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ther and son (2)
회사를 나온 윤재는 올리버와 주세페를 데리고 에밀리를 찾아갔다.
별다방으로 유명한 스타빈스 매장에, 에밀리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재! 인테리어가 굉장히 고급스러운데, 한국의 카페들은 모두 이렇게 럭셔리한가?”
“아닙니다. 미국사람이 만든 커피 프랜차이즈인데, 이곳이 한국진출 3호점이라고 하는군요.”
“미국 커피? 커피는 우리 이탈리아가 갑인데?”
에밀리는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커피에 대한 특별한 선호가 없었지만, 주세페와 올리버는 달랐다.
이탈리아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뼛속 까지 녹아 있었다.
프랑스를 포함해 서유럽은 유독 스타빈스가 힘을 쓰지 못했는데, 특히 이탈리아가 심했다. 2018년에 밀라노에 이탈리아 스타빈스 매장 1호점이 오픈했다고 하니, 이탈리아의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에스프레소뿐만 아니라 카푸치노, 카페라떼 모두 우리 이탈리아가 최고의 맛을 자랑하지. 어디 스타빈스 커피 맛 좀 볼까?”
한 참 이탈리아 커피에 대한 자랑을 털어 놓던, 주세페가 커피를 마셨다.
“음....”
아메리카노를 볼 때부터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던 주세페.
뭔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커피 맛을 음미했다.
옆에 있는 올리버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커피가 아니야! 빌어먹을 양키놈들!”
주세페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전생에서 내가 스타빈스에 지출한 금액은 얼마나 될까?’
젊은 직원들과 여사원들 때문에, 스타빈스에 자주 갔고 매년 200만원은 스타빈스에 지출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세페? 올리버? 스타빈스 맛이 그렇게 안 좋아?”
“설거지 하는 물맛이라고 해 두지!”
이탈리아인 특유의 농담이었다.
주세페의 농담에 윤재는 빵 터졌다.
세계 최고의 커피 기업에게 독설을 퍼붓는 주세페의 자신감과, 자기나라의 전통을 사랑하는 마음이 맘에 들었던 것이다.
“내일 아침 내 방으로 와. 내가 이탈리아 커피를 맛보게 해주지.”
주세페는 여행을 다닐 때도 모카포트를 준비해 다닌다고 했다.
윤재도 확실히 이탈리아 커피가 맛있다고 느끼긴 했는데, 과연 주세페가 만들어주는 커피 맛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 ◈ ◈
그날 저녁 윤재는 외국인 손님들을 데리고, 북악산 기슭에 위치한 한정식 집을 찾았다.
올리버에게 호언장담했듯이 한국의 음식문화와 발효음식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미국 역사는 200년 남짓이지만, 한국은 로마의 역사와 발원시기가 비슷합니다.”
주세페와 올리버는 5,000년이 넘는다는 한국의 역사에 깊은 호감을 표했다. 무릇 숫자란 신뢰를 줄 때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만큼, 한국도 발효음식으로는 뒤지지 않아요. 간장. 된장. 고추장부터 각종 술까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농사가 주요 산업이었던 관계로, 발효는 서유럽 못지않다고 자부합니다.”
김과 간장. 회와 쌈장. 김치. 가자미 식혜. 과메기. 끝판 왕 홍어삼합까지, 어느 것 하나 발효음식이 아닌 것이 없다.
신선한 재료에 바질, 파슬리 같은 향신료 조금과 소금으로 간을 해 먹는 이태리 음식과,
간장,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 소금, 설탕과 각종 양념이 들어가는 한국 음식은 극명하게 대비될 수밖에 없다.
올리버와 에밀리는 특히 매운 맛에 힘들어 했고, 홍어삼합에는 기겁을 했다.
“윤재씨! 나 입천장이 다 벗겨진 것 같아요.”
“세상에 까망베르 치즈도 이런 맛이 나진 않을 거야.”
홍어삼합을 먹은 올리버 커플의 반응이었다.
반면 나이 52살 먹은 이탈리안! 주세페는 달랐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이탈리아 음식이 세계최고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한국의 오묘한 맛에 조금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는 가자미 식혜와 꼴두기 젓갈 등을 특히 좋아했고, 심지어 홍어삼합도 오묘한 맛이라며 괜찮은 반응을 보였다.
“한국의 코스 요리, 한정식을 먹은 소감이 어떤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을 꼽으라면?”
올리버가 불고기를, 에밀리는 두툼한 회를 최고로 꼽았다.
반면 2명 모두 홍어삼합을 최악으로 평했다.
이어서 주세페가 종합평가를 내렸다.
“솔직히 올리버가 한국의 발효 음식을 맛보러 가자고 할 때만 해도 믿지 않았어. 김과 찰밥... 그리고 가자미 식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물론 다른 음식도 좋았어! 처음이라 아직 그 맛을 제대로 알았다고 하긴 어렵겠지만, 세계가 넓었고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군.”
콧대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던, 주세페에게서 나온 최고의 찬사였다.
