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업 지원팀
전생의 기억이라는 치트키에도 불구하고, 터전을 옮기고 새로운 Job을 부여 받는 다는 것은 복잡한 일이었다.
2002년의 연말과 2003년 초는 신사업부문의 동료들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덕분에 새해 일출은 본사 28층에서 구경해야 했다.
새벽 별 보고 출근해, 한밤 중에 다시 별을 보고 퇴근하는 날이 계속됐다.
2003년 1월 3일 금요일.
서울 여의도 O2 F&B 본사 28층 신사업부문 회의실.
신사업 지원팀장 조영우와 팀원들이 불꽃 튀는 회의를 이어갔다.
제휴 사업팀, 신사업 전략팀, 신사업 지원팀, MC(market creating) TF 까지 네 개의 팀으로 구성된 신설 부문.
O2 그룹의 미래전략실과 함께 일하며, O2 F&B의 미래 성장 동력을 발굴하라는 미션이 하달돼 있었다.
윤재는 자신의 희망대로 신사업 지원팀에 발령 받았다.
대략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이미 전국구 수퍼루키인 윤재.
그가 본사 발령을 희망한다는 소식은, 생산본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본부의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 는 얘기처럼, 윤재의 이동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입하고자 했다.
영업기획부문. 수도권영업부문. 직매사업부문. 재무실. 인사실 등 수많은 부서에서 윤재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그 중에서 윤재가 택한 사람은, 신사업 지원팀장이 된 조영우였다.
“신사업 지원팀에 오고 싶다고?”
“네. 팀장님!”
“여기는 일은 힘들고 그다지 광 팔기는 힘들어서 기피 부서인데, 자기 같은 인재가 온다니 좀 의외긴 하다. 나야 뭐 봉 잡은 것이지만!”
그렇게 윤재는 신사업 지원팀으로 오게 됐다.
호남부문 영업3팀의 윤재 자리는, 인턴을 채용해 메꾸는 걸로 결정됐다.
3팀은 장동석과 윤재의 두 기둥이 빠진 형국이었지만, 팀 역량 자체가 상향평준화 돼 있어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윤재의 상념을 컬컬한 목소리가 뚫고 들어왔다.
조영우 팀장이었다.
“우리 부문 비전수립, 그리고 팀 R&R 논의가 주요 내용이야. 다들 잘 알겠지?”
“네. 팀장님!”
새롭게 생긴 부문이다 보니, 부문 비전과 미션수립, 그리고 R&R 등을 정립해야 했던 것이다.
“2003년 신년사 화두 다들 알지? 2010년까지 매출 100조의 그룹으로 성장시킨다는 게 회장님 화두라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씩 얘기해 볼까?”
1월 2일 신년사의 화두는 매출 100조였다.
매출 10조가 안 되는 회사를, 8년 만에 매출 100조를 올려야 하다니!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팀장님! 매출 100조는 말 그대로 화두라 생각합니다. 그 보다는 우리 부문의 비전을 먼저 정하고, 그에 따라서 저희 팀 KPI와 R&R을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 역시 에이스다워. 날카로운 지적이야. 우리 부문 비전 뭐가 좋을까? 질보다 양이야. 브레인스토밍 하다 보면 좋은 의견이 튀어나온다고. 자 고스톱 순으로 돌아볼까?”
조영우 팀장은 무겁지 않게 회의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 돋보였다.
회사 전체적으로 ‘매출 100조!’ 라는 화두에 짓눌려 정신들이 없는 상태.
하지만 조영우는 그렇지 않았다.
매출 100조 같은 레토릭보다는, 10%를 성장하더라도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조팀장의 얘기에 이런 저런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신사업 기반의 성장 동력 발굴! 어떻습니까?”
“괜찮긴 한데, 좀만 더 정량적인 내용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면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문의 비전 수립.
난상토론 끝에 부문장께 보고할 비전을 만들 수 있었다.
[ 2010년 매출 100조 달성을 위한 성장 동력 발굴! ]
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KPI를 다시 논의하기 시작했다.
1월1일까지 출근하며 강행군을 이어왔지만, 지치지 않은 팀원들이었다.
새로 생긴 조직에서 회사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생각 때문에, 다들 에너지가 넘쳐 있었다.
◈ ◈ ◈
“최태훈 차장. 최차장이 부문 및 팀 KPI 담당입니다. 어떤 일 해야 하는지 잘 알겠죠?”
“네. 팀장님!”
“일단 4개 팀과 부문장님 KPI부터 만듭시다. 가안 만들어 놓고 본부 KPI 나오면 얼라인(Align) 시키자고!”
“네. 팀장님!”
“신미나 대리. 당신이 부문 내 투자와 비용예산 담당을 맡도록. 문제없지?”
“네. 팀장님!”
조영우 팀장과 윤재를 포함해 총 6명의 팀으로 구성된 신사업 지원팀.
비전과 KPI가 결정되자 R&R은 일사천리였다.
조팀장이 술술 정리해 버렸고, 다들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조팀장의 리더십을 믿는 분위기였다.
조영우는 외모 때문에 평가절하 받은 인물.
