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05화 (105/196)

모든 선택엔 후회가 따른다

숱한 러브콜을 물리치고 윤재가 신사업 지원팀을 택한 이유는 크게 두가지!

신사업 부문이므로, 다양한 부서와 협업을 할 수 있다는 것!

광주에서 영업3팀에 2년 정도 더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혜진과 결혼해 쉽게 가정을 꾸리고 알콜달콩 살 수도 있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앞으로 2년 동안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나를 알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윤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호남의 인재로 만족해서는 안됐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신사업 발굴과 제휴를 위해, 전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회사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내 재산을 불리는 걸 병행할 수 있는 본사의 거의 유일한 부서가 신사업 지원팀이다!’

전날 술을 제법 마셨지만, 윤재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아파트에서 요가와 스트레칭을 했다.

‘4억 5천만원을 주고 한강변 아파트 32평을 살 수 있다니!’

자신이 회귀했음을 실감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2003년의 부동산 가격이야말로

과거로 돌아왔음을 느끼도록 했다.

윤재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명상에 잠겼다.

‘관건은 오진탁의 위세가 점점 커져서, 치명적 실수를 해 버리기 전에 그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윤재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플랜B를 동시에 가동시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오진탁은 잘나든 못났든 오재준 회장의 장남!

엄연한 경영권 승계 1순위였다.

자신은 그저 일 잘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          ◈

류중정 전무가 며칠 전 회의 멤버 전원을 소집했다.

고생한 사람들에게 점심을 사겠다는 제안이었다.

중국요리와 빼갈을 유난히 좋아하는 류전무의 식성.

높은 사람의 취향을 쫒아 일행들은 회사 근처 마천루 라는 중국집을 찾았다.

류전무를 중심으로 9명의 둘러앉은 방.

화교 사장님이 주문을 받으러 들어왔다.

“먹고 싶은 것 먹읍시다. 눈치 보지 말고. 난 짜장면!”

류중정 전무가 상사의 전매특허, ‘난 짜장’ 을 시전한 것이다.

“저도 짜장면 하겠습니다.”

“오늘은 왠지 짜장면이 끌리는 군요.”

7명의 사람들이 류전무를 따라 짜장면을 주문했다.

아직 주문하지 않고 있는 윤재에게 시선이 쏠렸다.

“저는 팔보채 밥 하겠습니다. 이 집이 그걸 잘 한다고 하더군요.”

윤재의 주문에 7명이 순간 긴장했다.

그 때였다.

“우하하핫!”

류중정 전무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럼 저래야지. 내가 짜장면 먹는다고 눈치 보고 짜장면 먹어서야, 어떻게 신사업 하겠는가? 응? 김대리 저 친구처럼 하자고!”

“.....”

오랜 관습에 젖어 살다보면, 잘못된 관습을 내면화 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상사가 짜장면을 시키면 눈치 보고 짜장면을 시킨다거나, 임원이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는 건너뛰는 등의 행동들이 그런 것이다.

한 참 재밌게 웃고 난 류전무가 윤재에게 물었다.

“윤재 대리는 짜장면 싫어하나?”

“아닙니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셔서요.”

“우하하핫. 나도 그 노래 아네. 지오디 노래 맞지?”

윤재가 미친 척 팔보채 밥을 주문하고, 미친 척 드립을 날린 덕에 분위기가 말랑말랑해 졌다.

다른 조직도 아니고 신사업 부문의 조직문화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 윤재의 생각.

관행과 이별해야 했고, 창의적 사고로 접근해야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다.

먹고 싶은 것 하나 눈치 보며 시키지 못해서는, 관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윤재의 신념이었다.

오늘의 팔보채 주문을 시작으로 신사업 부문의 사람들은, 눈치 보느라 먹고 싶은 음식 대신, 상사가 주문한 음식을 따라서 시키는 일은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상황.

류전무가 전반적으로 분위기를 이끌고 나갔다.

“조팀장! 꼬끼오 면에 대한 후속 조치는 어떻게 돼가고 있나?”

