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66화 (66/196)

Refresh로 되빠구!

“보름 휴가 중 이틀은 안 쓰고 출근했네? 왜? 책상 없어질까 봐?”

황태준의 전화 이후 급격히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양광수 상무.

장기 휴가 후 복귀 신고 차원에서 그를 찾았을 때, 양광수가 한 얘기였다.

“이건 뭐야?”

“보고서입니다.”

“무슨 보고서?”

“유럽에 단순히 놀러만 다닌 게 아닙니다. 현지의 먹거리 문화를 살펴보고 우리 회사와 연계할 상품이 있는지. 우리 회사가 개발해 상품화 할 제품은 없는지 그런 것도 보고 다녔습니다.”

“!”

보고 때 함께 들어온 장동석이 윤재를 거들었다.

“상무님! 한 번 보시죠. 제가 보기엔 괜찮은 내용들도 있더군요.”

“그래?”

보고서 내용만 괜찮다면 양광수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윤재가 작성하는 보고서의 퀄리티야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프로젝터로 보시면서 보고 받으시죠? 훨씬 와 닿을 겁니다.”

장동석 팀장이 적절하게 추임새를 넣어 줬다.

“그렇단 말이지?”

“네.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윤재는 즉석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어느새 양광수는 지원팀장에게 내선 전화를 걸어 그를 불렀다.

◈          ◈          ◈

“첫번째 상품을 소개드리겠습니다. 이태리 발사믹 식초입니다.”

“발사믹? 미사일 발사도 아니고 그게 뭔가?”

의전형 임원답게 실력이 부족한 양광수의 아재개그였다.

지원팀장 혼자 박수를 치며 웃었다.

‘으이구! 무식한 인간. 식품회사 상무가 발사믹이 뭔지도 모르고.’

윤재는 게의치 않고 보고를 계속했다.

“발사미코(Balsamico)는 이태리 말로 향기롭다는 뜻입니다. 이태리는 프랑스 못지않게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우유에서 치즈가 파생되듯, 와인을 발효시키면 발사믹 식초가 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김치처럼 말인가?”

“역시 상무님의 비유는 본질을 꿰뚫는 것 같습니다.”

“허허허. 내가 좀 그렇지?”

회사 생활 하려면 맘에 안 들어도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병당 30,000원 수준의 발사믹 식초를 현지에서 직수입해, 저희가 공급하는 겁니다.”

“3만원? 미쳤어? 한 병에 2~3천원이면 사는 식초를 10배 넘게 주고 사는 미친 사람이 누가 있다고!”

양광수가 저렇게 나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권위에 직찹 하는 스타일!

네임드를 이용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걸 윤재는 20년전부터 알고 있었다.

“바로 이 분이 그 미친 사람입니다.”

윤재가 화면을 넘겼다.

화면에 등장한 인물은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인사였다.

오성그룹의 오건 회장!

대한민국 재계서열 No.1의 회장이, 샐러드를 먹는 모습이 화면에 등장한 것이다.

“오건 회장께서 매 분기 병당 800 만 원짜리 발사믹 식초를 수입해서 드시는 건, 업계에 유명한 일입니다.”

유명한 일인데 너는 모르냐는 뉘앙스가 담겨 있는 걸 양광수는 몰랐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오건 회장에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저. 정말인가? 오회장님께서 800만 원짜리 식초를 드신다는 게?”

“그렇습니다. 아주 애호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꿀걱!”

“IMF터널을 빠르게 극복하며 한국경제가 비상하고 있습니다. 이미 올해에 사상최고 수출액을 경신할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 뉴스는 나도 봤지.”

양광수는 여전히 오건 회장에게 시선을 박고 있었다.

신이라도 영접하는 표정이었다.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사람들은 3가지를 보통 찾습니다. 여행. 취미. 그리고 건강입니다.”

“그럴 테지?”

“네. 800만 원짜리 말고, 2~3만원 수준의 발사믹을 수입해, 백화점이나 마트 중심으로 판매하는 방안! 제가 이번 유럽 여행에서 생각한 첫 번째 아이템입니다.”

윤재가 자신의 프레젠테이션 전매특허인 호흡 끊어가기 신공을 발휘했다.

