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104화 (104/196)

TRIZ로 창의하라

윤재는 이번에는 옐친 전 대통령의 얼굴을 띄웠다.

“다들 아시는 인물일 겁니다.”

“엘친 아닌가?”

“그렇습니다. 98년 옐친의 러연방 모라토리움 선언 후 다국적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철수할 때, 오성 같은 한국 기업은 러시아에 남아 현재까지 사업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 최고의 푸드 회사.

그래서인지 국내 영업통들은 글로벌 마인드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우리 예상과 달리 러시아에서 한국에 대한 선호도가 아주 좋다고 합니다.”

류전무와 조영우 팀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스릴러 영화를 볼 때 나오는 집중도 수준으로, 회의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국내 밀가루, 설탕 시장은 맥스로 잡아도 1조2천억! 라면시장보다 적습니다. 만약 저희가 하얀 국물 라면을 성공적으로 론칭해, 러시아에 안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윤재의 질문을 이번에는 조영우 팀장이 받아 답했다.

미리 준비한 각본과 리허설의 결과였다.

“전무님! 김대리 얘기처럼 고객사들이 밀가루, 설탕은 우리 제품을 아예 쓰지 않을 방법은 없습니다. 고로 밀가루, 설탕에서 잃을 손실보다, 라면시장과 해외시장에서 얻게 될 파이가 크면 회사의 이익은 증가하는 겁니다.”

류전무의 머리에 백열등이 반짝하고 켜졌다.

머리 하나는 비상한 류중정 전무.

그의 머리에 하얀국물 라면의 성공이미지가 박히기 시작했다.

“하긴 옹심이나 똑순이가 경쟁사 밀가루로 우리 제품을 모두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류전무가 좌중을 한 번 훑어 본 뒤, 마지막 시선을 윤재에게 가져갔다.

“자신 있나?”

“네. 전무님! 2003년 들어 갑자기 생각한 게 아니라, 지난 1년 동안 철저히 시장분석을 토대로 보고 드리는 겁니다.”

사실은 전생 10년의 경험을 녹인 프레젠테이션이었지만, 윤재는 적당히 1년이라 답했다.

“우하하하! 지난 1년! 이거 완전 준비된 신사업 인력이었군. 우하하하. 좋아! 내 전폭적으로 밀어줄 테니 적극 추진해 보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그럴싸한 프로젝트 이름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조팀장과 상의해 프로젝트명 후보안도 준비해 뒀습니다.”

류전무의 입은 귀에 걸릴 정도로 째졌고, 나머지 참석자들은 부러운 표정으로 윤재와 조영우만 쳐다봤다.

“프로젝트명! Geographic Expansion ! 즉 GX프로젝트입니다.”

“GX프로젝트?”

“네. 전무님! 남북으로 갈리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국시장만 바라보지 말고 해외로 영토를 넓혀야 합니다. 라면이라는 영토도 신사업의 영역. 러시아라는 외국 시장도 새로운 영토입니다.”

“그래서 지오그래픽 익스팬션이군. 그럴싸 해!”

류중정의 머리에 남아 있던 작은 의구심마저 날아가버렸다.

“저희 신사업 부문을 선두로 회사가 GX프로젝트를 실행한다면, 매출 100조가 더 이상 허황된 구호에 그치지 않을 겁니다.”

류중정 전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위 말하는 기립박수였다.

그는 박수를 격하게 치며 소리쳤다.

“합격! 수석합격! 합겨어어어어억!”

◈          ◈          ◈

KPI와 GX프로젝트, 그리고 꼬끼오 면에 대한 설명만으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났고, 다시 10분을 휴식한 후 3교시 회의에 들어갔다.

풀이 죽어 썩은 동태눈 같던 참석자들의 눈빛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한국을 넘어 러시아로, 러시아를 넘어 세계로 나가자는 윤재의 구호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것이다.

또한 동료이면서도 경쟁자 관계인 타 팀의 참석자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혼나고 끝날 줄 알았던, 조팀장과 윤재의 선전에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3교시에도 윤재와 조팀장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신사업 추진단이 2003년에 할 일과, 향후 2~3년간 할 일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100%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짜임새가 아주 좋았다.

신제품 진출 카테고리와 영토 확장이라는 확실한 컨셉이 하나!

식품 사업본부의 주요 전략으로 M&A를 통한 외연확장이라는 컨셉이 또 하나!

끝으로 제휴를 위한 구상까지!

사실상 신사업 추진단의 3년지 대계를 종합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디테일한 플랜까지 윤재의 머릿속에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3개 팀을 고려해, 여지를 남겨뒀다.

이런 윤재의 마음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교시까지 회의를 마치고 팀장급과 류전무 1개조! 나머지 팀원들 1개조로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          ◈          ◈

“푸하하. 명불허전이라더니! 김윤재 대리 다시 봐야겠어!”

회사 단골 중국집에 둘러 안자마자 류중정 전무는 빵 터졌다.

