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74화 (74/196)

임원도 계약직이거늘! (1)

‘황성호 그 어리바리한 자식 때문에 골로 갈 뻔 했네!’

호남부문 전체 회의 다음날인 9월15일.

양광수는 초췌한 모습으로 자신의 다이너스티에 올라탔다.

한숨을 내쉬고 나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요한 시기다. 상무 5년차! 재수하지 않고 한 큐에 전무 단다. 300만원? 그까짓 거 껌 값 이라 생각하자.’

양광수는 자신의 차에 오르고 나서야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갔나보군. 휴~ 뭐 그런 무대포 같은 자식이 다 있어!’

양광수는 한숨을 내쉬며 헝클어진 자신의 넥타이며, 머릿결을 손질했다.

‘어린년이 제법 앙칼진 구석이 있어. 가시 돋친 꽃이었단 말인가? 그나저나 황성호 그 어벙한 놈은 계집 보는 눈이 그 모양이야? 쯧! 쯧! 앞으로 그 자식과 어울리다 신세 조지겠어. 황태준 그 형님은 어쩌다 그런 모자란 아들놈을 뒀는지!’

양광수는 거푸 가슴을 쓸어내렸다.

‘윤리경영 제보라인에 전화하겠소!’

다시 생각해도 섬짓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마음을 진정시키자, 분노와 짜증이 밀려왔다.

동시에 양광수는 황성호를 포함한 수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저주와 원망을 퍼부었다.

‘황성호 그 놈 때문에, 애꿎은 김윤재를 닭잡듯 잡았는데... 허참. 사는 것이 고약한 일이야.’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양광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황성호와 독대를 했다.

황성호는 일하는 것도 변변찮고, 인물도 그저 그래서 임원이 직접 코칭할 수준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3선 국회의원이고 회사에도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열심히 일해라. 야망을 가져라!’

뭐 이런 수박 겉핥기식의 얘기가 끝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나저나 의원님은 어떻게 지내시나?”

“아버지요. 뭐 여전하시죠. 꼰대 어디 가시겠어요?”

“허허. 젊어서 그런 건가? 성호 자네는 의원님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보통 자식들이 부모를 낮게 평가는 경향이 있지. 내년에 있을 당 선거에서 원내대표로 출마하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상무님! 저는 정치니 뭐니 머리 아픈 얘기는 잘 모릅니다.”

“알았네. 하여튼 성호 자네는 아버지 위대한 줄 알아야 해. 오늘은 내가 선약이 있어서 안 되니까, 언제 저녁 한번 하지. 의원님 아들이니까 특별히 시간 내준다는 것 잊지 말고.”

상무5년차.

장동석과 윤재의 활약으로 성과가 뒷받침 됐다.

게다가 일반임원의 신분으로, 황태준에 대한 로비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양광수였다.

11월 임원인사에서 전무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양광수이기에 황성호와 1:1로 저녁을 하는 짓은 삼가야 했다.

“다음 주 목요일에 제가 서비스팀과 일정 잡아놨는데, 어떻습니까? 새로 입사한 애중에 퀸카가 하나 있습니다.”

“9월14일? 그날은 부문 회의날인데....”

양광수의 모호한 답변. 황성호는 그 애매한 태도에서 여지를 읽었다. 그런 일에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3차 때 합류하시죠? 상무님! 부문 최고 지도자와 신입이 격의 없이 어울리는 조직문화! 젊은 조직문화 아니겠습니까? 저희 아버지도 항상 젊게 살아라고 강조하시죠.”

양광수는 황성호의 꾀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말만 번지르 했을 뿐, 속은 완전 곪은 그런 사람.

◈          ◈          ◈

문제의 9월14일 밤 10시 30분.

양광수는 팀장들의 배웅을 받으며, 자신의 차에 올랐다.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의 사택이 아니라, 첨단지구에 있는 노래방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황성호가 2명의 여자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상무님! 오셨습니까? 여기 이 친구들은 C&S 호남팀 에이스 장미정씨와 안선영씨입니다.”

2명의 여사원들은 불편한 표정으로, 양상무에게 인사를 했다.

어느새 맥주와 과일안주가 들어왔다.

그 사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황성호가 신나는 노래 두곡과 트롯 두곡을 불렀다.

능숙한 솜씨로 양상무와 서비스팀원들에 맥주를 따라 주더니, 건배를 외쳤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잔잔한 음악을 선곡했다.

부르스 타임을 준비한 것이다.

깔삼하다던 안선영의 등을 떠밀어, 양광수 상무에게 보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던가?

황성호는 그날, 밤의 황태자 그 자체였다.

이미 2차까지 술을 마신 양광수.

정신이 해롱거리기도 했지만, 그는 원래 음주가무와 여색을 밝히는 사람.

신입 서비스팀원과 부르스를 추던 양광수가 여사원의 엉덩이를 쥐었다.

“어맛! 상무님! 왜 이러세요. 상무님 제발요.”

“음? 왜 그래?”

“상무님! 아무리 상무님이라지만 이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저 집에 가겠습니다.”

