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07화 (107/196)

돌아온 올리버

술도 취했겠다, 제대로 필 받은 류전무는 흥을 주체하지 못했다.

90분이 넘도록 노래를 불렀는데, 지친 직원들이 드문드문 화장실을 다녀오는 게 보였다.

직원들은 지쳐서 집에 가고 싶은 얼굴들.

반면 류전무는 아직 여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아직 팔팔했다.

회사원이 아니라 가수가 됐으면 대성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잠시 소강상태인 가운데 윤재는 맥주를 한잔 마시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그때 룸과 10미터도 더 떨어진 모퉁이 화장실에 있는,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각이 좋기 때문에 남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신재영 팀장과 하진호 대리였다.

“뭐야? 하대리? 블랙 크로우즈 보컬 실력 어디 갔어? 설마 윤재한테 쫄았어?”

“아. 아니요. 컨디션이 안 좋습니다.”

“내 눈은 못 속인다. 아까 윤재 ‘네버엔딩 스토리’ 부르는 것 보고 쫄았잖아?”

“....”

하진호 대리는 부인할 수 없었다.

윤재가 프로라면 자신은 아마추어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너 그래서 험한 회사생활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이미 신사업 지원팀에 5km는 뒤져있다던 전무님 말씀 못 들었어? 오늘은 그렇다 쳐도 앞으로 잘 해야 한다. 정신 단단히 차려라.”

“네. 팀장님. 면목 없습니다.”

“기회를 무한정 줄 수는 없어. 다음 기회는 확실히 잡아야 한다. 명심해.”

“네.”

윤재는 노래방 책을 뒤적거렸다.

보나마나 뻔한 신팀장과 하대리의 얘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왜 나를 건드는 걸까?’

회귀한 이래 윤재를 건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골로 갔다.

윤재의 대응 방식은 이미 확고하게 확립돼 있었다.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지만, 도발은 확실하게 응징해 버린다!

아둔한 신재영과, 순진한 하진호가 부디 착한 맘으로 살기를 바랄 뿐이었다.

소강상태를 거쳐서 인지, 좀처럼 노래방 분위기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어느새 노래방 회식을 정리할 타이밍이었다.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노사연의 히트곡 만남을 함께 부르는 것으로, 첫 번째 노래방 회식이 끝나가고 있었다.

‘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후회가 동반될 수밖에 없어. 다만 후회를 최소화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면 되는 거야.’

윤재는 조팀장과 나소희 대리의 어깨동무를 한 채, 노사연의 만남을 따라 불렀다.

오재준 회장은 하얀국물 라면 출시에 대해, 그 자리에서 OK사인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님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나와 조팀장님 프레젠테이션은 일말의 후회도 없는 것이었다. 그거면 됐어!’

◈          ◈          ◈

류전무가 집으로 가고 난 뒤, 윤재는 항상 그렇듯 직원들이 집에 가는 걸 일일이 챙겼다.

모두 배웅하고 나니 어느새 밤 11시였다.

윤재는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노래방을 갔든 술을 마셨든 당일 계획했던 목표를 채우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28층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가는데, 그 시간 까지 야근을 하고 있는 직원들이 보였다.

영업기획부문 소속의 직원들이 윤재를 발견했다.

전생에서 윤재는 영업기획팀장을 3년간 역임한 이력이 있다.

“김대리 집에 안가고 다시 들어온 거야?”

영업기획팀 과장 소경운!

이변이 없다면 15년 뒤에 영업총수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다!

“네. 과장님! 정리하고 가야 할 일이 있어서요.”

영업기획팀 소속 선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사업 부문의 회식이 있다는 것은 28층에 이미 알려진 사실.

회식이 끝난 심야시간에 사무실로 돌아오는 윤재가 대견했던 것이다.

‘요즘 종횡무진 한다고 들었는데, 회식 자리 끝내고 일을 하러 다시 돌아온다? 신사업 부문이 다들 말술이라 술도 제법 마셨을 텐데? 소문 보다 훨씬 큰 인물이란 얘긴가?’

소경운 과장은 윤재를 보며 감탄했다.

미래에 영업본부장이 될 정도로 잘 나가는 인물이 바로 소경운 과장.

그는 자신이 윤재 정도 나이 때, 저 정도 열정이 있었는지 돌이켜 봤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젊은 날보다 윤재가 한수 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하다. 얼른 정리하고 들어가라.”

“그러는 과장님도 대단하시네요. 벌써 11시인데....”

“하하하하. 목구멍이 포도청 아니냐?”

윤재는 목례를 하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는 다음날 예정돼 있는 제휴 사업팀과의 회의 자료를 다시 검토했다.

국내와 해외의 제휴가능 회사들의 우선순위를 바탕으로, 사별 매출액과 주력상품을 비교 정리하는 일이었다.

이미 Data는 모두 찾아놨고, 스토리에 맞춰 장표만 구성하면 충분했다.

자정이 되자 회사 건물을 관리하는 용역회사 직원이,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퇴근을 은근 종용했다.