간 크게 놀러다녀 왔다며 갈구려 했는데, 신박한 아이템이 여러 개 라니!

어느새 양광수는 다음 아이템을 갈구하는 표정이 돼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번 몽블랑 트래킹을 함께 한 친구가 발효에 미쳐있는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를 통해 고품질의 발사믹을 들여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품질과 가격, 그리고 회사 마진까지 만족하실 겁니다.”

“그래?”

윤재는 다시 PPT장표를 넘겼다.

이번에도 한 사내의 얼굴이 등장했다.

“뭐야? 톰 크루즈 아닌가?”

“하하하. 아닙니다. 그 친구를 닮긴 했죠. 올리비에노 페레레. 이 친구의 이름입니다. 바로 페레레 그룹의 3세 후계자죠.”

“설마 이 친구가 그 발효과학 친구?”

“네. 그렇습니다.”

양광수는 화면에 있는 올리버와 윤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런 미친! 그러니까 페레레 그룹의 후계자와, 윤재 자네가 일주일동안 트래킹을 했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O2그룹은 종합 식품기업입니다. 500원짜리 젤리부터 800만 원짜리 발사믹 식초까지! 제품 포트폴리오를 골고루 갖춰야 명실상부한 종합 식품기업이 될 수 있습니다.”

“....”

종합식품기업!

윤재가 제시한 명분에 양광수는 말을 잃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윤재는 보고를 계속 이어갔다.

올리비에를 통해 3가지를 수입하자는 의견이었다.

먼저 발사믹 식초.

백화점을 찾는 부자들과 미식가가 타겟 고객이 될 것이었다.

두 번째는 이태리 와인이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소득수준이 올라갈수록 음주문화도 다양해 질 겁니다. 와인. 세계맥주. 수제 맥주. 전통주 등으로 술에 대한 기호도 다변화 될 겁니다.”

윤재는 증거로 최근 조사된 인터넷 여론조사를 보여줬다.

미미하지만 와인, 수입맥주의 매출이 증가하고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회사는 종합식품 기업을 지향합니다. 현재 회사는 술을 전혀 취급하지 않습니다만... 이태리 와인부터 시작해, 독일 맥주, 프랑스 와인 등으로 보폭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끝으로 윤재는 페레레 그룹과 국내 판매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누텔라. 페레레로쉐. 킨더 등 수많은 메가히트 상품을 갖고 있는 페레레 그룹과 제휴를 한다면, 하나의 사업부를 꾸릴 수 있을 정도로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저희야 국내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회사가 충분히 상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페레레 그룹과 제휴해 초콜렛을 국내에 판매하고, 이태리 현지업체와 제휴해 발사믹코, 와인, 스파게티 면 등을 수입해 판매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올리비엔가 기생 오래비인가 그 친구와 거래 틀 자신 있어?”

“네. 맡겨 주십시오. 이번 여행으로 전우에 가까운 동지애가 생겼으니까요!”

문득 자신의 펀치에 한쪽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채, 허탈하게 웃고 있던 올리버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이 아무리 자네라지만 그게 가능해?”

“상무님! 고난을 함께 이겨낸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합니다. 이번 몽블랑 트래킹에서 개고생하며 사귄 친구입니다. 믿으셔도 될 겁니다.”

약간의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윤재는 자신 있었다.

“고생했어. 몇 달 남았으니까, 충분히 다듬어서 연말 이노베이션 챌린지에 제휴사업 방안을 주제로 출품해 보자고!”

“네.”

2000년대 초반.

회사 생활 포기한 사람이나 다녀온다는 장기휴가.

가뜩이나 황성호와 황태준의 등장으로, 양광수가 색안경을 끼고 윤재를 보기 시작했다.

양광수가 장기 휴가를 탐탁지 않아 했던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보고서 하나로 상황을 뒤집는데 성공한 것이다.

말 그대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남자였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윤재, 장동석, 최희갑이 양상무 방을 나가려고 하던 때였다.

“응? 이건 뭐야?”

“무슨 일 있으십니까? 상무님!”

장동석의 물음에 양광수가 3명을 보고 자기 쪽으로 와보라고 손짓을 했다.

“이거 윤재 자네가 올렸나?”

“아. 이거요? 네. 오늘 아침에 올렸습니다.”

“허...허...”

