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 정밀의 두 귀인(2)
12월29일 일요일.
윤재는 아침 일찍 서울로 출발했다.
월요일부터 본격적인 본사 생활이 시작될 예정.
윤재는 Plan A의 향후 스텝들에 대해 생각해 봤다.
먼저, 2년간 신사업부문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야 했다.
신상품 개발. 제휴처 발굴. M&A. 회사가 개척할 새로운 시장.
대략적인 계획은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전생의 경험에, 회귀 이후의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회사의 지원을 받아 글로벌 MBA를 다녀와서 팀장에 오를 계획.
전생에서 이미 국내 EMBA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기 때문에, 미국에 가서
학업을 몰아버린 다음 남은 시간에 개인적인 재테크를 병행할 생각이었다.
현재는 HPI(High Potential Individual) 수준이지만, MBA를 다녀오면 LC(Leader Candidate)가 돼 팀장과 임원후보가 될 수 있었다.
그 다음 CEO 후보군이 된 뒤, 회사를 글로벌 식품회사로 키워 나간다는 것이 종합적인 계획이었다.
윤재는 서울로 가는 길에 군산에 있는 태화정밀기계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김민기 사장께 인사도 드리고, 논의할 얘기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잠시 쉬어가기 위해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려, 커피를 한잔 마셨다.
어제 찾아 뵀던 장인과 장모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장인어른 조범우.
그는 광주에 있는 여자고등학교의 윤리교사였다.
이름처럼 모범적이고 우등한 삶은 추구했는데, 여고 선생보다는 조선시대 훈장이 어울릴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예를 들어, 남자는 대학을 나와야 한다거나, 여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남자가 벌어다 주는 월급으로 애들 키우는 것이 섭리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장모님과 혜진이 아빠 밑에서 받았을 스트레스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윤재 자네가 아주 뛰어난 인재이고, 제법 돈도 벌었다는 얘기는 들었네. 하지만 방통대 졸업장은 인정할 수 없어.”
혜진 엄마와 혜진이 온갖 눈치를 줬음에도, 조범우는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O2에 계약직으로 입사하기 전부터, 남몰래 다녔던 방통대.
7학기 만에 졸업을 하고 학위를 취득했다.
장인어른의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는 엄연한 혜진의 아빠였다.
“미국 아이비리그의 MBA 학위가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 그 정도면 내 인정함세.”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MBA 취득해, 혜진이 데리러 오겠습니다.”
장인 될 사람이 까다로운 얘기들을 많이 했지만, 윤재는 시종일관 웃음을 유지했다.
혜진에게서 고지식한 윤리 선생님이란 얘길 듣고,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차근차근 정공법으로 장인의 벽을 허물어갈 생각이었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대목에서 일이 풀려 버렸다.
마치 회사 면접 보는 것처럼 이것저것 장인의 질문에 답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고?”
“김에 일자 출자 쓰십니다.”
시종일관 입술 양쪽 끝을 근엄하게 늘여 트리고 있던, 조범우가 깜작 놀라는 것 같았다.
“혹시? 대동고 해직교사 김일출 선생 아니신가?”
“예. 그렇습니다. 저희 아버지를 아시나요?”
“아다마다. 어쩐지 김선생님을 닮았다 했더니...... 역시 그랬었구나.”
흔히들 부모는 생전에도 모든 사랑을 주고 가지만, 사후에도 그 사랑을 주신다는 말이 있다.
재산을 상속해 주는 것이 대표적인 사후의 영향력.
시간을 두고 혜진 아빠의 마음을 얻으려 했는데, 의외의 대목에서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합격일세. 내 딸을 자네에게 보내겠어.”
남편과 아빠의 꼬장에 안절부절 하던 장모님과 혜진이 깜작 놀랐다.
윤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공전의 전격전으로 바뀌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 아버지가 내가 평생 가장 존경했던 선배님이시네. 일출형님 아들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합격이지. 통과! 혜진이 데려가!”
“!”
장인의 텐션이 너무 올라가 있어, 윤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당장은 아니고 혜진이 졸업하면 언제든 결혼해도 좋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조범우가 왜 그리 흥분하는지, 그 해답은 금방 밝혀졌다.
전인교육과 촌지반대 등을 기치로 내걸었던 전교조 운동.
윤재의 아버지 김일출은 전교조 운동의 초대 기수였다.
광남대 사범대학 2년 후배인 조범우는, 학창시절부터 김일출을 존경했다고 했다.
“나는 비록 겁쟁이라, 형님과 함께 하지 못했지만 항상 형님을 동경해 왔네. 자네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부끄러워 찾아가지도 못했었는데..... 그 아들이 내 딸과 맺어질 줄이야.”
