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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06화 (106/196)

줄 세우기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료들이지만, 시야를 좁혀 보면 동료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사는 게 직장생활이다.

번듯한 외모에 S대 출신이라는 화려한 이력.

신사업 부문 산하 전략팀 신재영 팀장보다 스펙이 화려한 인물은 드물다.

새로운 부문으로 발령난지 어언 한 달.

신재영 팀장은 뭔가 꼬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팀장에 비하면 조영우 팀장은 일단 외모가 너무 후달렸다.

Market Creating TF의 이도형 팀장은 아무래도 학벌이 밀렸다.

제휴사업팀장이야 이제 팀장 1년차에다 여성 팀장이니, 자신의 경쟁자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영우 그 자식은 보이지도 않은 놈이었는데, 갑자기 왜 이리 컸지?’

신팀장은 여의도 공원을 내려 보며 생각을 거듭했다.

오후 3시에 공원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신세가, 대기업 팀장으로 스트레스 받고 있는 자신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에 초점이 명확해졌다.

꼬여버린 원인이 생각난 것이다.

‘문제는 김윤재 대리! 그 친구였어.’

대학도, 인물도, 입사 연차에서도 보이지도 않던 조영우.

그런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곳에 김윤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 부문에 팀장 A고과는 잘 해야 두 명. 나는 디폴트고 나머지 자리를 3명이서 피 튀기게 싸울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박정호 팀장은 살짝 조바심이 느껴졌다.

굳이 류중정 전무의 얘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출발이 뒤쳐진 건 부인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꼬끼오 면에 대한 성공적인 프레젠테이션에도 불구하고 오재준 회장이 의사결정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42.195Km의 여정에 5Km는 뒤쳐졌지만, 모든 스포츠에는 역전승이라는 훌륭한 스토리가 있는 법이지!’

아직은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공원!

버스킹인지 뭔지, 누군가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추운 날 무슨 청승이야?’

신재영은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혀 차는걸 뚝 멈췄다.

그는 여의도 공원에 두고 있던 시선을, 내선 전화기로 옮겼다.

그리고 내선 번호를 재빠르게 눌렀다.

◈          ◈          ◈

신사업 지원팀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윤재.

그는 사내 메신저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메신저 상태창에는 한송이라는 이름이 반짝 거리고 있었다.

- 윤재오빠! 회장님께서 결정을 못하셨다는 게 사실이야?

- 응! 그렇게 됐네.

- 아이템 괜찮던데. 의표를 찌르자는 내용도 좋고, 해외 시장을 공략하자는 전략도 신선하고! 그런데 왜 OK를 안 하셨대?

- 왜긴? 밀가루와 설탕 매출하락과 기회손실을 걱정하시는 거지.

한송이를 포함해 벌써 여러 명이 윤재를 위로했다.

윤재는 이런 일로 상처받을 스타일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동안 정성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O2 푸드에는 윤재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게 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 오빠! 상심하지 마. 잘 될 거야.

- 하하하. 걱정하지 마라. 꼬끼오 면 아니어도 진행할 아이템이 지천에 널려 있으니까.

윤재는 실제로 자신이 있었다.

설탕과 밀가루 쪽 손실에 대한 걱정으로, 주저하고 있는 오재준의 모습은 분명 실망스러운 측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왠지 오재준이 결국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 송이야! 미안. 팀장님이 찾는다. 또 연락하자.

한동안 폭풍 메신저를 주고받던 한송이는 피식 웃었다.

‘뭐! 강철 멘탈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역시 데미지는 1도 없어 보이네.’

한송이는 메신저를 종료했다.

그녀는 아주 미세한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꼬끼오 면의 탄생을 보지 못한 점이 아니라, 윤재오빠를 볼 수 없게 된 게 서운한 건가?’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윤재에게는 혜진이 있었고, 자신에게도 남친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윤재의 존재가 자신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송이와 메신저를 끝내갈 즈음, 조영우가 윤재를 호출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한다. 일정이 생겼어.”

