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rm (2)
칠레 산티아고에서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는 농업마을 랑카구아.
그 곳에 이 나라 최대의 농업기업 아그로수퍼가 운영하는 돼지농장이 있었다.
윤재는 장식, 남재와 함께 랑카구아의 키위 밭으로 안내됐다.
“형! 돼지 농장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게 말이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장식이 오랜 시간 고생해 연결해준 현지의 아그라수퍼 회사 관계자.
그는 윤재 일행을 돼지 농장이 아닌 키위 농장으로 데리고 갔다.
“저거 보이시나요?”
후안 벨라스코라는 사내가 가리킨 곳에 스프링클러 같은 게 있었다.
“저건 돼지 분뇨로 만든 천연비료를 뿌리는 시스템입니다. 돼지 농장마다 도입한 분뇨처리시스템 덕분에 우리는 키위뿐만 아니라, 자두, 밀 등을 재배할 때도 화학비료 대신 분뇨비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돼지나 닭, 소 농장들에서 흘러나오는 폐수와 분뇨 등으로 인근 하천이 오염되는 경우가 많았고, 지역주민들과 농장들이 마찰을 빚었다.
그런 점에서 칠레의 분뇨처리 시스템은, 골칫거리인 분뇨를 비료로 만들어 농업에 이용했으니, 말 그대로 재생 가능한(Recyclable) 구조를 이룬 것이다.
후안 벨라스코를 따라 분뇨처리장도 구경할 수 있었다.
칠레의 모든 돼지 농장은 분뇨처리장을 의무적으로 갖춰야 한다고 했다.
“환경문제 때문에 돼지 분뇨를 반드시 액체비료로 만들어, 농업용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인천에서 달라스를 거쳐 3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장식도 남재도 윤재의 돼지와 닭에 대한 강의를 듣긴 했다.
하지만 칠레 현장을 직접 보니 충격은 훨씬 컸다.
충격 받은 것은 윤재도 마찬가지였다.
“환경문제와 돼지 품질문제 때문에 칠레는 돼지 생산량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한국보다 5분의 1 수준으로 생산량을 제한했기 때문에, 환경문제도 없었고 품질도 유지할 수 있다는 자랑이었다.
게다가 90년 이후 아직까지 구제역을 포함한 돼지 질병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칠레 FTA이후 칠레는 한국으로 삼겹살을 수출하기 위해, 돼지 사육두수를 2배로 늘리게 된다.
얼마든지 더 늘려 돈을 벌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환경과 건강한 돼지를 선택해 맥시멈 400만 마리로 연간 쿼터를 제한했었다.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에서 반도체 등에 이르기까지 수출주도형 산업을 키워왔다면, 칠레는 자신들의 나라에 맞게 농업을 육성해 왔던 것이다.
랑카구아 아그라수퍼의 돼지 농장에서 드디어 돼지를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기업농이 아닌, 일반 양돈농가의 돼지도 견학하게 됐다.
칠레의 건강한 돼지에 대한 현지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니콜라스 농장은 돼지를 방목해 키웠는데, 인근 호수에서 공수해온 갈대를 농장에 깔아줬다고 했다.
“2개월에 한 번씩 갈대를 갈아 줍니다. 이렇게 하면 돼지냄새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가 있어요.”
돼지 똥 범벅이 돼 고약한 냄새가 났기 때문에, 일할 사람을 구하기 어려운 고국의 양돈농장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랑카구아에서 돼지관련 시설들을 둘러본 뒤, 윤재일행은 산티아고로 돌아와 밤늦은 저녁을 먹었다.
남미 국가들이 자랑하는 고기구이 아사도가 메인 요리였다.
“나도 어설프게 알고 있었는데, 완전 놀랐다야.”
윤재가 잘 익힌 돼지 등심부위를 먹으며 말했다. 부드럽고 촉촉한 맛이 일품이었다.
“우리나라가 1천만 마리의 돼지를 키워도, 삽겹살이 부족해 국내 생산량보다 더 많은 삼겹살을 수입하고 있는 줄은 진짜 몰랐다.”
장식도 칠레에서 보고들은 사실에 놀란 얼굴이었다.
“현지에서는 끓여서 기름으로 쓰는 삼겹살을, 우리가 미친 듯이 수입해서 먹고 있었다니. 살짝 놀랐어. 형!”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한국 사람들이 삼겹살을 좋아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도 단기간에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재야! 어쨌든 와보길 잘했다. 52 Farm의 농업 비즈니스의 방향은 확실해 진거지?”
