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와 패자
2002년 6월 4일 저녁 한남동 오재준 회장의 집.
오재준은 조촐하게 가족과 한국 팀의 첫 번째 시합을 관람했다.
부인과 막내딸만이 그와 함께하는 중이었다.
오하나!
큰 아들 오진탁과 16살 차이가 날 정도로 늦둥이였다.
그런 막내딸을 오재준은 너무나 사랑했다.
오하나는 보통 가정처럼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보고 싶다며 오재준을 졸랐다.
다음 경기를 사장단들과 함께 보기로 하고, 오재준은 막내딸과 부인을 선택했다.
치맥을 마시고 응원을 하고 있는데, 전반 26분 황선홍이 폴란드를 상대로 첫 골을 터뜨렸다.
어느새 환갑이 넘은 오재준.
나이를 잊고 막내딸을 끌어안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아빠!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서 첫 승을 올리는 것 아닐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기대해 볼 만 하겠어!”
회사 경영이 주는 스트레스를 잊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재준의 부인도 부녀가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행복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한국 팀은 32강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0으로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재벌오너나 회사 대표, 의사나 변호사 등 부자들이 몰려 산다는 한남동.
2002년 월드컵의 열기는 한남동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는데, 곳곳에서 대한민국 응원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막내딸 오하나의 뽀뽀 세례를 받으며 한국의 승리를 기뻐하고 있는 동안, 오재준의 전화통은 쉴 새 없이 울려댔다.
냉정을 찾은 오재준이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 정말 우리가 이겨버렸습니다. 이곳 광화문은 거의 축제의 도가니입니다. 수십만 명도 더 모인 것 같습니다. 붉은 마왕을 후원한 저희 회사도 완전 대박이 날 것 같습니다.”
회사의 붉은 마왕 후원을 끝까지 반대했던 홍보부문장.
한국 팀의 첫 승에 숟가락이라도 올리려는 건지, 가장 먼저 오재준에게 전화해 광을 팔았다.
그 뒤로도 오재준은 여러 명의 전화와 보고를 받았다.
“회장님! 이번 붉은 마왕 후원은 정말 신의 한수입니다. 회장님은 진짜 신이 내린 오너이십니다.”
모두들 들뜬 목소리였고, 한목소리로 붉은 마왕의 스폰서 체결에 대해 찬양했다.
월드컵 본선 첫 승의 감격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오재준은 소파에 앉아, 조금 늦게 시작한 뉴스를 지켜봤다.
TV에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한국 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서울. 인천. 부산 등의 대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방 군소도시까지 붉은 티셔츠가 넘실거렸다.
오재준은 TV를 보다 윤재를 생각했다.
거의 1년 전부터 2002년 월드컵 특수를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윤재.
급기야는 2002년 오픈 이노베이션에서, [ 2002년 월드컵과 스포츠 마케팅 ] 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 대표 팀 응원단인 붉은 마왕의 스폰서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
‘마치 한국 팀의 선전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 강한 어조로 후원을 주장했었는데! 보기 좋게 맞아 떨어졌어. 정말 통찰력과 예지력이 보통이 아닌 친구야!’
전년도 O2그룹 론칭 광고와 프로모션은 폭망했었다.
그때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방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오재준은 붉은 마왕 스폰서십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영업지원부문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상무? 나도 저 거리응원이란 걸 해봤으면 좋겠네. 다음 경기는 임원들과 함께 광화문에서 보자고.”
“대구에 VIP 관람석을 예약해 놨는데, 광화문에서 보시겠습니까?”
“응. 대구 VIP석은 대형 거래처들에게 양보하고, 우리는 광화문에서 보자. 저 열기를 느껴보고 싶군.”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홍보부문장과 협의해서, 붉은 마왕과 함께하는 그룹 이미지 광고 편성 시간을 좀 늘려봐. 할 수 있겠지?”
“네. 회장님! 반드시 관철되도록 해 보겠습니다.”
오재준에게 폴란드전 승리는 기분 좋은 첫 승이었고, 50억이 아깝지 않은 쾌거였다.
그리고 영업지원부문장에게 오재준의 전화는, 홍보부문장보다 자신이 더 신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쾌거였다.
◈ ◈ ◈
한국 사람들 99.9%가 월드컵 32강 첫 경기의 승리를 기뻐했다면, 딱 한명! 한국의 승리에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황성호.
