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도 계약직이거늘! (2)
양광수가 노래방 사건으로, 서비스팀 여직원의 남친에게 험한 꼴을 당한지 어느덧 한 달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약 3주 정도 뒤엔 O2그룹의 임원인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 내에 숱한 소문이 돌았고, 직원들은 종종 카더라 소식을 전하며 수근 거리는 시기였다.
“양상무님이 전무 후보 중에서 유력하다던데요?”
“최근 호남본부가 실적도 좋았고, 양상무님은 황태준 최고의원을 배경으로 두고 계시지 않은가?”
“그런데 양상무님 오늘 본사는 왜 가신 거 에요?”
“몰라! 갑자기 회장님께서 호출 하셨다는 것 같던데!”
“좋은 일이겠죠?”
“내가 그걸 어찌 아나?”
임원 인사를 3주 앞두고, 서울을 찾은 양광수!
직원들은 진급에 대한 언질을 받기 위해, 본사를 찾은 것이라고 얘기했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같은 날 여의도 O2 F&B 본사 회장실.
오재준 회장 앞에 무릎 꿇는 게 주특기인, 양광수가 이번에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노래방에서는 제가 술에 취해서. 진짜 아무 짓도 안했습니다. 엉덩이 살짝 터치했을 뿐인데, 그 친구가 예민하더군요.”
양광수는 지난 달 300만원까지 써가며, 입막음 하려 했던 CS팀 여직원이 투서를 한 것이라 생각했다.
“노래방?”
“정말 죄송합니다. 진심입니다. 노래방 가서 몇 분 있지도 않았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양광수의 눈에서 곧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노래방 사건도 있었어? 너는 내가 얼마나 더 참아줘야 하는 거냐?”
“예?”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노래방 사건도 있다는 것 아냐?”
“예?”
양광수는 오재준의 표정에서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양상무!”
“네. 회장님!”
“똑바로 말 안 해?”
오회장의 반응을 봐서, 지난 노래방 사건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 사실이 양광수를 더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씨발! 대체 어디까지 회장님께서 알고 계시는 거야?’
양광수는 하는 수 없이 노래방 사건에 대해 들려줘야 했다.
오재준은 양광수의 얘기를 듣는 내내 혀를 차거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라도 오재준이 발길질로 양광수를 걷어 찰 것 같았다.
“이번 인사에 자네 이름이 없을 거네. 그동안 고생했고 임원관리 프로그램에 따라 예우는 해줄 테니 그리 알게.”
“회장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양광수는 울음을 터뜨렸다.
베테랑 연극배우 뺨치는 실력이었다.
“회장님!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뼈가 닳아지도록 회장님과 회사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오재준은 말이 없었다.
“회장님! 제발~”
양광수는 꿇은 무릎의 각을 조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헛 참! 이럴 인간이 왜 비서한테는 그 따위 짓을 했을까?”
“비서요? 누구 말씀 하시는 겁니까? 송진영이요? 송진영이 그 년이 먼저 꼬리를 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진짜입니다. 그 년이 교태를 부리며 꼬드겼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헛 참! 다 내 업보로다. 지난번에 내가 너의 눈물 연기에 속지 않아야 했거늘!”
분노를 다스리던 오재준이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송진영? 송진영? 송진영이가 누군지 나는 알지도 못해! 최아람 알지? 최아람. 최아람이 회사로 투서를 했어! 이 미친 자식아. 송진영이도, 노래방 사건처럼 내가 모르는 여자사건 이라는 거잖아.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양광수는 정신이 아뜩해짐을 느꼈다.
최아람은 강원본부장 시절, 자신의 비서였던 계약직 여사원이었다.
“최아람이요? 그 년이 뭐라던가요? 대질이라도 시켜 주십시오. 저는 결백합니다. 그 년들이 제가 잘 나가는 게 배가 아파 시기 질투 하는 겁니다. 회장님! 이건 음모입니다.”
“미친 자식!”
오재준은 자신의 PC의 버튼을 눌렀다.
