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장동석
“최팀장! 나 이태성이요.”
“네.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양광수의 후임으로 호남부문장으로 발령 난 이태성이, 최희갑 지원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크리스마스 전에 내려갈 생각이니,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광주 집에서 지낼 수 있게 사택을 얻어주게.”
“네. 상무님! 광주는 풍암동이 괜찮은데, 거기 34평 아파트로 할까요?”
“그래. 뭐 광주 거기가 서울도 아닐 테고, 내가 눈높이를 낮춰야지. 입주청소 잘 하는 곳으로 부탁함세.”
“네. 상무님!”
호남부문은 불명예 퇴역한 양광수 이후의 체제로 급속하게 변신하고 있었다. 이태성이 전화한 이유도, 2002년도에 대한 사전 준비의 성격이 강했다.
“그리고 말이야. 우리 KPI 중에 NDC있잖아?”
신규거래처 유치활동을(New Dealer to Company) 뜻하는 NDC는 매년 임원의 20~30%의 평가지표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지표.
새로 유치한 거래처와 거래 종료시킨 딜러의 합계가 플러스여야 했고, 매출액 합계 역시 신규 유치 거래처의 매출액이 더 커야 했다.
“내가 보니까 호남이 올해 플러스 3이던데 말이야. 올해 당신들 평가는 끝났잖아. 그니까 내 말은 내년에 상표철거하지 말고 혹시 철거할 거래처 있으면 잔여기간에 미리 철거하자고.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상무님! 잘 알겠습니다.”
“세상일이란 게 좋은 게 좋은 거야.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는 말자고.”
“그럼요. 전혀 그런 생각 안합니다.”
최희갑 팀장은 일어서서 90도로 인사를 올리며 전화를 끊었다.
권력의 무상함이 진하게 밀려왔다.
‘이태성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포기 나지 않는다!’
회사에 떠도는 이태성 상무에 대한 세평이었다.
출세지향적인 인물로, 구성원들을 쥐어짜 어떻게든 실적을 올리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2001년 강원본부장을 역임하며, 경기본부와 강북본부, 강남본부를 누리고 범 수도권에서 1위를 기록한 인물이 이태성이다.
‘조또 내년에도 쉽지 않겠구나!’
최희갑은 한숨을 내쉬며, 양광수와 이태성을 비교해 보았다.
‘그 놈의 KPI가 뭐라고!’
20% 이상 가는 비중 때문에, O2 푸드 영업조직장은 매년 NDC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거래중단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신규유치는 말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래 건전성이 낮은 거래처를 날려버리고, 우량한 거래처를 유치해 온다.
말은 쉽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은 것이 신규개발.
영업지사에서 매년 1개 유치하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태성 상무의 지시는 내년에 발생할 상표철거를, 2001년 남은 기간에 집행해 2002년도 자신의 KPI에 스크래치를 내지 말라는 노골적 지시였던 것이다.
신임 이태성 상무의 지침이 호남본부 산하 7개 팀, 지사에 하달되자 팀장들은 앞 다퉈 내년으로 예정돼 있는 거래처 철거 품의를 올리고 있었다.
양광수가 시퍼렇게 눈뜨고 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싹수 노란 거래처들 이 기회에 날려 버리자고. 영업사원들도 좋잖아. 그동안 스트레스 받게 했던 곳 이 기회에 날려 버려.”
목포지사원 들에게 지사장의 지시가 추상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네. 지사장님!”
“그리고 황제유통 있잖아?”
황제유통은 목포지사에서 신규유치가 확정돼 있는 거래처.
“네. 그렇지 않아도 품의 초안 작성해 놨는데 보시겠습니까?”
“이런 눈치 없는 친구 봤나? 신임 상무님 말씀 못 들었어. 거기 품의서는 좀 기다렸다 1월초에 올리자. 올해 개업해 봐야 평가 다 끝났잖아. 1월에 개업하면 플러스 1 먹고 시작하는 거잖아.”