깔삼하다던 그 친구가 핸드백을 집어 들고, 노래방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황성호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3차가 파국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          ◈          ◈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C&S 신입 여직원의 남자친구라는 사람이 양광수를 찾아왔던 것이다.

양광수는 회사 근처 카페에서 남자친구라는 사람을 만났다.

사태는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깔삼녀 안선영의 남자친구는 다혈질의 사나이였다.

그는 양광수를 보자마자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니가 새꺄! O2 임원이면 다야? 좆같은 새끼! 당신이 뭔데 내 여자친구 엉덩이를 만져. 디지고 싶어?”

“어허. 젊은이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착각. 이 새끼를 콱!”

양광수가 갑작스런 젊은이의 행동에 움찔했다.

딱 보기에도 찌질한 모습이었다.

남자친구가 주먹을 들었으나 차마 양광수를 치지는 못했다.

“어허 젊은이 이것 놓고 얘기하세. 점잖은 사람이 왜 이러나?”

“당신은 점잖아서 힘없는 여사원을 노래방에 불러내고 그랬어?”

“미안하게 됐네. 그건 내가 부른 게 아니고... 내 부하직원이 뭘 모르고 그런 것이네.”

“부하가 그랬어도 상무쯤 되는 인간이면 말렸어야지. 다 늙은 놈이 딸 뻘인 여자의 엉덩이를 만져? 엉?”

안선영의 남자친구의 눈에 불길이 일렁거렸다. 순간 양광수는 오줌이 마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원만 5년째! 항상 부하들에게 존중을 받다, 봉변을 당하니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내 정중하게 사과하겠네. 자네 이러면 자네 여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세!”

“뭐. 이런 좆같은 새끼! 지금 협박하는 거야?”

남자친구가 양광수의 멱살을 더욱 거세게 흔들었다.

“어허. 젊은이 이러면 폭력죄가 될 수도 있네. 우리 회사 법무팀에 변호사가 몇 명인지 알고 이러나?”

양광수가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을 빛냈다.

‘흐흐흐. 너처럼 돈 없고 힘없는 것들은 변호사 대동하면 없는 죄도 만들어 낼 수 있어. 내가 이런 일 한두번 해보는 줄 알아?’

양광수의 생각처럼 남자친구가 멈칫했다.

놈이 양광수의 멱살을 거세가 당겼다 손을 놓은 것이다.

하지만 양광수의 예상과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나도 가만있지는 않을 거요. 당신네 회사 윤리경영 제보라인에 올릴 테니까 누가 이기나 두고 봅시다. 월급도 달랑 100만원 넘게 주는 그따위 회사 그만 두면 되니까, 추접스럽게 그런 걸로 협박하지 마!”

남자친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제보라인에 전화를 하면 감사실로 넘어간다.

감사실장은 양광수와 오랜 견원지간.

양광수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일단 좀 앉아 보시게.”

양광수가 남자친구의 손을 잡았다.

“내가 어제는 술이 너무 과해서 실수했네. 정중하게 사과함세!”

“됐어. 당신 사과는 들으나 마나야.”

“진짜 미안하네.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사과하겠네. 선영씨라고 했던가? 자네 여자친구 앞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겠네. 그리고 사과의 의미로 배상을 하겠네. 자네도 보상과 배상의 의미는 알테지? 내가 진짜 미안해서 이러네.”

“.....”

남자친구가 조금 누그러지는 기색을 보이자, 양광수의 잔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회사 그만둔다고 했으니 일자리도 알아봐야할 테고, 3개월 정도 급여 생각해서 300만원 주겠네. 진짜 미안해서 그래.”

“.....”

“젊은 친구 좋은 게 좋은 것 아닌가?”

실로 역린을 건드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좋은 게 좋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자기에게 좋은 일을 말한다.

“회사는 어차피 그만 둘 거고, 당신 사과는 받은 걸로 하지. 당신 말이야!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마.”

“알겠네. 진짜 다시는 그런 실수 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네. 내가 아무래도 어제는 미쳤나 보네.”

양광수는 전화를 꺼냈다.

폰뱅킹을 시도하는 모양이었다.

◈          ◈          ◈

다시 9월15일 양광수의 자동차 안.

양광수는 방금 전 서비스팀 여사원의 남자친구에게 수모를 당한 것이 분했다.

‘씨발. 그까짓 엉덩이 좀 만진다고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300만원이면 싸게 막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윤리경영 제보라인에 접수되는 날에는, 양광수라 해도 모가지를 보전하기 힘들었다.

대충 사건이 해결된 것 같고, 분한 마음도 가라 안자 본전 생각이 나는 양광수.

자동차 안에서 혼자 주절거리는 모습은 한편의 싸이코 드라마 같았다.

“200만원만 부를 걸 그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삼백은 너무 쌔!”

“아냐. 전무 승진해야지. 그래 좋게 생각하자.”

“그나저나 그 싸가지 없는 새끼를 폭행죄로 쳐 넣어? 법무팀 박변한테 한번 물어볼까? 아니다. 아니야. 괜히 우세만 살라!”

“이 손이 300만 원 짜리 엉덩이를 그랩한 손이란 말인가? 키키키킥!”