회장실 벽과 천장에 부착된 뱅앤올룹슨 스피커를 통해 양광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람씨! 이거 왜 이래? 내가 강제로 했어? 다 돈 주고 했잖아! 그리고 솔직히 자기도 즐겼잖아. 대체 이제 와서 왜 이래?”
“상무님! 정규직 시켜준다고 하셨잖아요? 상무님 말씀 한 마디면 오재준도 끔뻑 죽을 거라 하셨잖아요?”
오재준이 버튼을 다시 눌렀다.
“차마 혈압 오를까 봐 더는 못 듣겠다. 뭐? 내가 너 말 한마디면 어떻게 된다고?”
양광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 미친년이 녹음까지 해 놨을 줄이야?’
이렇게 된 거 양광수도 이판사판이었다. 바지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져야 했다.
“회장님! 황태준 의원을 봐서라도 부디....”
“안 꺼져?”
“회장님! 제발!”
오재준은 인터폰을 눌렀다.
비서실장이 회장실로 들어와 애원하는 양광수를 부축해 나갔다.
30분도 넘게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일까?
양광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회장실에서 끌려 나갔다.
◈ ◈ ◈
2001년 11월 2일 O2 푸드 정기임원 인사!
임원인사는 매년 많은 사람들의 희비쌍곡선을 가른다.
호남영업부문장!
변경 전 양광수. 변경 후 이태성.
생산본부, 재무본부, 제약본부, 사료본부, 그 많은 자리 중 변경 후 자리에 양광수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소문은 바람보다 빠르게 사내를 맴돌았다.
주로 불명예 퇴진이라는 소문이었다.
“3년 전 강원본부장 시절, 비서가 회사로 투서를 했대!”
“양상무 애를 가졌었고 지우기까지 했다나 봐!”
“그건 그 비서가 아니라던데?”
“세상에나... 양상무님 여성 편력이 장난 아니란 건 익히 들었는데 그 정도였을 줄이야.”
“사모님하고 이혼하니 마니 난리라던데...”
“전직 비서가 앙심을 품고 피해자들 찾아다니며 연판장을 받았다더라!”
대부분의 소문과 마찬가지로 어느 것은 사실이고, 어느 것은 카더라 통신이었다.
확실한 건 양광수가 여성 관련 추문으로 불명예 퇴임했다는 것이었다.
58세가 정년퇴직이었던 시절!
아직 양광수의 정년이 5년도 넘게 남아있던 시점이었다.
여자 문제가 전부가 아니었다.
양상무의 끈이 떨어지자, 그동안 잠잠했던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양상무님이 너무 하셨지. 거래처 자금지원하면 3% 상납이 마치 관행처럼 이뤄지지 않았나?”
“맞아요. 거래처에서 술 안 사면 결재를 안 하셨으니까...”
말로는 성인군자 였던, 양상무의 실체는 사실 그런 수준이었다.
장비지원이나 여신연장 등 중요한 결재가 있을 때면, 양광수는 거래처의 상납이나 접대를 요구했다.
품의서 보고 들어갈 때, 접대가 없었으면 선채로 보고!
접대가 있었으면 앉아서 보고!
이것이 양광수 치하 영업부문의 룰이었다.
◈ ◈ ◈
양광수의 해임 사태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호남본부 전체에 고강도 감사가 후속타로 이어졌다.
“황성호씨!”
“네. 차장님!”
“7월18일 짠짠 노래방. 7월27일 용봉 노래방. 8월2일 퀸 노래방. 8월 16일 퀸 노래방. 9월14일..... 뭐가 이렇게 많아? 내가 말한 이 날짜에 C&S 여직원들과 노래방에 간 게 사실입니까?”
“네....”
그즈음 황성호는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주식투자로 마이너스 통장 5,000만원을 전액 날렸고, 황태준이 준 종자돈마저도 모두 날린 상태였다.