“마케팅 전략팀과 협의하고 있고, 다음 주에는 청주 공장 연구실을 함께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굿! 굿! 좋아. 중간 중간 보고하는 것 잊지 말고.”

“네. 전무님!”

그 사이 짜장면과 윤재의 팔보채 밥이 나왔다.

“자~ 먹읍시다. 올해는 먹을 게 많네. 보드카도 마셔야하고....”

잠시 뜸을 들이던 류전무가 윤재를 보며 말했다.

“김대리? 올해 안에 꼬끼오면 먹을 수 있겠지?”

“네. 전무님! 꼬끼오면이 신상으로 출시되면, 제가 부문원들을 모시고 직접 끓여 시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굿! 굿!”

중국집에 함께 참석한 부문의 팀원들이 자꾸 윤재를 쳐다봤다.

한번은 윤재의 팔보채를, 또 한 번은 윤재의 얼굴을.

자신들도 윤재처럼 거침없이 일하고, 행동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라면 같은 즉석식품은 신제품 하나를 출시하는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름. 컨셉. 재료. 광고. 가격책정. 생산라인 설계 등!

수많은 부서가 회의를 거듭하고, 엄청나게 많은 직원들의 노고를 쏟아 부은 뒤에야, 하나의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는 것이다.

신사업 부문의 하얀 국물 라면은 ‘GX 프로젝트’ 라는 타이틀로 극비리에 진행 중이었다.

가장 먼저 결재가 필요한 사람은 영업본부장과 마케팅 본부장.

개발에 대한 결재가 끝나자 신사업 부문은 류전무의 지휘아래 본격적인 협업에 들어갔다.

조영우 팀장이 프로젝트 리더가 됐고, 류전무가 챔피언으로 제반 후원을 담당했다.

“꼬끼오 면이라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보통의 소고기 분말이 아닌 닭 국물 분말을 이용할 계획이라, 닭을 연상할 수 있는 꼬끼오 면이라 네이밍 했습니다.”

어딜 가나 비슷한 질문들이 반복됐고, 그 때마다 윤재 또는 조팀장이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꼬꼬닭 면은 어때요?”

“계란 라면은 어떻습니까?”

“본사 로비에서 선호도 조사를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제품 이름 결정을 논의하는 것만 해도 몇 시간 동안 마라톤 회의를 했다.

그렇게 후보안을 정하면, 사내 선호도 검사 등이 뒤따랐다.

문제는 이렇게 결정한 이름을 본부장이나 CEO가 틀어 버리면, 처음부터 이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닭 육수 분말은 그렇다 치고, 수프 재료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김윤재 대리께서 생각하고 있는 기본 컨셉이 있을 거 아네요?”

“닭육수 분말. 칼칼한 맛은 청양고추 가루 분말. 건 표고 버섯 분말을 주 원료로 하고, 거기에 건 양파 등을 추가하는 컨셉을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뿐만 아니었다.

면발을 튀길 것인가? 말릴 것인가?

면발 모양은 동그랗게 할 것인가? 네모난 모양으로 할 것인가?

이런 회의를 위해 며칠이 흘러갔고, 보고 과정에서 재검토가 내려오면 다시 반복하기를 거듭했다.

그렇다면 이 기획 회의만 하느냐?

부문 내 전략 회의에 참석해야 했고, 제휴 사업팀의 업무도 지원해야 했다.

윤재 뿐 아니라 GX 프로젝트 팀의 모든 멤버가 그렇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험난한 여정이 3주 넘게 계속됐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하얀국물 라면의 제품명은 ‘꼬끼오면!’으로 확정됐다.

회사 최초의 라면시장 진출에 대한 계획을, 드디어 CEO에게 보고할 수 있게 됐다.

신사업 부문 9인 회의가 다시 열렸다.

“회장님 보고는 누가 하는 게 좋을까?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봅시다.”

류중정 전무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반으로 갈라졌다.

스타일은 조금 달라도 조영우와 윤재 2명 모두 프레젠테이션의 달인들.

