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91화 (91/196)

붉은 물결 대한민국

2002년 5월 6일 월요일 O2 F&B 여의도 본사 회의실.

마케팅 부문과 홍보부문의 임원과 팀장들, 그리고 영업지원 부문의 임원과 팀장들이 집결해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준비를 위한 제9차 통합회의가 진행 중이다.

“거리 응원단 준비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네. 상무님! 대형전광판 등 협력업체 크로스체크 완료했습니다. 서울시청과 경찰청과는 대행업체가 조율을 완료한 상태입니다.”

“초청 가수와 공연 팀도 문제없겠죠?”

“네. 모두 완벽히 준비를 마친 상태이며, 한국 팀의 출격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휘장. 응원풍선. Red Monster 응원복은 어떻습니까?”

윤재는 2001년부터 여러 채널을 통해, 2002년 월드컵 스폰서를 제안했다.

FIFA 공식후원사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관계로, 한국 축구팀 서포터즈인 붉은마왕을 후원하자는 게 핵심주장.

회사의 이름인 O2 푸드앤바이오의 B.I부터, 연수원 시절 버스폭행을 구하며 회사를 간접 홍보했던 것 까지.

윤재가 과거에 보여준 놀라운 활약은, 경영진으로 하여금 그의 제안을 무겁게 생각토록 압박했다.

그럼에도 오픈 이노베이션 전까지만 해도, 2002년 월드컵 후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경영진들의 생각.

결정적으로 2002년 1월에 개최된 오픈 이노베이션 행사에서, 윤재는 ‘2002년 월드컵과 스포츠마케팅’ 이라는 제목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믿고 보는 김윤재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윤재의 프레젠테이션 이후 약 1개월간, 격렬한 협의가 있었고 결국오재준은 붉은마왕에 대한 스폰서십 체결을 지시했다.

한일 월드컵 전까지 16강 진출조차 해 본적 없는 우리나라.

2002년 월드컵 유치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문학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이라는 얘기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오대영(5:0) 감독 히딩크는 1월~2월 평가전까지도, 졸전을 거듭했고 회사 관계자들의 우려를 증폭시켰다.

하지만, 3월 핀란드 전 2:0 승리를 시작으로 경기력이 향상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월드컵 시즌이 가까워지면서 월드컵 분위기가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려온 5개월이 지났고, 월드컵 개막을 1개월 앞둔 상황에서 오늘의 통합회의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영업지원팀장 보고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주문한 응원복 10만장 중 60%가 생산을 마쳤고, 다음 주면 100% 생산 및 출고가 가능한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래요. 다들 고생 많습니다. 귀찮은 일이라 생각하지 맙시다. 회장님 관심사항이니까,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철저하게 준비합시다.”

“알겠습니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2002년 한일 월드컵 회의가 끝나고, 세 명의 임원들은 홍보부문장 방에 모여 커피를 마셨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위로 올라갈수록 파벌이나 견제가 심한데, O2그룹도 마찬가지였다.

홍보부문장, 마케팅 부문장은 K대 선후배 사이였고, 영업지원부문장은 Y대 출신으로 홍보부문장과는 앙숙이었다.

“허 참. 신입사원 한명 때문에 회사가 이 난리를 치는 게 맞나?”

홍보부문장이 툴툴 거렸다.

윤재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 것.

신입사원 입문연수 때 오재준 회장과의 식사자리. 이후 회사 익명게시판. 심지어 올해 1월 오픈 이노베이션까지.

윤재는 끈질기게 한일 월드컵에 회사가 올인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그래도 회장님 선택입니다. 이 일을 부정적으로 얘기하시면 회장님께 누가 된다는 사실 명심하셔야 합니다.”

영업지원 부문장의 일침에 홍보부문장이 깜짝 놀랐다.

‘저 자식이...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야 뭐야?’

라이벌 관계인 홍보부문장과 영업지원부문장.

둘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그러게 홍보에서 이미지 광고를 잘 했어야죠. 그랬으면 이 고생해가며 붉은마왕을 후원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장동근의 산소 같은 남자는 지금도 오글거리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김윤재 그 친구가 어떻게 했습니까? 버스폭행에서 기사를 구하며 회사 이미지를 단 번에 끌어 올려버렸잖아요. 그러니 회장님이 김윤재를 편애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최상무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마케팅 부문장이 홍보부문장을 지원 사격했다.

“지나치긴 뭐가 지나쳐. 게다가 김윤재 그 친구가 신입사원 전체 1등 먹은 상태에서 제안한 거고 말이야. 또 회장님께서 축구를 얼마나 사랑하시나?”

“상무님! 솔직히 저는 모르겠습니다. 한국 축구. 보나마나 32강에서 탈락할 텐데... 50억을 꼬라박는 게 잘 하는 일인지.”

같은 편인 홍보와 마케팅.

둘이 영업지원부문장을 협공하는 모양새가 됐다.

