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73화 (73/196)

여전히 고문관

9월14일 목요일!

영업1팀부터 3팀장까지. 그리고 목포, 순천지사장, 전주지사장, 익산지사장이 모두 참석한 월례회의가 열렸다.

8월 실적 마감과 시장동향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이어서 지난 8월, 1등 지사와 우수사원 표창이 있겠습니다.”

지원팀장을 3년째 담당하고 있는 최희갑 팀장이 말했다.

“이번에도 영업3팀하고 김윤재 사원인가? 다른 지사장이나 팀장들 좀 각성이 필요한 것 아냐?”

“.....”

6명의 지사장, 팀장이 꿀 먹은 벙어리가 돼 있는 동안, 최팀장이 조심스레 얘기했다.

“상무님! 우수 팀은 영업3팀인데, 우수사원은 3팀 차명수 대리입니다.”

“차명수? 아 그래! 요즘 거래처 굵직한 것 가져왔다고 그랬지?”

“네. 그렇습니다.”

윤재의 도움 덕에 신규개발에 제법 익숙해진 차명수.

최근 들어서는 윤재의 도움 없이도 거래처 개발을 잘 해내고 있었다.

장동석이 우수팀 수상을 한 뒤에, 개인 시상이 이뤄졌다.

“이어서 우수사원상입니다. 영업3팀 차명수. 위 사람은 SMART한 영업활동과 악바리 근성으로.... 시상은 상무님께서 해 주시겠습니다.”

역시 박수를 받으며 차명수 대리가, O2 상품권 20만원을 부상으로 받았다.

“차대리! 요즘 몰라보게 달라졌어. 좋아! 그렇게 하는 거야!”

“네. 상무님 견마지로를 다 하겠습니다.”

“껄껄걸. 이 친구 보라고! 이젠 제법 문자도 쓸 줄 안다니까! 자네 S.M.A.R.T워크 뭔지 알지?”

“네. 상무님! Specific, Measurable....입니다.”

차명수 대리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SMART워크에 대해 답변했다.

1년전 이맘때에는 S.M.A.R.T 워크를 답하지 못해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괄목상대였다.

차대리가 SMART워크를 술술 말하는 사이, 몇몇 팀장들이 다이어리를 뒤적거렸다.

SMART워크의 풀이를 적어놓은 부분을 찾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들 잘 할 수 있다고. 응? 다른 지사는 죄다 93~95% 왔다 갔다 하는데, 영업3팀 혼자 114%야! 어떻게 1등하고 2등이 20% 차이가 넘게 나나? 영업3팀이 호남본부 실적을 견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은가?”

“......”

“장동석 팀장은 백화점에만 10년 넘게 있었다. 당신들은 입사부터 지금까지 푸드만 주구장창 했는데, 장동석 팀장 보다 못한다는 게 말이 돼?”

여전히 다른 팀/지사장들은 말이 없었다. 유구무언인 것이다.

“익산지사장?”

“네. 상무님!”

익산지사장이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기 지사에는 대리 없어? 자기 지사에는 신입사원 없냐고? 3팀에 김윤재 날아다니는 것 안 봤어? 대졸 공채들 2명이나 데려다가 93%가 뭐야? 93%가? 고졸 김윤재보다 잘 하지는 못해도, 비슷하게는 해야 할 것 아냐?”

“면목 없습니다.”

한동안 양광수 상무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양상무가 잔소리만 줄여도 회의 시간은 1시간은 단축될 것 같았다.

잔소리가 끝나갈 즈음, 장동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얘기했다.

“상무님! 귀한 상금도 주셨는데 오늘 회의 끝나면 저녁은, 영업3팀 비용으로 사겠습니다.”

“껄껄걸. 그래? 좋아. 잘들 봐! 실적 좋으니까 생색도 내고 좋잖아. 스마트하게 일 합시다. 스마트하게....”

◈          ◈          ◈

회의 마지막 시간은 11월에 예정돼 있는, 이노베이션 챌린지에 대한 호남본부 자체 대항전이 열렸다.

팀장들 사이에는 2년 연속 장동석이 출전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다들 나름대로 준비해 왔지만, 여전히 장동석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그들이 죽어라 뛰는 동안, 장동석도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었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장동석의 보고서의 제목은 [ HMR 시대의 게임 체인저 햅반! ] 이었다.

윤재의 아이디어 였는데, 누가 들어도 시선을 확 끄는 제목이 분명했다.

“HMR이 뭔가?”

“네. 상무님! Home Meal Replacement의 약어로, 가정식 간편 요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경쟁사에서 나오는 3분 카레 같은 제품이나, 레토르 식품들이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개념인 HMR.

윤재는 HMR과 햅반을 짝지어, 장동석을 임원으로 가는 고속열차에 태울 계획이었다.

3주 연속 주말이면 진도를 오가며 검은 쌀에 대해 배웠고, 수급계획 등을 상의했던 윤재와 장팀장이었다.

