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초보은
빚을 내서라도 골프를 치는 계절이 있다.
4~5월과 9~10월은 한국에서 가장 골프를 치기 좋은 계절.
봄에는 겨우내 숨죽였던 잔디가 파랗게 올라오고, 신록이 우거진다.
적당히 따듯해 몸까지 잘 돌아가니 골프치기에는 최적인 것이다.
가을에도 마찬가지.
뜨겁던 태양 빛이 시원해지고 하늘도 새파란 가을은, 필드 주변에 단풍까지 어우러져 골프를 즐기기에 딱 좋은 계절이었다.
문제는 이 좋은 9월에 장동석이 골프장에서 헛걸음을 했을 뿐만 아니라, 개무시를 당하고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는 것이다.
사건은 3개월 전의 일에서 시작됐다.
회사 거래처 중 서울의 빅 딜러가 호남으로 골프를 치러 올 일이 생겼다.
강남영업지사장이 호남의 에이스인 장동석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부킹을 부탁했고, 장동석은 전남 담양의 골프장에 8명 2팀을 예약해 준 것이다.
그런데 서울 빅 딜러가 사전 공지 없이, 라운드 당일에 노쇼(no show)를 해 버렸던 것이다.
골프를 장동석이 치러 간 것도 아니고, 예약만 대신 했을 뿐인데 노쇼에 대한 페널티는 장동석에게 떨어졌다.
“고객님! 예약자 명의가 고객님이기 때문에, 페널티는 고객님께 부과될 수밖에 없습니다.”
“페널티라고 하는데 대체 뭐가 페널티인가요?”
“노쇼 위약금 53만원을 입금해 주셔야 합니다.”
“53만원이요?”
골프예약 한번 잘못 했다가,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담양 다이너스 골프장 규정이라고 했다.
“만약 위약금 안내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저희는 어쩔 수 없이 영구출입정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골프장이 전국에 한 두 개도 아니고, 호남에만 수십 개의 골프장이 있다.
당시 장동석은 위약금을 내지 않고 영구출입정지 당하는 걸 택했다.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3개월 정도가 지난 9월 28일 토요일.
장동석은 거래처 사장이 부킹한 골프모임에 초대됐다.
문제의 담양 다이너스 골프장이었다.
골프 경험이 많은 것도 아녔고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장동석은 골프가 재밌었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다니어스 골프장을 찾았다.
“인터넷 회원은 1만원 할인됩니다. 미 가입 하신 분들은 회원가입하세요.”
장동석은 이미 담양 다이너스 골프장의 인터넷 회원.
별 생각 없이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다.
2~30분 뒤에는 싱그러운 잔디밭에서 티샷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장동석 회원님?”
“왜 그러십니까?”
“6.19일에 있었던 2팀 노쇼 페널티로 영구출입 정지 당하셨네요. 죄송하지만 오늘 입장 안 되십니다.”
“네? 뭐라 구요?”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골프장을 찾았는데, 당시 강남지사 거래처의 예약을 해줬다가 출입정지 당한 기억이 떠올랐다.
거래처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대신 예약했고, 펑크를 낸 사람들은 강남 고객 이었는데 예약자 명의는 장동석이었다.
장동석은 프런트 직원에 통사정을 했으나, 프런트 직원은 골프장 운영과의 통제를 받을 뿐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거래처 사장들 3명까지 합세해 골프장 쪽에 사정을 했으나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책정된 위약금 53만원을 내고 입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영구출입 정지라는 것이었다.
“장팀장님!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입장할 걸 그랬네요.”
“최사장. 이럴 줄 몰랐으니까 그런 거지.”
“그래도 골프장 사람들도 이렇게 유도리가 없나? 모른 척 입장 시켜줘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는데 말이야.”
거래처 사장들은 돈을 모아 위약금을 대납해 줄 테니, 라운드를 함께 하자고 했으나 장동석은 그렇게까지 해가며 골프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운영과장을 설득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 위약금 내셔야 입장 가능합니다. 위약금 낼 돈 없으면 그냥 돌아가세요.”
운영과장이라는 남자의 말투는 단호함을 넘어 불쾌한 수준이었다.
장동석이 체념한 채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남자의 말이 들려왔다.
“하여튼 개나 소나 골프를 치니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 거지새끼들이 골프를 치겠다고 말이야. 바빠 죽겠는데 짜증나네. 씨발.”
통화가 끝난 줄 알고 한 얘기였지만, 장동석의 귀에는 똑똑하게 들렸다.
결국 장동석은 사장들과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골프장을 떠났다.