“마케팅 부문장!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필요 없어요. FIFA 메인 스폰서십 하려면 5백억도 더 들어가는데 50억이면 껌 값이지. 우린 그저 준비 잘 하고 한국 팀이 선전하기만 기원하면 되는 거야.”

“아니죠! 상무님! 5백억을 쓰더라도 메인 스폰서를 해야죠. 한국 팀은 광탈해도 메인 스폰서는 대회기간 내내, TV광고부터 경기장까지 각종 홍보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응원단 후원은 대표 팀 탈락하는 순간 끝이라 구요. 끝!”

“뭐 16강만 가도 50억 가치는 하지 않을까? 소문에 KS텔레콤에서 응원단에 50억 제시했다던데, 같은 금액으로 선수 친 덕에 스폰서십 체결했으니, 우리 영업지원부문이 잘 한 거지. 안 그래?”

서로 공은 챙기고, 과실은 떠안지 않으려는 신경전이 계속됐다.

바야흐로 2002년 5월이었다.

한일 월드컵 개막 나팔이 울릴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          ◈          ◈

2002년 5월20일 월요일 윤재는 점심식사 시간에 짬을 내, 창진이네 지점을 찾았다.

대진증권 광주지점을 찾자마자 윤재는 귀빈 대접을 받으며 지점장실로 직행했다. 이미 윤재는 대진증권 광주지점의 VVIP였다.

윤재보다 예탁금을 많이 맡긴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투자한 금액도 금액이지만 윤재의 지도를 받고 있는 창진이, 돈 많은 부자들을 계속 끌어 들이는 바람에, 지점장은 요즘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살았다.

“아이고! 우리 현인님 오셨습니까? 우리 남대리가 운림동의 현인이라고 매일 칭찬하고 있답니다.”

“하하하. 현인은요. 부족한 저를 항상 챙겨주셔서 지점장님께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이번 월드컵 수혜주도 현인님 말씀이 귀신처럼 맞아 떨어졌습니다. 5월 되니까 관련주식들이 맥을 못 추네요.”

소문에 사서 뉴스에 팔아라.

윤재가 인용한 격언처럼, 월드컵 수혜주 대부분은 4월까지 시세를 분출하더니, 5월부터 거짓말처럼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이번에 남창진 사원이 회사 인트라넷에 보고서를 올렸어요.”

[21세기 초입은 조기철과 함께!] 라는 보고서를 대진증권 게시판에 올린 창진. 윤재의 제안대로 행동한 것이다.

그 보고서를 회사 애널리스트들과 영업지점 딜러들이 인용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경제신문에도 조기철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윤재덕에 창진의 주가는 나날이 치솟았다.

“지점장님. 그런 의미에서 올 여름에는 창진이 포상휴가라도 좀 보내주세요. 지점에 벌어주는 돈이 얼마인데, 작년처럼 휴가도 못 가게 하지는 않으시겠죠?”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하하.”

윤재는 지점장, 창진이와 함께 시내에서 가장 비싼 걸로 유명한 일식집을 찾았다.

식사가 대충 끝나갈 무렵, 지점장이 쇼핑백을 윤재에게 건넸다.

“현인님! 약소하지만 저희 지점 성의라고 생각해서 받아주십시오.”

“이게 뭔가요? 지점장님?”

“아하하. 그냥 작은 기념패 하나 만들었습니다. 매번 도움을 받고 있고, 저희 지점 큰 고객이시니까. 약소한데 양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것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종종 만나서 식사도 하시고, 조언도 구하겠습니다. 창진사원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지점장이 준비한 선물은 ‘운림동 현인 100억 예탁 기념 패’ 였다.

로티칠성이 3배 가까이 오르며 윤재의 잔고는, 어느새 덩치를 더 키운 상태였다.

이제 호남을 넘어 전국구 슈퍼개미 수준으로 성장한 윤재였다.

보통 골프 라운드 가서 이글이나 홀인원, 알바트로스 등을 했을 때 받는 고가의 패에, 위의 ‘100억 예탁 기념’ 문구를 넣은 패였다.

크리스탈 패 하단에는 6Cm크기의 조형물이 있었다.

월가에도 있고 여의도 증권사 건물 앞에 있는, 강세장의 상징 황소를 순금으로 만든 것이었다.

금만 해도 한 냥이 넘는 크기로, 시세로 치면 100만원은 줘야 제작할 수 있는 패였다.

◈          ◈          ◈

5월 세 번째 주말 서울 명동의 끝자락에 위치한 아시아 캐피탈.

20대 후반의 낯익은 젊은이가 아시아 캐피탈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 눈동자를 자꾸 굴리고 있고, 커피 잔을 든 손이 좀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걸로 봐서 많이 불안한 모양이다.

넥타이를 매고 깔끔하게 단장을 했어도,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그의 불안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윤재의 동기이자, 황태준 3선 의원의 아들 황성호였다.

