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게 뭐냐?”
“풀무원에서 나온 양배추와 브로콜리 녹즙입니다.”
“이걸 왜?”
“팀장님 위 생각해서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예상대로, 검진을 받은 장동석의 위 상태는 좋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미리 검진을 받아, 자신의 상태를 장팀장이 알게 된 것이었다.
“녀석. 별 걱정을 다 하네.”
“한 달 동안 매일 아주머니가 가져다 줄 겁니다. 1개월분은 제가 계산했습니다. 끊지 마시고 계속 드세요.”
“녀석.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어쨌든 잘 마시마!”
“팀장님! 한의사에게 배웠는데, 위에 좋은 운동이 있다고 합니다. 한번 해 보실래요?”
평소 같으면 전혀 관심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지만, 장동석 입장에서 이제 위장 문제는 심각하게 다가왔다.
윤재는 장동석에게 위장에 좋은 스트레칭과 운동법을 소개했다.
잠시 따라하던 장동석이 갈증을 느꼈는지 양배추 즙을 마셨다.
“생각보다 맛있네!”
“네. 팀장님! 몸이 재산 아니겠습니까?”
“아이고! 어르신 명심하겠습니다.”
윤재는 팀장 방에서 나왔다.
장동석은 다 마신 양배추 녹즙 병을 바라봤다.
윤재가 몽블랑 트래킹 중일 때, 장동석은 건강검진을 받았다.
건강검진 미실시자는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다는 불호령 때문이었다.
“위 상태가 나이에 비해 아주 안 좋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네. 60 넘은 노인들 위 수준이네요. 장사피화생이라고 이런 위가 암에 잘 걸립니다.”
“네. 치료할 혹시 방법은 없나요?”
“다른 방법은 없어요. 관리 잘 하는 수밖에. 양배추나 가지 같은 음식이 위에 좋다고 하니 많이 드십시오.”
나이 이제 갓 40을 넘겼는데, 60대의 위 상태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윤재 그 녀석! 어린데도 생각이 깊단 말이야! 그리고 내 위 상태를 마치 알고 있다는 듯한 저 행동들.... 대단한 놈이야.’
보통 때 같으면 다 마신 녹즙병을 쓰레기통에 휙 던졌을 장동석!
윤재가 준 양배추 즙 병을 살며시 쓰레기통에 넣었다.
◈ ◈ ◈
“안녕하세요? 오전에 전화 드렸던 DG오일...”
“아! 백도니씨?”
“네. 그렇습니다. 지금 회사 밑에 도착했는데 올라가도 될까요?”
“네. 어서 오십시오. 5층입니다.”
‘백도니라!’
참 특이한 이름이었다.
한 번 들으면 좀처럼 잊기 힘든 이름이었다.
반면 대한민국에 넘쳐나는 이름을 가진 윤재.
그는 왠지 백도니라는 이름과 사람이 마음에 들었다.
사무실 접객실에서 백도니를 만났다.
“백도니씨! 목소리만 듣고도 보통 분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인물이 좋으시군요.”
“그런가요? 김윤재님은 연예인 같으세요!”
“하하하. 역시 가는 말이 좋아야 오는 말도 좋은가 보군요.”
정유사에 근무하는 백도니와, O2 직원 윤재는 호탕하게 웃었다.
추석이 다가오고 있는 관계로, 회사의 선물세트를 구입할 필요가 있는 백도니가 윤재를 찾아온 것이었다.
“추석도 다가오고 해서 주유소 사장들에게 선물을 해야 하는데, 오대양 카달로그와 견적서를 좀 받고 싶습니다.”
“하하하. 백대리님! 오대양 아니고 이제 O2입니다.”
“아. 예! 그렇죠. 제가 버릇이 돼 놔서..”
“괜찮습니다. 다들 그러세요. 언젠가는 익숙해지겠죠.”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백도니와 뭔가 통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김두한이 시라소니와 만났을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윤재는 카달로그를 건넸다.
회사 제품의 장점과, 대량 구매 혜택에 대해 설명해 줬다.
서로 젊어서인지 마음이 잘 통했고, 업무 얘기 외에도 몇 가지 얘기를 더 주고받았다.
“요즘 주유업계는 좀 어떠세요?”
“수출은 양호한데 국내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래요?”
“네. 국내 시장 규모에 비해 주유소가 너무 많은 게 문제죠. 요즘 주유소 팔고 싶어 하는 사장들이 많습니다.”
“정말요?”
“아무래도 사양산업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보니.... 아차! 윤재씨 만나 얘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백도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나 신입사원들이 제일 바쁜 모양이었다.
“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내년 설에 다시 찾아봬도 되죠?”
“네. 얼마든지요. 이왕이면 비교견적만 받지 마시고 저희 거 주문해 주시면 더욱 좋구요.”
