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 드 몽블랑 (2)
해발 2,000m 전후를 오르내리며 진행되는 몽블랑 트래킹.
내려갈 때는 소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오를 때는 발밑에 운해가 펼쳐지기도 한다.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치도 좋고 파트너 2번 주자 장식이형을 포함해, 혜진이와 선희도 좋은데......
‘빠직! 저 놈이 문제다!’
올리버 보누치 일행과 함께 하게 된 윤재 일행.
쉬지 않고 혜진에게 뻐꾸기를 날리는 올리버의 존재가, 이상하게 눈에 거슬렸다.
“혜진씨! 당신은 분명 전생에 비너스였을 겁니다. 제가 만나 본 여자 중 단연코 으뜸입니다.”
“왜 이래요? 제가 그 정도는 아니란 말에요.”
“아닙니다. 혜진씨 만나기 전까지 제 여신은 모니카 벨루치였는데, 이젠 미스 조로 제 여신을 바꿀 생각입니다.”
올리비에 보누치. 자신을 편하게 올리버라 불러주라던 남자!
그 작자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씨바! 영하 3도가 넘는 기온인데 왜 이리 덥지?’
혜진은 자신에 대한 뻐꾸기의 방향을 돌리기 위해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했다.
“올리버는 하는 일이 뭐에요?”
“저는 발효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식초나 와인, 치즈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오! 멋진 일을 하시네요?”
“이탈리아는 장인 문화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가업을 이어 받으라는데 나는 식초가 너무 좋아요. 그래서 그 일을 하고 있죠. 혜진씨는 뭐해요?”
“저요. 그냥 대학생입니다.”
그때 선희가 끼어 들었다.
영어가 서툴러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선희는 줄곧 올리버와 거리를 유지하며 걷고 있었다.
“혜진이도 나도 영화배우에요. 다음 달이면 촬영에 들어가요!”
한국말을 모르는 올리버가 궁금해 했고, 혜진은 어쩔 수 없이 통역을 해야 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보통 미모가 아니라 했어! 미스 조 당신은 한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배우가 될 겁니다.”
기승전뻐꾸기!
모든 대화를 혜진에 대한 뻐꾸기로 승화시키는, 올리버의 능력에 감탄과 짜증이 동시에 나왔다.
“그런데 올리버는 일행들에게 가보지 않아도 되나요?”
“저는 지금 미의 여신을 모시는 중입니다. 헤파이토스 역할에 충실하게 해 주세요!”
“어머. 헤파이토스는 지독한 추남이라고 했는데, 올리버는 잘 생겼어요!”
“음하하. 미스조! 그리스 신화를 잘 아는 군요. 역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신이었어요! 감격스럽네요!”
어쨌든 놀라운 드립력이었다.
‘이 지랄 맞은 청력이 싫다!’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려버리는, 업그레이드 된 청력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 ◈ ◈
깔닥고개로 유명한 샤핀고개를 넘고 있을 때였다.
“저 한국인 좀 봐요? 헉.헉.”
“누구? 헉. 헉.”
“저기 풍채 좋은 남자 있잖아요. 인물도 좋은...”
“저 친구? 왜?”
올리버의 일행 중에서 여자 한명과 남자 한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윤재를 가리켰다.
“느끼는 것 없어요?”
“글쎄! 뭐 잘 생기고..키도 크고? 헉헉.”
“현지 트래킹 가이드도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저 친구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마치 동네 골목 걸어 다니는 것처럼 트래킹을 하고 있어요!”
여자의 말에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윤재를 유심히 살펴봤다.
“진짜네! 어떻게 저렇게 편하게 이 오르막을 오를 수 있는 거지?”
“앗!”
그 순간 윤재가 옆에 있던 여자 동료와, 뭔가 얘기를 하더니 그녀의 배낭을 짊어 졌다.
선희의 배낭이었다.
“세상에! 놀라워라!”
올리버의 동료 중 한명인 여자의 눈에 감탄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 ◈
샤핀고개 마루에서 휴식을 취했다.
선희가 올리버에게 들이대고, 올리버가 혜진에게 들이대는 괴상한 3각관계를 구경하고 있는데, 푸른눈을 가진 한 여성이 윤재에게 다가왔다.
30분 전에 윤재에게 감탄했던 바로 그 여자였다.
“왓츠 유어 네임?”
“아임 김윤재. 한국에서 왔어요!”
“South or north?”
“하하하. South Korea!”
맑고 깊은 푸른눈을 가진 여성이었다.
덩치가 제법 있는 스타일이었는데, 살만 좀 빼면 빼어난 용모란 생각이 들었다.
