삥질로 흥한 자 삥질로 망한다 (2)
공정거래법이 강화되며 2010년 이후에는 속칭 ‘삥’을 날리는 것은 완전 자율화 돼 버렸다. 인터넷 상거래의 발전도 한 몫 했다.
허태식의 욕심에서 비롯된 VC리테일과 영업3팀간의 ‘삥!’ 전쟁은 5월이 다 돼서야 정리됐다.
영업을 무시했던 스탭 출신의 허태식.
막상 영업해 보니 실적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자, 친한 후배를 통해 쉽게 실적을 채우려 했고, 부하직원이 제시한 삥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렇게 시작된 삥 전쟁은 허태식의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삥은 가장 중요한 게 믿을 수 있는 거래처가 있어야 가능하다.
전국에 걸쳐 영업을 영위하므로 삥을 잘못 날리면, 영업사원이나 회사가 오히려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는 저가로 삥을 날리면 거래처에서 항의가 들어오기 십상인데다, 회사로 투서가 날아들기도 했다. 그래서 삥을 날리려면 치밀하게 치고 빠지는 게 상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특수2팀은 호남의 영업3팀을 애시 당초 당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
VC 리테일이 날린 삥 물량보다 더 저가의 물량이 나오는 바람에, 버티지 못한 VC 사장이 회사에 허태식과 송과장을 제보해 버렸다.
허태식 팀장과 특수2팀은 결국 감사를 받게 됐다.
사건이 대략 정리됐을 무렵 영업3팀이 자주 가는 술집에 세 명의 직원이 모여 술을 마셨다.
“차대리! 너도 얘기 들었지?”
“무슨 얘기요?”
“특수2팀장이 특수 감사 받게 됐다던데?”
“정말요?”
사실 안테나 세우고 사는 걸 좋아하는 차명수가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모르는 척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래. 삥질하다 문제 돼서 감사받는다더라. 내가 보기에는 허팀장이 VC리테일과 딜을 했을 거야. 그런데 일이 틀어지니까 VC에서 손실분 보전을 요구하며, 회사에 제보하지 않았을까 싶어.”
“오과장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VC 쪽 물건을 받은 다른 대리점들이 회사에 제보했을 확률이 더 높다고 봐요.”
“윤재 너는 그렇게 생각하니? 어쨌든 둘 다 가능성 있는 얘기지.”
모른 척 하며 조용히 오석진과 윤재의 얘기를 듣고 있던 차명수가 킥킥대며 웃었다.
“와하하. 어쨌든 특수2팀 꼴 보기 싫었는데 잘 됐죠. 감히 영업다운 영업도 안 해본 것들이 누구를 건드려?”
2년 만에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차명수 대리.
이제 그는 더 이상 팀의 짐짝도 고문관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열심히 일한 자만이 알 수 있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야! 명수야. 너 솔직히 말해봐! 영광상사인가 하는 곳. 거기 니가 날린 것 맞지? 내 눈은 못 속인다.”
“에이. 과장님! 큰일 날 소리 하시네. 제가 뭘 날려요.”
차명수가 펄쩍 뛰었다.
“야. 선수끼리 왜 이래? 영광상사 거기 니가 작년에 유치한 영광식품 별도 사업자 아냐? 니가 특수2팀 물 먹이려고 거기 통해 날린 거 맞잖아.”
“에이. 과장님! 조용히 좀 해요. 윤재도 있는데...”
“윤재는 우리 식구 아니냐? 어쨌든 니가 한 것 맞다는 얘기네.”
차명수가 괜히 식당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뒤 아주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럼. 산동식품인가 거기 과장님이 하신 거잖아요. 김동현 사장 형수가 한다는 사업자에 종목 추가해서 하신 거 맞잖아요. 저도 다 압니다. 감사팀 연락받고 산동식품 쪽에서, 작년 설날 물량 재고처리 한 것이라고 했다면서요. 그거 과장님이 시킨 거 아네요?”
“어라? 애 보소! 이게 생사람 잡네. 너야 말로 영광상사 니가 시킨 거잖아. 지난 설 물량이고 자료도 없이 넘겼다고 했다던데 딱 니 솜씨 아니냐?”
“와하하하. 다 우리 팀이랑 장팀장님 잘 되자고 하신 거니까, 서로 모른 척 하게요.”
“너나 혹시라도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참나! 선수끼리 왜 이러셔?”
차명수는 우쭐거렸고, 오석진도 씨익 하고 웃고 있었다.
‘이 사람들 봐라?’
