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라고 같은 선배가 아냐!
“에밀리 잘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 올리버! 에밀리가 스스로 선택한 길이야. 그녀는 잘 해낼 거다. 내가 종종 내려가 Care할 테니까 걱정 마.”
3월18일.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윤재와 올리버, 주세페 3명의 남자만이 보였다.
“에밀리 걱정 말고, 회사와 집으로 돌아가! 너희 아버지도 이젠 완전 할아버지다. 나는 잘 해드리고 싶어도,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모두 이 세상 분이 아니셔.”
올리버는 윤재의 목이 잠겨 있음을 느꼈다.
4박 5일 내내 올리버를 괴롭히던 질문들.
조실부모한 윤재.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에밀리.
의사란 직업을 때려치우고 가업을 잇고 있는 주세페.
반면 30살이 넘도록 자신은 이뤄 놓은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잘난 자식이든 못난 자식이든 포옹으로 받아줄 곳이 집이 아닐까?”
“그래...... 이번 한국행에서 느낀 점이 많다.”
자신이 윤재보다 나이가 2살이 많았지만, 마치 윤재가 자신보다 20살은 많은 어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네가 미켈레 페레레를 능가하는 경영자가 될 거라 믿는다. 파이팅!”
올리버와는 얘기가 끝났다. 이젠 주세페와 이별해야 했다.
전날 진도에 들렸다가 서울로 올라와, IM팀장과 미팅을 했었다.
큰 방향에서 주세페 기업의 발사믹과 와인을 회사가 수입하는 것으로 진행될 예정이었고, 주세페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4박5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윤재의 가이드를 받은 주세페는 한국행에 만족했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일 뿐이라고 은근히 무시하고 왔다가, 나름 느끼는 게 많았던 것.
“윤재! 한국을 조금이나마 알게 돼 좋았고, 너를 알게 돼 너무 좋았다. 우리 사이가 좀 더 오래 이어지길 희망한다!”
“고마워요. 주세페! 꼭 비즈니스 관계가 아니라도 다시 뵙게 되길 희망합니다.”
짧지만 길었던 일정을 마치고, 2명의 이탈리안은 공항 검색대로 모습을 감췄다.
올리버의 또 다른 일행 에밀리 캠벨.
그녀는 진도에 남기로 했다.
모두 윤재가 준비했던 대로 이뤄진 것이다.
작년 하반기에 장동석 팀장과 ‘검은 쌀 햅반’ 출시를 위해 진도를 자주 찾았던 윤재.
신판석 아재를 통해, 진도가 낳은 명창 소공례 할머니를 뵙게 됐고 그녀와 제자들이 부르는 육자배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소공례 할머니의 육자배기는 신판석 아재와 친구들의 육자배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나더 레벨의 소리였다.
한 마디로 소름과 전율이 돋는 소리!
윤재는 소공례 할머니의 육자배기를 듣던 당시 에밀리가 떠올랐던 것이다.
포텐셜은 충분한데 가수 오디션에 자꾸 낙방한다던 에밀리.
윤재는 에밀리의 허스키한 보이스에 조금만 더 Scar가 더해지면, 엄청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리고 소공례 할머니의 영상을 촬영해 에밀리에게 메일로 전송했던 것이다.
에밀리 역시 무심한 듯 부르면서도 꽉 찬 소리를 내는 소공례 할머니의 노래에 반했고, 윤재의 한국행 권유에 흔쾌히 올리버와 비행기를 탔던 것이다.
한국행 4일차 진도를 함께 찾은 에밀리 일행과 윤재.
윤재는 신판석 아재와 소공례 할머니께 에밀리를 제자로 받아줄 것을 부탁드렸고, 소공례 할머니는 윤재의 제안을 수락했다.
최소 월 2회는 진도를 찾으며, 소공례 여사와 신판석 어른과 사전 조율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공항을 빠져나와 다시 광주로 방향을 잡은 윤재.
에밀리와 소공례 할머니의 만남을 회상했다.
한곡 뽑아보라는 주문에 에밀리는 크랜베리스의 ‘Ode to my Family’를 불렀다.
