재를 회사가 모른다는 것. 그리고 회사는 겸업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 등을 다시 설명해야 했다.

“먼저 일단 회사와 제휴 건을 성사시키고, 그 다음 몬스터&몽블랑 초콜릿을 상용화하고, 그 뒤에 조인트 벤처로 가자는 거지.”

“그래. 일단 네 말대로 O2 F&B와 제휴하는 것부터 성사시키고 얘기하자.”

일단 올리버는 단계적 접근법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올리버가 구상하고 있는 조인트 벤처의 미래가 궁금했다.

“조인트 벤처로 생각해 둔 후보지라도 있는 거니?”

“당연히 중국이지!”

올리버는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윤재를 바라봤다.

“내 생각에 더 좋은 곳이 있어. 한 번 들어 볼래?”

“더 좋은 곳?”

“그래. 중국보다는 베트남이 더 좋아. 중국 인구 15억 명. 인도 인구 10억 명. 게다가 베트남도 인구가 약 1억 명이야. 중국과 인도 그리고 동남아시아 전체를 시장으로 겨누기 좋은 곳이 베트남이지.”

전생에서는 2010년대를 넘어서며 글로벌 기업들의 탈 중국 러시가 이어졌다.

인건비 상승. 각종 굴기로 대표되는 중국 우선주의 등이 불러온 결과였다.

그래서 수천억을 투자해야 할지도 모르는 조인트 벤처에, 중국보다는 베트남이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순간 올리버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회사로 돌아가면 아시아 시장에 대한 보고서를, 다시 만들어 라고 주문해야겠다.”

“그래. 조인트 벤처는 아무리 짧아도 2년 이상 걸리는 대형 프로젝트야.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 하자. 우리가 하루 이틀 보고 말 사이도 아니잖아?”

“콜!”

에밀리에 대한 얘기부터, 2가지 신제품에 대한 얘기까지 대충 정리가 끝났다.

이젠 진짜 숙소로 올라가 쉬어야 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올리버.

뭔가 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O2 직원들과 한국 진출에 얘기할 때만 해도, 내가 갑이었는데 이상하게 윤재랑 얘기하고 나니 내가 을이 된 기분이란 말이야?’

올리버는 그 이유가 무언지 금방 깨달았다.

첫 번째는 2가지 신제품에 대한 상표권이 윤재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자신의 연인 에밀리가, 1년 가까이 윤재와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문득 올리버는 윤재가 적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인 것이 너무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          ◈          ◈

다음날 올리버는 KTX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광주에서 진도로 넘어가 에밀리와 만나는 일은, 광주에 있는 혜진과 선희가 함께할 계획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진도까지 내가 같이 가고 싶다만, 회사 일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됐다. 이해해 줄 거지?”

“응. 걱정 마. 사실 너랑 같이 가는 것 보다야, 예쁜 혜진과 선희가 백번 낫지.”

“하하하. 너 다운 얘기다. 조심해서 다녀와. 에밀리 손 꼭 붙들고 와야 한다.”

“오케이!”

올리버가 서울을 떠나자 윤재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팔이 8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다.

제휴 사업팀과 함께 페레레 그룹과의 제휴에 대한 보고서를 다듬어야 했다.

게다가 하얀 국물 라면 출시를 위한 준비도 함께 진행해야 했다.

2가지 업무의 동시 처리에, 신사업 부문의 모든 역량이 총 동원됐다.

약 30명 가까이 되는 부문원 모두가, 철야근무에 주말 출근까지 해가며 2가지 신사업의 성공에 매달리고 있었다.

특히 윤재의 업무 강도는 살인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얀 국물 라면의 원작자로서 부문원들의 수많은 질문에 답해야 했고, 의견을 조율해야만 했다.

페레레와의 제휴사업 역시 올리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윤재인 만큼, 회의와 보고서 작성 등에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윤재와 회사 모두 다행인 점은, 윤재가 멀티태스킹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윤재는 힘들어도 티를 내지 않는다는 미덕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구성원 모두가 윤재와 같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회장님이 원망스럽네. 하얀 국물 라면을 안 하실 것 같더니, 갑자기 오케이 하실 게 뭐야?”

“그러게 말이야. 라면 오케이 하셨으면, 페레레와 제휴를 속도조절 했을 거 아냐?”

야근이 반복되다보니 농담반 진담반으로 불평이 흘러나왔다.

“자! 쓸데없는 얘기들 그만 하시고, 힘들 냅시다. 우리가 회사 매출 100조의 선봉장이란 생각으로 일 해 봅시다. 편하게 회사생활 하려고 신사업부문 온 건 아니잖아?”

“네.”

제휴사업팀이나 신사업전략팀, MC TF 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금 우리 부문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김윤재 대리에요. 김대리도 아무 불평 없이 일 하는데, 우리가 불평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제휴사업팀 임나영이 팀원들에게 한 얘기였다.

조영우 팀장을 포함한 매니저들이 팀원들을 다독거리며,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었다.

◈          ◈          ◈

2003년 2월 15일 토요일.

윤재와 신사업 부문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보름달이 눈앞에 떠 있는 것 같은 착시를 줄 정도로 가까운 밤.

경기도 양평의 별장 1층 발코니에 두 명의 사내가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별장 주변에는 다른 집이 하나도 없었다.

쉽게 허가를 받을 수 있는 건축물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는 풍경이었다.

“회장님! 저희가 선대 때부터 협력해 온 게 벌써 40년 가까이 됐군요.”

옹심그룹의 회장 신찬호!

그는 송아지 안심 스테이크를 익숙한 동작으로 썰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오재준 회장.

그 역시 묵묵히 스테이크를 썰었다.

신찬호도 오재준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들 옆에는 따듯한 석유난로가 좌우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기류는 묘하게 서늘했다.

칼질을 멈춘 신찬호가 오재준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회장님!”

신찬호가 말을 하다 멈췄다.

적막한 별장 주변에는 계곡물 소리만 들릴 뿐, 벌레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꼭 라면 시장에 진출해야 하겠습니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나이가 5살 가까이 어린 신찬호에게 오재준은 극존칭을 쓰고 있었다.

그로서는 나름 최고의 예우를 하고 있었다.

40년 넘은 두 회사의 묵계를 깬 것에 대한 예우인 것이다.

“오회장님! 저희로 하여금 오대양의 밀가루와 설탕을 계속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2대에 걸쳐 내려온 선린 관계가 상하는 걸 저는 원치 않습니다.”

줄곧 신찬호의 눈을 피하던 오재준이 눈을 치켜떴다.

40년간 서로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오대양은 라면 시장에 진출하지 않았고, 옹심은 오대양의 영역에 진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한 틀에서 벗어날 때였다.

혼맥, 선대 회장들의 약속, 오랜 묵계 등으로 얽히고설킨 상태에서 매출 100조는 영원히 달성할 수 없었다.

“동반자적 공생관계에서, 공정한 경쟁관계가 되길 희망하겠습니다.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스테이크 잘 먹었습니다.”

오재준이 조용히 일어났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오재준의 비서가 운전기사에게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 회장님! 다시 한 번 재고해 주십시오.”

신찬호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오재준은 끝까지 하지 않겠다던 사과를 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끝내 신찬호를 돌아보지 않고 별장을 떠났다.

고민 끝에 내린 O2의 라면시장 진출.

설탕과 밀가루의 최대 고객인 옹심에 선전포고를 해버렸다.

이제는 돌아갈 배마저 불태워 버린 형국.

윤재와 회사의 입장에서 하얀 국물 라면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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