왠지 주세페를 포함한 이들과의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이튿날 윤재는 외국인 3명과 함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전날 윤재를 조용히 불러, IM팀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IM&리테일 부문의 주요 고객이 될지 모르는데, 자네가 잘 케어해 주게. 회사에서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 잊지 말고.”
광주, 진도를 방문한 뒤 토요일에 다시 서울로 올라가 IM팀장과 점심을 먹는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금까지 영업3팀의 일을 보지 못하게 된 윤재.
보통 팀장 같으면, 헛짓거리 하지 말고 설탕, 밀가루나 더 팔아라고 성화였겠지만 장동석은 윤재의 출장을 흔쾌히 허락했다.
“올리번가 그 친구가 작년 휴가 보고서에 나온 그 친구 아니냐? 페레레 후계자라는?”
“네. 팀장님!”
“다 회사 잘 되자고 하는 일 아니냐? 걱정 말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손님들 잘 모셔라!”
장동석의 배포는 언제나 윤재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의 존재가 감사할 따름이었다.
광주까지 꼬박 4시간 정도를 운전해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좁은 차에, 4시간을 함께 있는 다는 것은 이 사람들과 그만큼 더 친해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 추운 호수에 뛰어들어, 아가씨를 구하고 새끼 마멋까지 구했다고? 정말이라면 이 친구 보통 사람이 아니군. 사람이 달리 보이는 걸?”
작년 여름 몽블랑에서 윤재가 활약했던 얘기를 들은 주세페의 반응이었다.
“평소 사모하던 여자 친구를 구한 건 알겠는데, 마멋은 대체 왜 구한거야?”
“혜진을 구하러 들어갔더니, 마멋 새끼가 낚시 바늘에 걸려 있었어. 그리고 부모 마멋들이 거품을 내뿜으며, 새끼를 구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윤재는 일찍이 부모님을 잃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고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해줬다.
윤재가 새끼 마멋을 구한 줄만 알고 있던 에밀리와 올리버 역시, 그 사실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윤재에게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네.”
조실부모했다는 윤재의 얘기에 특히, 에밀리가 격하게 반응했는데 그녀도 아버지를 일찍 하늘로 보내드린 것이다.
상페호수의 무용담과 윤재의 부모님 사연에,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가족으로 넘어갔다.
“나도 윤재처럼, 엄마가 나를 임신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그래서 부모님 생각이 났다는 윤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에밀리까지 부모님 얘기를 하자, 갑자기 누가 더 힘든 시절을 보냈나 얘기하는 분위기가 될 것 같았다.
“어제 왜 의사 생활을 때려치우고 모데나의 작은 마을로 낙향했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주세페가 담담하게 자신의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38살 팔팔하던 시절에,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서 의료사고가 났어. 내가 저지를 사고는 아니었지만, 병원장은 끝까지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더군. 당시 내 아버지는 모데나로 내려와 가업을 이을 것을 종용하셨지. 주세페 가문의 전통을 끊을 거냐고 협박하시면서....”
주세페는 얘기를 하는 동안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그도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지라,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만감이 교차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내 아들놈은 어릴 적부터 집안 일 돕는 걸 좋아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네. 게다가 올리버까지 제발로 찾아와 나를 돕고 있으니 나는 복 받은 남자 아닌가 싶다.”
돈에 눈이 먼 병원장 밑에서 일하던 것보다, 가업의 전통을 이어가며 고향에 사는 현재에 더 만족한다는 주세페.
그는 자신의 제자를 자랑스럽게 쳐다봤지만, 올리버는 멍하니 서쪽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다.
올리버에게도 고국에 늙어가고 있는 아버지가 계셨다.
◈ ◈ ◈
광주에 도착해 다시 한 번 남도의 발효음식을 맛봤다.
저녁을 먹고, 52Cafe를 찾았다.
커피 부심이 뼛속까지 스며있는 주세페의 평가도 받아보고 싶었고, 올리버를 낚을 미끼도 준비해 뒀기 때문이었다.
“네 숙모라고 했나? 비너스가 어찌해서 네 숙모님으로 환생했단 말이냐?”
주세페의 뻐꾸기였는데, 나이를 먹든 안 먹는 뻐꾸기를 날리는 것은 이태리 남성들의 특성인 모양이었다.
혜진 어머님은 오후에 퇴근하신 관계로 안계셨는데, 만약 계셨다면 주세페의 호들갑은 따따블이 됐을 것 같았다.
“아이스 큐브 돌체 라떼 말고 에스프레소를 부탁하네. 에스프레소가 기본인데, 기본이 안 되면 다른 것은 보나 마나야.”
서울 스타빈스에서 실망했기 때문에, 그다지 기대하는 눈빛이 아닌 주세페.
그에게 고도윤 사장이 에스프레소 한잔을 추출해줬다.
“음!”
스타빈스 아메리카노를 설거지 물 같다고 하던, 주세페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고도윤 사장. 작은 엄마. 송진영 누나까지 모두 숨죽이며 주세페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델리지오소(맛있다)!”