“전무님. 아무리 그래도 CEO 보고인데, 최소 팀장급이 발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분히 의전에 가까운 주장.

“아닙니다. 새로운 사업을 하는 부문에 맞게, 아이디어의 원 기획자인 윤재대리가 직접 보고하는 것도 신선할 것 같습니다.”

새로운 스타일로 밀어 붙이자는 주장까지.

갑론을박은 이어졌다.

그걸 결정해야 하는 몫은 조직의 수장인 류전무에게 있었다.

“우하핫. 그냥 사이좋게 조팀장과 윤재대리가 번갈아 발표 하라고!”

“.....”

“둘 다 프레젠테이션은 회사에서 알아주는 사람들 아닌가? 역할 분담 잘 하고, 사전 리허설 충분히 갖자고! 알았지?”

“네. 전무님!”

그렇게 오재준 회장에 대한 ‘꼬끼오 면’ 컨셉 보고를 조팀장과 윤재가 분담해 준비하게 됐다.

◈          ◈          ◈

CEO보고 일주일 전!

오랜만에 한송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윤재오빠! 아니, 이제 김윤재 대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하하하. 그냥 편하게 불러도 돼.”

“호호. 알았어요. 오빠! 회장님 보고 끝나면 청주 공장에 내려온다면서요?”

“응. 회장님 재가 떨어지면 당분간은 청주 공장에서 연구소 직원들과 협의를 해야 할 것 같다.”

“연수원에서 오빠랑 라면 얘기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 가까이 지나 버렸네. 시간 참 빠르다. 그치?”

“어이구. 한송이 사모님! 누가 들으면 중년은 되신 줄 알겠어요?”

“호호. 그렇게 되나?”

수화기 너머로 그녀의 부끄러움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회사 동기이자 선배인 백현민과 연애를 시작한 한송이.

황성호 같은 쓰레기와 비교하면 백마 탄 왕자나 다름없었다.

작년 월드컵 불법 토토 사건 이후, 황성호는 결국 회사를 떠났다.

그의 부친 황태준은 사회 공헌 등 전향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원내대표 선거에서 중도 낙마했다.

아들 교육 잘못시킨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것이다.

전생과 비교하면 180도 다른 행복한 삶이, 한송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주 내려가면 그 때 보자. 다시 팀웍 한번 발휘해 봐야지?”

“뭐야? 오빠! 벌써 회장님 결재 받은 것 같이 얘기하네?”

“하하하. 나 김윤재야!”

윤재의 큰 소리가 근자감이 아니라는 것을 한송이도 잘 안다.

동기 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이유를, 가장 지근거리에서 체험한 사람이 한송이였다.

“그래요. 오빠! 오빠라면 회장님 보고도 한 방에 패스할 거라 믿어요. 청주에서 봬요.”

“오케이!”

신제품 출시를 위한 연구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청주연구소.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송이.

능력 출중한데다 윤재와 손발이 잘 맞는 만큼, 라면 신상 출시도 잘 풀릴 것 같았다.

◈          ◈          ◈

2003년 2월5일!

하얀 국물 꼬끼오 라면에 대한 CEO보고일.

꼬박 3일동안 리허설을 하며 준비를 마쳤다.

윤재는 조팀장, 류전무와 함께 32층 경영위 회의실에 도착했다.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회의실에 2시간 전에 도착한 윤재.

그에게 격려 문자가 쇄도했다.

“윤재야! 회장님 보고 잡혔다고 들었다. 긴장하지 말고 네 실력만 발휘해라! 장동석!”

이젠 강원 부문장이 된 장동석의 문자였다.

부문장이 된 장동석은 강원부문을 자신의 스타일로 장악해 나갔다.

합리적 의사결정과 강한 실행력을 강조하는 장동석.

국내영업에서 호남부문과 강원부문이 피 튀기는 경합을 벌이며, 서로 발전해 나갈 모습이 눈에 선했다.

“김대리! 다 씹어 먹어 버려. 너보다 니 프로젝트 더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명수!”

장동석, 차명수부터 호남 시절의 동료들과 한송이 등의 동기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윤재에게 힘을 실어줬다.