윤재는 차명수와 오석진의 얘기를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처음에 산동식품과 영광상사 얘기가 나왔을 때, 오과장과 차명수 대리가 저지른 일이 아닌가 생각하긴 했었는데, 그 의구심을 셀프로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손자병법에 보면 상산에 사는 뱀 얘기가 나오는데, 딱 우리 팀 얘기였구나!’
티격 대는 오석진 과장과 차명수 대리를 보며 윤재는 소주잔을 털어 넣었다. 소주가 달게 느껴졌다.
상산에 사는 솔연이라는 뱀은 머리를 공격하면 꼬리가 덤비고, 꼬리를 공격하면 머리가 덤벼든다고 했다. 그리고 허리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달려든다고 했다.
윤재의 생각에 장동석과 영업3팀은 마치 상산의 솔연과 같았다.
서로를 위해 행동하지만, 그걸로 티내지 않고 대가도 바라지 않는 마음.
장동석부터 팀원들까지 그런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야! 윤재야! 너는 의리 없이 혼자 마시냐? 우리 특수2팀 삥도 잡아냈는데 거국적으로 한잔 하자.”
차명수 대리가 신이 난 얼굴로 소주를 따라줬다.
윤재가 차대리의 술잔을 받고 있는데, 오석진 과장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 일출이라는 곳은 어딘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러게요. 감사 다녀갔는데 뭐 잡히는 것도 없었다는 것 같던데!”
“거기만 그런 건 아니지. 영광상사랑 산동식품도 감사에 걸린 건 없으니까! 그런데 일출이란 곳은 도무지 감이 안 잡혀. 미스테리야.”
오석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장님! 대리님! 그런 건 따져서 뭐 합니까? 허태식 팀장 골로 보냈으면 된 거죠. 애 쓰시는 관우와 장비 생각에, 하느님이 조자룡이라도 보내줬나 보죠!”
“관우? 장비? 그건 무슨 소리냐?”
“장팀장님 돕겠다고 애쓰시는 오과장님이 관우. 차대리님이 장비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일출이라는 조자룡을 보내 돕게 했다 뭐 그런 얘기죠.”
“와하하. 듣고 보니 기분은 좋네. 자 그런 의미에서 쭈욱 한 잔 합시다. 건배!”
“건배!”
3명은 소주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3명 모두 술이 달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 ◈ ◈
일주일 뒤! 여의도 O2 푸드 본사 32층!
특수영업2팀에 대한 감사가 사실상 막바지에 다른 상황.
“뭐야? 지금 이걸 보고서라고 가져 왔어?”
“네?”
“이걸 지금 징계 보고서라고 가지고 왔냐고?”
“?”
특수영업부문 지원팀장은 상무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 쩔쩔매며 눈치만 보고 있었다.
“뭐? 허태식이를 시말서 받고 끝내자고?”
“죄. 죄송합니다.”
특수부문 지원팀장은 그때 서야 담당 상무의 의중을 파악했다. 허태식을 중징계 하라는 의미였다.
“당신! 지원팀장 1~2년 했어. 감사 보고서 아직 안 나왔지만 감사 결과 보나 마나 야. 허태식 그 인간 때문에 나까지 시말서 쓰게 생겼는데, 중징계로 가야지. 허태식 그 인간 ‘감봉’ 의견 달아서 보고서 다시 만들어.”
“알겠습니다. 상무님!”
“가뜩이나 본부장님 민감해 계시는데, 회사 수익 깍아서 지 후배 챙겨준 놈을 뭐가 이쁘다고 시말서야? 시말서가!”
“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태식이 그 인간, 오진탁 전무 라인만 아녔어도 더한 징계 받고도 남을 사안이야. 팀장 딱지 뗄 뻔 했다고. 알아?”
“죄송합니다. 상무님.”
지원팀장은 어느 조직, 어느 회사나 불쌍한 자리.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저 죄송하단 말만 반복해야 하는 자리가 지원팀장 자리인지도 모른다.
“허태식 그 미친놈! 내가 지 보고 언제 물건을 팔라고 했어? 매출을 올리라고 했어? 지가 영업에서 클 사람도 아니고 영업 경험이나 하면서 현장 감각 익히라고 보내놨더니, 이게 돌았나? 삥을 날려? 삥을? 병신새끼가 걸리지나 말든가!”
“그러게 말입니다. 허팀장 건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그런 놈이 조지워싱턴 대학은 어떻게 나왔나 몰라. 에잉. 쯧쯧쯧! 됐고, 보고서 다시 써 와! 중징계로!”
“네. 상무님 바로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팀장이 임원실을 나가자 특수부문장은 창밖을 바라봤다.
올림픽 대로에 가로등이 밝혀지고 있었다.