고도윤 사장이 활짝 웃었고, 나머지 52Cafe 멤버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을 모르는 몇몇 고객들이 윤재와 이방인들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태리 커피 머신 업체이자, 바리스타를 양성하기도 하는 달라 코르테사.
고도윤 사장은 커피에 미쳐, 젊은 날 이태리 달라 코르테사에서 거의 2년간 커피를 배운 적이 있다.
52 Cafe의 에스프레소 머신 역시, 달라 코르테사의 것을 구매할 정도로 이태리 커피 신봉론자이기도 했다.
주세페는 비로소 52Cafe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카페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서툴긴 하지만 제법 이태리 말이 가능한, 고도윤 사장이 주세페를 밀착마크하며 카페를 안내했다.
◈ ◈ ◈
말 많은 주세페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젠 올리버를 위한 선물을 꺼낼 차례였다.
전생에서 올리버는 결국 아버지 미켈레의 사후 페레레그룹의 수장에 오른다.
2015년이 돼서야 후계자로 나섰는데, 경영능력이 탁월하긴 했어도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부친이 너무 걸출한 스타였기에, 아버지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부담감에 시달렸던 올리버.
그를 충동질 시켜, 빠른 경영수업을 받게 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자신과 회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윤재의 판단이었다.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예식장 뷔페 주방에서 일했던 작은 엄마.
가난한 작은 아빠 때문에 고생을 했을 뿐, 작은 엄마의 실력은 어디에 내놔도 부족하지 않았다.
예식장 뷔페에서 주로 후식을 만들던 솜씨를 발휘해, 올리버를 위한 작품을 준비해 놨다.
검은색 초콜렛 위에 마시멜로와 카카오버터로 만든 고명이 올라가 있었다.
“한 번 맛 좀 볼래? 올리버와 에밀리를 위한 선물인데.”
“너무 많은 걸 준비한 거 아냐? 괜히 윤재 너랑 가족들께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하다.”
“아냐. 올리버! 일단 먹어본 뒤에 얘기하자.”
올리버와 에밀리는 작은 엄마가 만든 초콜렛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500원짜리 동전보다 살짝 큰 초콜렛은 먹기에 딱 좋은 사이즈였다.
“굉장히 시원한 맛이다. 그리고 맛있다. 너무 달지 않아서 더 좋은데?”
쵸콜렛으로 제국을 이룬 페레레그룹 3세의 총평이었다.
“숙모님 솜씨가 예술이네요. 저도 넘 맛있게 먹었어요.”
에밀리도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안에 남은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두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보며, 뒷맛의 여운을 즐기고 있던 올리버에게 물었다.
“이 쵸콜렛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그래? 어디지?”
올리버는 작은 엄마가 만든 쵸콜렛을 요리조리 둘러 봤지만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검은 산 위에 만년설이 덮힌....”
“서. 설마? 몽블랑?”
“정답!”
“듣고 보니 정말 몽블랑과 똑 닮은 모양이네. 몽블랑이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면, 누구나 몽블랑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
에밀리 역시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맞장구 쳤다.
“그런데 윤재. 이게 왜 내 선물이야?”
올리버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윤재의 답을 구했다.
“올리버 내 얘기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다. 네 부친 미켈레 페레레는 훌륭한 경영자이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CEO 중 한명이 아닐까? 페레레 로쉐, 킨더 서프라이즈 등 히트작을 수도 없이 내 놓으셨지! 나는 네가 발효 과학자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페레레의 후계자가 되길 바란다. 이제 곧 네 아버님도 70세를 넘기신다.”
올리버와 에밀리는 말이 없었다.
“네가 페레레의 경영자의 길을 걸을 때, 이 몽블랑이 너의 비밀병기가 됐으면 좋겠어. 몽블랑 초콜렛의 산등성이를 너희 집안의 누뗄라 초콜렛으로 채웠다고 상상해 봐! 아마 더 기막힌 맛이 되지 않을까?”
“?!”
올리버는 한방 맞은 얼굴이 됐다.
자신보다 더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동양인 친구에게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유..윤재! 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하하. 그런 표정 지을 것 없어. 공짜는 아니니까. 나중에 혹시라도 잘 팔리게 되면 내 몫도 챙겨주라고. 터무니없이 요구하지는 않을 테니까!”
어느새 Big Wheel과 카페내부를 둘러본 주세페가 윤재 일행에게 돌아왔다.
“이건 뭐야?”
주세페는 몽블랑 초콜렛을 들더니 자신의 입에 털어놓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음? 뭐야? 이집! 커피 맛 집이자, 초콜렛 맛 집이잖아?”
절대미각을 가졌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주세페 역시 몽블랑 초콜렛에 후한 점수를 줬다.
여세를 몰아 올리버를 위한 선물 2탄도 소개시켜줘야 했다.
윤재의 신호를 감지한 작은 엄마가, 52 Cafe의 디저트 명물 몬스터 초콜렛을 가져오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