“응. 감이 왔어. 분뇨처리장을 통한 친환경. 사료를 적게 먹인 건강한 돼지. 전염병에 취약한 집단사육이 아닌, 방목형 사육을 통해 맛있고 건강한 돼지를 키워야겠어. 뿐만 아니라 Recyclable 한 농업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목표도 확실해졌어.”
“굿! 비싼 돈 들여 데리고 온 보람 있네. 귀국하면 스페인하고 헝가리 등 유럽 나라도 좀 다녀와라.”
“예? 유럽이요?”
“응. 나는 회사일도 그렇고 시간이 없지만, 너야 아직 백수 아니냐?”
스페인은 유럽 최대의 양돈국가 중 하나.
돼지 뒷다리를 일주일간 소금에 절인 뒤, 그늘에서 말려 숙성시키는 하몬으로 일반 돼지보다 5~6배 비싼 가격에 판매하면서 고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헝가리는 300만 마리라는 적은 규모의 양돈 규모에도 불구하고, 뒷다리나 등심을 골고루 소비했다.
특히 헝가리의 돈가스 버전 등심 슈니첼은 국민요리로 인기가 높았다.
돼지의 거의 모든 부위를 골고루 소비하는 헝가리는, 우리나라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생산규모에도, 부족함이 없어 돼지 수입이 사실상 전무했다.
“그런데 형! 나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형 얘기대로 하려면 52 Farm에 엄청난 돈이 필요할 것 같아. 수천억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한테 그만한 돈이 있냐는 거잖아?”
남재는 윤재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하하하. 돈 걱정은 하지 마라. 52 Farm 이 당장 다음 달에 양돈, 양계부터 시설작물 재배까지 모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시간을 가지고 하나씩 해결해 가면 돼. 자본조달은 내가 할 계획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차입 건은 앞으로 상의해 가면서 해결하자고.”
윤재의 자신감은 근거 있는 것이다.
2002년 8월 현재 현금성 자산만 300억이 넘었다.
월드컵 관련주로 30억이 넘는 돈을 벌었고, 파산한 미국의 통신재벌 월드컴에 대한 풋옵션 매매로 2배를 훌쩍 넘는 수익률을 챙겼다.
게다가 조선주 오성중공업도 큰돈을 벌어주고 있었다.
이미 구르는 눈덩이의 사이즈가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
규모의 경제 달성. 그리고 회귀자라는 속성이 결합하면 1,000억 돌파도 시간문제였다.
윤재는 52 Cafe와 52 Farm을 동시에 성장시킬 자신이 있었다.
52 Farm 도 52 Cafe 도 결국은 먹거리 회사.
팜을 통해 파프리카나 과일 등의 시설작물을 재배해, 신선식품의 라인업을 수직계열화 할 수 있다.
그리고 돼지, 닭 역시 가공식품과 신선식품의 양대 라인업에 반드시 필요한 품목.
수직계열화를 통해 모든 원재료를 조달할 수 없었고, 직접 생산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을 사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래의 식품왕국을 위해서는 생산과 유통의 거점 확보는 반드시 해결돼야 했던 것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데 있어, 동기부여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이번 칠레 ? 아르헨티나 여행을 통해, 사촌동생 남재는 충분히 각성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칠레가 자랑하는 와인을 곁들인 아사도의 식감은 잊기 힘든 맛을 자랑했다.
◈ ◈ ◈
윤재가 칠레의 산티아고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동안 한국에서는 굵직한 뉴스가 터지고 말았다.
윤재에게 평택 땅을 처분했고, 지역구에 공공도서관 기부를 밝히며 대국민 사과문까지 읽었다.
아들 황성호를 극비리에 자수시킨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황태준이 원했던 그림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황성호는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경찰에 불법 도박 사실에 대해 자수하는 길을 택했다.
윤재의 얘기처럼 자수를 통해 형량을 가볍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회의원이라는 배경 덕에, 경찰 쪽에서도 황성호의 도박 사실을 조용히 처분하는 방향으로 진행 중이었다.
문제는 황성호가 3억원의 돈을 빌린 사채업자 쪽에서 터지고 말았다.
꼭 사채업자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게, 황태준의 돈 욕심도 사건의 확대에 일조했던 것이다.
애시당초 선이자 15%를 뗐지만, 황성호가 빌린 금액의 이자는 연리 30%.
잔여이자 15%를 일할 계산해 지급해야 한다는 사채업자.
이자를 조금만 깍아 달라는 황태준 의원.