“재직증명서! 신분증!”

“여기 있습니다.”

“얼마 해 주라고?”

반말을 찍찍해대는 사내의 목에 칼자국이 선명했다.

범상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음을 칼자국이 웅변하는 것 같았다.

“많을수록 좋습니다.”

“많이 얼마나? 1억?”

“얼마까지 되나요?”

“명동에서 우리는 듣보잡이지만, 그래도 명동업자야. 우리는 10억도 되고, 100억도 해. 그런데 당신은 얼마 안 돼. 담보도 없고, 조회했더니 금융권 빚도 꽤 되고. 우리가 당신 뭘 믿고 대출을 해주겠나?”

황성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를 깨물었다.

제1당의 3선의원의 아들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자신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1억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 입금될 걸세. 선이자 15% 떼고. 명심해! 2개월 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2개월까지 안 걸릴 겁니다.”

아시아 캐피탈을 나서는 황성호의 뒤통수에 칼자국 난 아저씨의 얘기가 단도처럼 날아와 꽂혔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내 돈 떼어 먹은 사람 없다. 명심해!”

황성호는 캐피탈 계단을 내려왔다. 5월의 햇살이 꽤나 눈부셨다.

“김윤재 그 멍청한 자식!”

월드컵이 다가오자 황성호는 번뜩 윤재가 생각났던 것이었다.

작년 9-11 테러 당시에 2억에 가까운 손실을 봤고, 그 중 1억5천만원이 빚이었다.

그 뒤 다시 끌어 모은 5000만원으로 주식투자에 나섰다.

하지만 그 종자돈도 이젠 2000만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대부분의 못난이들처럼 황성호도 세상을 원망했다.

너무나 무섭고 엄격한 아버지도, 자신에게 투자종목을 권유했던 친구도, 그리고 돈 벌때는 싹싹하게 굴다가 냉정하게 반대매매를 한 증권사 여직원도!

모두 원망의 대상이었다.

언젠가 윤재가 말한 적이 있다.

잡주에 대한 투자를 멈추라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선물옵션이나 경마, 카지노 같은 곳을 찾게 될 거라고.

황성호는 예상보다 빨리 윤재의 예언대로 움직였지만,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그렇게 움직인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한일 월드컵에 회사 홍보를 집중하라고? 미친놈! 이번에는 대진 운마저 안 좋아 32강 탈락이 뻔한데. 월드컵 홍보에 50억을 투자하자고? 미친놈들 투성이야. 투성이!’

윤재를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하자, 조금은 힘이 나는 것 같았다.

‘흐흐흐. 나는 필승전략을 세웠어. 이번 베팅으로 1억만 갚자. 잘하면 빚을 갚고도 조금 더 남길 수 있어. 그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흐흐흐. 모든 투자는 확률로 수렴하게 돼 있어. 확률로 수렴한다고!’

어디서 이런 천재적인 전략이 나왔는지 스스로 기특할 정도였다.

그는 이번에 사설 스포츠 베팅사이트에 베팅할 생각이었다.

해외 스포츠 토토는 엄연히 불법.

하지만 자신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돈만 따면 황태준이 자신을 커버해 줄 것이었다.

그의 전략은 이론상으로는 진짜 필승전략이었다.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32강 폴란드전에 한국 패배에 1000만원을 투자한다.

이기면 대충 2배 이상의 이익을 낼 수 있다. 한국팀 패배 배당은 대략 2배 수준.

베팅에 패하면 원금 1000만원을 날리게 된다.

미국전은 해 볼만 하니 베팅하지 않는다.

32강 마지막 경기 포루투칼 전에는 한국 패배에 2,000만원을 투자한다. 배당을 고려했을 때 이기면 2,000 넘게 따게 되고, 패하면 누적 3천만원을 잃는다.

기적적으로 한국이 16강에 올라간다고 치자.

더 이길 가능성은 낮아진다.

혹시 16강에 올라가면 올인을 해버리면 손실을 복구하고도 남는 다는 계산이 선 것이었다.

‘흐흐흐. 가능성은 0%지만 8강을 가면 그 때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베팅을 하면 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 전략은 말 그대로 필승의 전략이었다.

황성호는 월드컵 토토로 수익을 내면 일단 빚을 최대한 청산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황태준에게 충성을 다할 생각이었다.

다시 황태준의 신임을 얻으면, 막대한 재산이 자기에게 상속된다.

과거의 아픔은 잊어버리고, 미래를 맞이하면 됐다.

아직 자신은 젊고 젊었으니까.

‘윤재 너는 되지도 않는 한국 팀 응원 열심히 해라. 나는 이번 월드컵으로 빚 좀 갚고, 다시 시작할 테니까! 흐흐흐.’

황성호는 2002년 월드컵의 최대 수혜자가 자신일 것이라 확신했다.

초여름의 개꿈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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