위에서부터 살펴보면, 반쯤 빠져 버린 머리카락 사이로 머릿속이 훤히 보였다. 배는 남산처럼 솟아올라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쌍둥이를 임신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목소리마저 걸걸한 쇳소리가 났다.
어떻게 팀장이 됐나 싶을 정도로 볼품이 없긴 용모였다.
‘조영우 팀장은 볼품없는 외모가 아니라, 실력으로 승부한 사람. 내가 장동석에 이어 두 번째로 좋아한 선배가 조영우였지!’
장동석과 조영우의 공통점은 윤재의 존경을 받았지만, 고위직 임원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영우는 볼품없는 외모가 승진의 걸림돌로 작용했었다.
‘조팀장님도 이번 생에는 꼭 임원 되실 수 있습니다.’
윤재는 조영우의 튀어나온 배를 보며 전생을 회상했다.
그 사이 팀 차석인 최태훈 차장이 말했다.
“팀장님! 그런데 왜 윤재 대리는 Role이 없습니까?”
나머지 팀원들도 격하게 공감하는 몸짓을 보였다.
최태훈 차장. 왕상근 과장. 신미나 대리까지 3명의 팀원들은 모두 각자의 Role을 부여 받았다.
그런데 윤재의 R&R은 조팀장이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우하하. 내가 깜빡했네. 김대리 Job에 대한 얘길 안했네. 이거 실례!”
조영우는 듬성듬성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키득거렸다.
“김윤재 대리는 우리 팀 주무담당이자, 신사업 부문의 코디네이터를 하게 됐어. 소위 리베로 역할을 맡는 거지.”
“리베로요?”
“그래요. 리베로! 부문 내 팀들과 유관 부서를 오가며, 팀과 팀. 부문과 부문의 윤활유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새로 생긴 부문이다 보니, 업무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
부문 내 일들과 타 부문과의 협업을 하며, 부문의 중점과제를 명확히 정리할 실무자가 필요했고 그 적임자로 윤재가 선택받은 것이다.
파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계약직으로 입사해 10개월 만에 정규직이 됐고, 만 3년을 채워야 대리가 되는데 1년 6개월 만에 발탁승진으로 대리가 된 김윤재!
조영우의 뉘앙스로 봐서, 오만 잡일을 다 하는 리베로가 아니라,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리베로가 확실해 보였다.
이미 O2 영업본부의 전국구 스타였다.
거기에 ‘리베로’ 라는 한 마디가 더해져, 팀원들은 윤재를 더욱 우호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 ◈ ◈
조영우 팀장은 회의가 끝나고 팀원들 전원과 1:1 면담을 진행했다.
윤재의 차례가 돼 조팀장과 마주보고 앉았다.
“어때? 자신 있지? 리베로?”
“네. 실망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만큼, 올해 1년 기대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자네는 참 독특해?”
조영우 팀장이 오른손 검지를 쭉 펴 우측에서 좌측으로 코를 비볐다. 그의 버릇이었다.
“말이 리베로지 부문의 마당쇠 역할을 해야 해. 일은 엄청 많을 게 뻔하고, 여기 저기 불려 다니다 보면 불필요한 비판도 받게 될 텐데. 그 뿐인가? 고유 Job이 없다보니 광 팔기도 쉽지 않은 게 그 일이잖아?”
“저는 일 많은 게 좋습니다.”
조영우가 손끝으로 코를 튕기며 웃었다.
험한 일을 자처하겠다는 윤재가 기특한 것이다.
“그래. 고생하고 성과 내는 구성원을 배신하는 조직은 없는 법이지. 올해 잘 해 보자. 윤재 대리를 보고 있으니까, 올해 왠지 잘 풀릴 것 같다. 그치?”
“네. 저도 왠지 그럴 것 같습니다.”
윤재는 조팀장과 면담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왜 굳이 오만 일을 다 해야 하고, 이거저거 책임도 떠맡아야 하는 리베로를 하겠다고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윤재는 빙그레 웃었다.
올해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국내를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회사 일과, 개인 비즈니스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팀이 신사업지원팀이란 걸.’
다른 사람들의 면담이 진행되는 동안, 윤재는 직원들의 프린터 연결을 도왔다.
그리고 내선 전화 연결하는 법을 출력해, 직원들 전화기에 붙여 줬다.
“어머! 김대리님은 본사 근무 처음이시라면서 되게 능숙하시다.”
전생에서 본사 근무만 10년을 넘게 한 사람이 윤재다.
남들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신미나가 윤재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나 대리님께 호감 있어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맞죠? 어쩜 이리 친절할까? IT도우미가 따로 없으시네! 하하하.”
왕상근 과장까지 합세해 윤재를 띄워줬다.
입사 4년차 신미나가 특히 윤재에게 적극적이었다.
“김대리님! 호남에 계실 때 별명이 ‘아시아의 주무담당’ 이었다면서요?”
“하하하. 그런 뜬소문은 어디에서 들으셨습니까?”
“장동석 팀장님 입버릇이 그랬다고 들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에서 일을 제일 잘 하는 직원이라고...”
