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rm (1)
52 Farm!
윤재가 만든 52 Corp 소속의 두 번째 회사가 될 곳이다.
52 Cafe의 후속 회사로 윤재는 농업법인을 준비해 왔는데, 바로 52 Farm이었다.
농업법인은 주주의 10% 이상을 농업인으로 참여 시켜야 한다.
또한 이사회의 30%를 농업인으로 구성해야 한다.
52 Cafe와 마찬가지로 자본금은 10억.
65%의 지분인 6.5억을 윤재가 투자했고, 나머지 35%를 투자한 농업인이 3명 있었다.
O2 푸드의 구례-곡성의 주요 대리점이자, 회사에 벌꿀 납품을 주도해 큰돈을 벌게 된 김동현 사장이 15% 주주로 참여했다.
부인과 함께 구례에서 약 6,000평에 달하는 농사를 짓고 있는, 김동현은 당연히 농업인의 요건을 갖춘 인물.
또 다른 15%의 주주는 김동현 사장의 친구인 류호진 사장.
그는 구례군 토지면, 간전면, 문척면 일대에 비옥한 논과 밭을 약 4만평 정도 보유한 대농이었다.
조상대대로 구례지역의 만석꾼인 류씨 집안의 후예이기도 했다.
윤재와 차명수 대리를 통해, 회사 대리점을 개설했고 시장에 안착한 상태였다.
담당지역이 순천 동부권과 광양인 관계로, 호남본부 순천지사 관할이긴 했지만 개업과정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은 윤재와 차명수였다.
그 인연으로 김동현과 류호진은 52Farm의 이사직에도 이름을 올렸다.
52 Farm에 대한 투자유치를 위해 김동현과 류호진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구례군 토지면에서 위치한 금환락지 명당 설조루.
조선조 최고의 명당에 자리 잡은 저택.
현재 99칸 설조루 고택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류호진은 설조루를 세운 류씨 가문의 적손이었다.
3명은 설조루의 사랑채 마루에서 오미자 차를 마셨다.
얼음이 살짝 떠 있는 오미자 차를 마신 김동현이 물었다.
“대체 농업법인을 만들겠다는 이유가 뭔가?”
회사 대리점 사업의 성장과 벌꿀 매출의 지속적인 증가 때문에, 김동현의 윤재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28살의 회사원이 농업법인을 만들겠다고 하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윤재 역시 농업인 자격을 취득한 상태.
2001년 영화 촬영을 앞둔 상태에서, 나래이터 모델 알바를 하던 혜진을 보고 착안한 아르바이트가 바로 농사였다.
윤재는 전남 화순에 있는 작은 파프리카 온실을 사들여, 스케줄이 없는 주말이면 화순을 찾아 파프리카 재배를 도왔다.
전문 농업인이 아닌 관계로, 파프리카 온실 매도자가 여전히 윤재의 농사일을 도왔는데, 온실매도자 한상원씨는 52Farm의 5% 주주이기도 했다.
윤재는 한상원 사장께 더 많은 지분 취득을 권했지만, 그는 5% 지분도 부담을 느낀다며 5,000만원만 투자했었다.
김동현의 질문은 계속됐다.
“그러니까, 파프리카 농사 지어서 수출하려고 농업법인 만든 것은 아니잖아?”
“그렇죠. 그 정도에서 머물 생각이면, 제가 형님 찾아와서 이런 부탁드리지 않죠.”
“파프리카 농사와 수출보다 더 큰 일을 벌일 계획이란 거야?”
김동현은 혀를 내둘렀다.
시골의 조용한 식품대리점에 불과했던 김동현.
자신의 사업을 키워주고 벌꿀 벤더로까지 성장시켜준 윤재의 능력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28살 젊은 친구의 포부는 어디가 끝인지 궁금했다.
김동현과 류호진을 상대로, 왜 농업법인을 설립하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설명했다.