이제는 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자정이 넘어서도 일할 계획이면, 사전 요청을 해 승인을 득해야 가능했다.

노래방 회식을 예견치 못한 탓에, 사전 승인은 당연히 신청하지 않았었다.

영업기획팀 과장을 포함해 야근하던 3명의 선배들이 윤재를 찾아왔다.

“김대리? 어떻게 할래? 우리 요 앞 우동 집에서 간단하게 한잔하고, 배 좀 채우고 들어갈 건데. 같이 갈래?”

“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그래. 곧 불 꺼지니까 같이 나가자.”

“알겠습니다.”

1시간 만에 대충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기쁜 맘으로 PC를 껐다.

광주에 있었다면 제한적인 사람들과 반복적인 접촉을 했지만, 본사에 올라오면 이런 장점이 있었다.

‘본사에 근무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것! Plan A와 Plan B 모두에 좋은 일이다.’

외투를 고쳐 입고 사무실 불을 모두 껐다.

엘리베이터 통로에는 영업기획팀 직원 3명이 윤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2003년 2월 3일 수요일 한남동 오재준 회장의 자택!

늦둥이 막내 딸 오하나의 생일을 맞아 일찍 퇴근한 오재준.

큰 아들과 둘째 아들 내외와 함께, 막내의 21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셋째인 딸 오하루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있었다.

“네 언니가 있었다면 온 가족이 모이는 건데. 오늘 따라 하루가 보고 싶구나!”

오재준은 곧 있으면 서른 살이 되는 딸이 보고 싶었다.

“하루 고것은 잊어버리세요. 자유인가 나발인가 찾아 떠났지 않습니까?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말이에요.”

큰 아들 오진탁이 여동생 얘기에 발끈했다.

보통 가정이라면 4남매끼리 우애가 좋아야 했건만, 재벌집안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미묘했다.

형제관계를 떠나 생각하면 수십조에 달하는 그룹의 승계를 다투는, 잠재적 경쟁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너는 이 놈아. 큰 오빠가 돼서 그러면 안 된다. 그리고 태윤이 엄마는 왜 같이 안 왔니?”

“나윤이가 좀 아파서 나윤이 케어하고 있습니다. 함께 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충청권을 연고로 한 중견건설사의 딸과 정략 결혼한 오진탁은 부부관계가 좋지 않았다. 정략결혼의 태생적 한계였다.

딸이 아프다는 얘기도, 애 엄마가 딸을 케어하고 있다는 얘기도 모두 거짓말이었다.

“큰 일 하려면 집안이 평안해야 한다. 가화만사성이라고 했어. 명심해라.”

오재준은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다는 표정으로, 큰 아들에게 애비로서 충고를 하고 있었다.

셋째 딸 얘기가 나오면서부터 어색해진 생일 축하자리는 결국 어색하게 끝났다.

큰 아들과 둘째 아들 부부가 떠나간 뒤, 아내와 막내딸만 남은 집안.

마치 의무감에 참석했다는 듯, 밥만 먹고 부랴부랴 떠난 아들들이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당신은 그러게 왜 하루 얘기는 꺼내 가지고!”

“내가 딸 얘기 꺼낸 게 무슨 잘못이요?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오빠들이 돼 가지고, 막둥이 생일을 살갑게 챙기지는 못할망정. 쯧쯧!”

“아빠. 전 괜찮아요. 오빠들이 좋은 선물도 사다 줬는걸!”

오재준은 여전히 자신과 살고 있는 막내딸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대기업의 오너라는 자리는 사실 엄청 고독한 자리이다.

의사결정 한 번에 수백억에서 수천억의 이익이 왔다 갔다 한다.

굵직한 M&A의 경우, 한 번의 판단 미스로 회사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오재준이 가장 총애했던 자식이 셋째 오하루였다.

객관적으로 4명 중 가장 뛰어난 두뇌를 타고난 하루.

문제는 태어나기를 자유로운 영혼으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굵어질 무렵부터, 오빠들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오하루는 속세를 버리듯 영국행 유학을 고집했다.

음악과 예술에 자신의 꿈이 있다고 했었다.

기 싸움을 더 하다가는 딸 인생 망치겠다 싶어, 결국 오하루를 영국을 보낸 오재준.

오늘 따라 딸을 보내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금슬이 좋았던 오재준 내외.

그는 자신의 아이들도 자신처럼 부부관계가 좋길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창밖으로 여의도 사무실 방향을 보며 상년에 잠겨 있는데, 막내 딸 하나가 오재준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아빠! 언니 영국 보낸 것 후회해?”

“후회?”

“응. 오늘 따라 유난히 언니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오재준은 오하나의 ‘후회!’라는 말에 뜨끔 하는 기분이 들었다.

굴지의 재벌 오너로서 약한 모습을, 막내딸에게 들켰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후회라!”

막내딸과 회사 방향을 번갈아 지켜보고 있는 오재준.

오재준은 막내딸과 팔짱을 낀 채, 한 명의 사내를 떠 올렸다.

‘어떤 선택이든 후회를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오재준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그 사나이.

김윤재가 얼마 전 한 얘기였다.