양광수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며, 미친놈처럼 웃었다.

룸미러를 보며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차량의 시동을 걸었다.

“씨발. 누구 집 아들놈인지 존나게 잘 생겼다.”

“신고합니다. 전무 양광수는 2002년 1월1일자로 O2 에프앤비의 전무로 영전하였음을 시인고오 합니다!”

싸이코 드라마를 다 찍은 양광수.

다시 O2 임원의 행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인물 좋겠다! 성과 확실하겠다! 그리고 황태준이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까지... 전무가 대수냐? 부사장 찍고 내친김에 사장까지? 하긴 김윤재가 내게 왕의 기운이 있다고 했어... 키키키킥!’

운전을 하고 있는 양광수의 표정은 한없이 밝아보였다.

◈          ◈          ◈

양광수 노래방 사태 이후, 일주일 정도 지난 2001년 9월 20일.

양광수의 비서였던 송진영이 회사를 떠났다.

2년 계약직에, 2년을 추가해 4년을 다녔지만 정규직 전환에 성공하지 못한 송진영은 회사와 계약이 종료됐다.

이미 그녀의 나이 30.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비서로 일 해왔던 송진영.

나이 30을 넘은 그녀에게, 앞으로 비서 자리는 잘해야 1번 아니면 2번이 전부일 것이다.

비서로 있을 때는, 지사장이나 직원들이 수시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상무가 자리에 있는지, 보고를 위한 일정 조율 등을 위해 비서에게 묻기 위함이었다.

임원의 비서에게 잘 보여서 손해 볼 건 없었으니까, 팀장들은 그녀에게 대체로 잘해줬다.

하지만 그녀의 퇴장은 쓸쓸했다.

4년 계약기간을 채운, 계약직 여사원의 퇴장에 관심을 갖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지원팀에서 챙겨준 고별회식과 그룹상품권 10만원을 받고, 그녀는 쓸쓸히 회사를 떠났다.

마지막 출근을 18시까지 근무한 송진영이 집으로 돌아갈 때, 그녀를 태워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윤재였다.

호남본부에 있던 5명의 계약직 여사원들은 모두 윤재에게 잘 해줬는데, 특히 송진영이 그랬다.

이성간의 감정이 아니라, 기특한 집안 동생을 대하듯 송진영은 윤재에게 잘 해줬고, 윤재 역시 그런 송진영을 누나처럼 좋아했다.

“너무 걱정마세요. 잘 될 거에요!”

전생에서 윤재가 회사를 떠나던 그녀에게 전했던 인사말.

친동생처럼 대해줬던 송진영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더 힘이 돼 주고 싶었다.

“진영 누나. 다른 직장 구하셨어요?”

“아니. 2~3개월 정도 쉬면서 일자리를 다시 알아봐야지.”

윤재 역시 그녀의 앞날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회사 생활 10년 했지만, 매번 느끼는 건 조직이란 곳이 무서운 구석이 있다는 거야.”

“....”

“다들 회사 그만두는 내게 더 이상 관심이 없지만, 윤재씨만 한결같네. 고마워....”

“아네요. 그동안 누나가 내게 잘 해주셨는데, 큰 도움이 못돼 미안할 따름입니다.”

보고와 품의 진행 때문에 양광수 상무실을 찾을 때면, 송진영은 윤재에게 특히 상냥하게 대해줬었다.

그리고 윤재가 정규직이 됐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준 사람도 송진영이었다.

지난달에 몽블랑 트래킹을 떠날 때도 그랬다.

출국을 앞둔 윤재에게 송진영이 봉투를 건넨 적이 있었다.

“윤재씨! 유럽여행 간다고 해서, 광주 계약직들이 십시일반 모은 거야.”

영업3팀을 제외하고, 윤재의 해외여행을 챙겨준 사람들은 계약직 여직원 5명이 유일했다.

송진영이 건넨 봉투에는 300달러가 들어있었다.

4명의 여직원이 각 50달러, 송진영이 100달러를 보태 만든 300달러였다.

“몽블랑 갈 때 누님이랑 여직원들이 경비 모아줬었는데, 미안하네요.”

“자기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냥. 미안해요.”

계약직 없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목표 역시, 윤재의 이번 생의 목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네가 귀국하면서 우리가 모아준 돈보다, 더 비싼 선물을 갖다 줬는데 뭘. 우리끼리 얘기 많이 했지만, 윤재씨 보면서 우리도 좀 더 잘 살아보자는 생각 많이 했어. 정규직이 된 이후에도 매달 한 번씩 우리 밥 사주고, 회식 약속에도 참석해준 사람은 윤재씨 밖에 없었으니까....”

계약직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윤재였다.

20분 정도 걸려 송진영이 사는 동네에 도착했고, 그녀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아파트 단지로 멀어져갔다.

자신과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윤재는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도, 휘귀 이후에도 한 결 같이 잘해줬는데....’

감상은 잠시... 다시 분노가 끌어 올랐다.

송진영을 태워주며 들은 얘기 때문이었다.

막연하게 짐작만 했던 양광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양광수. 당신의 권력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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