“저는 식품회사에 다닙니다. 식품의 가장 기초적인 원재료가 농산물입니다. 그래서 농업법인이 필요해요.”
“내 말이 그 말일세. 윤재 자네가 농사 지을 거야? 회사는 안 다닐 거냐고?”
김동현도 류호진도 시골에 살면서 농업을 병행해서인지, 농사는 루저들이나 하는 거라는 생각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잘 나가는 윤재가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김동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는 당연히 회사 생활 열심히 해야죠. 농업 법인 경영은 따로 적임자를 물색해 뒀습니다. 어쨌든 그 경영자가 52 Farm을 운영하게 될 거에요. 농지매입을 통한 부동산 관리. 실제 농사. 그리고 유통 허브를 구축하는 게 목적입니다.”
김동현도 류호진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본금 10억짜리 회사가 추진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농사는 파프리카. 버섯. 딸기, 토마토 등 시설작물 위주로 할 계획입니다.”
윤재의 설명은 계속됐다.
“향후 20년을 내다보고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에 농지와 토지를 사들일 생각입니다. 그래야만 전국 유통을 할 수 있어요. 유통 거점은 52 Farm의 농산물뿐만 아니라, 물류 허브로도 활용할 계획이구요.”
“윤재씨! 다 좋은데 그걸 10억으로 할 수는 없는 것 아네요?”
조상대대로 구례의 만석꾼 집안인 관계로 금전적 여유를 갖고 살아온 류호진. 윤재의 얘기처럼 사업을 하려면, 밑 빠진 독에 돈을 쏟아 부어도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본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분 형님들이 내키지 않는 투자는 강요할 생각 없으니까요.”
김동현과 류호진은 당장 52Farm을 농업법인화 하는데 필요한 사람들.
윤재의 포부대로 실행한다면 수천억으로도 부족할 일.
자신의 필요에 의해 주주로 참여시킨 사람들에게 부담주고 싶지 않았다.
“회사가 성장하다 보면, 형님들 지분은 현재 15%에서 자꾸 낮아질 겁니다. 하지만 52 Farm의 매출과 수익이 증가하면, 그 가치는 현재 1억5천만원을 훌쩍 뛰어 넘게 될 겁니다.”
윤재의 지난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김동현.
투자한 1억5천만원이 손실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했지만, 그 정도 금액은 설령 0원이 된다 해도 맡길만한 사람이 윤재라고 생각했다.
류호진 사장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농업법인 52 Farm의 설립의 토대는 마칠 수 있었다.
52 Cafe도 물류 허브가 사업목적에 들어가 있고, 52 Farm도 물류허브가 주요 사업목적이었는데, 윤재가 추구하고 있는 Plan B 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전국단위 물류허브의 구축이었다.
45억을 들여 황태준의 평택 땅을 사들인 것도 모두, 중장기 전략에 의한 선택이었다.
광남대 농대를 다니다 군에 입대한 사촌동생 김남재.
52 Farm의 미래를 책임질 남재가 곧 있으면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남재가 전역하면 52 Farm의 대표이사를 맡길 계획.
5년 정도 뒤에 52 Farm이 더 커졌을 때는, 경영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남재 정도면 훌륭히 역할을 수행할 것이었다.
농업 법인이 안정세를 찾으면 윤재의 평택 땅도 모두, 52 Farm에 넘겨 관리할 생각이었다.
◈ ◈ ◈
2001년 윤재의 몽블랑 트래킹에서 촉발된 O2 푸드의 리프레시 휴가제도.
하계휴가 4일에 연차 하루를 더하고, 리프레시 휴가 5일을 붙이면 최장 10일의 휴가를 갈 수 있었다.
윤재가 그랬던 것처럼 관광 외에 현지에서 배울 수 있는 시사점이나 비즈니스 인사이트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2주 가량 국내외에서 리프레시만 하고 돌아와도, 생산성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인사실과 경영진이 내린 판단이었다.