윤재는 그녀의 노래에 감동을 받았고, 그 사이 실력이 더 늘었다 생각했지만 소공례 할머니의 얘기는 달랐다.
“기교를 부르지 말거라. 네 목소리가 악기인데 지나친 기교는 과잉이니라.”
윤재의 통역을 전해들은 에밀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네들은 어찌 들었는가?”
소공례 여사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제자라고 했지만, 그녀들도 대부분 40줄을 넘은 사람들이었다.
“소리가 아주 좋구만요.”
“들었느냐? 타고난 소리가 좋아! 이미 명창이거늘, 기교를 부릴 필요가 없어.”
윤재의 통역을 들은 에밀리가 말했다.
“선생님! 실례이지만 선생님의 노래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제자들과 눈을 맞춘 소공례 여사가 육자배기를 뽑았다.
옆에 있던 북을 가져다 치면서 소여사님이 목소리를 토해냈다.
“둥! 탁! 저어 거언너 갈미봉에 비가 묻어.......”
동영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공례 할머니의 소리를 들은 에밀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으시고도 어찌 저런 소리가 나온단 말인가? 마치 소리 대포가 심장을 때리는 것 같다.’
90이 넘은 가녀린 몸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에밀리는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공례 할머니가 나지막하게 얘기했다.
“먹는 것도 잠자리도 불편하기 짝이 없을 텐데, 그래도 원한다면 나와 함께 하자꾸나!”
“네. 선생님!”
에밀리는 얼어붙은 채 귀신에 홀린 것처럼 간신히 대답했었다.
그렇게 에밀리는 소공례 명창의 첫 외국인 제자가 된 것이다.
소공례 할머니 제자중에 기본적인 영어를 하는 아줌마가 있어서, 소통에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회사는 주세페와 거래하게 될 것이고, 올리버는 페레레 그룹 3기를 이끌 훌륭한 CEO가 된다. 에밀리도 세계를 주름 잡는 여가수가 될 거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내 해외사업 파트너가 될 것이다.’
소나타의 악셀을 밟으며 하늘을 보니, 서쪽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 하나 점점 점이 돼 사라지고 있었다.
◈ ◈ ◈
3월 20일 수요일.
인턴사원과 매월 1회 진행하는 멘토와 멘티의 만남.
회사는 멘토링을 위해 월 5만원을 법인카드로 사용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호남본부 신입 인턴인 홍길수와 나용조는 버스를 타고, 상무지구에 있는 대게나라로 이동 중이었다.
“길수씨! 미안한데..... 내가 거래처 상담하다 보니 얘기가 길어져서, 태우러 가질 못하겠어. 혹시 황성호 선배가 픽업 가능하면 그 차로 오고, 안되면 대중교통으로 와야 할 것 같은데?”
윤재는 진짜 일 하느라 2명의 인턴을 태우고 약속장소로 갈 수 없었고, 황성호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식당으로 바로 온다는 소식이었다.
주식 투자 실패. 양광수의 퇴진 과정에서 감사까지 받은 황성호는 요즘 방황중이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있는 홍길수와 나용조는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용조 너는 지난달에 황선배님이 뭐 사주셨니?”
앞서 얘기한 것처럼 멘토링 비용으로 지원되는 금액은 월 5만원이다.
“응? 그냥 그렇지 뭐... 너는 윤재형이 뭐 사 주셨냐?”
“나는 2월에 남해수산이란 곳 가서 회 먹었지. 살면서 회는 처음 먹어 봤는데, 진짜 맛있더라! 윤재 형님이 술도 사주시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 주시고....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 여동생이라도 있다면 소개시켜 주고 싶었으니까!”
홍길수 인턴은 윤재 선배 얘기만 나오면 항상 싱글벌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졸라 부럽네. 나는 아무래도 멘토를 잘못 만난 것 같아. 황성호 선배는 사람이 아니야.”
회사 사람이라고는 자기 둘 밖에 없었지만, 나용조 인턴은 버스 안을 두리번거렸다. 본격적으로 황성호 뒷담화를 할 기세였다.