“네. 지사장님!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죽은 권력이 양광수라면, 이태성은 미래 권력이었다.
10월 말 기준으로 11월에 평가받는 팀장들.
이미 자신의 고과는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반대로 임원 평가는 12월말까지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년도 1월에 고과를 받게 돼 있었다.
이미 잘린 양광수에게 인사고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반면, 미래 권력으로 등장할 이태성 상무는 2002년도의 고과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팀장들은 2002년도의 인사고과와 미래권력 이태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신규유치는 최대한 미루고 Debrand(거래종료)는 서둘러 진행하는 품의서를 올리고 있었다.
◈ ◈ ◈
“팀장님! 지원팀장께서 NDC관련 지침을 내렸는데 어떻게 할까요?”
윤재는 1장짜리 보고서를 출력해 장동석 팀장실에 들어갔다.
“그동안 거래관계가 성실하지 못한 곳 위주로 2개소 정도 날려라는 지시입니다.”
“너 생각은 어떠냐?”
“외람된 말씀이지만, 날리는 것은 쉬워도 가져오기는 어렵죠. 올해 차대리께서 수고해 주신 덕에 저희 팀은 플러스 4라는 압도적인 실적을 올렸습니다. 두개 거래처 날려도 플러스 2입니다. 하지만 왠지 껄적지근 하네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는 영업3팀에게, 거래처 2개소 정도 날리는 것은 쉬운 일.
하지만 윤재도 장동석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녀석! 내가 이래서 너를 좋아한다. KPI의 덫이야! 우리가 이번 달 안에 2개 거래처 날려도 우리 팀은 플러스 2다. 지표상 S등급 받을 수 있지. 그렇다고 관계정상화를 시도해 보지도 않고, 멀쩡한 거래처 두 개를 날린다는 게 대체 어느 나라 논리냐?”
“맞습니다. 팀장님! 가져올 때는 개고생해서 가지고 오고 날릴 때는 너무 쉽게 날리는 폐단을 저희까지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듣자하니, 익산지사는 올해 NDC가 마이너스 1인데도 디브랜드 품의를 올렸다더라. 아무리 팀장 평가가 사실상 끝났고, 임원이 바뀐다지만 굳이 거래처를 날린다는 건 옳지 않은 일이야.”
장동석의 얘기를 들으며, 지극히 그다운 행동이라 생각했다.
윤재는 장동석의 이런 모습을 좋아했다.
“나는 양광수 상무님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끈 떨어진 임원 등 뒤에 칼 꼽고 새로 부임할 상무님께 아부하는 것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
“네.”
“내년에 날려야 할 거래처면 당당하게 날리고, 신규거래처 유치에 사활을 걸면 되는 것이지, 미리 앞당겨 날리고 내년에 KPI 평가 잘 받겠다는 것은 정공법이 아니야.”
“200% 동감입니다.”
“윤재야! 삼수갑산을 갈망정 정도를 걷자. 꼼수 부리지 말고.”
“네. 팀장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너는 그렇게 반응해 줄 거라 생각했다.”
윤재는 전생의 기억 덕분에 잘 알고 있었다.
내년에도 영업3팀을 제외한 다른 팀의 NDC 실적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마이너스를 최소화하고, 플러스를 극대화하는 건 비단 영업뿐만 아니라 모든 조직이 추구해야 할 일.
죽은 권력에 쓰레기를 투척하고, 미래권력에 아부하겠다는 자세는 프로페셔널의 자세가 아니었다.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장동석 팀장을 뒤로 하고, 윤재는 팀장실을 나왔다.
‘내가 이래서 장동석 팀장을 존경하고 좋아한다. 예나 지금이나 귀감이 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회사에서 승승장구해야 한다. 그래야 조직이 건강해지고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윤재는 KPI의 역설에 대해 생각했다.
본부장-부문장-팀장-팀원으로 이어지는 조직에서 1년 단위로 평가받는 KPI.
본질적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설계해야 할 성과를, 1년 단위의 단기 성과에 집착하게 만드는 폐단을 갖고 있었다.