윤재는 장인어른을 통해,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돌아가신지 6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아들을 돕고 있는 부모님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장인어른! 부모님께서 안 계시는 만큼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부모님처럼 모시겠습니다.”
“그래. 나도 자식이라고는 혜진이 밖에 없는데, 앞으로 자네를 아들이라 생각하겠네.”
그렇게 처갓집 방문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2003년이 되면 윤재와 파트너들 상당수가 서울로 근거지를 옮길 예정이었다.
연예 기획사를 알아보고 있는 혜진과 선희.
서울 본사 발령을 희망하고 있는 대진증권의 남창진.
어차피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일했던 신장식.
광주 NBC의 안수애도 여의도 NBC 본사로 발령이 나 있었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고 했다. 나는 파트너들을 더욱 성장시켜 최대한 멀리, 최대한 높이 도약할 것이다.’
윤재는 휴게소를 나섰다.
혜진과 처갓집을 생각하니, 다시 힘이 솟았다.
군산까지 이어진 2차선의 길이, 유난히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 ◈ ◈
군산 태화정밀 사무실에는 원래 공장 경리일을 했던 허수정이, 김민기 사장과 함께 윤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형님 선물이고, 이건 수정씨 선물!”
“이게 뭐니?”
“골프공이에요. 타이틀리스트 볼 1더즌. 형님 친구들과 운동하실 때 쓰시라고....”
원래 선물은 허수정의 것만 준비하려 했으나, 태화정밀에서 만나기로 한 바람에 김민기 사장의 선물도 골라야 했다.
“이렇게 안 해도 되는데, 어쨌든 고맙다.”
김민기 사장 만큼, 허수정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에게 윤재는 대학 학자금을 지원해준 것만으로도,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선물까지 준비했다고 하니, 더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수정씨 한번 꺼내 봐! 내가 여친이랑 같이 고르긴 했는데, 수정씨한테 맞을려나 모르겠네.”
윤재가 준비한 수정의 선물은, 세계 최고의 골프 전문 브랜드.
타이틀리스트 사의 여성용 바지와 점퍼였다.
골프 브랜드 중 대표적인 고가 브랜드 중의 하나가 타이틀리스트였다.
가난하게 살고 있는 허수정이 타이틀리스트나 골프를 알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럼에도 윤재가 타이틀리스트를 고른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쭈뼛거리며 점퍼를 걸쳐봤다.
“저는 골프 같은 것 모르는데....”
“그래서 평상복으로 입을 수 있는 걸 샀어. 예쁘고 잘 어울리네.”
브랜드가 뭔지는 몰라도 허수정은 점퍼가 맘에 드는 얼굴이었다.
“수정씨! 내가 타이틀리스트를 사온 이유가 있어.”
“?”
허수정과, 김민기의 두 눈에 동시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52 Cafe 용 Big Wheel, 텀블러에 이르기까지.
인연을 맺어온 이래, 윤재의 얘기를 들어서 잘못된 케이스는 단 한건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윤재가 또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타이틀리스트는 골프공이 가장 잘 나가지만, 용품과 의류도 세계 정상급이야. 그런데 그 로고를 누가 만들었는지가 오늘 얘기의 핵심이야.”
평범한 외모였지만, 허수정의 눈빛이 살아 있었다.
윤재의 얘기를 듣고 있는 허수정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설립자 필 영에게는 헬렌이라는 비서가 있었다고 해. 헬렌은 필기체를 굉장히 잘 썼는데, 그녀가 쓴 Titleist 필기체가, 그대로 회사의 로고가 된 거야. 지금 수정씨 옷에 박혀 있는 그 로고!”
김민기 사장이 윤재의 얘기에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며, 신기해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현재 타이틀리스트 로고의 값어치는 100억 정도 값어치는 있을 거야.”
“세상에! 정말요? 이 로고가 정말 100억의 가치가 있다구요?”
허수정은 역시 순진했다.
태화정밀에서 연봉 1,500만원을 받고 있는 그녀에게 100억이란 돈은 딴나라 얘기였던 것이다.
“나는 수정씨가 앞으로 그릴 그림이나, 타이포그라피 등이 헬렌 로빈슨의 글씨보다 더 값어치 있을 거라 생각해. 내가 수정씨의 학비를 지원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힘들더라도 학교 열심히 다녀서, 최고의 심볼 디자이너가 돼야 해! 알겠지?”
허수정에게 윤재는 평생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대학 학비를 대주는 것 외에도, 종종 용돈도 주거나 계좌로 송금해 주기도 했었다.
아주 큰 금액은 아녔다.