“회사에서 5만원 지원해주는 것 길수 너도 알지? 윤재 형님이 회 사줬다는 얘기는 자기 돈으로 사줬다는 얘기야.”
“진짜? 나는 회사 지원금이 5만원인지 몰랐어. 1월에는 장어구이. 2월에는 회를 사주셨거든. 당연히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줄 알았지.”
“아냐. 내가 인사지원팀에 직접 확인한 거야. 5만원이 맞아.”
나용조가 갑자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황성호 그 새끼는, 나한테 5만원도 다 안 쓰더라. 2월에는 편의점 파라솔에서 새우깡 안주에 맥주를 사주는 거야. 그러면서 지 피우는 담배도 포함해서 법카로 계산하는 거 있지! 뭐 그런 인간이 다 있냐?”
“완전 쓰레기네.”
걸레는 빨아도 걸레이고,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되지 않는 법이다.
황성호는 죽었다 깨어나도 사람 되기는 그른 놈이었다.
“오늘도 윤재형님하고 합동으로 멘토링 하자고 황성호가 먼저 얘기했대. 보나마나 윤재형님한테 빌붙고, 5만원은 나 멘토링 하는 척 하면서 지 배 채우는데 쓰겠지. 하여튼 개새끼라니까!”
홍길수와 나용조는 버스에서 내릴 때 까지, 쓰레기 황성호에 대한 험담을 이어갔다. 들으면 들을수록 괴담 투성이었다.
◈ ◈ ◈
윤재가 인턴 2명과 함께 대게나라 식당에 앉아 있었다.
“길수씨. 용조씨 미안! 내가 태우고 왔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형님! 일 하시느라 그런 건데. 괘념치 마십시오.”
“그런데 황성호 선배는 연락 없었어요? 왜 안 오지?”
“글쎄요.....”
“내가 따로 전화해 볼 테니, 일단 주문부터 합시다.”
윤재는 대게를 5인분 주문하면서 술을 함께 시켰다.
신입 인턴 2명이 각 2인분, 자신이 1인분이었고 황성호는 도착하면 추가로 시켜줄 생각이었다.
“형님! 진짜 저희 2인분씩 먹어도 돼요? 1인분에 8만원인데....”
대게만 5인분이면 40만원. 술 먹고 황성호까지 오면 50만원은 훌쩍 넘을 금액.
당시 O2푸드 신입사원의 월급이 200만원이 안됐으니, 윤재의 재력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대게를 먹으며, 소맥을 한잔씩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황성호가 거드름을 피우며 식당으로 들어왔다. 약속시간 보다 20분은 늦은 시각이었다.
늦은 이유도 어이없는 것이다.
조용필이 항상 마지막에 나타나야 한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사는 인간이 황성호였다.
“성호야. 신입들이 대게 사줘서 고맙다고, 잘 먹겠다고 한다.”
“뭐라고? 내가 대게를 왜 사?”
“왜 사긴.... 너 투자의 귀재잖아?”
소맥을 마시던 황성호가 콜록거리며 술을 쏟았다.
작년 9-11테러 즈음에, 재벌3세 작전주에 투자했다가 반대매매를 당하는 아픔을 겪었던 황성호.
뭐든 시작이 중요한 법.
우량주 장기투자로 시작한 사람은 대체로 그렇게 살아가고, 잡주와 작전주로 주식을 시작하면 또 평생 그렇게 사는 법이다.
아버지 황태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까먹은 1억을 복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신용카드 소액대출과 2금융권 신용대출. 회사 지방거주자 대출 등을 총 동원해 6,000만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다시 잡주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황성호의 새 투자는 상한가 매도도 몇 번 해 봤지만, 손해 보는 경우도 못지않았다.
6,000만원 투자가 3개월 지난 현재 5,500만원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전년도에 날려먹은 것 까지 이자만 대략 80만원 넘는 돈이 빠져나가고 있어서, 바쁜 황성호의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했다.
인턴 2명이 양해를 구하고 담배 피우러 간 사이, 윤재는 황성호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했다.
