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
3월27일 수요일 오후 5시.
윤재는 담양군 금성면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멍청한 놈! 아직도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으니.... 내가 이 쓰레기를 만나러 가는데 설레일 줄이야! 너는 오늘 죽었다. 하하하.’
황성호의 장단에 맞춰, 놀아주러 가는 길이었다.
‘개새끼! 내가 한송이와 정명철 사건을 잊었을 것 같아!’
약 일주일전의 일이다.
신입 인턴들과 대게를 먹었던 날 있었던 소동은, 딱히 윤재의 잘못이 없었다.
늦게 나타난 것도 황성호였고, 윤재에게 바가지를 씌우려 했던 것도 항성호였다.
게다가 조 단위의 재산을 자랑한다는 집안 아들놈이, 신발 끈 묶기 신공을 발휘하지 않았던가?
그날 옆 테이블을 들이 받은 황성호가 화난 손님들에게 사과하고, 자기가 먹은 대게와 술값을 계산하고 나왔을 때, 윤재는 후배들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신입사원 연수원 시절부터 쌓여온, 윤재에 대한 피해의식이 정점을 찍고 폭발했다.
‘썅놈의 새끼! 나한테 이런 모욕을 주고, 지는 천사행세하고 있어? 넌 디졌다.’
윤재의 청력이 엄청 발달해 있음을 모르는 황성호는, 그 자리에서 황태준 의원의 부하에게 전화를 했다.
국회의원이지만 부동산 재벌이기도 한 황태준에겐 직원보다는 부하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다.
황성호는 부친의 부동산 관리회사에서 경호를 하고 있는 친구를 광주로 부른 것이다.
“형준씨. 나 손 봐줘야 할 놈 하나 생겼으니까, 손발 잘 맞는 놈 하나 데리고 와! 다음 주 수요일에 거사 치를 테니까 일정 잊지 말고! 잘 끝나면 내가 풀코스로 한번 쏘지!”
“도련님! 무슨 일인데 둘씩이나 필요한가요?”
“자기를 믿지 못해서가 아냐. 혹시 모르니까. 꼭 2명이서 와야 해. 그 녀석이 조금 하는 놈이거든.”
윤재는 인턴 2명과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황성호의 계획을 전부 다 알 수 있었다.
딱 황성호 수준의 저질 플랜이었다.
다시 3월27일 현재 담양군 금성면.
담양댐으로 가는 길은 원래 차량 통행이 많지 않은 곳.
게다가 해마저 서산 너머로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황성호는 히죽거렸다.
모은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 생각하니 기쁨이 2배였던 것이다.
“형준씨! 잘 해라.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 주자고!”
“네. 도련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나름 프로입니다.”
“송장 보는 일만 없으면 돼!”
“으하하. 알겠습니다. 도련님!”
2시간 전.
황성호는 외근을 나가 있던 담양군 금성면에서 윤재에게 전화를 했다.
“윤재야! 내 차가 갑자기 방전 됐나 봐. 그런데 긴급출동 서비스 차량이 오다가 사고가 났단다. 시골이라 출동이 되게 늦네. 동기 좋다는 게 뭐냐? 네가 와서 내 차 점핑 좀 해 주면 안 되냐? 그래~ 밟으면 30분이면 올 거 아냐?”
황성호의 어설픈 연기를 들으며 윤재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은 황성호를 보며,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완벽한 찬스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결국은 황성호가 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덤벼든 것이다.
머리가 멍청하면 몸이 고생하는 법.
그동안 숱하게 윤재에게 당했으면서도, 황성호는 윤재의 잠재력을 눈치 채지 못했다.
◈ ◈ ◈
오후 5시가 넘은 시간.
순창 가는 국도에서 담양댐으로 빠지는 구간은 가뜩이나 차량통행이 뜸한 곳.
‘성호야! 네가 아니라 나에게 딱 좋은 곳이다. 마음껏 활개를 쳐도 걸릴 것 하나 없네?’
윤재가 현장에 도착했더니 황성호의 멀쩡한 소나타가 퍼져(?)있었다.
황성호가 어색한 연기를 시작했다.
“윤재야! 고맙다. 역시 동기밖에 없구나. 시골이라 그런지 보험사도 안 오고, 차도 다니지 않고. 하마터면 회사까지 차 버리고 걸어갈 뻔 했지 뭐야. 음하하.”
그런 황성호를 보며 윤재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칠칠치 못하게 배터리가 나가냐? 인적 없는 곳에 주차하고 잠이라도 잤던 거야?”
이 정도면 누가 봐도 다정한 동기들의 대화였다.
“성호야! 보닛 좀 열어 봐. 점핑해 줄게.”
윤재는 갓길에 차를 세운 뒤, 자신의 차 보닛을 열기 위해 이동했다. 황성호나 윤재나 어차피 연기를 하고 있는 상황.