“에밀리에 캠벨! 에밀리라 불러주세요! 아일랜드에서 왔어요.”
“South or north?”
에밀리의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는 윤재.
그녀가 활짝 웃었다.
“아일랜드 역사를 잘 아시는 군요. 센스도 좋으시고! 저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태생입니다.”
에밀리의 목소리는 굉장히 허스키했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사연이 많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과 아일랜드는 비슷한 측면이 많아요. 우리나라 속담에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남쪽나라 남자. 에밀리는 북쪽나라 여자이니... 우리 속담에 어울리는 만남이군요.”
“코호호. 이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푸른 눈을 빛내며 웃는 에밀리의 미소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윤재능 일부러 과장해 에밀리에 대한 칭찬 멘트를 날렸다.
일종의 올리버 따라하기였다.
“에밀리! 당신의 눈망울은 저 에메랄드 빛 호수를 닮았군요!”
에밀리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코호호. 올리버 못지않은 멘트군요.”
“저는 한국에서 식료품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에밀리는 뭐해요?”
“저요? 저는 가수 지망생이에요.”
“가수?”
“네. 아직 정식 앨범을 내지 못했으니 지망생이라 해두죠.”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이 있다 싶었는데, 가수 지망생이라는 얘기와 매치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올리버는 이태리 사람이랬는데,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친구에요. 올리버도 예술에 관심이 많아요. 저 같은 젊은 사람들과 문화운동 같은 걸 하고 있어요. 우리 일행들 다수가 그래피티나 조각을 하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윤재가 에밀리와 한참 애기를 나누고 있는데, 올리버가 다가왔다.
“에밀리! 깔딱고개 넘어오느라 다들 지쳤는데, 에밀리 노래하나 듣고 가는 것 어때? 다들 힘이 나지 않을까?”
“몽블랑이 싫어할 거야!”
“너무 크지 않게 하면 되지. 어때?”
잠시 빼는 것 같더니 에밀리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어느새 십여명의 일행들이 에밀리에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When are you gonna come down!”
엘튼존의 ‘굿바이 옐로 브릭로드’ 였다.
일부러 성량을 낮춰 부르는데도,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맛이 있었다.
독특한 음색의 허스키 보이스.
그녀의 목소리는 짙은 애환을 담고 있었다.
올리버 일행 11명과 윤재 일행 4명.
거기에 트래킹을 오가던 몇 명의 사람들까지....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산악에 울려 퍼지는 에밀리의 노래!
“Ah, ah, ah, ah......”
에밀리는 엘튼존의 곡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해석했다.
맑고 투명한 알프스와, 애환이 담긴 그녀의 허스키 보이스가 묘한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언제 이만큼 걸어왔을까?
에밀리의 노래를 들으며 아래쪽을 봤더니, 까마득하게 먼곳에 꾸르마이어 마을이 다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었다.
◈ ◈ ◈
약 두 시간 뒤 윤재 일행은 이태리 구간 첫 숙소 보나티 산장에 도착했다.
개인차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꾸르마이어에서 보나티 산장 코스를 알프스 트래킹의 백미로 꼽는다.
특히 보나티 산장에서는 그랑드 조라스의 남벽을 쉬면서 바라볼 수 있다.
알프스의 3대 주봉중 하나인 그랑드 조라스!
최고봉인 워커 피크(Peak)를 중심으로 6개의 하얀 봉우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
올리버 일행과 함께 나무 벤치를 중심으로 모여 앉았다.
누구는 산장에서 가져온 맥주를 마셨고, 누군가는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혜진아! 아까 저 언니 노래 정말 좋았다고 영어로 좀 말해주라!”
선희의 얘기를 혜진이 통역했다.
에밀리는 혜진의 통역을 듣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Thank you! Thank you so much!”
마치 콘서트를 마친 것 같은 에밀리의 대답이었다.
혜진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올리버가 끼어 들었다.
“밥 먹을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았는데, 어때 한곡 더 부탁해 볼까?”
에밀리의 답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성을 질렀다.
“그랑드 조라스의 봉우리와 맑은 하늘을 보고 있자니 이 노래가 떠 오르네요! 한 번 불러보겠습니다.”
그녀는 알라딘 OST ‘A whole new world!’를 부르겠다고 했다.
“가만 그 노래는 듀엣곡인데?”
올리버가 말했다.
“어때 올리버? 함께 부를까?”
에밀리는 애틋한 표정으로 올리버를 바라봤다.
“잘 알잖아? 나 음치인거.... 알프스 동물들이 기겁할거야! 대신 여기 온 한국 친구들 중에서 누가 노래를 하면 어떨까?”