‘오진탁 전무가 미는 허태식이가 치명상을 입었어. 그럼 나는 좋지. 대놓고 지원팀장을 밀 수 있으니까. 흐흐!’
올림픽 대로에도 상행선과 하행선이 있고, 강변북로에도 상행선과 하행선이 있듯, 회사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사안을 두고 희비쌍곡선은 언제나 엇갈리기 마련이었다.
◈ ◈ ◈
윤재는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는 신입사원 동기들과 통화를 하며 지냈다.
오석진, 차명수와 함께 한 회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송이가 전화를 했다. 허태식 팀장 얘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윤재 오빠네는 피해 없었어요? 전국에 특수2팀이 날린 저가물량 때문에 피해 본 팀/지사가 여러 곳이라고 하던데?”
“우리 쪽에도 저가 물량 풀리긴 했는데, 우리는 다행히 큰 피해 없이 넘어갔지.”
“아. 그렇군요. 허태식 팀장님은 어떻게 되실까요? 올해 말 상무보 1순위라는 얘기 있었는데.”
“징계 먹고 고과 강등될 테니까 쉽지 않을 거야. 올해 징계라 내년에도 여파가 있을 거고, 그러다 보면 후배들 치고 올라오고. 오진탁 전무가 맘먹고 밀어주지 않는 이상 힘들지 않을까?”
윤재의 얘기를 들으며 한송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는 영업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가끔 영업 얘기 듣다 보면 살벌할 때가 있어요.”
“하하하. 송이 너 영업 잘하잖아요. 햄 전 완판 시킨 사람이 왜 그래?”
“아이. 왜 그 때 얘긴 하고 그래요. 챙피하게.”
한송이는 당시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험한 연수원 시절을 겪어서 그런지, 이제는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런데 영업은 왜 경쟁사랑 싸워야지? 회사 내부에 그렇게 저가 물량을 풀어서 내부 총질을 하는 거죠?”
“그게 다 KPI 때문이고, 평가 때문이고, 출세욕 때문이지.”
“하긴 회사 생활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어요.”
가만히 사고 치지 않고 있으면, 임원 될 사람이 무리해서 실적을 올리고 싶어 하는 것.
자존심이 됐든 뭐가 됐든, 손쉬운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게 대부분의 사람인지도 모른다.
“이번 사건이 주는 교훈을 나는 이거라 봐.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내 영업이 소위 말하는 밀어내기에 혈안이 돼 있거든.”
“밀어내기요?”
“큰 일 말하는 건 아니고.”
“호호호. 오빠 저질 개그 갑자기 그립네.”
약간 형광등 기질이 있는 한송이는, 잠시 지나서야 의미를 깨닫고 한참을 웃었다.
“회사 창고에서 대리점 창고로 밀어내는 건 악순환만 반복될 뿐이지. 누가 밀어내기 잘하는지를 보는 KPI가 돼서는 안된다고 봐.”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송이 같은 개발부서가 좋은 제품 만들어주면, 우리 영업이 실제 소비자들이 잘 사갈 수 있게 열심히 영업하고. 앞으로는 그렇게 변해가야지.”
“오늘도 오빠 좋은 말씀 잘 들었어요. 잘 주무셔요.”
“그래. 다음 달 ‘O2 하다.’ 팀 모일 때 보자.”
“넹.”
한동안 송이와 영업의 현실과 미래의 계획 등에 대한 얘길 주고받다 전화를 끊었다.
이노베이션 챌린지 샘플 광고를 혜진과 함께 찍은 적이 있다.
송이 역시 회사 인트라넷에 올라온 그 영상을 봤는데, 그날 이후 윤재에 대한 마음을 완벽하게 정리했다.
최근 그녀는 입사동기이자, 오랜 기간 그녀만을 짝사랑해 왔던 동기 백현민과 공개연애를 시작한 상태였다.
‘다음 모임 때는 현민이 형과, 송이를 위한 선물이라도 준비해 가야겠다.’
이제 윤재에게 10~20만원의 돈은 큰 고민 없이 쓸 수 있는 상황이 돼 있었다.
적은 금액으로도 받는 사람의 기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선물들이 있는데, 윤재는 그런 선물로 사람들을 관리했다.
잡을 사람은 확실히 잡고, 내칠 사람은 가차 없이 내치는 것은 윤재의 철칙.
그런 의미에서 개만도 못한 황성호와 맺어지지 않도록 한 일은 다시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이제 소매영업팀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은 대략 끝났다. 내년에는 전국구가 돼 더 많은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
허태식의 무모한 도전을 물리쳤지만, 윤재의 눈은 더 높고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