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08화 (108/196)

타고난 장사꾼

2월 13일.

발렌타인데이를 하루 앞두고 올리버 페레레가 한국을 찾았다.

회사에서 시니어 디렉터 자리에 오른 올리버.

수행원 한명 없이 홀로 한국을 찾을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행보였다.

그의 두 번째 한국행 역시 윤재가 함께할 예정이었다.

여의도 본사 28층 회의실.

페레레의 책임자로 한국을 찾은 올리버를 맞이하기 위해, 신사업 부문의 핵심멤버가 총출동했다.

류전무. 조팀장. 임나영 팀장. 그리고 제휴사업팀에서 이태수 과장과 정지민 사원이 팀 실무자로 배석했다.

O2 참석자 중 영어를 가장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은 조영우 팀장.

구수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기름진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 했다.

영어를 구사하는 조팀장의 얼굴은 진짜 대니 드 비토처럼 보였다.

미켈레 페레레의 눈부신 업적에 대한 찬사.

올리버의 외모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그의 세련된 패션에 대한 칭찬 등이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에 오갔다.

협상 본론에 들어가자 올리버는 100m 달리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의견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태리 남자 특유의 남성다움도 한몫 했지만, 윤재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저희의 주력상품에 대한 한국시장 진출 파트너로 O2 와 함께할 생각입니다. 다른 회사에서 제안이 있었지만 다른 파트너는 고려하지 않겠습니다.”

“네?”

서론을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올리버의 정공법에 모두 깜작 놀랐다.

“조건은 페레레가 진출해 있는 OECD국가들 수준이면 됩니다. 특별하게 더 바라는 점은 없습니다.”

“OECD국가들 수준이라면?”

“한국 매출액의 5%를 로열티로 지급해 주시면 됩니다. OECD 국가들은 모두 그렇게 계약돼 있습니다.”

너무 심플해서, 과연 글로벌 초콜렛 공룡 기업의 조건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운 조건이었다.

“개도국의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남미나 아시아의 경우 7%를 넘는 나라도 있습니다.”

상품성이 확실한 페레레의 제품은, 경쟁사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따라서 마진을 확보하기 용이했고, 후진국일수록 마진을 높게 책정할 수 있었다.

어쨌든 로열티가 1~2% 낮다는 건 반가운 얘기였다.

국내1위의 식품기업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설탕. 밀가루. 식용유. 더 스팸 정도가 주력이었던 O2 푸드!

국외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제휴나 M&A 경험이 적은 탓에, 회의에 참석한 실무진의 경험도 부족한 게 현실이었다.

제휴사업을 맡고 있는 임나영 팀장이 어설픈 영어로 물었다.

“한국 광고에 대한 비용 분담, 고객 클레임 발생에 대한 본사의 책임 범위, 안정적인 물량 공급 등 논의해야 할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만?”

임나영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올리버가 빙긋 웃었다.

남자에게 보내는 웃음과 여자에게 보내는 웃음이 달랐는데, 역시 올리버는 올리버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레레는 한국으로 원하는 물건을 선적해 보내는 것으로 그 임무를 다 합니다. 한국 내 판매 단가 등 모든 권한은 O2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광고, 클레임, 유통방식 등 의무 또한 O2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한국 매출액의 5%만 로열티로 받으면 됩니다. 그게 페레레의 방식입니다.”

마라톤 회의를 생각하고 참석한 사람들은 허탈할 지경이었다.

“올리버 디렉터. 귀사 측에서는 한국 내 매출액 규모를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명색이 조직장인데 듣고만 있기 민망했는지, 류중정 전무가 서툰 영어로 물었다.

“3년 이내 매출액 500억. 그리고 7년 이내 1,000억 돌파할 것이라 자신합니다.”

500억이면 O2의 영업이익이 50억이었고, 페레레가 가져갈 로얄티가 25억이 된다.

1,000억이면 회사가 50년 동안 이어온 설탕 소매시장에 육박하는 규모였다. 그것도 단 7년 만에!

국민건강 증진이 강조되면서, 국내 설탕 소매 시장 규모는 매년 축소되고 있었는데, 올리버는 7년 만에 2배의 성장을 자신하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과자회사나 제과 프랜차이즈 등에 판매하는 설탕직매와 달리, 마트 등에서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설탕소매는 하락추세가 완연했다.

페레레와의 제휴가 잘 풀리면, 설탕 소매관련 인력의 재배치에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올리버. 아주 자신 만만하시군요. 3년 500억, 7년 1000억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제휴사업의 주관부서는 어디까지나 제휴사업팀.

팀장인 임나영이 올리버에게 물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일본시장의 3분의 1로 추산한 것이니까.”

“!”

O2의 참석자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윤재의 보고서를 통해, 페레레 그룹이 1년에 15조가 넘는 초콜렛과 과자를 팔아치우는 기업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너무 주먹구구식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내 친구 윤재가 작성한 보고서는 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O2처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분석을 합니다. 그러니 믿으셔도 될 겁니다.”

올리버가 참석자들의 눈빛을 서칭했다.

당신들 마음 나도 잘 알아.... 뭐 그런 표정이었다.