올리버의 얘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윤재에게 쏠렸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희한한 일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11명의 유럽 친구들은 하나 같이 윤재를 쳐다봤다.
그들도 범상치 않은 윤재의 기운을 느낀 것이었다.
“나도 올리버 못지않은 음치인데....”
“한국의 저력을 보여줘 봐! 다들 자네만 보고 있잖아!”
“이것 참....”
윤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노래 못한다고 욕이나 하지 말라고!”
윤재의 입에서 첫 소절이 흘러 나왔다.
“I can show you the world....”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제법 괜찮은 실력이었던 것이다.
이어지는 여자파트를 에밀리에가 멋지게 받았다.
에밀리에가 특유의 허스키한 보이스라면, 윤재의 목소리는 맑고 낭랑한 소리였다.
그런데도 묘하게 둘의 노래는 멋진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무반주에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아무것도 꾸미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알프스처럼 담백한 매력이 있는 소리였다.
어느새 산장 안에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도, 윤재와 에밀리에의 노래를 경청하고 있었다.
“와우! 부라보! 부라바!”
여기저기서 박수와 휘슬이 울렸다.
“미스터 윤재! 노래 못한다더니 굉장히 잘 하네. 나는 무슨 가수 듀엣이 공연하는 줄 알았다.”
올리버가 특유의 오버액션과 함께 던진 얘기였다.
“한 곡만 듣기에는 너무 아쉬운데 하나 더? 한곡 더 듣고 밥 먹자!”
올리버의 얘기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화답했다.
그냥 빼기에도 뭐한 순간이었다.
에밀리가 윤재에게 물었다.
“미스터 김?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뭘 하지?”
“이 멋진 자연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자는 의미에서, 비틀즈의 Let it be 어때?”
“엑셀런트 초이스!”
이번에는 에밀리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몽블랑 정상 너머로 해가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
윤재와 에밀리 주변으로 몰려든 수십명의 사람들이, 렛잇비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앵콜까지 두 곡을 멋지게 소화한 윤재와 에밀리.
박수와 환호성이 계곡을 따라 메아리쳤다.
박수가 거의 잦아들었을 무렵!
신장식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저길 보세요!”
장식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
언덕배기에 알프스 마멋 십여 마리가 이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콘서트를 관람하는 객석의 청중처럼!
두발로 일어서서 양손을 배꼽에 모으고 있는 마멋들.
어른 마멋부터 새끼들까지.
“음하하하. 저 녀석들도 두 명의 노래에 감동한 모양이군. 코러스처럼 양손을 모으고 좌우로 까닥거리고 있잖아?”
올리버의 호탕한 웃음에 다들 한바탕 웃었다.
“어때? 혜진! 저 마멋들 귀엽지 않아?”
“저는 다람쥐나 개 등 동물들을 무서워해서.....”
“역시 여성스럽네. 미스조는 천상 여성이야!”
뭐든지 뻐꾸기로 연결 짓는 올리버의 타고난 능력.
감탄이 절로 나오는 솜씨였다.
◈ ◈ ◈
여름에도 밤에는 영하 7~8도까지 떨어지는 알프스.
“날씨가 요동치는 곳이 알프스야. 오늘처럼 맑은 날엔 별구경이 딱이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나가서 은하수 감상 안할래?”
장식의 제안에 따라, 윤재 일행은 중무장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문자 그대로 별들이 쏟아질 것 같은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캄캄한 하늘을 밝히는 Milky Way가 끝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윤재 오빠! 여기 오자고 해 줘서 고맙네.”
“그래. 나도 선희 네가 따라와 줘서 고맙다.”
선희도 혜진도 알프스의 밤하늘에 감동을 먹은 모양이었다.
“혜진아... 니 덕에 올 수 있었다. 고맙다!”
“언니! 나는 언니 없이 아무데도 못가. 내가 고맙지!”
친자매 못지않은 둘의 자매애가 애틋했다.
“장식 오빠! 오빠의 세심한 준비 없었으면, 우리 개고생할 뻔 했는데 고맙네!”
“크하하. 선희야! 힘들 텐데 잘 버텨줘서 고맙다.”
“오빠들! 남은 며칠 파이팅 합시다!”
그랑드 조라스의 봉우리 너머 진한 쪽빛 하늘... 그 하늘에 수채화 붓으로 그린 것 같은 구름들... 거기에 하얀 별들이 수없이 박혀 있었다.
환상적인 알프스의 은하수!
은하수를 이등분하며 초록꼬리의 유성이 떨어지고 있었다.