“성호야! 출동비는 안 받을게. 우린 동기 아니냐? 하하하.”
“그. 그래? 고맙다.”
황성호와 말도 안 되는 개드립을 주고받는데, 티뷰론 한 대가 급히 다가오더니 급정거를 했고, 윤재의 소나타를 살짝 들이 받았다.
누가 봐도 사고 날 자리가 아니었다.
황태준의 경호원이 신경질을 부리며, 티뷰론에서 내렸다.
각본대로 그 남자는 다짜고짜 화부터 내기 시작했다.
“뭡니까? 예? 사고가 났으면 차를 갓길로 빼야지, 길 한복판에 그대로 있으면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친구 녀석이 배터리가 나갔다고 해서요. 그런데 제 차를 뒤에서 받은 건 그쪽 같으신데?”
“뭐? 그쪽.... 이 새끼가 어따 대고. 사고를 내서 남의 차에 기스 나게 했으면 싹싹 빌 생각을 해야지? 이 새끼가 완전 시비네?”
어차피 시비를 걸기 위해 저런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닌 만큼, 뜸 들일 필요 없었다. 해지기 전에 해치우는 게 여러모로 좋았다.
“왜? 고작 티뷰론에 기스 나서, 화라도 났어? 뒤에서 차량을 받았으면 당신이 100% 과실이야. 그것도 모르고 운전 하냐? 시비 걸자고 작정한 게 누군데?”
황성호의 똘마니이자 황태준의 경호원 배형준은 순간 놀랐다.
딱 봐도 힘깨나 생긴 자신을 보고도 쫄지 않는, 윤재의 배짱이 보통을 넘은 것으로 보였던 것.
“적당히 돈 좀 받고 끝내려 했더니, 너는 좀 맞아야겠다.”
배형준의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조수석에 있던 녀석도 차에서 내려 윤재를 향했다.
배형준이 윤재의 멱살을 잡고 귀싸대기를 거칠게 때리기 시작했다.
“짝!짝!짝!”
‘김윤재 저새끼 별것도 아니구만. 고수 앞에 서니까 완전 호구네. 음하하하.’
배형준에게 싸대기를 맞는 윤재를 보며, 황성호가 쾌재를 부르나 싶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윤재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다섯 대 맞았다. 이러면 쌍방이 되는 것 알고 있지?”
배형준이 태권도와 주짓수 등의 무예로 단련했다면, 윤재도 특공무술과 크라브마가 등을 입에 단내가 나도록 훈련한 사람.
게다가 회귀와 함께 초인적 스피드를 갖췄으니, 배형준 같은 놈 2명으로는 윤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멱살을 내리치나 싶었는데, 허공으로 솟구친 윤재가 무릎으로 배형준의 턱을 가격해 버렸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배형준이 허무하게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이런 개새끼가.....”
다른 놈의 2연속 발차기를 흘려보내고, 3번째 발차기를 막아낸 윤재의 짧고 굵은 펀치가 정확하게 놈의 인중을 찍었다.
“어이쿠!”
순간 휘청한 녀석이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윤재의 킥이 놈의 관자놀이에 작렬했다.
◈ ◈ ◈
배형준과 그 동료가 윤재에게 하얀 수건을 던지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15분 남짓.
그래도 나름 싸움꾼들이라, 2명은 쓰러진 뒤에도 계속 일어나 악착같이 덤볐다.
하지만 배형준이 처음에 때린 싸대기 5대가 전부였다.
2명의 따까리는 결국은 뒈지게 처 맞고, 실신 직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팝콘각인줄 알고 구경하던 황성호는, 윤재의 몸놀림에 꼼작 못하고 얼어붙어 버렸다.
‘씨... 씨발. 저새끼 뭐야.... 오줌이 나올 것만 같다.’
따까리 2놈이 결국 하얀 타월을 던지자, 윤재는 비로소 황성호에게 눈길을 보냈다.
“네 놈 짓인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딱 대기하고 있어라. 도망이라도 가려고 면 너부터 죽일 테니까.”
윤재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배형준에게 다가갔다.
자켓 안주머니에서 꺼낸 보이스 레코더가 윤재의 손에 들려있었다.
윤재가 배형준의 턱을 잡아 올렸다.
놈의 눈빛에 공포와 체념이 스쳐지나갔다.
“어차피 불게 돼 있어. 좋은 말로 할 때 불어라. 괜히 피곤하게 하면, 너희 잘난 도련님부터 다시 묵사발을 내 버릴 테니까.”
배형준이 눈이 황성호를 향했다.
그때서야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파악한 황성호.
도망치기 위해 자신의 소나타에 올라타려 했다.
“빠각!”
황성호 차의 트렁크를 밟고 날아오른 윤재의 발차기가 황성호의 턱에 정확히 꽂혔고, 황성호는 그대로 실신해 버렸다.
