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Corp
“에헷! 형님. 이게 뭐야?”
“여행 선물.”
“뭐 이런 걸 다 사 오시고.”
“우리끼리 수도 없이 얘기했다. 너도 같이 왔으면 정말 좋았겠다고...”
한국 떠벌이 창진과, 이태리 떠벌이 올리버가 돌비 입체 서라운드로 떠드는 모습을 상상하니, 귀에서 피가나올 것 같긴 했다.
그럼에도 창진이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형님. 인생은 길어. 앞으로 얼마든지 기회 있을 거야.”
쉴 새 없이 이빨을 까는 와중에도 창진은 선물을 뜯어봤다.
“세상에! 구찌지갑이네!”
“응. 취리히 공항에서 하나 샀다. 그것 갖고 다니면 돈 많이 벌 거다!”
“형. 너무 너무 고마워. 진짜 멋지다. 이미 형 때문에 많은 돈을 벌고 있는데....”
“이런 일 따위로 감동받지마. 앞으로 통곡할 일 많을 테니까!”
직원들과 작은집을 위한 선물은 모두 전달했고, 이제 몇 명 챙겨야 할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1번 파트너 남창진이었다.
“그나저나 지난 2주 동안 투자는 좀 어땠니?”
“형 얘기대로 쉬고 있었어. 고객들도 이젠 제법 내 말을 먹어준다니까. 그래서 투자하는 사람들께도 방망이 짧게 잡고 버티라고 했어요.”
“우리 내기 했던 것 잊지 않았지? 일단 내가 1:0으로 이기고 있다!”
윤재는 창진과 전에 내기를 했었다.
2008년 올림픽은 윤재의 얘기처럼 중국 베이징으로 낙점됐다.
“그런데 정말 체코한테 5:0으로 질까? 6월엔 호주를 1:0으로 꺽었는데?”
“내가 그걸 어찌 알겠냐? 다만 예감이 그렇다는 거지.”
“형 말은 자꾸 맞고, 투자도 형님 덕에 잘 되니까 왠지 기죽네. 축구도 왠지 깨박살 날것만 같아!”
“창진아. 그래서 말인데!”
남창진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윤재가 ‘그래서 말인데.’ 라고 얘길 하면 중요한 얘기가 나온 다는 것을.
“그리고 너 1종까지 취급 가능하다고 그랬지.”
2종 자격증은 주식을, 1종은 선물-옵션을 취급할 수 있다.
“네. 우리가 좀 중소형 회사라 주식, 채권, 선물 옵션 다 취급 가능해요. 그런데 실전으로 해 본 적은 없어서.”
“다음에 쌔게 한 번 지를 생각이니까, 선물 투자할 수 있게 준비 좀 해봐라.”
“뭐야 형? 또 뭐 있는 거야? 갑자기 안하던 몰빵을 하겠다고 그래?”
“그런 건 없는데, 어쨌든 꼭 알아 봐.”
1억의 계약금에 2억을 대출해 신국제서점을 인수했다는 혜진.
그녀의 얘기를 듣고 윤재는 새삼 느낀 바가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 사후, 제로에서부터 시작하다 보니 빚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으로 살았던 전생이었다.
‘혜진이도 과감하게 지르는데, 회귀자인 내가 안전빵만 추구해서야!’
그러고 보니 새삼 혜진이가 보고 싶었다.
미모. 지성. 생활력. 마음씨. 멘탈도 강한데다 배짱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진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주문한 요리가 나왔다. 대게 요리였다.
“형! 맛있겠다. 나는 이상하게 형이 사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더라.”
“그래. 먹자. 맛있겠다.”
윤재는 집게 다리를 집어 들었다. 제일 선호하는 부위였다.
탱탱하면서도 쫄깃한 그 맛!
인당 8만원이 넘는 가격이었지만, 윤재는 그 맛을 좋아했다.
‘응?’
집게 다리를 먹던 윤재는 놀랐다.
주방에서 먹기 좋게 갈라놓긴 했지만, 느낌이 평소와 많이 달랐던 것이다.
‘이게 뭐야?’
윤재는 다시 한 번 다리 쪽 살을 뜯었다.
‘대게 껍질이 종이 찢기듯 뜯어진다.’
윤재는 대게 다리를 다시 살펴봤다.
평범한 집게 다리였다.
‘설마! 이번에도?’
문득 생각난 장면이 있었다.
윤재는 숟가락에 자신의 치아를 비쳐봤다.
앞니 두 개가 유난히 빛이 나고 있었다.
‘상페호수에서 마멋(Marmot)을 구해준 영향이란 말인가?’
진짜 대게 다리가 무 썰리듯 뜯겨지는 것이었다.
“에헷! 형! 왜 그래? 대게 다리 그렇게 씹다가 옥수수 다 털려!”
“응? 괜찮아. 걱정마라. 건치 회사원이니까!”
◈ ◈ ◈
다음 날에는 안수애를 만났다.