양광수 상무의 PC화면에 윤재가 올린 글이 보였다.

일종의 소통 채널인 나눔게시판.

[ Refresh 휴가와 업무생산성 ] 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첨부파일을 열어보니, 몽블랑과 그랑드조라스를 포함한 알프스의 봉우리들.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는 폭포와 맑은 호수 등의 사진이 여러 장 보였다.

올리버와 에밀리를 포함한 현지 친구들과 찍은 사진 등도 눈에 띄었다.

사진 하나하나가 탄성을 불러올 만큼 멋졌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가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 하계휴가 4일 + Refresh 휴가 5일을 묶어 2주 가량 휴가를 다녀오면 어떨까요? 하루하루 힘든 일상에, 무언가를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번 몽블랑 트래킹을 통해 몸과 마음이 재충전 되는 기분을 느끼고 왔습니다.

- 또한, 프랑스 샤모니. 이태리 꾸르마이어. 스위스 상페 등을 돌아보며 현지의 음식문화와 식자재들을 직접 경험해 봤습니다. 회사가 와인, 발사믹 등의 유럽의 식품을 수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됐죠.

- 회사에서도 약 2주간의 Refresh 휴가를 제도화 해보면 어떨까요? 구성원들의 만족도 향상은 업무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질꺼라 자신합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윤재가 나눔 게시판에 올린 글의 요지였다.

게시판의 글을 장동석, 최희갑과 함께 읽어 내려가던 양광수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누구나 올릴 수 있는 자유게시판에, 오재준 회장이 직접 댓글을 단 것이다.

일개 사원의 글에 CEO가 직접 댓글을 달다니!

1년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이례적인 일이 분명했다.

- 김윤재 사원의 글을 읽으며, 저도 더 늙기 전에 몽블랑 트래킹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성원 여러분! 눈치 보지 말고 자유롭게 휴가를 가는 문화를 만들어 갑시다. 회사 경영자로서 인사실에 Refresh 휴가 제도를 검토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오재준 회장의 댓글에 대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양광수는 본래 손바닥 뒤집기의 달인!

큰소리로 웃더니 최희갑 팀장을 불렀다.

“최팀장!”

“네. 상무님.”

“올해 여름휴가 안간 사람들부터, 전원 10일씩 휴가 가도록 지시해! 그리고 10일씩 휴가 안가거나, 여름휴가 안가는 놈들 있으면 인사고과 C 준다고 그래!”

◈          ◈          ◈

보고서와 몽블랑 사진을 함께 올린 윤재의 글의 파급력은, 그 뒤로도 며칠째 회사에 여진을 남겼다.

- 야! 멋지다. 나도 MBT 가보는 게 버킷리스트였는데. 회장님! 리프레시 휴가 하루라도 빨리 도입해 주십시오. 익명씨.

- 김윤재씨! 정말 멋지네요. 저도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청주공장 연구1팀. 한송이!”

- 휴가보상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데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 생각합니다. 익명씨!”

- 형님! 존경합니다. 형님은 역시 우리의 영웅입니다. 정명철.”

920개!

오재준 회장을 포함해, 윤재의 글에 달린 댓글의 개수였다.

회사 나눔 게시판 역사상 가장 많은 댓글이었다.

거의 대부분 윤재의 휴가를 부러워했고, 리프레시 휴가에 동참하고 싶어 했다.

반면 ‘반대’ 가 엄청나게 달린 댓글도 딱 하나 있었다.

- 신입사원이 패기 있게 일을 해야지. 휴가를 열흘이나 가면 어떻게 합니까? 황성호!

황성호의 댓글에는 반대표시와 함께 반박댓글이 넘쳐 났는데, 딱 하나만 예로 들자면 이런 것이었다.

- 가끔은 휴가를 가는 것이 회사를 돕는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죠. 누구라고 얘기는 안했습니다. 차명수!

나눔 게시판과 댓글뿐만이 아니었다.

영업본부를 넘어 생산본부에 이르기까지 Refresh 휴가에 대한 얘기가 단골소재로 회자되고 있었다.

‘IMF 터널을 벗어나, 고도성장기로 접어들 우리나라! 회사에서 Refresh휴가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자신의 글 하나와 보고서 하나로, 제법 괜찮은 휴가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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