“너무 쉽게 한다는 생각들 하고 계시는 거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임나영 팀장이 얼굴을 끄덕이며 말했다.

“O2 푸드의 작년도 매출액이 약 4조5천억이라 들었습니다. O2 그룹 전체 매출이 10조가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우리 페레레는 매출 15조가 넘는 회사입니다. 세계 40여 국가에 이미 진출해 있어요. 언어의 문제 등을 고려해 쉽게 말씀드릴 뿐, 우리는 결코 대충 일하지 않는다고 자신합니다.”

다국적 기업의 자신감이란 저런 것일까?

올리버의 얘기들은 속이 뻥 뚤릴 정도로 시원했지만, 반면에 대충 얘기하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올리버는 팔짱을 끼거나, 다리를 꼬는 등 시종일관 여유로운 모습으로 협상을 주도했다.

상대방의 패가 모두 나왔으니, 더 논의할 내용이 없었다.

올리버가 협상을 명토 박겠다는 기세로 말했다.

“제가 제시한 조건은 좀 전의 내용이 전부입니다. 귀사 측에서 최종 오퍼를 주시면, 페레레도 검토에 들어갈 것입니다. 귀사의 결정에 우리의 제휴가 달려 있는 것이지요.”

보고서 작성과 검토. CEO보고. 품의서 작성, 계약서 검토부터 CEO 결재까지!

아무리 빨리해도 최소 3주에서 한 달은 걸릴 것이었다.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한국 기업 문화가, 하이어라키를 중시한다는 점 알고 있습니다. 말씀 드린바와 같이, 다른 파트너는 고려하고 있지 않으니, 차분하게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윤재는 올리버가 지난 1년간 경영수업에 몰두한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 대해서도 각종 보고서를 받아보고, 숙지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 한국 방문 기간은 1주일 밖에 안 됩니다. 그 안에 모든 의사결정이 마무리 될 거라 생각지 않습니다. 의사결정이 끝나면 귀사 협상 대표와, 이태리에서 만나 최종 사인하는 걸로 하면 되겠죠?”

“네. 잘 알겠소.”

협상이라고 하기에 지나치게 일방적인 자리였다.

갑인 페레레가 키를 쥐고 있었지만,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올리버의 행위를 갑질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로열티 5% 뿐이니, 이보다 더 심플한 조건이 없었다.

신사업 부문원들은 글로벌 Top 클래스의 자신만만함에 놀랄 따름이었다.

◈          ◈          ◈

고객초청 만찬은 짧게 끝났다.

올리버가 장시간 비행에 따른 피로를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페레레와 O2푸드의 사업적 이해관계에 따른 제휴추진이지만, 윤재의 존재 덕분에 성사된 측면은 무시할 수 없었다.

몽블랑에서의 인연.

그리고 전년도 주세페와의 거래.

모두 윤재가 중심에서 활약한 바 있다.

주세페를 통해 수입하고 있는 이태리 와인과 발사믹은, 전국 대도시 백화점에서 제법 좋은 반응을 끌고 있었다.

특별한 관계 덕분에, 만찬 이후는 윤재가 올리버를 커버했다.

고객사 Senior Director가 아니라 친구로서 맞이하는 자리였다.

올리버와 윤재가 떠난 뒤, 신사업부문 직원들은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복기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것 아냐? 왠지 불안하지 않냐고?”

3년 내 매출 500억에 50억의 순이익이 예상되는 비즈니스다.

이탈리아 사람을 만나 협상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인데, 너무 쉽게 일이 풀리고 있었다.

류전무가 계속해서 물음표를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무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김윤재 대리와 각별한 사이이고, 그 인연 때문에 우리와 제휴하고 싶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습니다.”

류전무와 달리 공항에서부터 올리버와 함께한 조영우.

그는 자신의 촉과 올리버와 나눴던 대화를 토대로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혔다.

O2는 페레레보다 훨씬 규모가 작긴 하나, 어쨌든 국내 1위의 식품회사.

유통망에 강점이 있어, 페레레 입장에서도 나쁜 파트너는 아닌 것이다.

“페레레가 세계 3위권 초콜렛 회사가 맞는 건가?”

류전무는 여전히 너무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런 모양이었다.

임나영 팀장이 윤재의 보고서와 그동안 공부한 걸 바탕으로 얘기했다.

“길리안. 허쉬. 마스. 린트 등 세계 굴지의 초콜렛 회사들이 많습니다만, M&A 없이 자체 성장만으로, 글로벌 Top3에 들어간 회사는 페레레가 유일합니다.”

임나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놀랄만한 회사인건 맞았다.

초콜릿과 과자류만 팔아 연 매출 15조라니....

“상대는 마피아의 나라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로열티만 5% 주면 된다니? 납득이 안 가서 그래!”

류전무는 여전히 가자미눈을 뜬 채, 분명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주장을 되풀이 했다.

“전무님! 오랜 부정부패에 신물이 나 오히려 투명하게 진행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잖습니까?”

“음....”

“초콜릿만으로 글로벌 빅3가 된 회사입니다. 저들의 눈으로 봐야지 저희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임나영 팀장의 예감은 정확한 것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올리비에노 페레레!