이미 윤재에 대한 환심이 넘쳐나는 아가씨였지만, 공짜 홍보를 위해서는 정성을 다해야 했다.
“이게 뭐에요?”
“제가 이번에 유럽에 다녀오면서 사온 선물입니다. 스카프입니다. 수애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어머? 버버리네요. 예쁘다!”
그녀는 버버리 스카프를 이리 저리 둘러보며 신나했다.
워낙 세련된 외모라, 뭘 둘러도 잘 어울릴 것 같기는 했다.
“저한테 구애하는 건 아닐 테고? 웬 선물?”
“지난 번 부탁한 것도 있고 해서....”
“뉴스에 나오게 해 달라고 한 거?”
“그렇습니다. 공짜로 해 달라는 건 아니구요.”
“?”
“제가 관상과 명리학에 나름 조예가 깊습니다!”
명리학은 전혀 모르지만, 대략 20년 뒤의 미래는 훤히 알고 있는 윤재였다. 게다가 안수애가 출판한 책까지 읽었으니, 안수애의 미래를 훤히 알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수애씨 운세 한 번 봐드릴까요? 물론 공짜입니다.”
“정말요? 그게 가능해요.”
버버리 스카프에 공짜 운세까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했다.
마다할 안수애가 아녔다.
윤재는 잠시 명상에 잠긴 시늉을 했다.
“수애씨는 제가 보기에 1~2년 안에, 여의도 방송국에 있을 겁니다.”
“어머? 진짜요?”
“그럼요. 제 점괘가 그렇게 나오네요.”
중앙 방송계로 진출할 수 있다는 얘기에, 안수애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남자 복이 넘쳐나는 걸로 나오네요. 그런데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애 딸린 유부남은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세상에!”
안수애는 밥 먹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전생에서 남자 파트너와의 잠자리 경험담을 실명으로 펴내 물의를 일으켰던 안수애.
최근 애 딸린 유부남인 건설회사 사장과 헤어진 안수애.
마치 모든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윤재가 무섭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또 뭐 없어요? 재물 운이나... 결혼은 언제 한다거나?”
윤재는 안수애가 궁금해 할 얘기들을 몇 가지 들려줬다.
모두 그녀의 책에서 본 내용이거나, 전생의 연예 스포츠 섹션에서 봤던 얘기들이었다.
“윤재씨 능력이 엄청나단 걸 알긴 했지만, 예지력이 정말 노스트라다무스 동기동창 수준이네요.”
이제 안수애는 윤재가 하는 얘기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기세였다.
‘30만 원짜리 버버리 스카프 하나로, 방송출연을 보장 받았으니 남는 장사네!’
윤재와 안수애는 기분 좋게 헤어질 수 있었다.
◈ ◈ ◈
“오빠! 어서 와요.”
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흔들었다.
푹푹 찌는 더위를 잊게 할 정도로 상큼한 미소였다.
“오랜만이다.”
“일주일 밖에 안 됐는데 무슨 오랜만?”
“나는 날마다 보고 싶은데, 일주일 만에 봤으니 오랜만이지.”
“됐어. 오빠! 올리버 따라해 봐야 하나도 안 비슷하니까, 억지로 할 필요 없어.”
“티 나니?”
“응. 많이....”
엉겁결에 연인 사이가 된 윤재와 혜진.
혜진은 상페호수 사건 이후로, 날마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선희 같이 보자니까!”
“언니가 바쁘대. 내일 올라가야 하니까 짐도 싸야 하고.”
“그래? 조금 아쉽긴 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재는 알고 있었다.
선희가 윤재와 혜진의 오붓한 시간을 위해 일부러 자리를 피했다는 것을.
“잘 올라가서 촬영하고, 항상 몸조심하고!”
“꼭 아빠 같이 얘기하네.”
“하하하. 내가 나이에 비해 좀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어.”
“....”
혜진은 윤재를 빤히 쳐다봤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래. 오빠는 27살이 아니라 50살 먹은 도사처럼 보이니까.”
“내가 조금 노안이긴 하지?”
“어머. 왜 그래? 칭찬인데 이 반응은 또 뭐람?”
실제 혜진은 윤재를 그렇게 생각했다.
나이에 비해 철이든 사람.
50살은 돼야 간직할 만한 지혜를 갖고 있는 사람.
혜진이 윤재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어머님 뭐하시니?”
“우리 엄마? 그냥 주부인데.... 왜?”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 번 들어 볼래?”
스위스 상페호텔에서 혜진이 주겠다던 선물을 윤재는 거절했다.
“남자가 큰일을 해야지! 여친이 주는 부동산이나 덥석 받는 건 사내가 할 일이 아니야!”
상페호텔에서 윤재가 던진 얘기였고, 별 것 아닌 그 얘기를 혜진은 좋아했다.
윤재는 서점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인수할 생각이었다.
“장모님이 한 미모 하시잖아!”
“장모님?”
혜진의 입이 자신이 벌릴 수 있는 최대치로 벌어졌다.