윤재의 몽블랑 휴가와 후기는, 휴가에 대한 문화를 조금씩 바꿔놓기 시작했다.
젊은 직원들을 중심으로, 2주 리프레시 휴가를 가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2001년에 이어 2002년에도 윤재는 장기휴가를 떠났다.
전년도와 달라진 점은 여행목적지와 동반자였다.
원투어에 다니며 윤재의 여행을 도왔던 장식이 함께했고, 군대에서 전역을 마친 남재가 한자리를 더 채웠다.
목적지는 칠레와 아르헨티나.
비행시간으로만 꼬박 3일 이상을 쏟아 부어야 하는, 이 미친 여행의 목적은 명확했다.
장식의 목적은 업무상 출장.
원투어에 남미 관련 상품이 없어, 현지 탐방과 휴가를 겸한 여행이었다.
윤재와 동재의 경우 칠레의 농업 현실에 대한 견학이 주요 목적이었다.
국가 수출의 20%이상을 농업에 의존하는 칠레는 명실상부한 농업강국.
포도, 사과 등 신선과일 농장과, 친환경 돼지 사육으로 유명한 칠레의 농업 견학이 주요 목적.
목적을 달성하면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해안도시 마르델플라타를 찾아 식도락으로 여정을 마칠 계획이었다.
“형! 나는 농촌 공동체가 꿈이지만, 형도 이렇게 농업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네!”
“하하하. 우리는 다 같이 농민의 후예 아니냐?”
사촌동생 김남재.
전생에서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농촌 공동체 운동을 하겠다며, 전남 화순으로 귀향해 농사를 지으며 농민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살았다.
윤재의 부모님부터 작은 아빠, 그리고 은행 노조활동을 한 동재에 이어 남재까지.
윤재를 제외한 집안 남자들의 피에는, 저항과 비주류의 기운이 흐르는 건지도 모랐다.
남재가 하겠다는 농촌 공동체 운동은 필연적으로 가난을 동반했다.
전생에서 남재는 잊을만 하면 윤재를 찾아와 손을 벌렸었다.
“대기업 상무면 부르주아 아냐? 나 같은 농민 덕에 형님이 쌀밥 먹는다 생각하고, 200만원만 빌려주소.”
갚지도 않을 받아가며 어찌나 당당하던지.
‘전생은 남재가 집안의 천덕꾸러기였는데, 이번 생은 좀 다르게 갈 수 있다. 남재의 농촌 운동과 내 비전의 접점을 찾을 수 있어.’
농촌활동을 꿈꾸는 남재에게 어차피 대학졸업장은 큰 의미가 없었다.
윤재는 남재를 자퇴시킨 뒤, 52 Farm을 이끌도록 할 계획이었다.
미국 달라스를 경유해 가는 긴 비행시간은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하지만 윤재와 남재, 장식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여건이었다.
“남재야. 너 스페인 인구가 몇 명인지 아니?”
“몰라. 땅 덩어리가 우리나라 보다 크니까 대충 1억 정도 되나?”
“나도 가보지는 않았다만, 대충 5,000만명 정도 된다고 하더라. 우리나라랑 비슷하지?”
“그러네.”
“너 농대 다니니까 스페인 이베리코 돼지는 알지?”
“잘은 몰라도 들어봤지. 돼지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정도?”
윤재가 이베리코와 스페인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칠레 여행과도 맥락이 닿아 있었다.
“우리나라 돼지 사육이 연간 1,000만 마리야. 그럼 스페인의 돼지 사육두수는 얼마나 될 것 같니?”
“음... 대충 우리랑 비슷하지 않을까?”
2002년에 스페인의 돼지 사육두수는 연간 2,000만 마리가 넘었다.
한국보다 거의 2배의 돼지를 키우고 있는 것.
스페인의 돼지 사육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윤재가 회귀하던 시점인 2020년에는 인구수보다 많은 5,000만 마리의 돼지를 키웠고, 독일을 제치고 유럽연합 1위의 돼지생산국이 됐다.
