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직 상무가 너무 잘함-64화 (64/196)

상페 호수에서 (1)

엘레나 산장에서 1박을 마친 윤재 일행은 버스를 타고 샤모니로 돌아왔다.

원투어 직원이자, 대학시절부터 배낭여행을 밥 먹듯 다녔던 장식의 설계 덕분이었다.

샤모니에 있는 노천탕에서 피로를 풀었다.

“사장님께서 우리 회사 이용해 줘서 고맙다며, 특별히 준비해 준 거야!”

수영복을 대여해, 목욕타월로 몸을 가리고 남녀가 스파를 즐길 수 있었다.

혜진과 선희는 지친 몸을 달랠 수 있다는 점과,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곳에서 온천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장식 오빠! 고맙네. 오빤 훌륭한 트래블 에이전트가 될 거야!”

샤모니 온천은 물 온도가 대략 34~5도 수준.

뜨겁지는 않았도 피로를 풀기엔 충분한 온도였다.

혜진과 선희가 잠수도 하면서 온천 삼매경에 빠진 사이, 장식이 윤재에게 다가왔다.

“윤재야! 고맙다!”

“고맙긴요..”

“네 덕분에 이 비싼 곳에서 숙박을 하는 거니까.”

1박 요금과 온천요금을 합치면, 1인당 60만원이 넘는 금액을 윤재가 부담했다.

그리고 장식에게는 원투어에서 지원해 준걸로 하자고, 미리 입을 맞춘 상태였던 것이다.

“나중에 형님이 여행사 사장님 되실 거니까, 그때 또 형님이 좋은 코스 개발해 주시면 되죠!”

“으하하. 그런 날이 오긴 올까?”

“꼭 올 겁니다. 형님!”

윤재는 지나가는 듯이 말했지만, 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해가 봉우리를 넘어가자, 어둠이 찾아왔고 스파 여기저기에 조명이 밝혀졌다.

스파 곳곳을 구경하던 혜진과 선희가 다가왔다.

“갑자기 올리버가 보고 싶네!”

“하하하. 선희 너는 보고 싶은지 몰라도, 나는 조용해서 좋기만 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재도 올리버의 뻐꾸기가 그립긴 했다.

“이제 온천은 할만큼 했으니,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장식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          ◈          ◈

트래킹 7일차!

사실상 트래킹의 마지막 날이다.

전날 버스를 이용해 스위스 국경을 넘은 윤재 일행.

스위스 트래킹 하루를 마친 뒤인 2일차!

윤재 일행은 트래킹의 마지막 종착지 샹페호수에 도착했다.

“어머 저 집들 좀 봐! 되게 이국적이다.”

“스위스 부자들의 별장과, 여행객을 위한 호텔이나 펜션들이야!”

대충 봐도 모두 화보가 된다는 스위스답게, 상페호수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저 분들은 뭐하는 거에요?”

“여기에 송어들이 많이 산다나 봐! 이곳 주민들이나 휴양객들이 송어낚시를 즐긴다고 하네.”

상페호수 주변으로 나 있는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본 뒤, 다시 샤모니로 돌아가면 여행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는다.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은 뒤, 쉬었다가 돌아 갑시다.”

“그렇게 하죠. 장식이 형!”

그렇게 상페 레스토랑을 발길을 옮겼다.

일행의 선두에서 걷던 윤재가 식당 문을 열려는 순간!

식당 문이 열리며 유쾌한 표정의 서양신사 두 명이 식당을 나왔다.

백발의 노인과 금갈색의 중년인.

모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미스터 윤재?”

“아니 당신이 여길 어떻게?”

중년인은 2개월 전 경기도 청평에서 만난 적이 있는, MS의 빌 게이트 회장이었다.

옆에 있는 백발노인은 이제 70살이 된 전설적인 투자가 워렌 버핀이었다.

“그러는 자네야 말로 이 먼 나라에는 웬 일인가?”

빌이 장식, 혜진, 선희를 차례대로 훑어보며 물었다.

“친구들과 휴가를 즐기러 왔습니다.”

선희는 빌 게이트와 워렌 버핀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2명의 유명인을 알아 본 혜진과 장식은 얼어붙은 채 말이 없었다.