게다가 양광수의 불명예 퇴진 공범으로 찍혀 감사까지 받고 있었으니,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회식 정도까지는 괜찮지만 노래방에 가서 부르스 추고, 만지는 건 엄연히 갑질 아닙니까?”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차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눈동자마저 초점을 잃은 황성호의 입에서 체념한 듯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젊은 사람이 그러면 쓰나? 앞길이 구만리 인데... 아버님 명예도 생각해야지. 안 그래요?”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어떤 벌이든 받겠습니다.”
황성호는 맥없이 비위사실 확인서에 자필 서명했다.
죄를 지은 사람은 황성호와 양광수!
하지만 영업3팀 전원도 잠시였지만, 감사팀과 마주해야 했고 윤재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김윤재씨!”
“네. 차장님!”
“황성호씨에게 술 몇 번이나 얻어 마셨어요?”
감사팀원들은 때로는 이런 강한 질문으로, 사람을 충동질 시켜 원하는 답을 끌어내기도 한다.
“글쎄요. 저희 집 집들이 때 한번 초대한 적 외에는 없습니다만.”
“그래요? 우리도 윤재씨 법인카드 사용내역이나, Peer 그룹 인터뷰 등 봤는데 특별한 얘기는 없더군요.”
고강도 감사를 진행했지만 윤재에 대한 비위는 티끌 하나 나오지 않았다. 거래처도 직원들도 감사를 해봤자, 미담만 쏟아낼 뿐이었다.
“동기사랑이란 말도 있는데, 황성호 씨 좀 잘 챙기지 그랬습니까?”
“글쎄요. 영업3팀만큼 성호씨를 챙긴 사람들이 어디 있었을까 싶습니다. 집에 초대해서 와인숙성 돼지 먹여줘. 사고 치면 뒷수습 해줘.... 뭘 더 해줘야 동기 사랑일까요?”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사람이 아니라면, 감사팀 앞에 서면 위축되기 마련.
하지만 윤재는 그렇지 않았다.
시종일관 당당하게 감사팀에 맞섰다.
“2001년 1월부터 10월까지 단 한 번도 영업본부 팀 중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팀이 영업3팀입니다. 작년 이노베이션 챌린지, 올해 오픈 이노베이션에서도 개인 1위를 배출한 팀이 영업3팀입니다.”
너무나 자신감 넘치는 윤재의 모습에 감사팀 차장은 할 말을 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윤재를 감사팀 직원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죄지은 녀석은 죄 값을 달게 받아야죠. 그런데 죄 없는 사람들은 현업도 바쁘고 하니, 죄지은 사람 중심으로 감사를 진행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전국 최고의 실적을 내는 팀이 받아야 할 건 감사가 아니라, 상장과 상품이라 생각합니다.”
“크음. 젊은 친구가 뼈 때리는 얘기만 골라 하네. 알았어요. 당신 충동질 시켜 혹시라도 뭐 나오나 했던 거니까 오해하지 맙시다. 나도 윤재씨 잘 하고 있다는 소문 많이 들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윤재의 한 마디 이후,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감사는 신속하게 끝났다.
‘죄 지은 자 벌 주고, 잘 한 자는 상 주자!’
평범한 상식 앞에 감사팀도 더는 할 얘기가 없었던 것이다.
양광수의 추문 때문에, 호남본부는 거의 한 달간 감사를 받았다.
주유카드나 법인카드를 사적인 용도로 이용한 사례나, 거래처에 할인금을 과하게 지급한 행위 등이 주요 적발사례였다.
감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호남본부 회의실에는 감사팀원들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크건 작건 뭐라도 하나 걸리는 게 보통인데, 어떻게 된 게 영업3팀은 비리가 하나도 없냐? 살다 살다 이런 팀은 처음이다.”
“김윤재 그 친구 보세요. 파도파도 미담만 나오잖습니까?”
얼마전 최동식 과장건도 신속한 보고와 대응으로, 문제시 되지 않았다. 3팀은 말 그대로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고 감사를 이겨냈다.
◈ ◈ ◈
호남본부에 대한 고강도의 감사는 용두사미로 끝이 나 버렸다.
정식 징계를 받은 사람은 황성호가 유일했다.
서면경고 플러스 감봉3개월의 징계였다.