“하하하.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도니를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그가 닫히는 문 사이로 윤재에게 꾸벅 인사를 건넸다.
‘주유소를 매물로 내놓은 사람들이 많다고?’
윤재는 백도니의 얘기를 통해 하나의 퍼즐을 맞출 수 있었다.
기름장사는 매출은 크지만, 전형적인 저마진 사업이었다.
시장은 결국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수렴하는데, 국내 수요대비 지나치게 많은 주유소의 숫자가 문제였다.
‘비전 없다고 매물로 내놓는 주유소를 사들이면 된다. 52 Urban, 52 Suburban, 52 Rural 에 적합한 주유소들을 쓸어 담으면 된다.’
대략 2012년부터 별다방에서 전국의 주유소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라이브 쓰루형 별다방으로 바꿔나갔다.
‘저마진 기름판매는 모두 중단하고, 복합형 스테이션으로 개발하는 거야!’
이미 52Cafe와 52Corp을 총괄할 후보자와 약속이 돼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 분을 뵙고 싶군.’
◈ ◈ ◈
2001년 8월 15일!
윤재 부모님의 제삿날!
작은 아빠 내외와 사촌 동생 동재가 찾아왔다.
간소하게 제사를 마치고 식구들과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형! 집 좋네!”
“좋기는....”
“우리 집보다 좋구만. 형 능력자야! 아주 부르주아 다 됐구만!”
“하하하. 여전하구나!”
누가 노조간부 아니랄까봐, 말 하는 모양새가 그다지 맘에 들지 않았다.
윤재의 플랜에 의하면 동재는 3번 파트너가 돼야 할 사람.
우선 서점과 작은 엄마 문제를 해결한 뒤, 동재를 손볼 생각이었다.
“작은 엄마! 하시는 일 지겹지 않으세요?”
“좋아서 하는 일이냐? 니 잘난 작은 아버지 때문에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지?”
“이 놈의 예편네가 어디 애들 앞에서....”
“윤재 너는 작은 아부지처럼, 혼자 잘난 맛으로 살지 마라. 절대 그러면 안 돼! 여자 고생시키는 일이여.”
작은 아빠 내외의 티키타카가 시작됐다. 말씀들은 저렇게 하지만, 두 분 사이에는 정이 남아 있었다.
더 싸우시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작은 엄마! 혹시 커피 일 배워보지 않으실래요?”
“커피? 웬 커피?”
“제가 드디어 아버지 서점을 되찾았습니다.”
“니가? 어떻게?”
“그게 정말이냐?”
작은집 식구들이 동시에 놀랬다. 말이 서점이지, 한두푼 하는 건물이 아니란 걸 다들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얘기는 빼놓고, 오피스 서적을 출판해 제법 큰 돈을 벌었다는 말씀을 해드렸다.
그리고 52Cafe에 대한 계획을 들려줬다.
“나는 니가 큰 일 할 줄 알았다. 네가 어릴 때부터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게 보통 영특한 놈이 아니란 걸 알았다. 네 아부지가 살아 계셨으면 널 얼마나 자랑스러워했겠냐!”
작은 아빠는 금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남자나이 50이 넘으면 눈물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와! 형! 진짜 대단하네. 우리 집에 작가가 나오다니! 부럽다 형. 부러워...”
작은 집 식구들의 칭찬릴레이를 한동안 듣고 난 뒤, 윤재는 다시 카페 얘기를 꺼냈다.
“작은 엄마. 그동안 작은 아빠 때문에 맘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남은 생은 좀 다르게 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것이 가능하겠니? 나도 이제 50이 넘었는디!”
“가능하고 말구요. 요즘에 나이 50은 청춘입니다. 게다가 작은 엄마는 어디 가시면 30대 후반으로 보일 미모시니까!”
“오메? 내가 그 정도냐?”
“미친놈의 예편네 같으니...”
작은 엄마도, 신경질을 내시는 작은 아빠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듭되는 설득에 작은 엄마의 마음이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그럼 조카 말 믿고 한번 해볼까?”
“아무렴요. 작은 엄마 음식 솜씨 좋으시겠다. 쿠키나 케익, 초콜렛 같은 건 도사시잖아요.”
작은 엄마는 시내에 있는 예식장 뷔페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하고 계셨다.
특히, 떡이나 쿠키, 케익 같은 디저트 류가 작은 엄마의 전공분야였다.
환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작은 엄마께 작은 아빠가 큰소리를 치셨다.
“이 놈의 여편네야!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뱁새 가랑이 찢어지고 싶어?”
비록 이죽거리셨지만, 작은아빠의 표정도 꽤 밝아보였다.
◈ ◈ ◈
“회사 일은 좀 어떠니?”
“어떻긴... 바람 앞의 등불이지.”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며 동재가 말했다.