불법 해외 인터넷 토토 사이트를 통해, 1000만원을 한국 팀 패배에 베팅한 황성호는 1:0으로 이기고 있을 때만 해도, 한국 팀의 역전패를 자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한국의 2:0 대승!
90분 만에 돈 1000만원을 날려 버렸다.
‘그래. 재수가 좋았을 뿐이다. 미국전은 건너뛰고, 포루투칼 전에 2,000만원을 걸면 된다.’
그는 애써 정신승리를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전국적으로 거리응원이 진행된 관계로, 황성호의 집 근처에서도 첫승의 여운을 만끽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씨발. 짜증나네..... 아냐.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어차피 Data와 확률은 내 편이야. 불안해 할 것 없다. 깡깡하게 마음먹고 베팅하면 결국은 이긴다.’
그는 다짐했지만,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0.1%의 확률도 내게 일어나면 100% 확률이 돼 버리고, 99%의 확률도 일어나지 않으면 0%가 되고 만다는 평범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Risk 관리가 안 되는 도박에, 확신을 가져서는 곤란하다는 진리 말이다.
황성호는 자신의 필승공식을 믿었고, 애초 계획한 대로 32강, 16강전에 베팅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다.
그 필승공식이 다시 한 번 자신을 좌절시키고, 부친 황태준에게도 적지 않은 타격을 미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 ◈ ◈
동 시간대 광주 52 Cafe 1호점.
월드컵 기간 동안 한국 팀 경기가 있는 날에는, 카페를 개방해 응원 공간으로 제공했다.
벽면을 가득 메울 정도로 큰 스크린을 걸어놓고, 입장객들과 함께 응원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52 Cafe 1호점은 테이블 2개짜리 복층이 있었고, 평소에는 고객들이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윤재는 친구들과 함께 한국 팀을 응원했다.
혜진과 선희. 창진과 장식은 물론이고 52 Cafe 관련자들도 여럿 함께 했다.
한국 팀의 승리가 확실해 지자, 카페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화장실을 찾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결국 1층 화장실로 그 많은 인원을 커버할 수 없게 되자, 출입금지 푯말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2층 화장실로 몰려들었다.
2층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던 사람 중 누군가가, 혜진과 선희를 발견했다.
“혹시 백제의 달밤 조혜진, 김선희 배우 아닌가요?”
혜진과 선희가 당황하자 그 손님은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순식간에 카페에 미녀 배우 2명이 함께 응원전을 펼친다는 소문이 퍼져버렸다.
축구가 끝나자 사람들은 복층 계단에 줄을 서, 혜진과 선희의 사인을 받으려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재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도윤형! 카페에 텀블러 재고 몇 개나 남아 있어요?”
“글쎄다.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대략 50개 정도 있을 거야.”
“잘 됐네요. 진영누나! 창고에서 텀블러 좀 빼 주세요.”
“응? 알았다. 전부 내오면 되는 거지?”
“네.”
윤재는 사람들의 틈으로 삐져나가, 1층 카운터로 갔다 .
그리고 두 손을 입 근처에 모은 뒤,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진도에서 방울새를 구해준 뒤, 목소리가 부쩍 커진 덕에 윤재의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여러분 비좁은 복층에 계시지 마시고, 여기로 오셔서 줄을 서십시오. 여기 조혜진, 김선희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텀블러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이 기회 놓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공간을 터주자, 혜진과 선희가 카운터로 내려왔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2명의 배우의 사인이 담긴, 텀블러 판매가 이뤄졌다.
월드컵도 이겼겠다, 미녀 영화배우도 봤겠다, 사람들은 다들 들뜬 기분으로 떠들었다.
“조혜진! 정말 예쁘지 않냐? 얼굴이 진짜 조막만 해!”
“김선희도 매력적이잖아. 실물로 보니까 확실히 연예인이라 다르네.”
사람들이 혜진과 선희의 미모에 탄복했다.
이미 대박의 선순환에 접어든 1호점이지만, 윤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페 홍보와 텀블러 판매를 연결시킨 것이다.
“여러분 여기 계시는 조혜진씨가 한때는 이 카페의 주인이었습니다. 주변에 많이 홍보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혜진은 부지런히 텀블러에 사인하면서, 윤재의 상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오빠! 그 순간에 카페 홍보하는 것 좀 보소! 게다가 텀블러까지 끼워 파는 알뜰함이라니!’
평소에도 잘 팔리는 편이었지만, 미녀들의 사인이 담긴 텀블러는 순식간에 동이 나 버렸다.