윤재는 다시 배형준에게 다가갔다.
방금 전보다 훨씬 큰 공포가 그의 눈빛에 어른 거렸다.
배형준에게서 사건일체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는 황성호의 실토를 받을 차례였다.
◈ ◈ ◈
“짝! 짝!”
소리가 날 때마다 황성호의 얼굴이 왼쪽 오른쪽으로 휘청거렸다.
“이미 니 꼬붕들이 다 실토했어. 폭행을 사주한 아들놈을 둔 거대정당 대표라? 이 음성파일이 방송사에 나오면 어떻게 될지 그림이 그려지지? 니 아버지 올해 당 대표 선거 가능하겠어?”
황성호는 비로소 자신이 윤재의 덫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윤재야! 내가 잘못했다. 한번만 용서해주라. 다시는 너한테 까불지 않으마.”
무릎을 꿇고 있던 황성호가 양손을 싹싹 빌며 윤재에게 애원했다.
“일어나!”
“용서해주는 거야?”
“짝! 짝!”
다시 한 번 황성호의 얼굴이 허공에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작년에 청평에서 다리에 톱질해서, 정명철이 습지로 밀어버린 것도 니 작품 맞지?”
“그.... 그게.....”
윤재는 다시 황성호의 면상을 갈겼다. 볼이 안쪽에서 터졌는지, 황성호의 얼굴을 따라 왼쪽 오른쪽으로 피가 튀었다.
“한번만 더 즉시 답하지 않으면, 그땐 싸대기로 멈추지 않을 거다.”
황성호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모든 것을 실토할 준비가 된 모양이었다.
작년 연수원에서 있었던 일과, 오늘 윤재에 대한 폭행 교사까지 모두 녹음한 윤재.
황성호와 꼬붕들에게 마지막으로 일갈했다.
“황성호! 너는 나한테 안 돼. 다시는 까불지 마라. 너 하나 뭉개지 못해서 여태껏 봐준 게 아냐. 오늘 같은 완벽한 찬스를 기다린 거지.”
“!”
황성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윤재의 얼굴이 너무나 무표정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은 것.
자신의 말처럼 윤재에게 황성호는 한주먹 꺼리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자가 임계점까지 기다려 임팔라를 사냥하고, 산포수가 인고의 시간을 지내고 범을 잡듯, 윤재는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그 결과 자신의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황성호와 황태준의 목을 틀어쥘 수 있는 찬스를 잡았던 것이다.
“앞으로 단 한번이라도 까불면, 오늘 녹취한 영상과 음성 모두 공중파에서 보게 될 거다.”
“영상?”
보이스 레코더만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영상도 갖고 있단 말인가? 황성호는 더 절망했다.
“내일 네 이메일로 영상 보내줄 테니, 잘 감상해라!”
“....”
“니 꼬붕이 내 차 들이박은 건 봐주마. 깽값하고 퉁 친 것으로 해 주마.”
윤재는 현장을 정리하고, 금성면을 떠났다.
◈ ◈ ◈
광주로 돌아가는 윤재의 차 안에 남창진이 타 있었다.
오늘 담양으로 오기 전, 퇴근한 창진을 몰래 태우고 왔던 것이다.
남창진의 임무는 윤재가 건네준 비디오카메라로 영상을 촬영하는 것.
윤재가 현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창진은 뒷좌석에 숨어서 모든 상황을 촬영했다.
“형님! 저 자식이 그 찐따새끼에요?”
“응.”
“근데, 형이 이렇게 싸움을 잘할지 몰랐어. 완전 천사 같은 사람인지 알았는데, 완전 날아다니네. 형 진짜 깜작 놀랐다.”
“날개 달린 천사 맞아! 그러니 날아다니지.”
윤재는 그동안 황성호와 얽혔던 일들에 대해 얘기를 들려줬다.
“완전 개네. 개! 내가 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흥분 하지 마. 황성호는 지 아버지 유산 때문에 황태준에게는 고양이 앞에 쥐야. 약점 잡았으니 다시는 내게 까불지 못할 거다.”
이날의 사건은 99% 윤재의 계획대로 돌아갔다.
딱 하나가 윤재의 계획과 달랐는데, 그것은 황성호가 회사를 계속 다녔다는 것이다.
깨박살이 나도록 처 맞고, 개망신 당했으면 쪽팔려서 회사를 관둘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성호는 이후로도 회사를 악착같이 다녔다.
서울로 올라간 경호원들은 이날의 사건에 대해 황태준에 보고를 해야만 했다. 황성호가 아니라 주군의 신상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인지라,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최근 일련의 사건사고로 황태준의 신뢰를 잃은 황성호.
이번 담양 사건이 터지며 완벽하게 황태준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게다가 매달 80만원의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황성호는,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다녀야 했던 것이다.
참으로 배알도 없는 자식이었고, 참으로 모진 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