‘일머리를 굴려야 할 사람들이 잔머리를 굴리고, 솔선해 자신을 굴려야 할 팀장과 임원들이 아랫사람을 굴려먹는 폐단의 시작이 근시안적인 KPI에 있음을 왜 모르는지!’
쉽게는 본부장부터 팀원까지 KPI평가기간을 일치시켜야 했고, 더 길게는 회사의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 중장기 로드맵과 KPI를 일치시켜야 했다.
‘전생의 20년과 앞으로의 20년은 달라야 하니까!’
◈ ◈ ◈
2001년 달력도 이제 2장 밖에 남지 않았다.
윤재는 장동석의 2년 연속 이노베이션 챌린지 우승을 돕기 위해,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일을 하는 중간 중간 진도를 오가야 했고, 태화정밀을 찾아 진행현황을 체크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창진과 재테크에 대한 논의도 했고, 주말이면 진행하는 알바도 챙겨야 했으니 말 그대로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회귀의 연 때문인지, 그런 일정에도 윤재는 피곤함을 몰랐다.
회사일도 돈 버는 일도 모두 잘 됐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최근 윤재는 한송이와 전화 통화를 자주했다.
검은 쌀 햅반 시제품을 만드는 일 때문에, 청주공장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한송이의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제법 괜찮게 시제품이 나왔어요. 저는 나쁘지 않은 맛이라 자부하는데.... 괜찮을까요 오빠? 햅반도 영 힘을 못 쓰는 판국에 검은 쌀 밥은 왠지....”
윤재와의 연인관계를 꿈 꿨으나, 목적달성에 실패한 한송이.
시간의 치유로, 이젠 윤재와의 관계를 절친 동료로 세팅해 놓은 상태였다.
“너무 걱정 마. 검은 쌀 햅반은 스끼다시야. 메인 디시(dish)는 따로 있으니까. 다음 주 정도에 장팀장님과 한번 올라갈게.”
“그래요. 오빠. 그때 봬요.”
윤재는 한송이와의 통화를 끊었다.
부서 간 요청 메모를 작성하긴 했지만, 어려운 부탁을 쉽게 들어주는 송이는 항상 고마운 존재였다.
연구소장과 팀장들의 총애를 받고 있는 한송이가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이제 딱 하나를 제외하면 2001년 이노베이션 챌린지를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다.
11월 14일이면, 혜진과 선희의 영화 촬영이 모두 끝난다.
광주로 내려오는 대로, 햅반 신혼부부 편 데모 영상을 찍는 일만 남아 있었다.
1인 가구 수의 증가에 맞춰 도래할 HMR(Home meal Replacement)시대를 준비하자는 메인 꼭지.
햅반 용기의 안정성과 최첨단 공법에 대한 제품광고.
그리고 Guilty Feeling Products에 대한 우려를 중화시켜 줄 이미지 광고.
끝으로 검은 쌀에 대한 추가.
윤재의 프레젠테이션용 소프트웨어 스킬까지 가세한다면, 이번에도 하나의 작품이 될 것이었다.
“오빠. 나도 장팀장님 좋아해. 팀장님 잘 되는 일이라면 내가 도와야지.”
윤재가 햅반 홍보용 샘플 광고를 찍어보자는 얘기에 대한 혜진의 답변이었다.
크리스마스 성수기에 혜진의 영화는 개봉된다.
그때가 지나면 혜진은 연예계의 신데렐라가 돼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연예인병에 걸리지 않고, 장팀장과 자신을 위해 흔쾌히 돕겠다는 혜진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 ◈ ◈
2001년 11월 16일.
윤재가 계약직이었던 시절부터 1년간 진행해온 엑셀과 파워포인트에 대한 강좌가 끝나는 날이었다.
워드는 회사에서 거의 쓰는 일이 없어, 엑셀7개월 파워포인트 5개월 정도 진행한 강의였다.