◈          ◈          ◈

윤재는 장식에게 같은 메뉴를 주문해 달라고 한 뒤, 빌 게이트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워렌 버핀이 묵묵히 윤재와 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나는 스위스의 수력발전 현황을 둘러보기 위해 왔어. 아레강의 저낙차 수력발전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네.”

워렌 버핀과 함께 더 나은 지구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빌 게이트.

평소 자신이 구상했던 실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윤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전해 듣고 악수까지 나눴던 워렌 버핀은, 시종일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윤재를 지켜보며 걷고 있었다.

“설탕 파는 일은 잘 되나?”

“하하하. 설탕 파는 회사에서 1등 먹고 포상휴가로, 이곳에 온 겁니다.”

“와우! 자네는 뭘 해도 잘 하는군!”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자신의 분양에서 최고중의 최고가 된 빌과 워렌 버핀.

이들에 비하면 윤재는 아직 갈길이 멀었다.

“이제 어디로 가나?”

“저희는 오늘 트래킹이 끝납니다. 내일 귀국합니다.”

“하하. 그런가? 우리는 이제 체르마트로 넘어갈 계획이네. 작은 마을은 화석연료 제로에 도전하고 있다네. 마을도 둘러보고 시장도 만나볼 계획이네.”

윤재는 두 명의 거물과 함께 상페 호수를 10분 정도 걸었다.

“다시 만나 반가웠습니다. 일행들 때문에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그래. 나도 다시 만나 반가웠네. 이 넓은 지구에서 자네를 다시 만날지 몰랐네. 아무래도 인연이 있는 모양이야! 기회가 된다면 또 만나길 기대하겠네!”

윤재는 빌과 워렌 버핀과 헤어져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보니 햇빛이 잘 드는 벤치에, 빌과 버핀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저런 거물들이 달랑 경호원 한 명 데리고, 유럽을 여행 중이다니.’

윤재는 다시 한 번 그들을 돌아본 뒤 식당문을 열었다.

◈          ◈          ◈

“정말 그 사람이 빌 게이트하고 워렌 버핀이라고?”

“그래. 너도 봤잖아!”

“세상에. 말도 안 돼. 그런 사람들하고 오빠가 10분 가까이 대화를 했다고?”

“아까 창문으로 다 봤잖니?”

윤재가 빌 게이트와 대화 중일 때, 일행은 일제히 창에 기대 윤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었다.

“대박. 대박. 대애애애박!”

여행기간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선희에게, 아직도 놀랄만한 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놀랍다. 진짜 놀라워! 빌 게이트가 너를 보러 청평까지 날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윤재는 식사를 하면서 빌 게이트와의 인연에 대해 얘길 해줬고, 장식이 형도 그 얘기만은 놀라운 모양이었다.

“진짜! 오빠는 속에 뭐가 들어있는 거야? 구미호라도 들어 있는 거 아냐?”

선희는 계속해서 호들갑을 떨었고, 혜진은 윤재를 존경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식사를 마친 윤재 일행.

한 시간 전에 빌게이트와 걸었던 코스를 따라 상페 호수를 돌았다.

빌과 워렌 버핀은 상페호수를 떠났는지, 더 이상 벤치 주변에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호수를 반 정도 돌았을 무렵!

윤재의 눈앞에 10여명의 낯익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장 앞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은 올리버와 에밀리였다.

“세상에!”

“오 하느님!”

윤재일행과 올리버 일행에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로를 알아본 것이었다.

“내가 뭐랬나? 운명이라면 다시 만날 거라고 했지? 혜진씨랑 저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봅니다. 음하하하.”

이틀 만에 다시 만난 올리버가, 그동안 못한 뻐꾸기를 날리겠다는 각오로 덤벼들었다.

“윤재! 정말 반가워요.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에밀리에 캠벨은 마치 오랜 친척이라도 만난 것처럼, 윤재와 장식, 혜진과 선희의 손을 잡았다. 서양사람 답지 않게 정이 많은 스타일이었다.

“혜진! 여기가 여행의 종착지라고 했던가?”

“네. 좀 있으면 저희는 샤모니로 돌아가요.”

“혜진? 어때? 이 멋진 호수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이라도 찍는게?”