하지만 윤재의 그런 후원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허수정이 김민기와 윤재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김민기 사장이 허수정을 다독거렸다.
“수정아. 너 윤재오빠 은혜 갚고 싶다고 했지. 울지 말고, 실력을 키워서 오빠한테 보답해야 한다.”
“네. 사장님! 고맙습니다. 윤재 오빠!”
울지 말라고 했더니, 허수정은 폭풍오열을 했다.
꺽꺽 거리며 우는 소리가 왠지 정겹게 들려왔다.
◈ ◈ ◈
허수정을 퇴근 시키고, 윤재는 김민기 사장과 독대했다.
‘허수정은 타고난 실력이 있기 때문에, 졸업 후 경험만 조금 쌓이면 괜찮은 작가가 될 거다. 그녀는 이제 더 걱정하지 않아도 돼.’
태화정밀의 2명의 귀인 중, 허수정은 정리가 끝났다.
이제 김민기 사장의 차례였다.
“형님! 52 Cafe 일은 이제 궤도에 올랐죠?”
52 Cafe 의 시그니처 조형물이자, 콜드브루 원액을 돌리는 빅휠(Big wheel).
그리고 허수정의 필기체 로고가 박힌 텀블러.
모두 태화정밀기계에서 제작했는데, 모두 고객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최근에는 텀블러 제품 4가지를 이탈리아에 수출까지 시작했다.
한국 방문 때, 52 Cafe에서 텀블러에 반한 주세페가 태화정밀의 제품을 주문한 것이다.
“그렇지. 네 덕분에 회사가 창사이래 가장 안정된 것 같다. 내가 고맙게 생각한다는 것 알지?”
“하하하. 형님과 태화 기술력과 완성도 때문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
김민기 사장도 윤재와 인연을 맺은 뒤로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뜸을 들이면, 뭔가 제안이 뒤따르고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기존 하시던 사업과 52 Cafe 일은 다 안정적이니까, 이제 새로운 일 한번 시작해 보시지 않을래요?”
“새로운 일?”
“네. 제게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거든요.”
윤재가 태화정밀과 거래를 시작하고, 먼 길을 오가며 공을 들인 진짜 이유가 바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이었다.
Cafe 관련 일도 물론 중요했지만, 사실상 김민기 사장의 신뢰를 얻기 위한 마중물 성격이 더 강했다.
금형. 사출. 압출. 다이캐스팅에 이르기까지!
김민기 사장은 기술력도 뛰어났지만, 장인정신은 동종업계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괜찮은 특허 아이템들이 있습니다. 라이선스, 특허트롤, 직접사업까지! 형님과 함께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특허? 내가 뭐 그런걸 해 본적이 있어야 말이지.”
“아이디어는 제 머릿속에 있어요. 형님께서 시제품이나 완성품으로 만들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
“첫술에 배부를 수 있나요? 1년에 2개씩만 해 보시죠.”
윤재가 김민기 사장에게 건의한 첫 번째 아이디어는 매직 홀 용기였다.
구례에서 김동현과 꿀 사업을 시작할 때, 특허로 고수익 알바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꿀. 케찹. 마요네즈. 샴푸 등 짜서 쓰는 튜브형 용기 있잖아요?”
“응. 그렇지!”
“사용하다보면 뚜겅에 남아 있거나, 줄줄 흘려서 불편한적 있으실 겁니다.”
“맞아. 꿀 같은 건 꼭 용기에 잔량이 남아서 끈적거려서 찝찝하지.”
김동현 사장이 마치 자신의 손에 꿀이라도 뭍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제가 구상한 매직 홀 용기는 꿀이나 케찹을 짜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보관이 가능할 것 같아요. 대략적인 개념과 구상도인데 한 번 보시겠어요?”
윤재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매직 홀 용기에 대해 설명해줬다.
캡을 역방향으로 설계하고, 용기와 외부의 기압차를 이용한 매직 홀에 대한 설명하자 김민기 사장의 입이 점점 커져갔다.
“매직 홀 용기 같은 제품은 직접사업으로 진행할 특허입니다. 이 외에도 라이선스, 통행세 받는 방법 등 제법 괜찮은 것들이 있어요.”
“자네는 진짜 가끔 뭐하는 사람인가 궁금할 때가 있어!”
“변리사나 변호사도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매직 홀 용기부터 시작해 보시죠?”
윤재의 플랜에 의하면 특허 사업 역시, 돈을 벌어들이는 포트폴리오의 하나일 뿐이었다.
김민기 사장의 기술력과 장인정신.
허수정의 예술적 감성과 디자인 능력.
거기에 윤재의 아이디어와 전생의 기억을 더하면, 아르바이트 치고는 아주 쏠쏠한 돈벌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