황성호가 청개구리 짓을 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충고였다.
“성호야! 기분 나쁘겠지만, 작전주 이런 것 투자해서 돈 벌었다는 사람 못 봤다. 너야 뭐 집안이 빵빵하니까, 걱정 없는지 몰라도 나는 주변에서 작전주 하다 망한 사람 많이 봤어.”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잡주 하다가 망하면, 선물 옵션 손대고.... 그러다 망하면 경마장이나 사설 카지노 가더라고. 니가 걱정돼서 하는 얘기야.”
“이야! 우리 윤재. 응? 아주 워렌 버핀 나셨어? 조지 소로스 나셨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
황성호는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인턴들이 돌아오자마자, 나 때는 말이야 신공을 시전하며 짜증을 부렸다.
“나 때는 말이야. 응? 신입사원들이 선배님들 선물도 사다주고, 노래방도 모시고 가고 응? 다 그랬어!”
“....”
“하여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당신들 앞날도 갑갑하구만.”
하는 행동마다 보기 싫은 짓만 골라하던 황성호.
멘토가 아니라 그냥 망나니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인턴들이 보기에 윤재가 알곡이라면, 황성호는 영양가 없는 쭉정이에 불과했다.
하는 얘기도 쓸 만한 것이라고는 한 마디도 없는 게 황성호의 구라였다.
2시간 정도 진행된 멘토링 겸 식사가 끝나갈 무렵.
갑자기 황성호가 미적거리며 신발 끈을 풀었다 묶었다를 반복했다.
‘어휴... 저 진상새끼!’
윤재는 카운터로 걸어가며, 2명의 인턴들의 어깨를 감쌌다.
“먼저 나가들 있어요. 내가 계산하고 갈 테니까!”
“예. 형님. 잘 먹었습니다.”
카운터로 다가가자, 여자 사장님이 계산하러 온 윤재를 반갑게 맞아줬다.
“얼마 나왔습니까?”
“56만 4천원 나왔네요. 손님!”
“아, 그래요. 469,000원은 이 카드로 계산해 주시고, 나머지는 저기 신발 끈 묶는 사람 보이시죠? 그 친구한테 받으시면 됩니다.”
여자 사장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윤재의 카드를 먼저 계산했다.
그 사이 신발 끈을 묵던 황성호가 움찔했다.
윤재와 여사장의 대화와, 신용카드 체크기가 전표를 뽑아대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뭐야? 잠깐만!”
깜짝 놀라 카운터로 달려오던 황성호.
풀어놓은 자신의 신발 끈을 잘못 밟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옆쪽에서 대게를 먹고 있던 사람들의 식탁을 들이 받고 넘어졌다.
황성호의 얼굴로 대게를 볶아 놓은 볶음밥이 후두둑 떨어졌다.
“뭐야? 씨...”
“아저씨! 대체 왜 이러는 거에요?”
황성호가 들이 받은 식탁의 사람들이 온갖 짜증을 부렸다.
모처럼 큰 맘 먹고 비싼 대게를 먹으러 왔다가, 봉변을 당했으니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이~ 재수 없어.”
황성호는 얼굴에 붙은 볶음밥을 걷어내고, 출입문을 향해 달려갔다.
마음은 문밖을 달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사장이, 황성호의 목덜미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손님! 손님 드신 95,000원은 계산하고 가셔야죠?”
“예? 아... 네....”
황성호는 지갑에서 법카와 개인카드를 꺼내, 5만원과 45,000원을 나눠서 결제하는 알뜰함을 보여줬다.
창 밖에서 이 광경을 쭉 지켜보고 있던 인턴사원 홍길수와 나용조.
황성호가 선배인지라 아닌 척 했지만, 팝콘각으로 구경하고 있다.
“야! 저 진상 좀 봐라. 지 아버지가 엄청 부자라던데... 하는 짓은 왜 저렇게 벤댕이 같냐?”
“그러게. 윤재형님 발톱의 때만도 못한 자식이지 뭐야? 재수 없는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