태화정밀에서 납품한 텀블러에 대한 반응도 아주 좋았다.
“텀블러가 4만원이나 한다고 해서 놀랬는데, 이 마감 좀 봐. 정말 마감이 기가 막히네.”
“그러게 말이야. 괜히 여기에 커피 마시면 커피 맛이 더 좋아질 것만 같다.”
“나도 하나 갖고 싶다. 돈만 있었어도 사는 건데.....”
“야! 이건 그냥 텀블러가 아냐. 조혜진의 사인이 담긴 한정판이라고!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텀블러 판매뿐이 아니었다.
응원전을 끝낸 사람들은, 혜진과 선희에게 기념사진을 찍자고 부탁했다.
텀블러를 산 고객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혜진은 친절하게 사진을 찍어줬다.
그 바람에 밤이 깊도록 카페 문들 닫을 수 없었다.
◈ ◈ ◈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역사상 다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한 월드컵이었다.
히딩크와 함께 4강 신화를 써 내려갔다.
한국뿐만 아니라, O2푸드와 윤재에게도 대박을 안겨준 월드컵이었다.
월드컵 기간 내내 2002년 월드컵의 진정한 승자는 O2푸드라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FIFA메인스폰서가 된 기업들은 500에서 700억의 비용을 지출했다.
하지만 O2 푸드는 공식후원사와 달리, 10분의 1도 되지 않은 금액을 지출했지만 공식후원사를 능가하는 효과를 누렸다.
2002년 월드컵은 전 국민이 붉은 마왕이나 마찬가지였던 만큼, 홍보효과는 금전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윤재 역시 월드컵의 승자 중 한 명.
미리 월드컵 관련주에 투자해 수십억의 차익을 남겼다.
또한 얼마 안 되는 금액이지만, 작년도에 미리 써뒀던 ‘히딩크의 리더십’ 에 대한 책도, 세월을 거슬러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미리 출판해 있었던 덕분에, 독자들과 축구팬들로부터 ‘성지’ 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 대표 팀의 영광을 예견한 예언서!”
“히딩크의 리더십을 가장 먼저 알아본 선지자!”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런 종류의 극찬이 계속됐고, 미래출판사는 계속해서 인쇄기를 돌려야 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마왕에 대한 끈질긴 후원 주장과, 월드컵의 대성공으로 윤재의 값어치는 상종가를 찍었다.
오대양 시절부터 O2에 이르기까지 평사원으로는 누구도 윤재만큼 신임을 받은 사람은 없을 정도가 됐던 것이다.
반면 2002년 월드컵으로 쪽박을 찬 사람도 있었다.
16강전까지 6,000만원을 날린 황성호는 이미 이성을 상실했다.
6,000만원 잃는 것으로 끝내야 했지만, 한 걸음 더 딛고 만 것이다.
16강전을 서울의 집에서 관람한 황성호.
‘이탈리아는 한국에 대한 편파판정 때문에, 한국이 이긴 거야. 하지만 무적함대 스페인은 절대 못 이겨! 마지막 한 번만 더 스페인에 명운을 건다.’
한국사람이 아니라 이태리 사람 같은 정신상태였다.
아니, 그냥 미친놈이었다.
결국 황성호는 8강전을 앞두고 다시 사채업자를 찾았다.
뒷조사를 통해 황성호가 3선 국회의원 황태준의 아들이란 것을 알고 있는 사채업자.
그들은 이제 쾌재를 부르며 황성호에게 돈을 빌려줬다.
애시당초 1억밖에 안된다던 대출액이 2억으로 불어나 있었다.
‘스페인은 죽어도 못 이긴다. 스페인 전 베팅에 성공하면, 그 동안 잃은 돈을 만회하고도 1억원을 넘게 벌 수 있어!’
이성을 상실하고 무언가에 미치면, 죽으러 가는 길이 꽃길로 보이는 법.
그렇게 4번에 걸쳐 총 3억원에 가까운 돈을, 해외 도박사이트에 베팅을 하는 어리석음을 택하고 말았다.
그동안 윤재는 영업1팀 사무실이나 계단실에서 황성호의 통화를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황성호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략 알게 됐다.
4강전을 앞두고 윤재는 황성호를 불러 위로주를 사줬다.
황성호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었고, 그가 불쌍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황성호의 염장을 지를 수 있었고, 황성호의 부친인 황태준에게 돈벌 수 있는 기회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