다른 팀장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소속 팀장인 조영우가 류전무의 칭찬을 담담하게 받았다.

“며칠 안됐지만, 같이 일해 보니 내공이 장난 아니더군요. 저도 정말 놀랐습니다.”

“우리 회사 전체를 통틀어 김윤재 대리보다 국제정세에 밝은 사람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어때 신팀장! 자기 옐친 때 러시아가 모라토리엄 선언한 것 알았나?”

“네? 그러니까 언젠가 들어본 것 같긴 했는데, 솔직히 정확히는 몰랐습니다.”

옐친과 모라토리엄 얘기가 나오니 나머지 팀장들이 시선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팀장들 기분 나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잘 해야겠더라! 분발들 하라고! 올해 우리 부문 사업을 마라톤이라고 가정하면, 당신들은 지원팀에 벌써 5km는 뒤져 있는 거야! 무슨 얘긴지 알지?”

“네. 전무님! 분발하겠습니다.”

조영우 팀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팀장이 쥐어짜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조팀장과 윤재 대리 얘기를 곰곰이 되새겨 봤거든. 오늘 2시간 발표한 내용만 디벨롭해도 우리 부문 2년은 먹고 살겠어. 그렇지 않아?”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통합 마일리지 론칭에 대한 얘기도 신박했고, M&A에 대한 얘기도 귀가 번쩍 뜨이더군요.”

다른 팀장들도 그런 식으로 류전무의 얘기에 수긍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기분이 좋아진 류중정 전무는 빼갈을 맛있게 털어 넣었다.

“조팀장 얘기 듣고, 윤재 대리를 부문 코디로 써먹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팍팍 들더군. 그룹 미래전략실을 포함해서 Co Work 해야 할 곳이 많은데 제대로 써먹을 수 있겠어!”

“저도 전무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체스에서 퀸 같은 존재가 김대리가 아닐까 싶더군요.”

전후좌우 대각선 이동까지 어디나 이동할 수 있는 퀸!

조영우는 윤재가 그런 존재라 생각했다.

류전무가 다시 빼갈을 입에 털어 넣고 말했다.

“몇 년 지나야 가능하겠지만, 하얀 국물 라면 성공적으로 론칭하면, 우리 보드카 한 번 마시러 가자고! 응?”

생산본부와 시제품 테스트부터, 마케팅 본부와 협업까지 할 일이 태산 같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윤재가 제안한 여러 프로젝트성 작업들의 전망은, 류전무의 표정으로 봤을 때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          ◈          ◈

팀장들과 류전무가 중국집에서 회식을 하는 사이, 사원들은 사무실 근처 오겹살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김대리님은 어떻게 그렇게 창의적일 수 있는 거죠? 저도 마케팅 본부에서 나름 구르다 왔는데, 김대리님 발표는 브리핑을 넘어선 것 같았습니다. 한편의 강의를 보는 느낌이랄까?”

“맞아요. 맞아! 정말 고저스했어요.”

“그런 신박한 아이디어들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죠?”

지원팀을 제외한 3개 팀의 주무담당들!

말로만 듣던 윤재의 프레젠테이션에 놀라긴 놀랜 모양이었다.

함께 일할 동료들에게 노하우를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 윤재의 스타일.

새벽 2시까지 공부하고, 학교에 와서는 일찍 잤다고 말하는 것은 윤재가 기피하는 스타일이었다.

“러시아에 사는 유태인들이 개발한 트리즈(TRIZ)라는 창의방법론이 있습니다.”

“트리즈요?”

윤재의 입에서 나온 트리즈!

나머지 3명은 처음 들어본 게 확실했다.

“네. 식스 시그마가 통계적 방법론을 중요시 한다면, 트리즈는 모순해결에 집중하는 방식인데 굉장히 파워풀 합니다.”

윤재는 트리즈 얘기를 하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3년 동안 죽어라 강의를 쫒아 다닌 끝에, Level2 자격까지는 땄는데....’

비록 Level3까지 인증 받지 못하고 회귀했지만, 트리즈의 철학과 방법론에 있어 윤재는 전생에서도 회사내 최고의 전문가였다.

“대리님! 트리즈 그게 뭐에요? 좀 알려주세요!”

TF팀의 여자 과장은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윤재를 스승 대하듯 했다.

“저도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지만, 재미삼아 말씀 하나 드려 보겠습니다.”

“어머! 좋아요.”

다들 몇 시간 전의 회의 집중모드로 돌아가, 윤재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윤재가 입을 열었다.

“작년에 출시한 로또 다들 아시죠?”

“로또 645! 아! 나도 한 번만 당첨됐으면 좋겠다.”

윤재의 질문에 다들 두 손을 모으고, 45도 각도의 허공을 바라봤다. 다들 로또가 당첨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회귀 전에 로또는 강남 아파트 전세 값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2003년도의 로또는 제법 값어치 나가는 복권이었다.

“저는 로또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머니 속에 품고 다니는 동안, 당첨에 대한 환상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그게 로또의 본질이라고 봐요.”