그는 2대째 이어오고 있는 가업승계를 거부하고, 예술과 자유, 취미를 찾아 10년 가까운 세월을 겉 돌았다.

그랬던 올리버가 회사로 복귀를 결정했을 때, 가장 기뻐한 사람은 그의 아버지 미켈레 페페레였다.

사실 올리버 페레레는 IQ 157이라는 두뇌와, 천부적인 사업 감각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전생의 경험이 있는 윤재만이, 올리버 페레레의 역량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리버를 그저 돈 많은 부모를 둔 금수저 정도로 생각했다. 이는 국내외의 사람들 간에 차이점이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윤재가 기억하기에 그는 천상 CEO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학자처럼 사유하고, 학생처럼 실행하라!’

2017년에 올리버는 ‘페레레 이야기’ 라는 자전적 에세이를 출판한 적이 있다.

그의 경영철학을 축약한 키워드가 바로 위의 문장이다.

사전 검토는 신중을 기하되, 검토를 끝냈으면 전광석화처럼 일처리를 끝내야 한다는 게 경영자 올리버의 기본 철학.

올리버는 O2와의 제휴건도 이미 충분히 검토를 마치고 한국에 왔다.

그래서 오늘처럼 명쾌하게 협상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올리버 페레레의 어렸을 적 일화 중, 그의 비즈니스 감각을 보여주는 대표적 얘기가 하나 있다.

역시 그의 책에 나오는 얘기다.

루텔라 초코잼으로 가업을 일으킨 올리버의 할아버지 피에트로 레페레.

피에트로 페레레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페레레 그룹은 이태리에서만 알아주는 로칼 회사에 불고했다.

올리버가 어렸을 때에, 그는 매일 한국 돈으로 1,000원 정도 되는 용돈을 할아버지에게 받았다고 한다.

그 돈으로 과자류를 사먹던 올리버가, 어느 날 할아버지 피에트로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하루 10리라 말고 1개월 치 모아서 300리라를 주면 안돼요? 어차피 한 달이면 300리라니까, 매달 초에 300리라를 주시면 한 달 동안 용돈 안 받을게요.”

손자의 가불 요청을 피에트로는 귀엽게 생각했고, 다음달 1일에 올리버에게 300리라를 쥐어줬다.

그런데 2주일 뒤에 올리버의 보물상자에서 400리라가 발견됐던 것이다.

그가 받은 용돈보다 100리라가 늘어난 금액이었다.

놀란 피에트로와 미켈레 페레레가 올리버를 호출했다.

혹시 못된 짓이라도 한 건 아닌지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이 돈이 다 뭐냐? 300리라 받기 전에는 한 푼도 없었던 네가, 어떻게 100리라가 늘어나 있는 거야?”

“하하하하. 아빠? 내가 무슨 마피아 놀이라도 했을까봐 그러는 거야?”

올리버는 천진난만하게 웃더니 아빠와 할아버지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할아버지가 그랬다구요. 한꺼번에 산 뒤에, 나눠서 파는 게 장사의 기본이라고.”

“?”

“그래서 동네 슈퍼에 가서 10리라를 주고 사탕 몇 개 사는 게 아니라, 300리라를 한꺼번에 줄 테니, 다른 친구들보다 20% 싸게 주라고 협상했어요.”

올리버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충 감이 왔다.

으쓱한 얼굴로 올리버는 설명을 계속했다.

“그랬더니 가게 아저씨가 정말 20% 싸게 사탕과 과자를 주더군요. 그래서 300리라를 주고 과자를 대량으로 가져다가, 친구들에게 마진을 붙인 다음 낱개로 팔았지요. 그 돈이 지금 400리라가 된 것 이구요!”

당시 나이 8살에 불과했던 올리버의 상업적 감각에, 가장 놀란 것은 그의 아버지 미켈레 페페레였다.

그랬던 아들이 오랜 방황을 끝내고 가업을 있겠다고 돌아왔으니, 아버지 입장에서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반면 그런 올리버를 류전무는 의심의 눈치로만 바라보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류전무가 올리버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사이, 올리버는 윤재와 호텔 커피숍에 함께 있었다.

“우하하. 윤재! 너랑 할 얘기가 많다. 하나는 여자 친구에 대한 얘기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비즈니스에 대한 얘기야!”

작년 주세페와 함께 할 때는 올리버도 커피 타박을 많이 했었다.

호텔 커피는 솔직히 보통 이하의 맛임에도 올리버는 커피 타박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와인, 치즈, 커피 등에 열을 올리는 취미학도가 아닌 것이다.

“우리 사이에 못할 얘기가 뭐 있니? 2가지 모두 얘기해 봐!”

“먼저 에밀리에 대한 얘기부터 해 볼까?”

바람둥이처럼 행세했지만, 올리버는 마음 속 깊이 에밀리를 사랑했다.

그건 에밀리도 마찬가지였다.

경영 수업을 시작하며, 철두철미해진 올리버의 입에서 에밀리 얘기가 나왔다는 건, 그녀를 위한 준비가 끝나 있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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