올리버는 윤재, 장식, 에밀리 등에게 사진 촬영을 제안했다.

상페호수를 배경으로 15명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올리버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혜진에게 끈질지게 사진촬영을 요구했다.

“혜진아! 우리 같이 찍자. 이런 기회가 또 오겠니?”

선희는 톰크루즈 닮은 올리버와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혜진을 설득했다.

피곤해 하는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 올리버와 혜진, 선희 3명이 사진을 찍으러 돌아 다녔다.

윤재와 나머지 사람들은 좀 전에 빌 게이트가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벤치 주변에 둘러앉았다.

에밀리가 윤재를 보며 말했다.

“윤재! 가 보지 않아도 되겠어?”

“뭐가?”

“혜진에게 가 보지 않아도 되겠냐고?”

“내가 왜?”

윤재의 퉁명스러운 질문에 에밀리가 예의 그 귀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코호호. 내 눈은 못 속여!”

마치 네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청춘남녀가 멋진 배경을 두고 사진 찍는 게 뭐 대수라고!”

윤재는 애써 쿨함을 유지했다.

“그런데 윤재! 왜 더워 보이지? 코호호.”

“아냐. 춥기만 한 걸..... 얼어 죽기 딱 좋은 날씨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재는 뭔가 부글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자꾸 시선이 혜진과 올리버에게 쏠리는 걸 참아야 했다.

‘젠장할!’

그런데도 강화된 능력 탓에 올리버의 뻐꾸기가 자연스레 들려왔다.

◈          ◈          ◈

에밀리와 유럽 친구들과, 이태리 엘리나 산장에서 헤어진 뒤의 일정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혜진과 선희는 여전히 올리버와 상페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윤재의 귀는 여전히 혜진과 선희에게 집중돼 있었다.

“오! 뷰티풀! 호수와 산보다 혜진이 더 아름답습니다. 오 나의 아프로디테여!”

“올리버! 이 호수 이름이 뭐에요?”

“원래 상페호수인데, 오늘부터 우나 베르지네 조 라고 부르겠습니다. Miss Joe의 호수라는 뜻이지요.”

“말도 안 돼!”

올리버는 여전히 오버액션을 하며 셔터를 눌러댔다.

“조금만 뒤로 가면 앵글이 좋을 것 같은데...음 선희씨는 좀 빠지면 안될까?”

그런 뻐꾸기를 날리던 올리버.

“오! 뷰티플! 인생 사진 나오겠네요!”

그가 혜진과 배경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렌즈를 밀었다 당기는 순간!

“끽! 끽! 끽!”

호수 옆 굴에서 튀어나온 6마리의 마멋(Marmot) 일가족이 혜진의 앞을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부모로 보이는 마멋과 어린 마멋 네 마리였다.

“엄마야!”

자신의 코앞을 뛰어 가는 마멋 패밀리를 보고 기겁한 혜진.

포즈를 취하던 혜진이, 갑자기 튀어 나온 마멋에 놀라 상페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넘어지는 혜진의 발에 걸린, 새끼 마멋 한 마리도 덩달아 호수에 빠졌다.

“혜진아! 혜진아! 어떻게! 올리버 혜진이 좀 도와줘요. 혜진아! 혜진아!”

“어.언니. 어푸. 어푸!”

호수에 빠진 혜진이 팔다리를 휘저었다.

“오 미오 디오! 선희! 나는 수영을 못합니다. 오 미오 디오! 오 미오 디오!”

◈          ◈          ◈

혜진이 상페 호수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 순간!

윤재가 있던 호수의 반대편에서도 탄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세상에! 저길 봐! 누군가 호수에 빠진 거 아냐?”

“세상에! 저거 올리버 아냐?”

다들 평온하게 올리버가 하는 짓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물에 빠진 혜진을 본 것이었다.

“뭐야? 뭐야? 앗! 윤재야?”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저리 빠를 수가 있지?”

장식과 에밀리를 포함한 일행들은 혜진이 물에 빠진 사실에 당황했고, 윤재가 빛의 속도로 혜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눈 덮인 산과 아름다운 집과 나무들이 반사된 상페호수!

그 호수에 그림자 하나가 빛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바람처럼 윤재가 달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