거래처 사장 3명이서만 라운드를 도는 것으로 최종 결정한 것이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집까지 돌아가는 길이 왜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평소보다 2~3배는 오래 걸리는 기분이었다.
◈ ◈ ◈
다음 주 월요일 영업3팀 Tea Time 때 장동석은 골프장에서 있었던 얘기를 꺼냈다.
골프장의 대응을 들은 팀원들은 하나 같이 분개했다.
“그 자식들 완전 개 매너군요. 영구출입 정지를 시키더라도, 당일 운동은 하게 해줘야지. 너무 하네요.”
“오과장님. 괜찮습니다. 3개월 전 일정을 제가 챙기지 못한 잘못이죠. 그리고 그곳도 원칙이 흔들리면 운영이 어렵지 않겠어요. 골프 하시는 분들 이런 일 겪지 말라고 하는 얘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맙시다.”
“강남지사 사장들도 그래요. 못 오게 생겼으면 팀장님께 말씀이라도 해줬어야지. 골프 매너가 다들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자신들의 리더가 골프장에서 굴욕을 당한 사건에, 3팀 팀원들은 마치 자기가 수모를 당했다는 듯 거품을 물었다.
윤재는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티타임이 끝나고 장동석과 단 둘이 남게 됐을 때였다.
“팀장님! 저 꼭 다이너스 골프장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한번 같이 가실래요?”
“야 다이너스 얘기는 하지도 마라. 어차피 나는 영구출입 정지야.”
“다른 사람 이름으로 가시면 되죠.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골프장이 다이너스 골프장이란 말에요.”
윤재는 평소와 달리 떼를 썼다.
“차대리님, 오과장님, 저, 팀장님 이렇게 4명 어떠세요? 부킹은 제가 할게요.”
“네가 정 가고 싶다면 한번 추진해 봐라.”
윤재는 즉시, 사람들을 총 동원했다.
창진. 남재. 동재 3명을 동원했다.
거기에 자신까지 포함해 4팀을 예약한 것이다.
2주 뒤인 10월 12일 토요일 오전 이른 시간이었다.
영업3팀 4명의 예약시간에 맞춰, 앞으로 1팀과 뒤 타임으로 2팀을 예약해 노쇼를 할 생각.
노쇼에 따른 위약금이 79만 원정도 나올 텐데, 위약금은 윤재가 대납할 생각이었다.
전생에 이어서 현생에서도 윤재에게 귀감이 돼 준, 장동석을 위한 작은 선물이라 생각했다.
자존심이 남다른 장팀장을 고려해 비밀리에 진행할 계획이었다.
장동석의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금전적 보상 같은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을 고려하면 이정도 선물이 최선인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면 장동석은 윤재에게 남다른 인물이긴 했다.
회사에 계약직 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그랬고, 정공법으로 일 처리를 해 가자는 귀감을 준 점도 그랬다.
전생에서 장동석이 위암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한 고민과 조사 덕분에, 위장과 관련해서는 준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회사가 최근에 공식 출시한 검은 쌀 햅반이나, 삼겹살과 양돈 농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모두 전생에 있었던 장동석과의 추억 덕분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2002년을 끝으로 본사로 진출할 계획인 윤재.
호남 부문과 장동석과의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보통 골프 하수일수록 앞 팀과 뒤 팀을 의식하다보면 마음이 급해지고, 실수를 범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10월에 장팀장과 함께 할 골프는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황제골프에 준하는 경험이 될 것이었다.
돌아가는 정황이 맞다면, 장동석은 2002년 말 임원인사에서 상무보로 승진하게 될 것이었다.
윤재 역시 연말 사원 인사에서 본사로 발령 나는 걸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
이별을 기념하는 것으로 제법 괜찮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 ◈ ◈
2002년 3월.
한국을 찾았던 올리버 페레레와 주세페는 한국을 떠났지만, 함께 한국을 찾았던 에밀리 캠벨은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6개월 넘게 전라남도 진도에 남아, 진도명창 소공례 여사의 지도를 받아 왔다.
진도 검은 쌀로 회사 검은 쌀 햅반을 출시한 인연도 있었고, 에밀리도 진도에 기거하고 있는 관계로 윤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진도를 찾았다.
회사 출장을 핑계로 찾은 적도 있었고, 혜진과 선희와 함께 에밀리를 찾아가 놀다 온 적도 많았다.
광주NBC 안수애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비디오 특공대’에 에밀리가 소개된 적도 있었다.
‘푸른 눈의 국악인!’
어설픈 한국말로 소리를 하는 그녀에게 지역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었다.