“오늘부로 파워포인트까지 교육을 마칩니다.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함께 해준 선배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윤재가 휴가를 가거나 숙박 교육인 경우를 제외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된 교육이었다.
그 결실이 영업3팀과 호남부문 참석자들의 업무 역량 향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윤재야! 아니 IT스승님! 1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밤에는 책걸이 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스승님!”
차명수 대리가 특유의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하. 스승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부족한 제 설명 열심히 들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단언컨대 영업은 물론이고 생산과 스탭 조직에서 MS오피스 3총사를 저희 팀만큼 능숙하게 다루는 조직은 없을 겁니다.”
“에이 설마 우리가 그 정도일까?”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스스로를 믿으세요! 이미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세요?”
“솔직히, 문서작업하거나 SAP다운 받아 편집하다가 나도 놀랄 때가 있다. 1년 전의 나와 비교하면 진짜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긴 하지.”
영업3팀이 가장 열심히 강의에 참석했는데, 그 중에서도 오석진 과장의 실력이 탁월했고, 그 다음이 차명수 대리였다.
“바로 그 겁니다. 선배님들께서는 이제 어딜 가도 엑셀, 파워포인트로 꿀릴 일은 없을 겁니다. 워드는 그냥 기본만 하시면 되니까, 제 책 보면서 한 번씩만 해 보시면 될 거에요.”
“최근에는 동기들이 내게 전화해서 엑셀 함수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니까. 크하하하. 이게 다 윤재 덕분이지.”
회식을 해서 술이 만땅 취한 다음날에도, 술 냄새를 풍기며 교육을 받으러 온 선배들이었다.
지겨울 수도 있는 루틴을 지켜준 사람들이 새삼 대견했다.
교육을 끝내고 일 보러 가려는데 장동석 팀장이 불쑥 제안을 했다.
“자 다들 일어납시다.”
애국조회도 아닌데 장팀장의 얘기를 따라 모두 기립했다.
영문을 모르는 윤재도 어정쩡하게 서 있어야 했다.
팀원들의 표정이 웬일인지 밝아보였다.
“오과장님! 준비하시죠!”
“네. 팀장님!”
오석진 과장이 미리 준비해 온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냈다.
“팀장님을 대신해 대독하겠습니다. 감사패! 영업3팀! 김윤재 사원. 위 사람은 지난 1년 동안 팀원들의 역량 향상을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 결 같이 팀원들에게 IT교육을 진행했는바 위 감사패와 기념품을 전달합니다.”
교육을 위해 가장 헌신한 윤재를 위해, 영업3팀에서 준비한 선물이었다.
“팀장님! 이게 뭐에요?”
“우리 팀 모두가 십시일반해서 준비했다. 사양 말고 받아라!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교육비도 받지 않고 1년간 고생했잖아.”
오석진 과장은 윤재에게 크리스탈 감사패와 금 한 냥으로 만든 메달을 전달했다.
“영업3팀 IT 구루 김윤재!”
금메달에 새겨진 문구였다.
“윤재야!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돈을 주고 가르쳐도 부족함이 없는 교육을, 1년 동안 무료로 해 줘서 고맙다.”
“나도 고맙다. 윤재야! 사실 나는 컴퓨터 울렁증이 있었는데 네 덕분에 울렁증을 고쳤다.”
“나이 먹다 보니, 모르는 것 물어보기 쪽팔릴 때도 많았는데 윤재가 자청해서 1년간 도와줘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처음엔 귀찮았는데, 이제는 끝난다고 하니까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장동석 팀장부터 차명수 대리까지!
팀원들의 공치사가 한 동안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하하하. 팀장님!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오는 정이 고와야 가는 정도 곱다고! 금메달도 주셨는데 오늘 저녁은 제가 쏘겠습니다.”
“아냐! 우리가 아무리 염치없는 선배라지만, 막내가 사는 저녁을 먹을 수 있나? 법카로 먹자고....”
영업3팀이 아니지만, 교육에 참석했던 부문 선배들이 장동석 팀장과 3팀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