‘하하하. 이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는데, 어떻게 실패한단 말인가?’

윤재는 고맙다는 내용의 답 문자를 일일이 발송한 뒤 전화기를 껐다.

오재준 회장의 뒤를 따라, 경영위원들이 회의실로 입장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          ◈          ◈

신사업 추진단의 단기와 중기 전략에 대한 보고를 맡은 조팀장.

대니 드 비토 닮은 외모와 달리,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준수한 것이었다.

걸걸한 목소리가 그렇게 호소력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윤재와 다른 사람들이 느낄 수 있었다.

신제품 출시 영역과 영토확장 프로젝트인 GX프로젝트!

그리고 M&A를 통한 성장전략에 대해 조팀장이 보고를 마쳤다.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오재준 회장과 임원들의 질문에도 능수능란하게 답하며, 첫 번째 보고를 잘 마무리 했다.

허술하게 생겼지만, 빈틈없는 사람이 바로 조영우였다.

쉬는 시간 없이 곧바로 2교시가 시작됐다.

회의를 시작하면 2시간이든 3시간이든 화장실을 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오재준!

그 바람에 비뇨기 쪽이 좋지 않은 임원들은, 기저귀를 차고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렇게 윤재의 시간이 도래했다.

“한국 사람들의 1년 라면 소비개수는 약 30억개! 국민 1인당 연간 60개가 넘는 라면을 먹고 있습니다.”

항상 스토리의 기승전결을 갖춰 보고하는 윤재의 브리핑이 순조롭게 시작됐다.

“즉석라면 또는 즉석 면 시장에서 우리 회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0.01%입니다. 호기 있게 출시한 생우동은 이제 시장철수를 고민해야 할 시점인 것이지요.”

윤재의 충동질에 몇몇 임원들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생생우동과 관련된 임원들이었다.

‘오늘 프레젠테이션은 충동에서 충동으로 끝내는 컨셉!’

윤재는 사람들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발표를 이어나갔다.

왜 하얀색 국물인지, 왜 러시아인지에 대한 내용을 포함해 15분간 진행된 윤재의 발표가 끝났다.

같은 팀 소속인데 조영우와 윤재는 극명하게 대비됐다.

대니 드 비토가 연상되는 조영우.

훤칠한 탤런트가 떠오르는 윤재의 용모.

걸걸한 목소리와 맑은 목소리 등.

비교체험 극과 극 수준이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발표를 아주 잘 한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윤재는 날카로운 질문들에 납득할 만한 답변을 내놨다.

드디어 오재준의 입이 열렸다.

“자네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군. 발표 잘 들었네. 그런데 말일세!”

“?”

모든 사람들이 오재준의 입만 바라봤다.

“며칠 전 내가 옹심 회장과 점심식사를 했네. 왜 그랬는지 다들 알겠지?”

아무리 보안에 신경을 쓴다 해도 소문은 나게 되는 법.

회사의 라면시장 진출 계획이 경쟁사에 소문이 났고, 결국 오너를 통한 압박에 이른 것이었다.

윤재는 오재준 회장의 입이 아닌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회장님! 지난 시절 회사는 라면시장의 문을 두드렸지만, 매번 그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윤재의 눈빛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나, 위기의 순간이면 나오는 특유의 눈빛이었다.

“회장님! 그리고 경영위원님들! 어떤 선택이든 후회를 동반하는 법입니다. 회사의 오랜 염원인 라면시장 진출!”

윤재가 한 템포 호흡을 끊으며 ‘라면시장 진출’을 강조했다.

장내에도 호흡이 멎는 듯 침묵이 흘렀다.

“저희가 라면 시장에 진출해, 밀가루와 설탕의 이익이 줄어든다면, 회사는 분명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염원인 라면 시장 진출을 또다시 포기한다면, 우리 회사가 후회하지 않을까요?”

누구도 감히 CEO에게 따지지 못했던 도전적인 질문이었다.

“후.회.라......”

오재준이 낮은 목소리로 토해낸 단 세글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