“하하하. 루머입니다. 루머!”
“소문대로 겸손신공까지!”
신미나는 윤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참 윤재를 스캔하던 그녀의 눈이, 윤재의 왼손 약지에서 멈춰 섰다.
“김대리님! 손가락에 그건 뭐에요? 반지?”
“하하하. 이거요? 여자 친구가 채워주더군요.”
“여자 친구 있었어요?”
신미나 대리의 표정이 급 어두워졌다.
반지라는 얘기에 왕상근도 윤재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제 반지 한 번 보실래요?”
윤재는 서울로 오기 전, 동재에게서 실반지를 하나 샀다.
여자들이 꼬이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하루라도 빨리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복잡하게 꼬일 수 있는, 일들은 피해야 해.’
어차피 이번 생의 여자는 혜진 하나면 족했다.
회귀 후 이런 저런 여자들을 만나다 보니, 눈빛만 봐도 대충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반지가 윤재대신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물끄러미 반지를 바라보며, 윤재는 혜진과 잠시 떨어져 서울로 오던 날을 생각했다.
혜진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간 날이었다.
미래의 처갓집을 나올 때, 윤재는 혜진과 함께 52 Cafe를 다시 찾았었다.
월드컵 때 응원전을 펼친 복층에서, 작은 엄마가 제조한 커피를 마셨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윤재.
그런 윤재를 생각해, 혜진은 작은 엄마를 극진히 모셨다.
작은 엄마도 그런 혜진을 무척이나 좋아 하셨다.
연세에 비해 센스가 있는 편인 작은 엄마.
어차피 손님이 끊길 시간대였지만, 복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만석!’ 간판을 세워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오빠! 학위는 따야 한다고 성화니까, 일단 졸업 때까지 학업에 전념할까 해.”
이제 1학기 학점만 더 따면,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좋은 생각이다. 어딜 가든 네 전공이 가정관리학이란 것 명심하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형광등하고는! 너랑 내가 꾸릴 가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얘기지.”
“오빠는~ 뭐야~ 부끄럽게!”
혜진이 눈을 곱게 깔고 얼굴을 붉혔다.
작은 엄마만 1층에 안계셨어도 덮쳤을지 모를 정도로, 귀엽고 고운 얼굴이었다.
연기할 때는 어디서 그런 폭발력이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로, 여성스러움이 넘쳐흘렀다.
“내년에 가장 역점을 둬야 할 건 영어공부다. 하루도 거르지 말고 영어와 가깝게 지내도록 해.”
“갑자기 웬 영어?”
“오빠 말 들어서 잘못 된 사람 못 봤다. 회화 중심으로, 빡 쌔게 준비해라.”
“알았어. 빨간 펜 선생님 오빠!”
그 즈음 친구들 사이에서 윤재의 별명이 몇 가지 있었는데, 창진이는 윤재를 ‘구몬 선생님!’ 이라 불렀고, 혜진과 선희는 ‘빨간 펜 선생님!’이라 불렀다.
무언가 숙제를 내주고 맘에 들면, 뭔가 비기를 알려주는 윤재를 빗댄 별명이었다.
“그리고 이것 받아라. 선물이야!”
윤재는 회사 상품권 봉투를 건넸다.
“이게 뭐야? 약속어음?”
상품권 봉투에는 약속어음과 함께 신권지폐 1만원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혜진이 약속어음에 적혀 있는 내용을 소리 내 읽었다.
“약속어음. 금 1만원 정. 위 금액을 조혜진에게 매년 2배씩 증가시켜, 30년간 지급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오빠!”
“네가 읽은 대로야. 내년에는 2만원. 그 다음 년에는 4만원. 뭐 그렇게 주겠다는 거지. 매년 12월 31일에 약속한 금액 지급할게!”
“칫. 나는 또 뭔가 엄청난 것인지 알았네. 딸랑 1만원이 뭐야? 청년 부자 된 사람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혜진의 표정을 보니, 30년이면 얼마를 받게 되는지 계산하는 표정이다.
“가만! 그러면 30년 뒤엔 대체 얼마란 얘기야?”
윤재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얼마 안 돼! 5조 3천6백8십7억 정도. 끝자리는 생략한다.”
“깔깔깔. 이 오빠 계산 빠른 것 보소! 오빠 땜에 내가 웃고 산다.”
혜진이 모처럼 박장대소를 했다.
“오빠! 천문학적 금액 안 줘도 되니까, 내 옆에만 있어주면, 혜진이는 좋습니다. 그러니 이런 공수표 날리지 마요. 알았지?”
“뭐. 정 안되면 부도어음 만들면 되니까.”
“깔깔깔. 재밌다. 오빠랑 나는 유머 코드가 제법 맞나 봐!”
“그럼. 220V 인데!”
혜진이 옆으로 다가와, 윤재의 팔을 끌어당긴 후 품에 안겼다.
“오빠! 사랑해~”
“Me too.”
“에이. 무드 없기는.... 좀 더 가까이 와 봐. 나도 선물 준비했어.”
“선물?”
“응.”
혜진이 윤재의 입을 틀어막았다.
5조 3000억 짜리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