해고와 정직을 빼면 가장 수위 높은 징계를 받은 것이다.
그나마 황태준의 존재 때문에 그 정도로 끝난 것이, 황성호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거래처 방문을 위해 외근 나가던 차명수는 복도에서 황성호를 만났다.
“야! 황성호 잠깐 나 좀 따라와라.”
차명수는 황성호를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담배를 권하며 차명수 대리가 말했다.
“징계 너무 신경 쓰지 마라. 나도 한 때는 회사에서 고문관 소리 들었던 사람이야. 그래도 하나씩 하나씩 노력했더니 좋아지더라.”
황성호는 말이 없었다.
“너는 이제 27살이다. 앞길이 아직도 창창해. 이번 감사를 기회로 스텝바이스텝으로 노력해봐. 다시 실수 안하는 게 중요하잖아?”
“알겠습니다. 대리님.”
대답하는 황성호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최근 들어 영업1팀에서 황성호는 완전 대역죄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3팀장과 3팀원들은 종종 위로를 해줬는데, 고마운 일이었다.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황성호.
“그런데 너 눈은 왜 그러냐? 누구한테 맞았니?”
“아. 아네요... 그냥 벽에 부딪혔습니다.”
황성호의 오른쪽 눈자위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주말 부친 황태준을 찾은 황성호.
뉴월드코프라는 잡주에 투자해, 결국 반대매매를 당했다.
그 결과 황태준이 준 종자돈과, 마이너스 통장을 포함해 1억을 날려 버린 것이다.
게다가 회사에서 여자 추행 문제로 감사까지 받았다는 소식에, 황태준이 재떨이를 던졌던 것이다.
자세히 보면 황성호의 눈자위에, 재떨이의 문양이 찍혀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 ◈ ◈
감사가 모두 끝났을 무렵 윤재는 양광수의 전 비서 송진영을 찾았다.
그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전해들은 송진영이 물었다.
“그런데, 윤재 너는 어떻게 양상무가 날아갈지 알았어?”
“그냥 감이 그랬어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잖습니까? 임원 인사 철도 다가오고 있었구요.”
전생에서도 양상무는 강원본부장 시절 비서의 투서로 옷을 벗었다.
송진영이 4년 계약을 마치고 퇴근하던 날.
윤재는 송진영을 집까지 태워줬었다.
송진영 역시 양상무가 허벅지를 만지거나, 엉덩이를 만지는 등의 성추행을 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뒤에서 다가와 부비부비를 한 적도 많았다고 했다.
“나는 금전적 보상을 바라거나, 양상무님의 사과를 바라지 않아. 그저 나를 4년 동안 채용해 준 O2라는 회사가 조금 더 건전해 지기를 바랄 뿐이야.”
회사 윤리경영 제보라인에 신고할까 말까 망설였던 송진영.
당시 윤재는 그녀를 만류했었다.
“누나. 누나가 굳이 제보하지 않아도 양상무는 어차피 옷 벗을 겁니다. 결코 양상무를 두둔하거나, 회사에 문제가 없어서 이러는 게 아네요. 제보하면 감사실에서 누나 찾아올 테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묻겠죠.”
“....”
“양상무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겁니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는 잊어 버리고, 미래를 준비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입니다.”
당시 소나타 안에서 윤재가 했던 얘기였다.
송진영은 눈앞에 서있는 윤재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자신들은 이뤄내지 못한 정규직 전환을 1년도 안 돼 이뤄냈던 윤재.
양광수 문제에 대해서는 마치 미래를 내다보는 듯 행동하기까지 했으니, 동생이지만 존경스러운 구석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나! 혹시 취업 준비하고 있어요?”
“응. 여기 저기 원서 접수하고 있는데..... 왜?”
“그냥 구직활동 하지 마시고, 제안하나 들어 보실래요?”
원래 큰 송진영의 눈이 더 커졌다.
“저희 작은 엄마가 곧 카페를 하실 건데, 거기서 일 해보시는 것 어때요? 누나 미래를 준비하시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