“어머! 진짜 일리 있는 말씀이다. 어차피 당첨될 확률은 낮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사는 거니까!”

TF팀 여과장도, 나머지 사람들도 격하게 공감하는 표정.

“그런 로또에 모순이 있습니다. 하나는 매주 1만원씩 사봤자 돈만 날릴 뿐 당첨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과, 다른 하나는 로또라도 사지 않으면 스트레스 받는 회사 생활을 그만두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죠. 이 두 가지 생각이 서로 모순을 이루는 거죠.”

다들 격하게 공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심하게 끄덕거렸다.

직장인들이라면 위와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가 로또의 모순을 Triz 방법론으로 해법을 찾았는데 그게 뭔지 아세요?”

“글쎄요. TRIZ가 뭔지도 모르는 지라....”

“돈은 최소한으로 쓰면서, 로또 당첨에 대한 환상을 계속 간직할 수 있으면 로또의 모순을 해결하는 거죠.”

“그런 신박한 방법이 있는 거에요?”

TF팀 여과장의 호기심이 최대치로 올라갔다.

로또 깨나 사는 모양이었다.

“제 방법론은 이겁니다. 1월 초에 로또를 2,000원 어치만 산 뒤, 1년 동안 지갑에 보관하는 겁니다. 그리고 12월 말에 로또 당첨여부를 확인해 보는 거죠.”

“?”

“그러면 매년 2,000원으로, 1년 내내 로또 당첨에 대한 기대감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뽑아낼 수 있는 거죠.”

얘기를 다 들은 신사업 추진단 3명의 팀원은 빵 터지고 말았다.

“아하하! 말 되네요!”

“호호호!”

“되게 재밌고, 신박한 아이디어네요. 재밌습니다. 하하하.”

그 순간만큼은 다들 직장인의 비애를 벗어나, 순진한 아이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윤재는 TRIZ의 모순에 대해 몇 가지 얘길 더 들려줬다.

“칼날이 잘 들면 좋은데, 손은 다치고 싶지 않다라는 모순! 여자 친구가 있으면 좋은데, 어쩔 때는 귀찮다 와 같은 모순! 그런 모순들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체계적 방법론이 TRIZ입니다.”

“오호!”

“라면시장에 진출하면서도, 경쟁사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모순에서 흰색 국물 라면을 생각해 낸 것도 TRIZ 방법론을 써 본 것입니다.”

어느새 3명의 팀원들은 술 마시는 것도 잊고, 윤재의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윤재의 수제자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는 데는 6시그마보다, Triz가 훨씬 파워풀 할 겁니다. 올 해 함께 배워 보시자구요!”

“좋아요. 김대리님과 함께 라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다들 결의를 다지는 모습이 윤재는 마음에 들었다.

2년 전 자신과 함께 엑셀 등 오피스 강의를 듣던, 영업3팀의 모습이 오버랩됐다.

윤재는 웃으며 한 가지 제안을 덧붙였다.

“세 분 선배님들은 모두 저보다 연상이십니다. 앞으로는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정말? 그래도 될까?”

“그럼요. 선배님들~”

차명수의 곤조로 인해 연착륙에 시간이 걸렸던, 영업3팀과 달리 윤재의 신사업 부문 연착륙은 무난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회식이 모두 끝나고 겨울 칼바람이 부는 대로변에서 윤재는 택시를 기다렸다.

“윤재대리. 엄청 추워. 우리 걱정 말고 얼른 들어 가!”

“윤재야! 조금만 더 지나도 택시 안 잡힌다. 걱정 말고 얼른 들어가라니까!”

부문 선배들의 만류에도 윤재는 끝까지 남아 선배들을 배웅했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

회귀자 윤재의 Plan A 의 가장 큰 목표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새 밤 12시가 목전이었다.

한산해진 길거리를 바라보며 윤재는 생각했다.

‘신시장 개척, M&A, 그리고 제휴까지! 이 세 마리 토끼를 잡는 로드맵을 그리는 것이 내가 진행할 일! 이걸로 무능한 오진탁과 확실히 차별화 한다!’

귀가 땡하고 얼 정도로 추운 겨울!

저 멀리서 택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쯤 오진탁도 미래전략실에서 M&A에 대한 전략을 구상하고 있을 것이다!’

오재준의 장남 오진탁!

그룹 미래전략실 상무가 된 오진탁은 2003년부터 크고 작은 헛발질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었다.

건너편을 지나가는 빈 택시를 보며 윤재는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이며 외쳤다.

“따블! 택시! 여기 따블이요!”

택시가 갑자기 유턴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강추위가 기승인 서울의 밤거리에서, 택시 잡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오진탁 따위와는 최소 따블 스코어로 차이를 벌린다!’

압도적인 실력과 성과로, 오너의 장남을 앞서는 것.

본사 발령을 자청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OK. 계획대로 되고 있어...’

윤재는 택시 좌석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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