남재는 스페인의 돼지 숫자에 상당히 놀란 얼굴이었다.
윤재의 얘기는 계속됐다.
“우리가 가는 칠레는 연간 돼지사육두수가 200만 마리 정도 된다고 해. 그런데 200만 마리를 키우는 칠레는 돼지 수출국인데, 우리나라는 1,000만 마리를 키워도 돼지를 수입하는 실정이다. 네덜란드. 칠레 등 세계 각국의 돼지가 한국으로 유입되고 있어.”
“인구가 칠레보다 많아서 그런 거 아냐?”
“물론 인구도 요인이지. 하지만 인구보다 더 큰 이유가 있어. 삼겹살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는 돼지 소비패턴 때문이야.”
“삼겹살?”
남재는 여러모로 깜작 놀랐다.
Y대 경영학과를 중퇴한 게 전부인 윤재가, 농대를 2년이나 다닌 자기보다 양돈문제를 더 잘 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한국인의 최애식품 중 하나인 삼겹살에 문제가 있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삼겹살과 목살은 돼지 한 마리에서 나오는 비율이 20%도 안 된다. 등심은 돈까스 재료로, 앞다리 살은 족발 재료로 쓰고 있어. 하지만 뼈나 기름을 빼면 비중이 절반 가까이 되는 뒷다리 살은 대부분 먹지도 못하고 폐기하고 있다.”
남재의 입장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군 제대 후 윤재는 매일 같이 남재를 찾아왔다.
자신과 함께 농업법인을 해보자고 설득했고, 남미 여행도 같이 가자고 꼬드겼는데, 모두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윤재가 어떤 그림을 그린 상태에서 자신을 포섭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돼지고기의 절반 가까이에 해당하는 뒷다리 살, 안심, 등심 등은 사실상 한국에서 용처가 없어.”
“그럼 어떻게 하는 거야? 수출 하나?”
“그렇게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것도 여의치 않아. 바로 구제역 때문이지.”
남재는 윤재의 얘기가 거듭될수록 눈동자가 커져만 갔다.
장식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윤재의 돼지 얘기의 핵심은 간단했다.
기름덩어리가 많고 살코기가 적은 삼겹살은 건강에 좋지 않아, 유럽이나 남미 같은 나라에서는 기피하는 부위.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삼겹살을 사랑하게 됐고, 돼지를 잡으면 삼겹살 위주로 소비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1,000만 마리의 돼지를 키우면서도, 삼겹살이 부족해 세계 각국의 삼겹살을 수입하고 있다고 했다.
더 문제는 남아도는 뒷다리 살 등이었는데, 구제역으로 한국산 돼지에 대한 수출길이 막히는 바람에, 냉동 창고에서 2년을 보관해도 수출되지 않으면, 전량 폐기처분한다는 얘기였다.
“이번에 비록 스페인엔 가보지 못하지만, 스페인은 뒷다리 살을 발효 숙성시킨 하몬을 만들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그리고 칠레는 친환경 돼지 사육을 통해, 세계 시장에서 건강한 돼지로 명성을 날리고 있어.”
“꿀걱!”
“칠레에 가자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거야. 52 Farm을 통해 한국 농업과 양돈 등을 한 단계 끌어올렸으면 한다. 네 평생 꿈도 그런 것 아니냐?”
군 제대 후 학교복학문제.
자신의 평생 소신인 농촌공동체 문제 등.
남재는 복잡했던 머릿속이 개운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형 얘기를 듣다보니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이야. 고마워! 갑자기 꿈과 비전이 생긴 기분이야.”
“하하하. 그래 이번 여행이 너와 나, 그리고 52 Farm에 좋은 계기가 될 거다.”
플랜A와 플랜B 모두 52 Farm의 역할은 중요했다.
한국을 넘어서는 세계 수준의 푸드회사를 위해서는, 52 Farm을 통한 수직계열화는 여러모로 이익이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