“네?”

“박팀장님께서 류전무님 모시고 노래방을 가자고 하시는군!”

입만 열면 ‘Fun 경영!’을 주창하는 류중정 전무.

대학시절 학내 밴드에서 드럼을 쳤다는 류전무는 음주가무를 아주 좋아했다.

도우미가 나오는 노래방도 좋아했지만, 도우미 없는 노래방에 가서도 기본 2시간은 노래를 부를 정도라고 했다.

그런 류전무의 성향을 알고 있는 신재영 팀장이 제안해 마련된 자리였다.

“팀 주무 담당들 필참이라고 한다. 오늘도 야근할 생각 아녔지?”

“네. 일정 없었습니다.”

일부러 노래방을 찾아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빼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호남 부문 시절의 윤재의 별명이 노래방의 황태자이기도 했었다.

사실 다음 주 제휴 사업팀과 협업할 자료를 준비해야 했지만, 내일부터 조금 더 집중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회식이 됐든, 노래방을 가는 것이든, 하다못해 한강공원에 가서 자전거를 타는 것이든, 야간 조직문화 활동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불참하게 되더라도, 자꾸 불참하다 보면 ‘소극적인 사람’으로 찍히는 게 조직생활이었다.

◈          ◈          ◈

회사 근처 류중정 전무의 단골 노래방 샌드페블!

대학가요제에서 우승한 이력이 있는, S대 출신의 밴드가 샌드페블이다.

류중정도 S대 샌드페블에서 드럼을 친 이력이 있다.

그가 이 노래방의 단골손님이 된 이유이기도 했다.

신재영 팀장이 이곳을 택한 이유도 바로 그것!

같은 S대 출신인 자신과 류중정 전무의 공감대를 형성해, K대 출신인 조팀장과 차별점을 만든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류전무의 라인임을 어필하려 했던 것이다.

추가적으로 신팀장은 비밀병기를 하나 더 달고 왔는데, 자신의 휘하에 있는 하진호 대리가 그 주인공이었다.

4시간 전의 일이었다.

여의도 공원을 바라보며 머리를 싸매던 신재영의 뇌리에 번쩍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었다.

바로 하진호 대리와 노래방이었다.

내선전화로 하대리를 불렀다.

“하대리! 대학 다닐 때 밴드 보컬이었다고?”

“네. 팀장님!”

“잘됐네. 오늘 전무님 모시고 노래방 가려고 했는데, 하대리도 같이 가자!”

“네. 알겠습니다.”

“오늘 실력 발휘 좀 해야 한다!”

신팀장은 그렇게 얘기하며 하대리를 요모조모 뜯어 봤다.

믿을만한 녀석인지, 상품성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H대 블랙 크로우즈 실력 보여야 한다. 방통대 나왔다는 윤재 그 놈 콧대를 납작하게 해 주라고.”

“예?”

“너 데리고 가는 밥값을 하란 얘기야. 신사업 부문에 방통대가 웬 말이냐? 명문대 밴드 보컬은 수준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라고! 할 수 있지?”

그의 말투와 태도에서 윤재에 대한 적개심이 읽혔다.

“너도 회사에서 잘 나가고 싶어서, 신사업 부문 지원했을 거 아냐? 빡 쌘 부문이 될게 뻔한데 말이야. 안 그래?”

“그렇습니다.”

하진호는 입사이래 나름 괜찮은 회사 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CEO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신사업 부문을 지원해 남들보다 빨리 과장진급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꿀걱!”

하진호는 침을 삼켰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신재영과 류전무는 같은 S대 라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눈앞의 신팀장이 자신에게 라인이 될 것을 종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김윤재 그 친구가 적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부문에 고과 S는 단 한명. 더러운 짓 하는 것도 아니고, 노래만 열심히 부르면 되니까!’

그렇게 하진호 대리는 신팀장의 손을 잡았다.