아파트 14층 베란다에 무등산의 맑은 밤바람이 불어 왔다.
지난번 얘기했던 것처럼, 동재가 다니는 은행은 악화일로였다.
“회사가 망하냐 마냐 하는 마당이라... 그런데도 행장과 독일 주주들은 배당이나 해대고 있으니... 개새끼들.”
동재는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다 피운 꽁초를 팅겼다.
“동재야! 내 말 잘 들어라!”
“형! 갑자기 왜 무게를 잡고 그래?”
심상치 않은 윤재의 분위기에 동재가 당황하는 표정을 했다.
“현대 그룹 부실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모양이야. 너희 은행도 문제가 심각해 질 거다. 산업은행에서 손을 들 가능성이 높아.”
“아니! 형! 형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아?”
‘어떻게 알긴! 10년도 안돼 외국환 은행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드는데!’
윤재는 전생의 기억을 대충 버무려, 동재에게 얘기를 해 줄 계획이었다.
“현대건설, 하이닉스 출자전환 했잖아.”
“그렇죠... 노조에서도 난리가 아닙니다.”
“나는 건설, 하이닉스 모두 드러나지 않은 부실이 훨씬 클 거라고 본다.”
“안 그래도 우리 노조에서도 그걸 문제 삼고 있어.”
노동조합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만능 해결사도 아닌데.... 동재의 처지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너는 은행 일이 하고 싶은 거니? 정치를 하고 싶은 거니?”
“그게 무슨 말이야?”
뜨끔했는지 동재가 깜작 놀랐다.
“내 말 잘 들어! 회사 일 계속하고 싶으면 노조 관두고, 정치를 하고 싶다면 회사를 관두고 정치를 해! 어정쩡하게 살지 말란 말이다.”
“....”
본심을 들켜서인지, 동재는 애꿎은 담배를 꺼내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동재야! 나는 정치 말리고 싶은 입장이다만, 굳이 하고 싶다면 제일 중요한 게 컨텐츠라고 생각한다.”
“컨텐츠? 마당발이나 돈 아니고?”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니까! 나는 컨텐츠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인간 김동재 혹은, 정치인 김동재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그런 컨텐츠 말이야.”
“음.....”
비로소 윤재가 하는 얘기를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뭐가 또 있어?”
“그래. 컨텐츠 보다 더 중요한 거야. 그건 네 야당 정신을 버리는 거야?”
“야당 정신? 그건 또 뭐야?”
“마이너 사고방식. 네 삐딱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메이저 사고방식을 습관처럼 익혀야 한다. 이게 더 중요해.”
동재가 다시 담배를 베란다 밖으로 튀기며 말했다.
“참 나~ 나나 형이나 뭐 한 살 차이밖에 더 나요?”
“그게 바로 야당정신의 표본이야!”
“허!”
“너를 돌아 봐! 외국환 은행 언제 망할지 모르지? 나는 O2그룹 정규직 됐고 나름 잘 나가! 너 부모님이랑 20평짜리 집에 4명이서 살지? 나는 혼자 25평에 살아!”
“....”
“한 살 아니라, 내가 너 동생이라도 옳은 얘길 하면, 들을 줄 아는 귀가 있어야 해. 열린 귀가 있어야 정치로 성공한다.”
윤재의 옳은 얘기가 쏟아지자 동재는 말이 없었다.
“열린 귀가 없으면 아부나 들으며 권력에 취해 타락하고 말 거다. 내가 됐든 누가 됐든 옳은 소리를 해 줄, 동료 한 명만 얻어도 네 앞길에 도움이 될 거다.”
“....”
“그리고 민족이나 국가니 거대담론을 하면서, 담배꽁초는 쉽게 집 밖으로 버리는 행동을 멈춰야 해!”
순간 동재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윤재는 동재의 빨간 얼굴을 보며, 동재에게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직감했다.
수오지심이란 좋은 정치를 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었다.
“그런데 정말 우리 회사 더 이상 가망이 없을까?”
엄밀하게 얘기하면 외국혼은행이 아니라, 은행 노조원 동재에게 가망이 없었다. 동재의 해고가 째깍째깍 다가오는 중이었다.
“올해 안에 안 좋은 소식들이 줄줄이 터져 나올 거다. 그러니까 잘 고민해 봐. 니 컨텐츠!”
“알았어.”
“명심해! 피는 물 보다 진하다고! 니가 내 사촌동생이니까 하는 얘기야!”
“알았다구요.”
윤재는 잘 알고 있었다.
동재가 스스로 머리를 깍지 못하리라는 걸!
그리고 얼마 안가 회사에 짤리고 말 것이라는 걸!
동재를 위해 준비해 놓은 컨텐츠!
그의 해고시점과 거의 비슷하게 준비가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