“하나야!”

“아빠. 왜?”

“후회 없는 선택이 어디 있겠니? 조금이라도 덜 후회할 선택을 하면서 사는 것이지.”

오재준은 내일 출근하면 식품사업본부 본부장을 부를 생각이었다.

그리고 하얀 국물 라면 시장에 대한 진출을 지시할 계획이었다.

어차피 후회가 남는 것이 선택이라면, 그 편이 나은 결정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이다!

◈          ◈          ◈

2월6일 목요일.

윤재는 오랜만에 국제전화를 한 통 받았다.

페레레 그룹으로 들어가, 한참 일을 배우고 있는 올리버의 전화였다.

“올리버 잘 살고 있지? 아버지는 좀 어때?”

“나쁘지 않아.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작년에 주세페와 함께 이태리로 돌아간 올리버는, 아버지 미켈레 밑에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고 있었다.

장인정신과 가업승계를 중요시 하는 전통이 이태리에는 있었고, 미켈레 페레레는 자신이 그랬듯이, 아들 올리버가 3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주길 바랐다.

“그나저나 이메일해도 되는데, 직접 전화한 이유가 있는 것 아냐?”

“음하하. 역시 너는 못 속이겠구나! 나 한국엘 좀 가야할 것 같다.”

윤재는 올리버의 전화가 왠지 모르게 희소식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장차 페레레 그룹을 이끌어 갈 사람으로서, 아버지께 내세울 만한 뭔가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

평소의 올리버는 떠벌이 이탈리안.

하지만 윤재가 알고 있는 경영자 올리버는 달랐다.

전생에서 올리버는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유명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결정을 내리는 인물이었다.

“그래. 니네 회사랑 손잡고 한국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내 첫 번째 과업으로 할까 한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루텔라 초코잼, 로쉐, 킨더 초콜렛 등 글로벌 히트 상품을 갖고 있는 페레레와 제휴할 수 있다면, 윤재가 속해 있는 신사업 부문은 날개 하나를 장착하게 된다.

올리버와 통화하는 사이, 윤재의 머리에는 몇 가지 그림이 순차적으로 그려졌다.

하나 같이 명작이 될 만한 그림들이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올리버와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월 1회 정도는 국제전화를 하는 사이였다.

특히, 에밀리를 한국에 남겨두고 떠난 올리버는, 그녀를 보살펴 준 윤재를 특히 좋아했고 존중했다.

몽블랑에서 첫 인연을 맺은 지 어언 2년.

오랜 시간 누적돼 온 올리버와의 인연이 빛을 발할 타이밍이 도래하고 있었다.

“한국에 들어가는 길에, 에밀리를 만나 설득해야겠어. 이렇게 나이만 먹어가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야지.”

“에밀리도 곧 있으면 30살이다. 지금도 이미 늦었어.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 부분은 윤재도 100% 공감하고 있었다.

소공례 여사님이 하늘로 돌아가신지 벌써 2달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올리버의 귀국이 에밀리에게 분기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하얀국물 시장 진출의 실패를 만회할 굵직한 한방이 제발로 찾아왔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모두 지난 2년간 윤재와의 인연과 노력이 작용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올리버의 한국행은 회사와의 제휴를 넘어, 윤재에게도 커다란 기회를 가져다 줄 수 있었다.

회사인들 중에 ‘적을 만들지 말라’ 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올리비에노 페레레!

몽블랑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철천지원수가 될 뻔 했었다.

그를 적으로 만들지 않고, 친구로 만든 것은 말 그대로 신의한수.

두고두고 윤재에게 천군만마가 돼 줄 사람이 올리버였다.

음덕양보(陰德陽報) 라는 고사처럼, 그간의 노력들이 순차적으로 보상이 돼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효시를 쏘아올린 사람이 올리버였다.

올리버와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조영우 팀장.

전화가 끝나자, 조팀장이 윤재를 불렀다.

“네. 팀장님! 찾으셨습니까?”

“전무님이 너랑 나를 찾으신다. 들어가자!”

윤재는 조영우 팀장과 함께 류중정 전무실을 찾았다.

류전무의 표정이 보름달처럼 환했다.

“조팀장! 윤재대리. 축하한다. 회장님께서 꼬끼오 면 정식 출시를 공식화 하셨다.”

“정말입니까?”

올리버 페레레부터 오재준까지!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게 보였다.

“정말이고 말고. 내가 비싼 밥 먹고 헛소리 하겠어. 그동안 고생들 했다.”

류전무는 자신의 자리에서 나와, 조영우 팀장과 윤재를 끌어안았다.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이제 대장정의 첫 발을 뗀 거니까, 너무 들뜨지 말고 치밀하게 준비하자고! 회사의 오랜 숙원인 만큼 꼭 성공해야 한다. 알지?”

“네. 전무님! 맡겨주십시오.”

일본을 누르고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먹게 된 한국인들.

명색이 국내 최대의 식품기업으로서, 라면이 없어 체면을 구겨왔던 O2 F&B.

드디어 고객사들과의 일전을 불사한 라면시장 진출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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