◈          ◈          ◈

VIP룸에 먼저 도착해 있는 4개 팀 주무담당들과 허진호대리.

이어서 팀장들이 류전무를 모시고 노래방에 도착했다.

하얀 국물 라면에 대한 1차 브리핑에서 오재준 회장의 OK 사인을 받지 못한 신사업부문.

당일 프레젠터였던 조영우와 윤재를 위로하는 자리를 갖자는 제안을 신재영이 했었다.

명분은 그렇게 포장했지만, 실제는 신팀장이 하진호 대리를 끼고, 류전무에게 잘 보이려 만든 자리였다.

노래방 사장이 단골고객인 류전무를 방까지 졸졸 따라왔다.

“어떻게 해요? 식사는 하셨을 테고, 맥주 넣어 드려요?”

“사장님이 알아서 해줘. 안주는 헤비한 것 말고.”

“네엥!”

콧소리 섞인 대답을 하고 노래방 여사장이 엉덩이를 흔들며 사라졌다.

류전무의 자켓을 받아 옷걸이에 걸어놓는 신재영 팀장.

비서실장이라도 되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고 류전무가 상석에 앉자, 비로소 회식의 2차 무대인 노래방 여흥이 시작됐다.

“지난 번 보고 준비하느라 다들 고생한 거 격려 차원이니까, 재미나게 놀고 다 잊자고!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거야.”

“네. 전무님!”

류전무의 일장 연설에 팀장들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은 박팀장이 초청가수도 모셔 왔으니까, 신나게 놀아 보자고. 하대리! 당신이 블랙 크로우즈 보컬이었다고?”

“네. 전무님! 변변치 않습니다.”

“그럼 하대리가 목 푸는 동안 누가 먼저 테이프 끊을래?”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사람들 치고, 여자 안 좋아하는 사람 없는 법!

류전무가 주무담당 중 유일한 여성 멤버인 나소희 대리를 쳐다봤다.

“제. 제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쭈뼛거리며 눈치 보던 나소희는 류전무의 눈치를 알아챘다.

신사업 부문을 지원한 이유는 다들 비슷했다.

좀 더 나은 인사고과, 조금 더 빠른 승진이 목표였다.

진한 남색 자켓에 블라우스를 입은 나소희 대리가,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를 불렀다.

열정은 높이 살 만 했지만, 노래 실력은 기대이하였다.

순간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와우! 좋았어!”

젊어서부터 음주가무계를 휘어잡고 산 류전무는, 소속 여사원의 노래를 치하했다. 분위기 다운되지 않게 하는 법을 잘 아는 류전무였다.

“젊은 여사원이 선창했으니, 어때? 이번에는 조영우 팀장 한곡 해보지 그래?”

류전무는 조영우 팀장의 출전을 종용했다.

난감한 표정의 조팀장이 앞으로 나갔다.

‘흐흐흐. 앞으로 노래방에 자주 와야겠어.’

음치로 유명한 조영우.

쩔쩔매는 조팀장을 보며 신정호 팀장은 노래방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조팀장은 악을 꽥꽥 써 대며 강진의 ‘땡벌’을 불렀다.

전국노래자랑이었다면 몇 소절 부르지 못하고 ‘땡’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이야! 우리 조팀장은 응? 가슴으로 노래를 하는구만! 좋았어. 박수!”

류전무는 솔선해 노래방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애를 썼다.

분위기 업을 위해 류전무는 노래를 3곡이 연속해서 불렀는데, 가만 두면 밤새도록 혼자 노래를 부를 기세였다.

1차에서 전적이 있는 상태에서 맥주를 마시게 되자,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덩달아 사람들의 취기도 올라갔다.

다음 타자를 찾아 헤매던 류전무의 시선이 윤재 앞에서 멈췄다.

예상대로 류전무는 윤재를 지명했다.

“일 만큼 노래도 잘 하는지 한 번 보자고? 응?”

그 때 MC팀 나소희 대리가 “김윤재!”를 연호했다.