올리버와 결혼까지 염두해 두고 있는 에밀리.
O2 푸드와 미래 비즈니스를 위해서도 에밀리는 중요한 존재였다.
가족, 친구 등 주변을 공략해 비즈니스 상대방의 신뢰를 산다는 전략도 작용하긴 했다.
하지만 윤재에게 에밀리는 그런 계산적인 관계를 뛰어 넘은 친구였다.
건강미 넘치는 귀여운 용모.
넉넉한 마음씨.
무엇보다 가수로서 왠지 모를 상처가 느껴지는 허스키한 보이스까지.
윤재는 에밀리의 성공을 진심으로 원했고, 그녀의 부족한 1%를 전남 진도의 명창 소공례 여사에게서 찾기를 바랬다.
10월3일 개천절을 맞아 윤재는 진도를 찾았다.
틈틈이 에밀리를 찾아 그녀를 보살피겠다는 올리버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또한 회사일과 52 Corp의 일 때문에 바쁜 상황에서,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힘이 났기 때문이었다.
진도 소공례 여사님 댁을 찾았을 때, 전남 구례에서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하는 소리가 마침 끝나가고 있었다.
남녀 소리꾼들이 어우러져 부르는 소리를 듣다 윤재는 문득 깨달았다.
92살 드신 소공례 여사님이나, 28살 먹은 에밀리나 모두 한의 정서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17살에 진도로 시집 온 소공례 할머니.
노래와 소리에 미쳐 있는 할머니는 남편과 시댁의 구박을 받았고, 남편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다고 했다.
모진 고초를 버티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 수십년을 소리꾼으로 떠돌다가 진도에 다시 정착하신 할머니였다. 그녀의 나이 45살이 넘었을 때였다고 했다.
에밀리도 비슷했다.
영국사람으로서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지지했던 에밀리의 부친은 벨파스트에서 돌아가셨다.
그것도 에밀리의 아버지가 지지했던 아일랜드의 테러단체의 폭탄테러로.
그래서일까?
공례 여사님과 에밀리의 소리에는 한국말로 한(恨), 외국말로는 Scar가 있었다.
나이도 피부색도 다른 두 여인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마치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 ◈
쉬는 시간을 맞아 윤재는 에밀리와 담소의 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윤재를, 공례엄니와 수제자 누님들이 반갑게 맞아줬다.
“에밀리. 벌써 7개월이 흘렀구나. 어때? 이제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아냐. 공례 엄니도 나이 50이 넘어서야 지금의 경지에 이르셨다고 해. 아직 나는 부족해.”
“공례 엄니 연세가 벌써 92세야. 아직 정정하시지만 언제 어떻게 되실지 몰라.”
윤재 말도 틀린 게 아니었다.
최근 들어 소공례 여사는 에밀리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자꾸 하셨다.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계시는 것이었다.
“윤재. 여러 모로 고맙게 생각해.”
“하하하. 내가 뭘....”
“그렇지 않아. 윤재는 공례 엄니 못지않게 내 인생에 중요한 사람이야. 윤재 덕분에 올리버와의 연애에 속도가 붙었어. 그리고 한국의 소리와 공례 엄니를 소개해 준 것도 윤재잖아. 바쁜 일상에도 짬을 내 이 먼 곳을 찾아와 말동무가 돼 준 사람도 윤재이고.”
지난 8월.
아르헨티나에서 돌아온 윤재는 에밀리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에밀리와 신곡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윤재의 아이디어 중 하나가 그들이 함께 했던 ‘몽블랑’ 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까지 4개국에 걸쳐 있는 몽블랑은 누구의 산도 아니라 그저 산일뿐이라는 내용이었다.
몽블랑 뿐만 아니라 자연이란 것이 원래 그랬다.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국경. 기록. 문명 등 모든 인간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자연 앞에, 겸허해 지자는 메시지였다.
한국말을 배운다고 배워도 아직 부족한 에밀리에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윤재는 항상 반가웠다.
게다가 음악에 대해서도 말동무가 돼 줘, 항상 든든한 존재였던 것이다.
“아냐. 내가 에밀리 노래 듣고 힐링 받고 가는 걸.”
“언제 어디에 가든, 윤재와 친구들이 베풀어준 은혜 잊지 않을 거야. 고마워!”
에밀리의 말처럼 그녀가 50이 돼, 영국으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부족한 1%가 채워졌고, 그녀의 성공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북아일랜드에는 에밀리의 엄마가 살고 계셨고, 이곳 진도에는 그녀의 음악적 어머니가 살고 계셨다. 공례 엄니의 노래 여정이 그 끝을 향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