둘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30%는 너무 고리 아니요? 내 체면을 봐서라도 1,000만원에 합의 봅시다. 돈도 갚았고, 이미 수 천 만원의 이익을 보지 않았소? 이 돈을 급히 갚느라 조상대대로 물려온 땅까지 처분해야 했소.”
황태준 입장에서는 충분히 억울할 법한 상황이긴 했다.
그러나 상대는 악질 사채업자였다.
“의원님! 돈 494만원 가지고 쩨쩨하게 이러지 맙시다. 우리도 땅 파서 장사하는 사람도 아니고, 담보 없이 3억원을 빌려줬으면 약속한 이자는 내셔야지요. 일할 계산된 이자에서 단돈 1원도 빼드릴 수 없습니다.”
분하고 억울하더라도 494만원 더 내고 끝내야 했다.
하지만 황태준은 돈을 떠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명색이 3선 국회의원인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는 사채업자들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언쟁과 설전이 오가는 사이에 사채업자도 빈정이 상하고 말았다.
“아니? 의원나리. 아들놈 빚과 이자 정당하게 갚으시면 되는 걸, 왜이리 지분거리는 겁니까? 자꾸 이러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494만원 마저 내놔요. 오늘까지 상환하지 않으면 내일부터 연체이자까지 붙게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할 거요.”
“뭐? 가만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감히 사채업자 주제에. 어느 안전이라고?”
결국 사채업자는 자신들의 인맥을 총동원해 황태준과 황성호에게 있었던 사건을 흘리기 시작했다.
거대 정당의 원내대표 선거가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이보다 더 좋은 뉴스거리는 없었다.
결국, 황성호의 2002년 월드컵 해외 도박 사실마저 뉴스를 탔고, 황태준은 원내대표 선거에서 중도하차 해야만 했다.
여행목적을 달성한 윤재가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 해변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던 시점이었다.
◈ ◈ ◈
휴가로 재충전을 하고 왔으면 다시 일에 매진해야 하는 법.
잃어버린 워킹데이, 10일을 보충하겠다는 맘으로, 윤재는 밀린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8월 20일 화요일 밤.
3선 국회의원 황태준이 밤늦게 윤재를 찾아왔다.
광주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의원님! 웬일로 이 먼 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내가 자네한테 면목 없는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네.”
황태준이 다시 끄응 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윤재 자네 말대로 사과문도 발표하고 지역구에 도서관 건립까지 약속했건만, 원내대표 선거에 낙마하고 말았네.”
“뉴스에서 봤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평택 땅을 돌려주면 안 되겠는가? 평당 15만원에 내가 되샀으면 하는데.....”
지독한 땅 욕심이고 물욕이었다.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땅을 팔았다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려서 말이네.”
최근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얼굴이 상해 있었다.
“평택 땅 넘겨드리는 건 일도 아닌데, 가격은 다시 조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깜작 놀란 황태준이 윤재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하니 친구의 아버지였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거래에 터무니없는 프리미엄을 요구할까 싶어 눈치를 보는 것이다.
“제가 의원님께 매입한 금액은 평당 15만원. 아직 등기도 끝나지 않았으니, 의원님께 박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렇지? 허허허. 얼마면 되겠는가? 16만원 정도면 되겠는가? 아니지. 취등록세 낸 거랑 양도세 생각하면 17만원은 해야겠지?”
황태준은 애써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들 뻘인 윤재에게 굴욕을 당하는 지라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참고 있는 것이다.
“얼마요? 17만원이요? 의원님 저랑 장난하러 오신 겁니까? 좋게 해 드리려고 했더니, 이분이 제 땅을 거저 드시려 하네!”
“뭐? 뭐라고?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것 아니지?”
마치 책사처럼 자신을 찾아와 해결방안을 제시하던 윤재는 더 이상 황태준의 눈앞에 있지 않았다.
냉정하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윤재가 명토박았다.
“하하하. 의원님! 제 말씀 잘 들으세요. 평당 1,000만원! 총액 3,000억 싸가지고 오시면 넘겨드릴 생각이니 그리 아십시오.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기름 값도 들고 톨비도 들었을 텐데, 커피는 제가 사죠.”
윤재는 남은 커피를 원샷 때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부동산 가치와 별개로, 평택은 52Corp의 제반 사업의 주요 허브가 될 곳. 20년 뒤에는 실제로 3천억 이상 가는 값어치를 갖게 될 곳이다.’
윤재는 차에 타기 전 카페를 돌아봤다.
황태준이 분노를 삭이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쥐어뜯고 있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