“김윤재! 김윤재! 김윤재!”

어느새 사람들이 김윤재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술과 분위기의 영향이었다.

윤재는 2002년도 최대 히트곡인 부활의 ‘네버엔딩스토리’를 선곡했다.

“오오오! 부화알~ 저 곡 어려운데?”

사람들의 호들갑 소리가 전주를 따라 들려왔다.

“손닿을 수 없는 저기 어딘가....”

윤재의 첫 소절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흡인력이 있는 목소리였다.

‘뭐야? 저 자식! 가수야? 무슨 노래를 저렇게 잘 해?’

신재영 팀장은 첫 소절을 듣는 순간, 자신의 계획이 망했음을 깨달았다.

‘아니, 저 친구 엄청난데? 시...실력자다. 그것도 엄청난! 솔직히 나보다 훨씬 낫다!’

윤재의 노래가 계속될수록 하진호는 자신감이 하락하는 걸 느꼈다.

어느새 사람들이 윤재의 노래에 맞춰 손을 좌우로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픽!”

네버엔딩 스토리의 하이라이트를 부르는 동안, 갑자기 노래방 기계의 전원이 꺼져버렸다.

미러볼도 멈춰 섰고, 화면도 나가버렸다.

마이크도 꺼졌지만, 윤재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

전원이 나간 객실에 육성으로 부르는 윤재의 노래가 계속됐다.

신사업 부문 사람들은 넋을 잃고 윤재의 노래를 감상할 따름이었다.

10~20초 정도 지났을까?

전원이 들어오고 조명도 들어왔다.

하지만 윤재는 마이크를 끈 채 네버엔딩 스토리를 마저 불렀다.

“우와와아! 짝짝짝짝짝!”

열화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나소희 대리가 다시 김윤재를 연호했다.

“김윤재! 김윤재! 김윤재!”

연호는 한동안 계속됐다.

“김대리! 한잔 해! 완전 깜작 놀랐다. 내가 이승철 노래하는 것 직접 본 적은 없는데, 이승철이 와도 윤재만큼 부르지는 못할 것 같다야. 가수해도 되겠어. 우하하핫!”

“윤재 너 일만 잘 하는 게 아니었구나. 40년 넘게 살면서 생으로 들은 노래 중 단연 최고였다.”

류전무에 이어 조영우 팀장에 이르기까지 칭찬은 계속됐다.

윤재를 옆으로 부른 류전무가 맥주를 따라 줬다.

그리고 다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야! 우리 부문에 가수들이 많구만. 푸하하하. 이제 하진호 노래 한 번 들어봐야지?”

류중정 전무가 하진호 대리를 쳐다봤다.

맥주를 마시고 있던 하진호가 갑자기 사래들려 맥주를 뿜어댔다.

“콜록! 콜록! 아이고. 전무님! 죄.. 죄송합니다. 감기에 걸려서 그런지 컨디션이 너무 안 좋네요. 죄송한데 다음에 하겠습니다.”

“괜찮아. 우리가 뭐 전문 가수인가? 흥이 가라앉기 전에 한곡 해!”

“죄송합니다. 전무님... 목이 너무 아파서요.”

하진호의 거듭된 사양에, 류전무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하진호와 류전무의 얘기를 듣고 있던, 신재영 팀장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 때 나소희 대리가 류전무에게 간청했다.

“전무님! 전원도 들어왔는데, 저희 윤재대리 앵콜곡이나 다시 들어볼까요?”

나소희 대리는 그렇게 얘기하며, 김윤재를 다시 연호하기 시작했다.

전략팀의 못난이 2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양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김윤재를 연호하고 있었다.

진도에서 올무에 걸린 방울새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자신의 성량이 풍부해졌다는 것을 윤재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업무에 이어 조직문화 활동에도 소질이 있음을, 류전무에게 강하게 어필하는 계기가 됐다.

류전무의 라인이 S대라는 학연을 떠나, 신사업 지원팀 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계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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