진도를 오가는 시간은, 윤재가 알고 있는 HMR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장팀장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1인 가구수의 필연적 증가.

1분 30초면 지을 수 있는 제법 맛있는 밥!

반도체 공정에 사용된다는 무균화 공정.

환경호르몬이 배출되지 않는 안전한 용기.

Guilty Feeling Products가 되지 않게 할 광고 방법.

그리고 HMR 시대에 가장 확실한 회사의 캐시카우가 될 햅반의 시장성.

보너스로 흑미 햅반을 출시해, ASP(평균판매단가)를 올리자는 것까지....

장동석은 보고 말미에 쐐기를 박는 멘트를 날렸다.

“광주에 혼자 살면서 1주일이면, 햅반을 최소 4~5개는 먹는 사람으로서 햅반의 성공을 확신합니다. 1년만 더 햅반생산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이노베이션 챌린지에서 회장님을 설득할 기회를 주십시오.”

윤재와 함께 연습을 거듭했던 장동석이, 10분 동안 완벽에 가까운 프레젠테이션을 해버린 것이었다.

1번 타자로 나온 장동석을 이미 2001년 이노베이션 챌린지 참석자로 확정지은 양광수.

나머지 팀장들의 지루한 발표를 참아낸 것도 용한 일이었다.

익산지사장을 끝으로 팀장들의 발표가 모두 끝나자 양광수가 말했다.

“다들 준비하느라 고생들 했어요. 그런데 다들 느꼈겠지만, 올해도 장팀장이 나가야 할 것 같지 않나?”

“....”

회사를 15년 이상 다닌 사람들이 왜 그걸 모르겠는가?

아무도 말이 없었다.

2년 연속 호남부문 I.C 발표자가 된 장동석!

그는 웃음을 참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김윤재. 검은 쌀 외에는.... 모두 윤재의 아이디어이거늘. 나를 위해 기꺼이 양보하는 모습. 한창 회사에 잘 보이고 싶은 나이일 텐데.... 대단한 녀석이다. 호남에서 썩히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영업. 기획. 3팀 전체의 밸런스를 생각하는 마음. 직원들에 대한 배려 등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은 윤재에게, 부끄럽지 않은 팀장이 돼야겠다고 장동석은 생각했다.

◈          ◈          ◈

같은 날 밤 광주 첨단지구의 횟집에는 황성호와 몇 명의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호남을 넘어 전국구 고문관의 길을 걷고 있는 황성호.

그리고 그 옆에는 자회사 CS팀의 팀장과, 서비스팀 여직원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CS팀 서비스팀 여직원들은, 모회사인 O2의 정규직 남성들을 동경했는데 황성호만은 예외였다.

적정선을 넘으면 안 되는 것이 세상이치인데, 황성호의 껄덕 대는 행동은 이미 선을 넘어도 한 참 넘어선 상태였다.

보통은 과장급 또는 팀장들을 대동해, 1차와 2차를 O2에서 사면 맥주 정도를 CS에서 사는 게 관례.

물론 함께 노래방을 가는 경우도 있었고, 황성호와 엇비슷한 수준으로 여직원들에 들이 대는 사람들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입사 1년도 안 된 신입사원이 단독으로 CS팀장과 여직원들을 소집한 전례는 없었다.

한마디로 개념 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노래방이라도 가면 노골적으로 치근덕거려, 호남 쪽 CS팀 여직원들에게 황성호는 진상 1호로 찍혀 있었다.

오늘 자리에 불려온 여직원들도 마찬가지.

그동안 핑계를 대가며 황성호와의 저녁자리를 피해 왔지만, 오늘은 소속팀장이 직접 챙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것.

‘으이구! 저 화상! 맑은 하늘에 벼락 맞을 놈!’

‘저 눈빛 좀 봐! 뱀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간 것 같다. 욱! 소름끼쳐!’

여직원들이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황성호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입맛을 쩝쩝 다시던 황성호가 말했다.

“오늘은 호남부문장이신 양상무님께서 CS팀장님과, 두 분 에이스의 노고를 치하하러 오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좀 늦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황성호의 얘기에 여사원들은 좌절했다.

반면, 자회사 CS팀의 팀장은 마치 하늘에서 동아줄이라도 내려오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양광수에게 잘 보이면, 자신에게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황성호가 준비한 저녁자리에 참석한 여직원 중, O2 C&S에 입사한 지 2개월 밖에 되지 않은 처녀가 한 명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안선영.

예쁜 용모도 시선을 끌었지만, 글래머러스한 몸내가 눈에 띄는 여성이었다.

눈앞의 황성호를 보던 그녀는 걱정이 밀려왔다.

회사 입사했을 때, 선배 언니들이 조심해야 할 인물이라고 알려줬던 사람이 2명 있었다.

바로 황성호와 호남부문장 양광수 상무였다.