희고 가지런한 이가 그녀의 미모에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모님이지 장인어른은 아니잖아.”
“호호호. 맞네. 맞아!”
“우리 작은 엄마도 한 미모 하시거든.”
“그래? 작은 어머님 한 번 뵙고 싶네!”
부모님이 안 계신 윤재를 배려하는 혜진의 마음씨가 느껴지는 얘기였다.
“내가 카페를 할 생각인데, 우리 작은 엄마나 장모님 같은 미인들이 많을수록 좋아.”
“카페? 어디에?”
윤재는 혜진에게 커피관련 구상을 들려줄 생각이었다.
1번 파트너 남창진, 2번 파트너 신장식에 이어 혜진과 선희도 윤재의 파트너가 될 사람들이었다.
“요즘 누가 서점에 가서 책 사냐? 신국제 서점을 카페로 바꾸는 거야. 카페 이름과 컨셉도 다 정해 놨다.”
“정말? 괜히 망하는 거 아냐?”
혜진의 표정은 마치 회사 관두고 치킨집 하겠다는 남편을 걱정하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1억 현금에 2억 대출받아 서점 산 사람이 왜 이래?”
“그야...”
윤재는 혜진에게 설명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윤재의 입에서 확신에 찬 얘기들이 흘러 나왔다.
“카페 이름은 52야!”
“52? 숫자 52? 그게 무슨 의미야?”
“아무런 의미 없어. 굳이 따지자면 1년 365일은 52주고, O2그룹을 숫자로 바꾸면 52가 되는 거니까!”
“처음엔 이상했는데, 얘기 듣고 보니 나쁘지 않네.”
“의미는 중요하지 않아. 커피맛과 예쁜 인테리어 하는 게 중요하지.”
신국제 서점을 되사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구상해 왔던 얘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그 역시 Plan이 준비돼 있었다.
“컨셉은 크게 3가지야. 첫 번째 ‘52Urban!’”
“Urban? 도시적이라는 건가?”
“빙고. 52Urban 은 신국제 서점처럼 도심에 있는, 우리의 카페들에 맞게 운영될 거야.”
“우리?”
‘우리’라는 말에 혜진의 입술이 다시 Maximum으로 찢어졌다. 자신과 윤재를 하나의 공동체로 여기는 남자의 얘기에 기분이 좋은 것이다.
행복한 여자의 표정이란 저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서점이나, 예전 농협 창고 건물 같은 걸 매입해서, 카페로 바꿀 생각이야.”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할 생각이야?”
“다다익선이라고 하잖아. 판을 크게 키워야 크게 먹는 거야!”
사실 윤재가 판을 키우기로 결심한 결정적 공로자가 혜진이었다.
영화 촬영을 앞두고 있는 미래의 스타가 알바를 하던 모습.
1억 계약금에 2억을 빚내 서점을 인수했다는 얘기에,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이 52suburban 이야.”
“이건 도심 근교의 카페가 되는 건가?”
“역시 혜진이는 척하면 척이네. 컨셉이 확실하게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이 얘기했으면 허파에 바람 들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오빠가 하니 왠지 설득된다.”
혜진의 눈빛에 윤재에 대한 신뢰가 가득 차 있었다.
“하하하. 마지막은 52 Rural이야.”
“이건 그럼 시골에 있는 거네?”
“응. 그런데 그냥 시골은 아니고, 예컨대 담양 메타세콰이어 길 앞이나, 구례의 섬진강 변 같은 곳에 초대형 카페를 지을 생각이야.”
“초대형?”
“응. 대략 2,000 평 정도!”
“2...2천평이라고?”
20평이면 될 커피집을 2,000평을 하겠다니!
혜진은 듣고도 윤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 그 정도 사이즈는 돼야 커피도 팔고, 굿즈도 팔고, 애견 카페도 집어넣고...”
“굿즈는 뭐야? 그리고 애견의 견이 강아지는 아니겠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세월이 흘러가면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된다. 커피 수요도 늘어나지만, 반려견이나 반려묘 같은 애완동물에 대한 수요도 크게 늘어날 것이었다.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사람들이 강아지, 고양이 등을 많이 키울 거야. 관련된 시장도 커질 거고... 한마디로 강아지 팔자가 사람 팔자 보다 좋은 세상이 온다는 거지.”
“에이..설마!”
“52 카페가 그런 수요를 견인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우리가 잘 할 수 있을까?”
“일단 1호점이 중요해. 계속 키워나갈 매장에 사람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장모님이도 작은엄마도 모두 52Cafe와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어!”
도심형, 준도심형, 그리고 시골형에 맞는 카페사업에 대한 복안은 이미 완성돼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사람!
자신이 회사를 관두고 사업에 집중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게 윤재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카페사업을 총괄할 사람이 있어야 했다.
‘플랜B의 중추는 내 회사야. 장차 52 Company로 성장시켜 나가기 위해서도 사람이 필요하다.’
몇 달 안에 신국제 서점을 시작으로, 52Cafe 1호점과 52Corp 이 발족하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