‘세상에! 진상 두목과 진상 막내를 동시에 접대해야 하다니....’

어떻게라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자리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이 자리를 피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CS팀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언니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O2 C&S에서 잘만 하면 교육팀장으로 승진할 수도 있다고 했다.

또한 O2 C&S에서 인정받으면, 비슷한 일거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 노래방 가서 부르스 추는 정도야.... 오늘 같은 자리 끽해야 2~3개월에 한번 이라고 했어. 몇 시간만 참자!’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남동생.

시장에서 일을 하며 힘들게 살고 있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일 끝날 때면 자신을 픽업하러 오곤 했던 남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을 생각하니 몇 시간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          ◈          ◈

양광수와 팀장들이 회의 끝나고 회식을 하고, 황성호가 자회사 직원들을 소집해 저녁을 먹고 있던 시각.

윤재 역시 영업3팀 직원들과 저녁을 먹었다.

“오늘 술은 제가 살 거니까, 절대 계산하기 없습니다.”

차명수 대리가 호기롭게 얘기했다.

회사 다니면서 처음으로, 부문장에게 상을 받은 것이다.

돈이야 20만원 밖에 안됐지만, 상을 받은 사실 자체가 기뻤다.

돌이켜 보면 윤재의 공로가 가장 크다는 것을, 차명수는 잘 알고 있었다.

회식하러 오기 전 차명수는 윤재를 따로 불렀다.

회의 때 받은 상품권 20만원 중, 절반을 봉투에 담아 윤재에게 건넨 것이다.

“네 덕분에 받은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말고, 고참 성의니까 받아 줬으면 한다.”

고문관이었던 차명수의 변신을 보며, 윤재는 차명수를 돕기를 잘 했다 생각했다.

굳이 10만원 때문이 아니었다.

1명 몫 이상을 하게 된 차명수가 고마웠던 것이다.

그렇지만, 명수의 10만원을 넙죽 받는 것은 자신의 스타일이 아녔다.

“형님! 됐어요. 그 돈으로 직원들 소주나 한 잔 하시죠.”

그렇게 해서, 마련된 회식자리....

접대부가 나오지도 않았고, 얼음에 재워놓은 양주가 있는 것도 아녔지만 영업3팀의 회식은 즐거웠다.

영업3팀 역시 CS팀 여직원들을 부를 생각이면, 얼마든지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상에 공표해도 떳떳한 일만 하라!”

장동석의 금과옥조를 새기며 사는, 3팀이기에 가능한 절제였다.

장팀장을 빼고 모두 참석한 회식자리.

테이블 위에 빈 소주병이 12병이 넘게 쌓였을 무렵이었다.

오석진 과장이 우려 섞인 얼굴로 말했다.

“요즘 서비스팀 직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영업활동을 열심히 하는 직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얘기였다.

“1팀 황성호가 CS팀에 접대 받고 다니고, 그쪽 여직원들한테 껄덕대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하더라.”

“과장님! 저도 듣긴 했어요. 내가 황성호 그 새끼는 처음 봤을 때부터 사고 칠 것 같았어요. 하여튼 존만한 새끼가 좆같은 짓거리만 한다니까....”

역시 소문을 들어 내용을 알고 있는 차명수.

오석진을 거들며 자신도 발끈했다.

“영업1팀장님만 불쌍하게 됐죠. 고문관 하나 들어와서... 팀을 풍비박살을 내고 있으니까. 얼마 전에도 매출조정 반대로 꺽고 생 지랄을 해서, 고참들이 거래처 사장들한테 시달렸다고 하던데....”

“이게 다 지 아버지 빽 믿고 그러는 것 아니겠냐? 보니까 양광수 상무님도 황성호 그 자식한테는 각별하게 대하는 것 같던데.”

“양상무님이랑 황태준 의장이 대학 동문이라고 하던데요.”

“참 나. 빽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쉬쉬해도 결국 다 알게 되는 법이었다.

한동안 직원들의 뒷담화가 계속됐고, 윤재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차대리... 너도 할아버지가 쓰리스타 장성출신에, 아버지가 금융계 스타였잖아. 혹시 너도 입사할 때 낙하산으로 들어온 거 아니지?”

“에이. 과장님! 왜 이러세요. 저 대졸 공채로 당당하게 들어온 사람입니다.”

“하하. 미안하다. 너 많이 좋아졌는데... 내가 공연한 소릴 했다. 미안해. 명수야!”

컵에 담긴 물도 차면 넘치는 법!

황성호에 좋지 않은 소문이 이토록 빨리 퍼지는 것을 고려했을 때, 조만간 황성호발 소동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낙하산 문화.... 이런 음습한 폐단들을 고치지 않는 한, 우리 회사는 절대 위대한 기업이 될 수 없어!’

윤재는 자신의 마시고 있는 2,000원짜리 소주처럼.

세상이 조금 더 맑고 투명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소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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